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이성비판 - 개정2판 대우고전총서 5
임마누엘 칸트 지음, 백종현 옮김 / 아카넷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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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천이성비판은 인간이 가질수 있는 이성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지만, 절대선 최고선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 같다. 최고선을 신의 공명정대함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주된 골자는 자유와 신 영혼이다. 이 세가지 이야기를 하기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유에 대해서 희구를 하고 있다. 자유란 어떤 것인가? 라고 자유를 말하려고 하지만, 애매한 답밖에 내지 못한다. 자유를 이야기 하려는 주된 이야기는 자유가 있어야만 인간에게 주어진 윤리라는 잣대를 댈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윤리를 설명하다가 자유가 없으면 인간에게 윤리란 있는 것인가라고 자답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그리고 쾌와 불쾌를 설명하면서 인간에게 주어진 윤리의 근원인 선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인간에게 쾌를 가져다 주면 선이라고 이야기하고 불쾌를 가져다 주면 악이라고 하는 그런 논의를 하는데, 이는 정확히는 그렇지는 않지만 선과 악은 그렇게 나눌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쾌와 불쾌를 설명하며 에피쿠로스 학파에 대한 연구를 한것을 알려준다. 선악이라는 근원적인 윤리의 모티프를 설명하기 위해서 에피쿠로스학파를 연구하게 된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인간의 윤리를 실천 하기 위해서 행복을 생각한다면 에피쿠로스학파지만 이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 덕만을 이야기 한다면 스토아학파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한다. 스토아학파에서는 덕을 이야기 하며 인간의 실천에서 윤리를 이야기 한다. 인간의 실천이성을 생각하면 스토아학파의 덕을 생각하기쉽지만 칸트는 인간의 실천이성을 근원적인 쾌락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참 독특했다. 순수 사변 이성과 순수 실천 이성과의 구분을 하면서 순수 사변 이성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이야기 한다. 순수 실천 이성은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중에 실천과 관련된 이성이다. 다시 말해 실천하면 미덕인 것들에 대한 이성이 순수 실천이성이다. 이둘을 구별할 필요성은 방법론을 개진하기 위해서이다. 이 실천이성을 윤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천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한 내용이 있는데 그것이 실천이성의 방법론에 대해서 나와있다. 그것들 중에 하나는 우리가 실천이성 즉 윤리적인 최고선을 실행한 사례를 배우게 한다는 것이다. 실천이성은 이렇게 행동될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실천이성이나 윤리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물론 이런 사례적인 것으로 선악에 대한 분별성을 키우는 것으로는 좋겠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런 존재가 아님을 이야기 하고 싶다. 신앞의 인간으로서 성령에 맡겨야만 진정한 선을 행할수 있다고 보는게 신학적 입장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을 행할 능력을 상실했다고 표현한 바울의 논구를 보아야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게 될것이다. 순수 실천이성은 일반적으로 표현하기에 윤리라고 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를 위한 자유를 가지고 자유의지를 가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칸트는 자유의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어떠한 결과가 없는 논의만 하게 되는데, 아포리즘의 영역에 들어서버리고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내게 되었다. 자유의지라는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의지를 설명하는데, 그 의지는 쾌와 불쾌와 같이 인과론으로는 설명이 불가한 영역에 대해서 이야기 하게 되는 것이다. 선과 악 그리고 의지 그리고 자유의지 이 모든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원인과 결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결국은 인간의 우주론논증으로 설명이 돼지 않는 영역인 최고선에 대해서 설명을 하게 되는데, 이 모든 개념에 원인은 신이다라고 결정하게 되는데 이게 내가 읽은 실천이성비판의 이야기이다. 


 최고선에 대한 인간의 선에 대한 갈망은 선을 실천하게 하는 동인이 되기에 틀림 없다고 칸트는 이야기 하지만 인간이 선으로 보이는 것들이 과연 선인가라고 물어보고 싶다. 선악의 구분의 애매함, 의지의 애매함, 자유의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하지만 아무런 논의가 되어있지 않음 신 존재 증명으로 끝을 매기게 되는 것이 이책이다. 물론 신존재 증명의 끝판왕이라고 보아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이를 답할 인간은 없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한 신에게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한 신에게 인간에게 선악을 준 신에게 어떠한 이야기도 할수 없을것이다. 그의 존재에 경탄하며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인식하는 방법 밖에 없다. 최고선을 알게 된다면 인간은 선을 실천할 능력이 있는가에 대해서 답해보자면 없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인간의 선이란 과연 무엇인가? 니체가 말한것처럼 인간의 선이란 도덕을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두려움에 기초한 법의 성립인가? 누군가를 죽이고 나서 죽이지 말라고 이야기 하는 정복자의 두려움에 떨린 것인가? 인간을 죽이지 말라고 하는 것이 선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누구나에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죽이라고 이야기 한 신은 선하다고 이야기 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정언명법에 위배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신이었다. 그럼 자기 아들을 죽이라고 이야기 한 신이 신존재 증명을 한 칸트에게 물어보고 싶다. 그가 과연 최고선인가라고 물어보고 싶다. 앞으로 있을 얘기는 신학도입장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선은 인간이 구분하거나 할수 있는 능력이 선험적으로 존재 한것이 아니라 절대선이자 최고선이 신의 이야기에 순종하는 것이 최고선이자 절대선이다. 이게 선이다. 그리고 자유는 인간이 얻거나 획득할수 있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는 곧 예수다. 요한복음 1장 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것이라.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여기서 보듯이 진리는 예수이고 진리가 자유를 주게 되니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예수에게 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신학적 답이 없었기에 칸트가 실천이성과 윤리를 따져가면서 혼란스러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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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까치글방 114
에리히 프롬 지음, 차경아 옮김 / 까치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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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의 책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회학 심리학 철학을 배우고 의대 교수까지 제직했던 경험이 있는 한마디로 말해서 여러가지 지식이 있는 식자층 사람이다. 물론 이책도 인문고전에 반열에 오를만한 책이기도 하다. 책내용을 하자면 소유냐 존재냐는 인간의 실존 양식인 존재에 뜻을 두기 보다는 소유한다는 인간의 근본적 욕구에 시달려 존재보다는 소유에 이끌려 살아가는 현시대의 작태를 비판한 책이다. 소유의 형태는 극단적으로 구약성경에 나와 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귀금속을 가져와서 유대인들을 출애굽 시켜준 것이 귀금속을 금송아지로 만든 상이었다. 이것이 자신들의 소유를 극단적인 숭상하는 형태이기도 하다. 신약과 지금 현시대를 따져보면 ,물론 에리히 프롬은 지적하지 않았지만, 돈이라는 맘몬을 섬기는 구조를 보고 이것을 소유중심적인 삶이라고 한다. 그러나 책에서도 이미 이야기 했다싶이 소유는 인간의 근본적인 양태이기도 하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의 불안감을 해소해서 재산을 축적하기도 하고 원시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도 조차 소유가 중심인 삶을 살게 된것이다. 이 소유중심적인 것을 어떻게 존재로 이행하느냐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게 참으로 인상깊다. 우리가 소유하는것을 가난하게 해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게 아니라, 그것은 이미 불교교설로서 전파되어진 무소유다. 자신의 소유를 남에게 나누어 주어 성경에 나와 있는 듯이 남을 윤택하게 하는것이 바로 존재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행위라고 이야기를 한다. 성경을 자세히 읽다보면 이런얘기가 나온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사람이 윤택해지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이고,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수 없다고 이야기를 한다. 자세히 읽다보면 에리히 프롬이 기독교인처럼 보이기 쉽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을 가지고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신앙의 흔적을 찾을려고 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사람에게 주어진것은 성경의 도덕적인 사랑으로서의 재산 나눔밖에 존재하지 않고, 또 불교와 무신론적인 에크하르트 수사의 이야기가 동일하게 전개 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맨마지막 챕터에서 나오는 야망은 자신의 책으로 다른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쓰고 싶은 마음이 적혀 있다. 

 

 사실 에리히 프롬이 이야기 하는것이 머리에 잘 남지 않아서 걱정이다. 읽었는데 무슨말을 설명해줘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한마디로 자신감이 없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을 비판하려고 하는 이유는, 신의 실수라던가 신학생입장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자꾸 한다는 것이다. 그의 비판은 실로 맞는 이야기이다. 근데 과연 이책을 씀으로써 읽고 나서 자신의 삶이 소유가 아닌 존재로의 이행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인가? 인간이 지식을 쌓는것 만으로 존재에 가까워 진다는 말인가? 단지, 기독교의 중심적인 교리나 성경을 읽고 나서의 내느낌은 존재로의 이행은 자신의 깨달음에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신없이 자신의 존재라는 기틀을 세울수 있다는 것이 역시나 인문주의적이다라는 이야기를 할수 밖에 없다. 그리고 에크하르트 수사의 역할도 그렇다 그의 글에서 무신론적인 향기가 난다는 이야기도 약간 납득이 가질 않는다. 단순히 성경에 나와 있는 진리를 글로 옮겨 적었을 뿐인것을 성경의 이야기와 판이하게 해석하는 틀이 다르다는 것을 느꼇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는 소유를 벗어난 존재로의 이행은 자신의 재산을 나눠주는것으로는 부족하다. 성경에 이미 적혀있다싶이 나를 따르라라는 말은 예수께서 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소유와 탐욕은 인간 스스로가 억제 한다고 해서 조절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기부한다고 한들 자신이 소유적 삶을 사는 것과 존재적 삶을 살게 되는것 그것을 바꿀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들자면 내가 설교 들었던 많은 재산가가 몇억을 기부하고 자신의 행적을 기리며 자랑하고 다니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그사람이 과연 소유적 행위에서 존재적인 사람으로 이행이 되었을까? 단언컨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때에야 만이 그의 숨결이 부어지어 존재로의 이행이 가능한것이다. 


  그러나 그의 지적을 일면 타당하고 성경을 보는 시선이 균형잡혀 있음을 부인할수가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야기의 중심적인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아는 기독교적 윤리만 안다고 해서 기독교적인 일을 할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성경에서 이야기 하듯이 죽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선행을 베풀만한 그릇이 되지 않는다. 소유에 지배당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소유에 지배당하는 삶을 살수 밖에 없는 무기력한 존재이다. 에리히 프롬의 짧은 책으로 많은 변화가 있길 바라지만, 아직 그가 생각하는 모든것들이 제대로 이행되어지지 않고 있다는 게 사실이다. 그가 책에서 이야기 했다싶이 인간이 소유를 추구하는것은 자기 자신이 탐욕으로 얼룩져 있는 부패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수밖에 되지 않는다. 존재로의 이행 상당히 간단하게 들리면서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존재라는 개념으로 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할것이 너무나도 많다. 존재는 현존재로의 인도함을 받는다고 해서 이어진다고 생각되어지지도 않는다. 하이데거가 이야기 하는 현존재로의 이행은 중세 철학에서 이야기 하는 존재로의 이행을 신없이 이루어가는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에리히 프롬의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꿈꾸는것 이루어가기에는 너무나도 어렵다. 사실 나도 이 존재로의 이행이 지식의 충만으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것인가라고 자문해 본다.진실된 인간의 휴머니즘을 꿈꾸는 사람이 많다. 인간다움이 더러운 육체로 표현만 되어져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남지만, 인간이 그만큼 복잡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랑을 많이 할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간다면 그보다 좋은 존재로의 이행이 어디있겠는가만은 그렇지 않다는게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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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 선 기독교 - 공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김명윤 옮김 / IVP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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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슬라브 볼프는 위르겐 몰트만의 제자이고 지금은 예일대학교 교수로서 재직중인 조직신학 교수이다. 사실 이책을 읽고 난다음에 약간 벙쪗다. 이런 사고를 가지고 신학을 하는 사람이 있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대략 책의 내용은 이렇다. 나태와 강요 사이에 존재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이 나태는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 나태를 지적하고 있다. 아무것도 참여하지 않고 그냥 수동적으로 바라보는 기독교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강요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사상만을 주장하여 강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글이다. 사실 정통 기독교는 강요만을 하면서 살아오고 문화적 가치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게 다른나라의 것만을 강요하는 사상이 팽배하다. 근본주의는 말할것도 없고 말이다. 그러나 성경을 성서라고 내리깔아 놓고 성경에 나와 있는 말을 무시하고 우리는 폭력을 위한 강요를 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는 미로슬라프 볼프의 의견은 사실 잘 몰라서 그런 얘기를 하는가보다 라고 생각이 든다. 우리는 나태가 더 유익한가? 근본주의 기독교라고 칭할수 있는 기독교는 총신, 광신을 합친 합동측 교단이다. 물론 장로교 태생이 그런것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기독교가 점점 진보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주장과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답답하다. 우리가 그들과의 대화를 이끌어내면서 과연 좋은 기독교가 탄생할 여지가 있는것인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의 대화로 인해서 유일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거 하나로 이슬람과 기독교가 하나의 신을 믿고 있다고 주장하는 현대 다원주의를 따라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것인가? 볼프는 너무 이상적이라고 느껴진다. 사실 기독교는 강요해서 믿어지는게 아니라 이리와서 한번 보시오 라고 전도하는 사람이 말하고 하나님께서 그사람들을 변화시켜 일주일에 30분 정도의 설교를 듣고 변화되어 기독교를 바꾸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예일대학교 조직신학 교수란분이 이런말을 하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가 고민이다. 우리가 강요라는 글을 빼버리고 권유라고 이야기 하면은 안되는것인가? 헬레니즘에 영향을 받았던 기독교가 있다고 해서 우리는 다른 종교와 융합을 해야하는 숙명을 가진것인가? 이 책 전반적인 글을 보면 이런 느낌이 든다. 서구 제국주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와 이슬람과 십자군 전쟁을 한 오만한 유럽과 그 모든것이 문제가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 그렇다면 다원주의로 인해서 우리 기독교가 발전할 가능성이 존재하는가라고 반문하고 싶다. 정체성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게 기독교의 선교모델을 가지고 말하는것 같다. 분리주의를 이야기 하면서 나치와 협력하지 않는 디트리히 본회퍼를 이야기 하면서, 다음번에는 차이를 인정하고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면 나치와 대화와 합력할 여지가 남아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걸까 이 신학자는 아주 탁상공론을 주장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공적인 영역에서의 폭력성을 지닌 기독교를 바라보면서 우리를 핍박하려고 하는 공적인 종교와 다른 신앙을 가진사람들은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차이로 인한 다원주의적 대화에서는 지혜를 공유하는 것이고 사랑안에서 모든 종교는 하나니까 그들과 대화하자는 아주 이상주의적인 이야기를 해놓고 있다. 이게 과연 옳은 이야기인가? 이슬람이 일부다처제를 이용하여 한국에서 결혼하여 이슬람의 숫자를 늘리고 있는 실정이고 미로슬라브 볼프와 같은 신학자들이 대거 등장하여 몰락되고 있는 서부 기독교의 모델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볼프의 얘기를 듣자하니 그가 하려던 이야기의 핵심은 이것이다. 차이를 바꾸려 하지 말고 공통점으로 인해서 서로의 대화로 발전하자라는 이야기이다. 재미있는 놈이다. 볼프에게 물어 보고 싶은것은 그렇다면 대화의 여지가 남아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으로 이야기 한다면 그럼 이단과의 대화에서도 발전방향이 있다는건가라고 물어보고 싶다. 나는 이단들과 여러 대화를 나눠보고 생긴 결론은 그들은 대화로서 해결되는 문제가 안된다는 것이다. 영적인 이야기를 해보아야 겠는데 그들에겐 그냥 폭력이 아니라 강요가 일삼아지고 속임수가 판을 치고 우리기독교를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이게 비단 공통점으로 대화를 해서 기독교를 발전시킬 여지가 있는것인가라고 물어보고 싶다. 볼프 이양반은 전도도 안해보고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모양이다. 인간은 영적 존재라서 우리가 이단이라고 여기는 것들에 빠지기가 매우쉽다. 나도 그런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내가 잘못된 길로 빠질까봐 두렵다.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이슬람보다 이단이 훨씬 많다. 그럼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 기독교가 새로운 영역으로 발전시킬 여지가 있다는 얘긴가? 가소롭고 웃긴 헛소리로 보여진다. 세상법을 따르지 말고 우리 기독교의 법을 따르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대화를 해야 하고 그들과의 논의를 해야 한다고? 그들은 거짓말치고 인간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드는 사탄앞에서 그런이야기가 나오는지 궁금하다. 사실 볼프의 이야기는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 형편없는 이야기이다. 실천적인 지침을 따르자면 강요와 나태 중간에 위치해 끈질기게 매달려야 하는게 기독교 이다. 나도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단과의 대화에서 얻은건 이사람들은 미쳤구나라고 생각이 안들어진다. 그냥 미친거다. 아무리 얘기해서 기독교를 발전시키려해도 그들에겐 하찮은, 기독교를 본딴 교리에 젖어 있다. 코란도 기독교와 유대교와 섞여 있는것이다. 그리고 유대교도 같은 신을 믿는다고 이야기 했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말이 거짓이란 말인가? 유대교는 그냥 눈이 멀어 있다. 이방인의 수가 채워지기 전까지는, 그들은 기독교를 믿지 못한다. 과연 그들과의 대화로 우리가 발전가능한게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 발전 방향을 제시해주고 그발전이 무엇이 있는지 정확하게 이글에서 밝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례가 전혀 없다. 그럼 나치와도 대화가 가능하단 말인가? 인간은 대화로 언어로 많은 발전을 하지만,  모든 발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령과 예수님의 말씀으로 되는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과연 정당한 사랑인가? 그게 정말 사랑으로 느껴져서 그 이상적인 상황에서 모든게 좋아질거란 낙관주의 빠질수 있는 것인가? 공적인 기독교가 있어야 할자리를 생각하는게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균형적으로 따라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하는게 맞는 이야기이다.


 사실 자유주의라고 이야기 하는 놈들의 이상은 웃긴다. 그들이 이야기 하는 얘기의 핵심은 성경을 소설책으로 보고 윤리적인 사랑만 남은채 아무런 유익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이긴 하지만, 성경을 무시하는 짓은 참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일이다. 성경이 폭력으로 가득차게 보였다면 그사람은 성령의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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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탐구 비트겐슈타인 선집 4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 책세상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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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암살자라고 불리워도 될만한 아주 재미 있는 철학자이다. 거의 완벽한 천재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이 사람으로 말할거 같으면 그냥 가족 자체가 철강기업을 소유로 한 아버지 밑에서 음악적 천재 철학적 천재가 다 나오는 엄청난 사람이다. 근데 이사람이 너무 어렵게만 느껴져서 사람들은 논리 실증주의나 다른 언어놀이에 대한 사유를 하지 않는것 같다. 우리가 만약에 물병속에 갇힌 파리라면 파리가 다니는 공간은 철학적 세계이고 그 껍데기가 바로 언어라는 것이다. 사실 언어에 대해서 그다지 많은 사유를 하지 않는 것을 꼬집어 말하는 이 천재의 반향은 실로 대단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한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다면 니체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철학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먼저 이 철학자의 위치를 다 떠나서 이책의 내용은 한마디로 충분히 설명이 된다. 우리안의 주관성(문법)을 파악하여 새로운 용어로 우리가 하는 철학을 하자라는 이야기이다. 사실 인간의 언어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서 많이 변하는 것 같다. 인간의 싸움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이런 언어적 오해로부터 시작이 되고 그 개념적 고찰이 중요해지기 때문에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일이 가장 잘 일어 나는 곳이 바로 정치판이다. 말끝을 가지고 이리 조리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도 그런 사람중에 한명이기도 한다. 아무튼 철학적 탐구 어려운 책은 아닌거 같다.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끊임없이 반복해나가며 말하는 책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못마땅한것은 자신이 논리 철학 논고를 통해서 비판받아 온 것들을 다시 세우려고 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이 논리 철학 논고에서 일으킨 오해들로 인해서 생긴 것들을 고찰하려고 이글을 썻다. 가장 인상깊은 것들은 우리는 고통 받는자들과 똑같은 고통을 받아도 주관성으로 인해 다른 해석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언어 놀이는 가다머가 말하는 해석의 단계와 비슷하다. 선이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가다머의 철학과 비슷하지만, 다른것은 그냥 철학을 송두리째 망가 뜨릴수 있는 여지가 너무 많다. 우리가 말하는 명제와 그 명제의 참됨은 인간마다 주장하는 것들에 따라서 변하기도 없어지기도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과연 문법으로만 설명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철학자이다. 정작 해제를 보면 문법을 잘 알아야 하는 것처럼 나오지만 사실 문법이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삶의 정황에 따른 이해의 엄밀성이라고 정의 하는게 더 좋아 보인다. 


비트겐슈타인 너무 어려워 보이지만, 그렇게 위대한 사유를 했다고는 느껴지지는 않는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연속상에 끼워져 있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언어놀이라는 것이 과연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서 새로운 사유로서의 길을 창제 했다기 보다는 그냥 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철학의 암살자와 같은 맥락으로 이어진다면 그를 생각하고 사유하는 레이몽크나 강신주나 모든사람이 그의 철학을 드러내기 보다는 그저 그의 삶에 집중하여 논의를 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언어놀이에 가서 그 사유를 시작하는게 아니라 그의 천재적인 삶에 대한 고찰에 그치는 아주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준다. 여태 들었던 모든 번역본이라던가 해설을 하고 있는 놈들이 지식장사꾼마냥 잘난체 하면서 그냥 그의 철학은 일언지하 말로 꺼내지도 않고 이해하지 못함을 드러내면서 자신은 이것도 이해했다는 아주 더러운 자랑만 늘어뜨리는 놈들이 많다. 솔직해지자, 하이데거나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무류성을 주장하는게 아니라 오류를 명백히 드러내며 침묵을 주장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실 철학적 탐구도 그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제자들의 글 모음집에 불과하지만, 너무 천재라서 그럴까 그의 의도에 맞게 철학한 사람은 보여지지가 않다. 하나의 명제에 대한 믿음 확신 참됨을 주장하는게 아니라 자신의 주관에 따른 새로운 개념창제 이것의 부재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의도하는것들이 너무 하찮게 느껴진다. 언어놀이를 설명하면서 가장 인상깊에 보이는 장면은 고통에 대한 사유를 손봉호 교수는 아무도 하지 않았다고 이야기 했지만 이사람은 했다는게 느껴진다. 고통이라는 언어에서 이해하는 정도와 척도가 일반적이지 않다는 그의 주장은 나에게 너무나도 좋은 자극제가 된것 같다. 그렇다 모든고통은 수동적이고 개인적 주관성에 매여 있다. 고통과 수열 인간의 수학이라는 도구에서까지도 그는 하나의 정립된 의미가 있지가 않다는 것이다. 물어보고 싶은것은 현대 수학에서 무한에대해서 다루는데 인간이라는 극도로 연약한 존재가 무한을 다룰수 있는 통찰력이 있는가라고 물어보고 싶다. 그저 인간은 연약한 이성을 사용해서 그 껍데기 밖에 사유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을 읽고 사유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경고한다. 이사람도 그냥 사람이다. 그냥 어렵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의 사고에도 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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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5-08-23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트겐슈타인 왠지 어려울것같지만 리뷰를 보니 이 책 한 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감사합니다^^
 
개신교신학 입문
칼 바르트 지음, 신준호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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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신학 입문 -칼바르트 
개신교 신학 입문 거창한 칼바르트의 신학자 입문 강의를 추려놓은 책이다. 아무튼 이책은 경고의 메시지와 토닥임의 메시지가 혼재하고 있다. 처음에 이책에서 이야기 하는 가장 주된 내용은 계시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하는것 같았다. 그것이 칼바르트의 가장 큰 핵심이니까. 칼바르트는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말씀이란, 기독교 내부에서 주어진 말씀이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인데 그것이 우리의 신앙과 합일이 되어서 주어지는 말씀이라고 이야기 한다. 또 증인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선지자, 사도로 대표되어지는 사람들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보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수 시켜주신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한 공동체 얘기를 들자면 공동체는 우리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책들을 완성시키며 전승시키는데 가장 큰 일조를 하게 된 중요한 일을 한사람들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맨 마지막에 한 챕터 마지막에 나오는데 성령이다. 이 모든 말씀이 계시가 보존되어서 나오는데 가장 중요한것은 성령이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조명해 주시지 않으면 제대로 된 성경 해석과 전승이 되지 않았고 증인들도 말씀에 대해서 쓰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오게 된다.

신학적실존에 대해서 논하자면 놀람은 가장 우리가 기적을 보면서 우리실존이 놀라는 상황에 처하면서 신학자들이 처하는 상황에 대해서 제시해주고 있다. 당황은 그 신학자들이 놀람을 당하는 상황에서 주어지는 일을 설명해 주다가 나오는게 당황이다. 당황을 함으로써 인해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대해서 강렬한 마주침에 직면하게 되는것을 설명하였다. 의무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도덕적인 의무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태도, 등등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있다. 여기서 맨마지막 챕터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던가? 믿음에 대해서 설명을 하게 되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믿음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믿음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인간이 노력으로 얻어지는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계시의 설명이 도입되어 믿음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믿음과 성령의 계시를 너무 집중한 나머지 인간이 할수 있는 노력에 대해서는 간과해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인게 칼바르트의 맹점이라고 보여진다.

신학의 위기 에서는 고독이 나오는데, 고독은 인간이 신학자가 되면서 처하는 가장 근본적인 경우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다. 신학자들은 대다수의 인기있는 직업과는 다르게 고독과 싸워야만 하는 직업임을 부인할수가 없다. 또한 의심에 대해서 나오는데, 의심은 우리 신학자들이 가져야 하는 가장 큰 페널티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에 대해서 논하지만 인간인 신학자는 항상 의심을 해야 하며 하나님께 대적하는 행위를 해야 하는 숙명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인것이다. 시험에 대해서 논하자면, 시험은 인간이 가지는 많은 것들을 의심하면서 가지는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신학자들에게는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사실 나는 이 면에서 가장 힘들었다. 신학자가 되려 했던 나의 희망이 어쩌면 엄청나게 힘든일을 자초하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희망을 제시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자는 희망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신학자들이 개신교신학을 함으로써 희망을 제시하는 일을 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희망이 되는 약간 몰트만의 사상이 섞인 이야기를 한다.

신학적 작업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기도에 대해서 설명해야 한다. 기도는 우리가 신학을 하면서도 꾸준히 이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기도가 병행되지 않는 신학은 허공을 맴도는 헛소리를 하는 것에 비유될수 있다. 연구를 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연구를 하면서 여러 제반의 신학에 대해서 철저한 연구를 통해 알아내야 하는 것들이 신학자들의 작업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책에서는 여러 신학들의 연구 방법에 대해서 써놓고 있다. 봉사는 우리가 이 일을 하고 신학자들의 일을 해나감에 있어서 봉사의 정신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다. 봉사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들이 가져야 하는 근본적인 정신이고 우리가 해야할 당위성을 가지고 있어야 된다. 사랑에 대해서 맨마지막에 설명을 하는데, 그럴듯 하다. 사랑은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두가지 종류가 나오는데 에로스 아가페이다. 조건적이고 타자 중심적 사랑이 에로스이고 무조건적이고 타자중심지향이 아닌 사랑이 아가페이다. 우리는 신학을 하면서 에로스적인 것을 하려하지만, 아가페적인 신학을 하려고 애를 써야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개신교신학입문을 요약했다. 비판하려고 하자면 너무나 신학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비관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나라고 생각이 든다. 신학의 위기에서 너무 괴로웠다. 의심이라는 것을 숙명적으로 하는 것은 인간에게 기적과 지혜가 상반되게 존재 하지 않는 삶을 사는 숙명적인 인간의 허무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인간은 발버둥 치되 하나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채 침묵하며 아무런 응답이 없는 묵상만이 존재하는 비극적인 운명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하나님은 침묵으로 답하시고 아무런 말이 없다. 우리는 신학을 하며 허공에 메아리 치듯이 하나님을 외쳐대지만 아무런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큰 비극이다. 사실 이책에서 중심적으로 이야기 하려던 이야기는 우리가 계시 중심적인 사고를 가지면서 신학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게 주된 요지 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나도 한수환 교수님과 동감하는것은 너무나 계시 위주의 사고를 하다보면 우리는 신비주의에 빠지게 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바르트의 경고는 맞는 말이다. 우리가 신학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지 인간이 주체가 되어 하나님을 대신하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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