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화와 복음
손희영 지음 / 복있는사람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세속화와 복음 이 책을 읽고 나서 드는 생각과 정리를 써보러 하겠다. 일단 이책의 내용은 세속화라는 것에 대한 정의와 그로 인한 피해를 막고 복음에 정진하자라는 말로 요약되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세속화란 다원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과 같은 세상사람들의 지식들을 쫓지 마라라는 내용과 또한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 한다. 세속화된 사랑의 태도란 과연 무엇인가 심각하게 고찰할수 있는 아주 좋은 책이었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들을 거의 집착과 중독으로 이야기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면 동의하지만, 너무 사랑이라는 개념을 추상화 어렵게만 만들려고 하지 않았나라고 생각이 든다.

 

 아무튼 세속화의 한 기치로서 다원주의에 대한 비판을 잘 보았다. 이 비판을 맞을것이다. 분명 우리는 이 다원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기독교의 기틀 마저도 무너지고 모든게 경계가 무너질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과연 다원주의가 있다고 해서 경계가 무너질것이라면 그것은 종교이지 하나님 모시는 일이 아니라고 할수 있다. 단적인 예로 우리가 가질수 있는 여러가지 상황을 보자. 미국이라는 나라를 보면 인종집합소 모든 인간 문화가 모여서 한 틀안에 있음을 알수가 있다. 그러나 그 문화를 보면 물론 새로운 문화와 아메리카라는 문화가 있겠지만, 그문화가 섞이지 않고 고유민족 나름의 문화를 지키며 융화되는게 아니라 서로가 각자의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원주의에서 걱정하는것은 우리의 틀이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문화가 합해지고 종교가 합해져 통섭이 되는 결과가 생기게 되겠지만, 기본적인 틀의 붕괴는 일어나지 않을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런 다원주의를 비판함으로서 얻는 것은 우리가 가질수 있는 종교적 틀을 유지하는것이다. 종교적 틀이라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를 얻기위해서 버리는 여러가지의 것들이 산재해있다. 특히나 배타성이라는 것인데 우리것이 아니라면 모든것을 배타적으로 보는 시각들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손희영 목사님은 연대성이라는 것을 제안했지만, 다원주의인것 같으면서도 교묘하게 줄타기를 하는 모습을 보여줄수 있다. 우리는 다원주의를 하지 않고도 상대방과 연대를 할수 있는것인가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라고 본다. 우리의 틀을 유지 한다는것 자체가 우리의 것이 남의 것과 구분을 지어서 상대방과 나의 경계를 유지시켜 대화를 막는다는 것인데, 이를 통한 연대성을 만드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변하지 않듯이 우리는 변해야 하는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다원주의를 하지 않고서 변하는 방법을 택해야 할것이다. 이를 통한 여러가지 비전과 제시를 보았지만, 그다지 나는 이게 옳다고 보이지 않고 변하기 싫어하는 우리 교단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일면 옳은 얘기들로 채워져있지만, 실천하는것이 어려워 보인다. 나의 틀을 상대방에게 맞추는것은 강요가 아닌 사랑으로 할수 있는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할것 같다.

 

 사랑에 대한 집착론을 이책에서는 거의 많은 장수로 할애하고 있다. 맞는 말인거 같다. 우리는 사랑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이것은 집착이나 중독에 가까운 생활을 우리의 가족이나 생활에 하고 있다. 문제는 이게 과연 성경적이냐라고 이야기 할수 있겠다. 과감히 말하지만 이것은 성경에 나와있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가짜 짝퉁 사랑에 대한 집착론이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이라는 것도 집착이라는 것으로 치환 되버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생각하는 모든 사랑이 집착으로 치환 되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 치환이 손희영 목사님의 시선으로는 정당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사람도 분명히 존재함을 주지 시켜 주고 싶다. 우리는 대개 그렇다하는 것이지 전부가 그렇지 않음을 알아야 하는것도 중요하다. 사랑이라는 것이 집착이라는 것으로 모든것이 치환 되버리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사랑이라는 것이 거의 없다고 지적하는것으로 보인다. 내가 보기엔 사랑이라는 것도 집착을 하고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오는것이 사랑이라고 보여진다. 그것이 물론 에로스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사실 아가페적인 사랑을 이야기 하려고 노력하지만, 전혀 아가페적인 사랑에 대한 정의도 논점도 없는것 같다 이책에선 ,물론 내가 배웠지만, 이 손희영 목사님은 자기가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수 있는 것으로 착각 하고 있는것 같다. 많은 선행도 무시할 그런 생각도 하고 그것 마저도 집착과 중독이라는 것으로 치환해버려서 절대적인 아가페를 이야기 하려는것처럼 보이는데 나도 손희영 목사님도 전혀 아가페를 알지도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하는것 같다.

 

 여러가지 지적으로 보아서 손희영 목사님은 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와 다른 기독교를 많은 부분에서 가짜 기독교 세속화된것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자신이 남들보다 높음을 주지시켜 주는 듯 하다. 물질주의 여러가지 지적은 옳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손희영 목사님이 말하는 바로 그 세속화에 다 빠져있고 손희영 목사님만 아는 바로 옳은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난 개인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우리 교단에 아주 많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보는 것은 옳바른 기독교이고 상대방과 역사적으로 퇴보하거나 발전하는 그런 기독교의 모습은 가짜라고 이야기 하고 자신을 따라와야만이 진정한 기독교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학교에서도 보았고 여러곳에서 보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하는 기독교는 손희영목사님이 말하는 기독교와 일치하는것인가라고 반문하고 싶다. 우리가 신의 의지와 뜻을 알수 있을 정도로 뛰어나고 대단한 사람인가라고 묻고 싶다. 물론 세속화된 기독교는 타락하고 나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희영 목사님이 말한 그 기독교가 참기독교라는 것에는 나는 반대하는 편이다. 물론 그런 노력을 폄하하는것이 아니지만, 끝없는 노력으로 화석화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갈구 하고 살아야 하는것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것에 벗어나는것부터가 먼저 선행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마치 영지주의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고 영과 육의 지식을 분리시켜 많이 알아야 구원을 받는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본다. 물어보고 싶다. 우리는 반드시 좋은것을 많이 알아서 좋은 내용으로 가르쳐야 하지만, 좋지 않는 목회자를 만나 좋지 않는 설교를 듣고 헤매는 사람에게 구원을 물어본다면 어떻게 할것인가라고 묻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버려둬야 한다고 이야기 해야 할것인가? 잘못된 하나님을 만나는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들 뿐만 아니라 우리자신이 된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는지 물어보고 싶다. 난 아직도 내가 생각하는 기독교와 하나님이 온전하다고 생각해본적이 없다. 이책을 읽고 손희영목사님이 말하는 기독교나 하나님을 알고도 온전한 기독교를 안다고 생각해본적이 없다. 단지 우리에게 남는것은 끊임없이 노력하여 알려고 하는 노력의 추구만이 있을 뿐이다. 비지식적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반지성주의로 흐르는 기독교인들은 전부가 다 손희영 목사님의 말을 따르지 않고 그들 나름의 기독교와 하나님을 알고 지내는데 그들에게 나는 너는 가짜야라고 이야기 하고 싶지가 않다. 세속화가 나쁘다고 지적하는걸로 끝나지 않고 나만 따라오면 너네들은 제대로 안다고 하는게 아니라, 같이 탐구하고 그들을 함께 구원시킬 방법을 고안해 내는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지적인 탐구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노인이나 교육이라고 하나도 없는 아프리카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이야기 해줄것인가? 고민한다. 우리는 눈을 뜨고 살아가지만 보지 못하는 복음이 눈앞에 있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인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불완전성을 모르는 하나님이 아니라는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우리는 옳바른 기독교를 안다고 착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저 노력만이 있을뿐이다. 이런분들의 논점대로라면 기독교의 99퍼센트는 지옥에 가는것이다. 잘 알고 있는 교수나 의사들만 가는 게 천국이다. 지적으로 많이 안다고 기독교와 믿음이 완벽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다. 과연 그럴까? 우리가 많이 안다고 해서 하나님이 오 훌륭한 자식이네 하면서 우리를 반겨 줄까? 그렇다면 십자가에 같이 못박혀 죽은 강도들은 어떻게 이야기 할텐가? 그들은 예수님을 단한번 만나서 구원에 이르렀다. 죽음앞에서 단한번 고백으로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우리가 헤매지 않았다고 착각하고 옳바른 고백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만약에 틀렸다면 어떻게 할텐가? 단한순간도 우리의 신앙고백은 일정하게 유지된적이 없었다고 나는 단언한다. 과연 신앙고백이 유지되었고 그렇다고 해서 신앙고백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고 이야기 할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일정하게 정해졌다고 해서 역사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언어라는 도구를 이용해서 바뀌어진 여러 사상들을 이용해서 되어진 신앙과 신학의 역사를 보면 그렇다 바뀌어졌다. 안바뀌고 개인마다 다 다른 사상과 기독교적인 신앙고백이 있다. 그렇다면 그게 왜곡되어지고 잘못되어진것이라면 어떻게 할텐가? 제가 만난 하나님은 이런것 조차 이해못하실 분이 아니라고 느껴진다. 다 아시고 불완전한 것을 다 안다. 일면 옳고 좋은 말씀들로 채워진 책이지만, 자신이 아니면 다 지옥간다는 그런 사상부터가 지나치게 사악하다고 생각한다. 모든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존재가 아닌 나와 다른 사람을 구분시켜 자신을 높게만 보려고 하는 자신은 위대한 사상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구분지으려는 착각을 가지는 사람은 웃기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성경책 글자도 못읽는 분들도 구원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이런생각을 한다. 반지성주의도 배격하지만 지성주의도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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