희망의 신학
위르겐 몰트만 지음, 이신건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위르겐 몰트만의 역작 희망의 신학을 읽어보았다. 나와 위르겐몰트만의 만남은 맨처음 신학교에 온 의사가 그를 극찬했다는 사실을 듣고 나서 부터이다.

몰트만은 애초에 전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로부터 3개월정도의 시간이 흐른후에 책을 샀고 신학책만 박해하고 철학책만 읽었던 나는 이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위르겐몰트만의 광림교회에서의 설교를 듣고 나서 그가 전하려던 희망이라는게 무엇일까라고 고민하게 되었다. 그가 말하던 희망은

어쩌면 가장 힘든 유년시기에서 시작했는지 모른다. 2차세계대전당시의 일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엄청난 힘든 상황에서 가졌던 희망이라는 단어를 예수로부터

얻었다는 이야기를 부활절 설교에서 하였다. 예수의 부활이 그자신에겐 희망이었고 하나님 나라가 희망이 되어 자신을 바꾸어줄 획기 적인 일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그가 당한 고난의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인 예수를 만났고 나도 예수를 만나서 또다른 실날같은 희망을 바라면서 이책을 읽기 시작했다.

  희망의 신학은 읽기 힘든 난해한 책임에 틀림이 없다. 나도 이책을 읽고 나서 한동안 무슨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나 몰트만은 그리스도교적인 종말론을 폐기하거나 유기하지 않고 종말론적인 것을 희망으로 바꾸어 육체의 부활과 하나님 나라로의 기독교인의 전환을 그려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중의 하나가 종말론일것이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피해갈수 없는 질문이자 숙명이고 우리로서는 피해가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살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살아야 했고 우리의 희망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부활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가 부활해야 우리가 앞으로 있을 부활을 할수 있는 것이다. 희망은 반드시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라는것이다. 종말론을 희망으로 전환하는 그런 노력으로 우리는 종말론을 폐기하거나 없는 일로 치부하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고 성경에 나와 있는 또다른 약속이라는 것에 접근하게 되는 것이다. 그 약속에 가까이 가서 우리의 삶이 희망으로 가득찬 하나님 나라로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의 태고적인 기독교적인 희망이 일어나는 장소인 신과의 인간과의 접촉이 일어나는 공간이 현대에는 교회이지만 그런곳이 아닌 여러 제사를 해야 하는 신과의 만남의 장소를 정했고 그곳은 우리에게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신과 우리의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것을 이야기 하였다. 시종일관 그는 종말론을 이야기 하지만 종말론을 접근하기 위해서 말하는 약속과 계시를 이야기 하는데, 여기서 나오는게 인격적인 만남이 바로 신이 우리에게 해주는 약속인것이다. 그것이 선지자들의 말이 되었고 모세의 말이 되었고 예수님의 말이 되었고 사도들의 말이 되어 지금의 기독교가 온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기독교는 신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를 해주었고 그 계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시작도 있으니 끝이 있을 거란 이야기와 함께 종말론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계시는 앞으로 이루어질 우리의 희망과 관련되어 있었고, 종말론은 절망이 아닌 새출발일것이고 또다른 희망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대 서사시인것이다.

  몰트만은 종말론과 과거 미래 현재의 이야기 중에서 우리의 실존이 거할 현재에 대해서 현존하는 인간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러면서 비추어진 그의 시선은 현재의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역사를 조명했고 그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현재는 미래를 향한 현재 종말론적으로 향한 현재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희망이 도처에 깔려 있는 현재 이고 현재라는 것이 미래와 과거에 걸쳐 우리에게 시간으로 현존해 있는 인간에게 존재하는 희망적인 존재라는것을 인식한다면 우리에게 가장 큰 희망은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것이고 그것은 부활과 관련되있다는 것이다.

  책리포트는 여기까지고 그는 종말론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것이 정말로 좋았다. 칼바르트가 전인구원이라고 이야기 하는 생뚱맞은 이야기를 뒤집어 엎은 이야기 인게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그의 조직신학적 영향력은 실로 지대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의 종말론적인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종교의 태고적 이야기를 하는것은 상당히 맘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추측이고 약속이라는 것이 신과의 만남의 전부인가하는 질문이 남았다. 그는 신과의 만남이 우리에게 약속과 계시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것보다는 앞으로더 한순간 한순간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시는게 더 좋아 보인다. 우리는 신이 없는 삶을 사는게 아니다. 신은 항상 선하고 하나님께선 우리의 삶을 지배하신다. 심지어 그를 미워하는 존재로 태어난 악인에게도 악인을 사랑해서 구원하려고 노력한다. 아무튼 약속과 계시의 이야기는 좋은면도 있지만, 과연 그런것만이 우리를 지배하는 이야기 인지 신과의 만남이 그것이 전부인지는 의문이 남을 것이다.

  여전히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신학책은 항상 상대방을 뛰어넘어 자신이 더 높은 곳을 차지하려고 남을 다 까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니체와 허무주의로 변한 현대 철학을 욕했고 칼바르트와 헤겔로 시작하는 변증법을 비판했다. 그의 비판은 일면 정당하다고 느껴질때도 있지만, 이것도 어찌보면 그냥 신학의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려고 노력하는 한사람의 노력으로 보여진다. 우리는 이런 사람으로 인해서 한시대를 지배하는 신학을 할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늘어놓는 잡담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언어로 고정되지 않는 생명이 있는 존재이시다. 하나의 언어로 묶으려고 하고 자신이 뛰어남을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그런 모습은 조직신학자에게 많이 드러난다. 나도 그래서 조직신학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언어 유희 지적 유희로 끝날 이야기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지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조직신학자는 뛰어 넘어야 할 존재는 많고 그런 존재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이야기 하면서 고품격인 나와 너는 다르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한다. 아무튼 그의 노력은 성공을 했다고 이야기 할수 있을까? 나는 실패 했다고 본다. 뛰어 넘었다면 현대신학의 지위가 이렇게 추락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성공했다는 것이 아니다. 현존하는 현세계를 보면 신학은 철학에 지배를 당하고 한사람에게 지배 당할것이면 존재 하는 것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