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까치글방 114
에리히 프롬 지음, 차경아 옮김 / 까치 / 199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의 책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회학 심리학 철학을 배우고 의대 교수까지 제직했던 경험이 있는 한마디로 말해서 여러가지 지식이 있는 식자층 사람이다. 물론 이책도 인문고전에 반열에 오를만한 책이기도 하다. 책내용을 하자면 소유냐 존재냐는 인간의 실존 양식인 존재에 뜻을 두기 보다는 소유한다는 인간의 근본적 욕구에 시달려 존재보다는 소유에 이끌려 살아가는 현시대의 작태를 비판한 책이다. 소유의 형태는 극단적으로 구약성경에 나와 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귀금속을 가져와서 유대인들을 출애굽 시켜준 것이 귀금속을 금송아지로 만든 상이었다. 이것이 자신들의 소유를 극단적인 숭상하는 형태이기도 하다. 신약과 지금 현시대를 따져보면 ,물론 에리히 프롬은 지적하지 않았지만, 돈이라는 맘몬을 섬기는 구조를 보고 이것을 소유중심적인 삶이라고 한다. 그러나 책에서도 이미 이야기 했다싶이 소유는 인간의 근본적인 양태이기도 하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의 불안감을 해소해서 재산을 축적하기도 하고 원시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서도 조차 소유가 중심인 삶을 살게 된것이다. 이 소유중심적인 것을 어떻게 존재로 이행하느냐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게 참으로 인상깊다. 우리가 소유하는것을 가난하게 해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게 아니라, 그것은 이미 불교교설로서 전파되어진 무소유다. 자신의 소유를 남에게 나누어 주어 성경에 나와 있는 듯이 남을 윤택하게 하는것이 바로 존재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행위라고 이야기를 한다. 성경을 자세히 읽다보면 이런얘기가 나온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사람이 윤택해지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이고,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수 없다고 이야기를 한다. 자세히 읽다보면 에리히 프롬이 기독교인처럼 보이기 쉽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을 가지고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신앙의 흔적을 찾을려고 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사람에게 주어진것은 성경의 도덕적인 사랑으로서의 재산 나눔밖에 존재하지 않고, 또 불교와 무신론적인 에크하르트 수사의 이야기가 동일하게 전개 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맨마지막 챕터에서 나오는 야망은 자신의 책으로 다른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끼쳐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쓰고 싶은 마음이 적혀 있다. 

 

 사실 에리히 프롬이 이야기 하는것이 머리에 잘 남지 않아서 걱정이다. 읽었는데 무슨말을 설명해줘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한마디로 자신감이 없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을 비판하려고 하는 이유는, 신의 실수라던가 신학생입장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자꾸 한다는 것이다. 그의 비판은 실로 맞는 이야기이다. 근데 과연 이책을 씀으로써 읽고 나서 자신의 삶이 소유가 아닌 존재로의 이행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인가? 인간이 지식을 쌓는것 만으로 존재에 가까워 진다는 말인가? 단지, 기독교의 중심적인 교리나 성경을 읽고 나서의 내느낌은 존재로의 이행은 자신의 깨달음에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신없이 자신의 존재라는 기틀을 세울수 있다는 것이 역시나 인문주의적이다라는 이야기를 할수 밖에 없다. 그리고 에크하르트 수사의 역할도 그렇다 그의 글에서 무신론적인 향기가 난다는 이야기도 약간 납득이 가질 않는다. 단순히 성경에 나와 있는 진리를 글로 옮겨 적었을 뿐인것을 성경의 이야기와 판이하게 해석하는 틀이 다르다는 것을 느꼇다. 그렇다면 내가 느끼는 소유를 벗어난 존재로의 이행은 자신의 재산을 나눠주는것으로는 부족하다. 성경에 이미 적혀있다싶이 나를 따르라라는 말은 예수께서 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소유와 탐욕은 인간 스스로가 억제 한다고 해서 조절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기부한다고 한들 자신이 소유적 삶을 사는 것과 존재적 삶을 살게 되는것 그것을 바꿀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들자면 내가 설교 들었던 많은 재산가가 몇억을 기부하고 자신의 행적을 기리며 자랑하고 다니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 그사람이 과연 소유적 행위에서 존재적인 사람으로 이행이 되었을까? 단언컨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때에야 만이 그의 숨결이 부어지어 존재로의 이행이 가능한것이다. 


  그러나 그의 지적을 일면 타당하고 성경을 보는 시선이 균형잡혀 있음을 부인할수가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야기의 중심적인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아는 기독교적 윤리만 안다고 해서 기독교적인 일을 할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성경에서 이야기 하듯이 죽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선행을 베풀만한 그릇이 되지 않는다. 소유에 지배당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소유에 지배당하는 삶을 살수 밖에 없는 무기력한 존재이다. 에리히 프롬의 짧은 책으로 많은 변화가 있길 바라지만, 아직 그가 생각하는 모든것들이 제대로 이행되어지지 않고 있다는 게 사실이다. 그가 책에서 이야기 했다싶이 인간이 소유를 추구하는것은 자기 자신이 탐욕으로 얼룩져 있는 부패한 사람임을 인정하는 수밖에 되지 않는다. 존재로의 이행 상당히 간단하게 들리면서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존재라는 개념으로 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할것이 너무나도 많다. 존재는 현존재로의 인도함을 받는다고 해서 이어진다고 생각되어지지도 않는다. 하이데거가 이야기 하는 현존재로의 이행은 중세 철학에서 이야기 하는 존재로의 이행을 신없이 이루어가는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에리히 프롬의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꿈꾸는것 이루어가기에는 너무나도 어렵다. 사실 나도 이 존재로의 이행이 지식의 충만으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것인가라고 자문해 본다.진실된 인간의 휴머니즘을 꿈꾸는 사람이 많다. 인간다움이 더러운 육체로 표현만 되어져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남지만, 인간이 그만큼 복잡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랑을 많이 할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간다면 그보다 좋은 존재로의 이행이 어디있겠는가만은 그렇지 않다는게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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