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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ㅣ 정호승 우화소설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5년 6월
평점 :
(협찬) 소설집 《항아리》는
버려진 항아리,
하늘을 날고 싶었던 그림 속 새,
자신을 봐주는 이 없어 슬펐던 손거울,
그런 존재들의 짧고 단단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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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44편의 이야기 속에는
사람이 아닌 존재들이 주인공이 되어
세상에 조용히 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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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에만 뿌리내리고 사는 삶이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졌던 벚나무,
흘러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깨달아가는 강의 존재,
그림 속 조각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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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 존재들은 하나같이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작고 하찮아 보일지 몰라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쓰임과 의미를 찾아가는 길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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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오래된 시처럼,
이야기 하나하나엔 상처와 사랑,
불안과 용기,
그리고 묵묵한 위로가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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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내 마음이 너무 모나 보이고
이 세상에선 비켜나 있는 것만 같아서
어디에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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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 이 책을 펼치면
조금씩 가라앉았던 마음에
따뜻한 말이, 다정한 손이
살며시 얹어지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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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게 괴로워서,
흘러가지 않으려 애썼던 삶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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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흘러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섬진강.
“왜 나만 이렇게 흘러가야 하냐”고 묻는 그의 마음은
어쩌면 나 자신의 마음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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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움직이는 게 버겁고
세상에 흘러드는 게 두려워
자꾸만 제자리에 머물고 싶었던 날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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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섬진강에게 어머니는 조용히 말해준다.
“흐르지 않으면 그건 네가 죽은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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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섬진강은 흘러내린다.
그리고 마주한 바다는 말해준다.
“네가 되고 싶은 삶이 바로 나야.
너를 만나기 위해 내가 여기까지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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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문장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내가 살아온 이 흐름의 의미가,
지금껏 힘겹게 흘러온 나날이
결국 내가 되고 싶은 나에게 닿기 위한
여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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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건 끝이 아니라,
바다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는 걸
섬진강을 통해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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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는
어쩌면 내가 잊고 있었던 나의 조각들을
다시 소중히 끌어안게 해주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