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노동 - 산업혁명부터 데이팅 앱까지, 데이트의 사회문화사 Philos Feminism 11
모이라 와이글 지음, 김현지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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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의 ‘정상성’이란 허울은 여성의 감정노동과 돌봄노동에 의해 작동되고 유지된다. 여성의 노동이 ‘사랑’이란 철갑의 외피를 쓰는 순간 노동으로서의 모든 쟁점과 논쟁들이 일순에 음소거 된다. 그 첫 번째 도미노 조각이 연애, 즉 사랑이다.

낭만적 사랑이라는 수사 아래 숨겨진 교환과 거래의 원리는 자본주의가 본격화되면서 자본의 기획 아래 더욱 치밀해지고 세련되어져 왔다. 유혹, 데이트, 결혼. 이 간단해 보이는 삼단 계단 사이마다 무수한 정치적 기제와 변인들이 존재해왔다. 지금도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현상의 이면에는 복잡한 사회경제적 맥락들이 작용 중이다.

가부장제를 움직이는 사랑이라는 진실, 혹은 환영, 혹은 분열이 어떻게 자본주의와 철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지 이 책을 통해 공부해 볼 계획이다. 아르테 출판사의 필로스 페미니즘 시리즈 전편 ‘자본의 성별’을 통해 여성의 물적 토대의 취약성을 여실히 확인했다. 이 책은 그 취약성의 근본적인 바탕, 가부장제 사회의 두터운 베일 ,사랑의 민낯과 구조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몹시 기대된다.

(이 필로스 시리즈 중 하나인 다크룸은 내 2024년 올해의 책 중에 하나다. 정말 수전 팔루디 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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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은 저항이다 - 시스템은 우리를 가질 수 없다
트리샤 허시 지음, 장상미 옮김 / 갈라파고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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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실현. 이 네 글자는 처음 본 이후(아마도 중학교 교과서이지 않을까)부터 지금까지 내게는 난센스다.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데!, 혹시 내가 안 보이나? 뭘 실현하라는 거지?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라는 건가? 노력해서 무언가를 성취해야 내가 나라는 말인가. 실현하지 않으면 나는 없는 건가. 이상하게도 아직도 가끔 저 글자들이 불쑥불쑥 머리에 떠오른다.

자아실현에서 발아된 흑마술은 노력, 인내, 극기, 극복, 도전, 경쟁, 자기계발, 성취, 성공이라는 주문들로 자본주의의 폭력과 모순을 연기처럼 사라지게 한다. 주문에 마취된 개인들은 열심히 자기를 채굴하기에 여념이 없다.

“자본주의는 저항과 파괴에 직면해야 한다. 우리의 시간과 능력을 끊임없이 탈취하는 전 지구적인 폭력이다. 교정이 불가능하며, 언제나 신성한 몸들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는 사악한 힘으로 작용해왔다.” p146

<저항은 휴식이다>의 저자 트리샤 허시의 진단이다. 너무 과격한가? 나의 어떤 시간들, 어떤 이름들, 어떤 얼굴들, 어떤 기사들이 떠오른다. 저 문장들은 과격하지 않다. 허시는 이 책에서 ‘과로 사회’와 그 원인인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갈아 넣는다’, ‘영혼까지 털린다.’는 말이 일상어로 쓰이는 한국 사회에서 허시의 자본주의에 관한 문장들은 너무도 현실적이다.

“휴식은 저항이다”는 허시의 정치적 선언이다. 이 선언은 유구한 자본주의 착취로부터 해방되어 소진된 삶과 해체된 공동체를 복원하고, 우리 육체와 영혼의 신성성을 회복할 것을 지향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허쉬는 휴식을 탐구하고 공동체를 꾸리는 단체 ‘낮잠 사역단’을 창립하고, ‘낮잠의 주교’로서 휴식을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강력한 문화로 정착시키기 위해 전방위로 활동 중이다.

“나에게 진정한 해방이란 끊임없이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면서 할 일 목록에 오른 일들을 지워나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이었다.” p88 ‘존재 함’ 자체로 존중 받는 것. 허시가 생각하는 해방의 정의다. 허시는 과로 문화의 속도와 지속불가능성을 인식하는 정신적 전환이 휴식의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휴식은 일회성 행사가 아니다. 과로문화에 대한 대항 서사로서 휴식이 문화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가차 없고 지속적이며 전복적, 의식적인 전 지구적 사고의 전환”p73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문화로서 우리는 쉬는 법을 모르고 과로 문화의 독성에 노출된 채 휴식을 이해해왔다. 우리는 휴식이 사치이자 특권이며, 탈진과 수면부족으로 시달린 후에야 자신에게 허용할 수 있는 특별조치라고 믿는다.” p70 “우리는 자신을 괴롭히는 수면 부족, 피로, 단절에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온전하고 풍부하게 누리기를 원하는 물질적, 비물질적 대상을 극구 칭송한다.”p94 허시는 휴식을 보상으로 인식시키고, 피로를 소비와 중독으로 해결하게 하는 과로 문화를 직시한다. 특히 계급, 인종, 젠더, 국적, 장애 등으로 차별받는 소수자들은 이 과로문화에서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p88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는 점을 허시는 놓치지 않는다. 더불어 그는 피로 문화가 야기하는 개인의 몸과 정신의 소진이 어떻게 공동체 파괴로 이어지는지에 대해 사유한다.


허시에게 휴식은 해방의 도구이며, 몸과 마음은 무한한 지혜의 공간이다. 그는 “과로는 우리를 트라우마의 순환 고리에 붙들어두지만 휴식은 그 고리를 헤집고 뒤집는다.”p89라고 말한다. 휴식은 몸과 마음을 연결시킨다. 이 연결은 자본주의가 주입해온 것들을 인식할 수 있는 역량을 가져다주며, 해방의 출구를 찾아갈 직관과 상상력, 그리고 용기를 되살린다. 이는 우리를 제3의 공간으로 인도한다. “휴식은 발명, 상상, 회복을 위한 현실을 뒤흔들며 공간을 만들어낸다. 휴식은 그저 존재할 공간을 만들어주기에 상상의 도구이다.”p161 휴식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문화적 전환이며 탈식민화이다. 급진적인 휴식은 제3의 공간을 만드는 정치적 운동이다. ‘낮잠 사역단’이라는 집단적 운동이 필요한 이유다.


“흑인은 자본주의의 잔인성에 직접 연결되어 있다. 우리 몸은 미국이 가진 최초의 자본이었고, 그로 인해 휴식과 꿈의 공간을 끊임없이 탈취 당했다.”p81 “나는 미국 도망노예의 능력에서 영감을 얻은 덕분에 자본주의 체제 속에 살면서 휴식을 재상상한다는 개념을 발굴했다. - 중략 - 그들은 달아난 것이 아니라 노예 역할을 거부하고 플랜테이션 농장을 집으로 삼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내가 꾸준히 과로문화로부터 벗어나려 애쓰며 스스로를 바라본 방식과도 직결되는 태도이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맹렬히 기세를 떨치는 지금 당장 휴식을 얻고자 한다면 자신을 다를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허시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과 해방에 관한 영감을 준 건은 역사이다. ("역사는 낮잠 사역단의 대단히 중요한 기반이다."p110) 흑인노예역사를 자세히 알게 된 후 허시는 그 앎이 준 슬픔이 영원히 자신의 몸에 새겨졌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역사가 준 것은 슬픔 이상의 것들이다. 조상들의 유산은 허시를 살게 했고, 상상하게 했고, 창조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더불어 살도록 했다. 허시 철학의 출생지, 정치적 실천의 출발점이 된 역사적 사실들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 나에게도 소중한 앎의 기회를 주었다. 미리 말하지만,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허시의 전복적 사유가 시작된 이 출발점들이다. 2024년 11월 6일 이후니까, 더욱.


휴식과 치유를 말하는 책들은 이전에도 많았다. 꺽이고, 베이고, 움추린, 식은 마음들을 다독여 주는 고마운 책들이다. 그 책들의 많은 진단과 처방은 사적이다. 또한 많은 책들이 사적 트라우마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은 곱게 접어 보이지 않는 곳에 간직해 둔다.


트리샤 허시의 <휴식은 저항이다>는 다르다. 허시는 많은 치유서 저자들이 고이 접어 한쪽에 얌전하게 치워 둔 역사와 체제, 구조에서 휴식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허시는 개인이 역사와 정치의 후손들임을 정확히 인식한다. 200여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자본주의가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역사를 가진 우리 몸과 정신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은 그 자체로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휴식의 실종, 휴식의 정의, 휴식이 필요한 이유(세상에! 휴식의 이유를 재정의하고, 재탈환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휴식의 방법, 휴식이 가져오는 무궁한 가능성들까지 모두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다. 이 책은 휴식에 관한 이런 재발견들로 넘실거린다. 그러니 이 책은 휴식에 관한 철학서, 정치론, 명상록, 전략서, 수행서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모 카드 회사의 유명한 카피문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쉼은 조건이 붙는다. 저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휴식은 죄책감과 불편함을 동반한다. 자본이 허락한 휴식이라야 온전하다.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과 하모니를 이룬다. 역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는 늘 함께이다.)


스파, 요가, 명상, 리조트, 휴양림의 광고들은 하나 같이 모두 쉼과 치유를 약속한다. 야무지게 값을 매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휴식을 ‘각오’한 개인은 꼼꼼하게 계획하고, 살뜰하게 휴식을 ‘노동’하고 ‘소비’하고 돌아온다. 휴식마저 이미 자본에게 넘어갔다. 노동은 말할 것도 없고, 호기심, 주의력, 시간, 마음까지 그야말로 참깨처럼 털린 시대에 휴식이라고 침범 불가의 성역일까... 라는 냉소야말로 고이 접어두자. 이 책은 ‘휴식’이야말로 우리가 끝가지 사수해야할 성소라고 말한다. 허쉬가 말하는 그 이유들에 나는 절절하게 공감한다. 허쉬의 강령대로 자본주의의 틈을 파고들어 제3의 공간으로 나는 매 순간, 매일, 있는 힘껏 탈주할 것이다. 일단 , 허쉬의 제안처럼 해야 할 일의 목록이 아닌 하지 않을 일 목록을 적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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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은 저항이다 - 시스템은 우리를 가질 수 없다
트리샤 허시 지음, 장상미 옮김 / 갈라파고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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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은 저항이다> 와독(?) 전용 돋보기를 쓰고 옆으로 누워 책장을 넘기니 이런 말이 나를 맞이한다. “이 책은 누워서 읽기를 바랍니다!” 어떤 저자도 지금까지 나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말해준 적이 없다. 이 말을 전하는 글씨까지 나를 마주보며 누워있다. 이렇게 다정할 수가!

 

열린 창으로 산들바람이 달콤한 노래를 부르며 불어올 , 바로 낮잠을 잘 때이다. 할머니는 현관에 앉아 있고 할아버지는 잔디를 깎는다.” p12 추천의 말을 읽자 마음이 물속의 잉크처럼 풀어진다. 추천사는 이어진다.

 

인간답게 존재한다는 아름다운 실험에 몸을 맡긴다.”p12,

"저자는 마치 고통 받는 우리를 더는 두고 보지 않겠다는 조상들의 목소리처럼, 자신이 걷는 길에 함께하자고 우리를 초대한다.“p13

"<휴식은 저항이다>는 그저 한권의 책이 아니라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개입이다.”p14

"저자의 거센 외침은 휴가를 보내야 한다고 호소하는 수준을 넘어 포획의 정치에 붙들린 우리를 구출하고자 정교하게 짜낸 주문과 다름없다.” p15

"이 책에서 허시는 휴식을 모두가 활용할 수 있는 치유와 상상력의 관문으로 삼는 해방의 자장가를 들려준다. 더 깊이 호흡하며 세상을 더 선명히 바라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이 책을 펼쳐보자”p15

 

마음이 뜨끈해진다. 추천사로 마음이 이렇게 움직이다니. 이 책을 소개하는 이들의 절실함이 문장들로 뜨겁게 전해진다. 그만큼 이 책이 많은 이에게 공감과 영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이야기겠다.

 

저자 트리샤 허시는 미국의 시인, 공연 예술가, 신학자, 공동체 조직가이다. 그리고 낮잠사역단낮잠의 주교이다. 세상에 나와 처음 들어보는 사역단이며 소임이다. 동시에 세상에 나와 처음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왜 이런 신성하기 그지없는 교단이 이제야 생긴 거야? 인류에게 가장 절실한 소명이잖아! 낮잠 자기!!’

 

나는 쉬었기에 살아남았다.” 서문을 여는 허시의 문장이다. 너무도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서 가슴을 친다. 무슨 긴 말이 필요할까. 많은 이들이, 다음이 아닌 바로 지금 쉬지 못해 아프다, 몸과, 정신이. ‘다음이란 말처럼 무용하고 무력한, 슬픈 말이 있을까. “나는 쉬었기에 살아남았다쉬이 잊지 못할 말이다.

 

버티기와 견디기, 힘내기가 덕담과 자기주문이 된 사회는 병든 사회다. 저자 트리샤 허시는 이 책을 우리 조상들로부터 탈취해간 노동력과 꿈의 공간에 여전히 빚지고 있는 체제에 내 몸을 바치기를 거부한다는 선언이자 서약이다."p19라고 말한다. “급진적 회복을 위한 거부와 저항으로서의 휴식. ‘낮잠사역단의 교리를 베개로 베고, 삶을 탐색할 수 있는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가 봐야겠다. 허시의 해방의 자장가가 열린 창의 산들바람처럼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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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이야기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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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주변부는 우리에게 늘 불가사의한 무력함을 안겨주므로.”p47 는 단편 ‘녹색 아이들’의 마지막 문장이다. 화자인 폴란드 국왕 주치의는 우크라이나 서부에 볼히니아 숲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온 피부가 녹색인 두 명의 아이들을 만난다. 이 아이들의 존재와 이 아이들이 떠나온 미지의 세계는 그야말로 낯설고 기이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야기의 기묘한 허구성을 현실에 대한 의심으로 전도시킨다.

현실은 얼마나 불투명한가. 중심은 얼마나 허구적인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단편집 <기이한 이야기>를 통해 세계의 익숙함에 질문을 던지도록 집요하게 독자를 몰아간다. 현실의 허구성은 비현실적인 것을 통해 드러난다. 중심의 기만성은 주변주의 생생함을 통해 누설된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무지는 우리의 앎을 통해 밝혀진다.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카르추크의 국내 최초의 단편집 <기이한 이야기>는 놀랍도록 기이한, 놀랍도록 예민한 장소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 낯선 장소는 어쩌면 너무 익숙해서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세계(승객, 병조림, 실화, 솔기, 모든 성인의 산, 인간의 축일력)이거나 이미 당도했을지 모를 미래의 세계(방문, 모든 성인의 산, 인간의 축일력)이거나, 혹은 한때 우리 자신이었으나 잃어버린 세계 (심장, 트란스푸기움, 녹색 아이들, 모든 성인의 산)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세계들은 하나이다.

토카르추크가 그려내는 미지의 영역은 동시에 인간 의식의 무능 또는 소실 또한 드러낸다. 우리는 ‘자연(인류를 포함한)’이라 부는 것의 정체를 알지 못하며 (녹색 아이들, 심장), 우리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승객, 병조림, 솔기, 실화, 심장, 인간의 축일력), 우리는 다가오는 미래를 알지 못한다. (트란스푸기움, 모든 성인의 산). 따라서 우리는 조금 자중해야 한다.

‘승객’은 이 단편집의 승선 세리머니 선물 같은 작품이다. ‘녹색 아이들’로 고도가 높아지고, ‘병조림’과 ‘솔기’로 토카르추크 월드의 기류를 타기 시작한다. ‘방문’으로 고도가 한껏 높아지고, 뒤로 갈수록 이야기들은 더 깊은 음영의 낯선 상공 속을 여행한다.

공포, 상실, 죽음, 익숙함, 냉혹함과 취약함, 어리석음과 폭력성, 잔인함과 나약함, 구원의 가능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미래를 그리는 이야기들은 너무도 기이하고, 낯설어서 한번 읽으면 쉬이 잊히지 않을 선명한 이미지들을 마음에 새긴다. "언어나 말은 그 뒤에 이미지가 버티고 있어야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p82 ‘방문’ 속 화자의 말처럼 토카르추크의 단편들은 이미지로 각인된다. 작가가 ‘실화’에서 인용한 네덜란드 화가들인 멜키오르드 혼데쾨터와 헤리 멧 드 블레의 그림들처럼 이야기들은 “불길한 징조”와 “의미와 숨겨진 징후”들로 가득 차 있다.

번역자인 최성은 선생은 올가 토카르추크를 ‘단편 장인’라 평가한다. 과연 그렇다. 책을 읽다 덮고, 다른 일을 해야 할 때도 마지막 읽은 문장은 독자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문장에 갈고리라도 달린 것처럼. 불가사의한 이야기들은 불가사의한 공모로 서둘러 독자를 기어코 책 앞에 앉힌다.

“목걸이를 손에 집어 드는 순간, 녹슨 줄이 끊어지면서 빛바랜 구슬들이 바닥으로 와르르 떨어졌고, 그는 결국 꽤 많은 구슬을 찾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잠 못 드는 밤이면, 그 구슬들이 과연 어디에서 무념무상의 둥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먼지 덩이 속에 정착했으며, 바닥의 틈새 어디쯤 둥지를 틀었는지 종종 궁금한 마음이 들곤 했다.”p59

구슬들이 아직 목걸이였을 때를 기억하기에, 그 목걸이를 했던 사람과의 추억을 간직하기에, 남자는 흩어져 사라진 구슬들의 현재가 궁금하다. 올가 토카르추크야말로 기억하고, 간직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이기에 이런 이야기들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사라지고, 망각되고, 다가오는, 그리고 되풀이되는 세계에 대한 연민과 애도의 마음이 이 책 <기묘한 이야기>들 전편에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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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 -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
클레어 데더러 지음, 노지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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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 그리고 MONSTERS, 표지 위 제목들이 겹쳐진 채 어긋난다. 누군가를, 혹은 나 자신을 괴물이라 명명할 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지극한 혼란과 분열. 초점을 잃어 착시를 일으키는 이성과 감정, 숭배와 혐오의 불협화음. 이 흔들리는 초점을 정확히 맞춰줄 렌즈가 있을까.

 

작가 클레어 데더러는 <괴물들>을 통해 창작물과 범죄를 일으킨 창작자, 그리고 수용자의 애착과 반감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심연을 들여다본다. 오랜 역사로 축적된 예술과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사람이라면 이 애증의 트라이앵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을까. 인터넷이 가져다준 축복(?)으로 우리는 우리가 즐기는 창작물과 창작자를 분리할 수 없게 됐다. 데더러는 말한다. “창작자의 전기를 떨쳐 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우리는 전기 속에서 헤엄친다. 전기는 질릴 정도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p73

 

읽고, 보고, 듣고, 나는 매일 누군가가 창작한 것을 향유하고 감상한다. 그런데 그 누군가몬스터라면? 나는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반드시 혼자라도 그의 캐럴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가 아내와 아이들을 학대했다면?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나는 울었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창작물들을 즐기고, 그것들의 창작자들 중 생각보다 많은 이가 문제적 인물들이라서 창작자와 창작물, 그리고 수용자인 나 사이의 무수한 함수관계는 늘 나를 괴롭힌다. 한마디로 개운치가 않다. 이 괴로운 심연을 언젠가는 진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작가 클레어 데더러는 그 심연으로 첨벙 뛰어든다. 나는 그의 등에 올라타고 안전하고 깊숙하게 그 무수한 딜레마들의 한복판 안으로 들어간다. 처음 그와 이 여행에 동참했을 때 나는 이렇게 멀리까지, 이렇게 깊이까지 가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스스로 윤리적 사고를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은 도덕적 감정을 품고 있다” p43

 

작가는 창작물과 창작자에게 개인이 특정 방식으로 반응하는 정동의 결들을 아주 세심히 분석한다. 우리는 감정을 의견으로 치환한다. 분노와 관용의 기준은 생각보다 감정에 좌우된다. 뿐만 아니라 괴물을 향한 공개 비난은 화살의 방향을 돌리기 위한 방어일 수도 있다. “나는 괴물이 아니니까. 저기를 보라”p61, '괴물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는 복잡한 맥락이 숨어 있다.

 

"나에게 괴물의 의미는 특정 행동으로 인해 우리가 어떤 작품을 작품 자체로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람이다.”p65

 

괴물은 작품에 얼룩을 낸 사람이다. 작가는 이 얼룩은 무엇이고, 그것의 파급력은 어떤 것이며, 수용자가 그것을 제거할 수 있을지 파헤친다. 창작자와 작품뿐만이 아니라 개인사에 적용해 봐도, 작가가 분석해내는 얼룩은 인생의 문제이다. 절절히 공감하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얼룩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나 자신의 어떤 조각을 잃을 가능성도 높아진다.”p80

 

소비자는 창작자와 작품 밖에서도 그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소비자는 자기 정체성의 일부를 창작자에게서 가져온다. 데더러는 팬덤 문화를 개인의 정체성의 문제, 수치심과 연결해 분석한다. 그는 유사 사회관계의 측면에서 소비자의 감정은 더욱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고 분석한다. 점점 더 우려되는 현상이다.

 

자신의 관점이 파이 전체가 아니라 그 파이를 이루는 작은 조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p100

 

작가는 우리의 초점이 흔들리는 요인 중 하나로 비평비평가들을 지목한다. 공급자도 남성, 수요자도 남성, 비평가도 남성. 이 역학은 범죄를 은닉하고, 객관과 균형이라는 명목으로 범죄와 피해를 말하는 이들의 입을 막는다. 자신의 의견에 주관적 관점이 없다고 믿을 수 있는 그 권력을 데더러는 해체한다. 통쾌하다.

 

천재가 남성성과 결합할 때, 이 남성성이 계속해서 스스로를 복제하고 내세울 때, 누군가는 분명 제외되고 있다.” p135

 

누군가는 제외될 뿐만 아니라 삶이 제거된다. 데더러는 대표적인 마초 남성 예술가들의 삶을 통해 저 문장이 어떻게 현실에서 피해자들을 양산해냈는지 보인다. 영감, 충동, 자유는 천재들의 놀이동산의 만능 이용권이며, 이 이용권은 특히 여성들을 학대하는데 주로 쓰인다. 동시에 그 학대에 면죄부를 주어왔다.

 

과거라는 개념은 괴물이라는 단어와 같은 방식으로 기능한다. 우리를 인간의 나쁜 특질들과 분리해준다. - 중략 - 과거의 철없는 행동은 지나갔고 우리는 성숙해졌다.”p166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 여성혐오는 계몽되지 않은 과거의 관점이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이 논리는 과거 예술가들의 명백한 비윤리적 행적들을 무마하는 논리다. 하지만 그 과거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작가는 미래가 저절로나아지리라는 자유주의자들의 망상을 깨뜨린다. 데더러는 과거예술가들에게서 우리가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한 증거”p168를 찾기보다는 우리를 비춰줄 거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유색인 여성은 제도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할 뿐만이 아니라 동료 예술가에 의해서도 침묵 당한다는 이야기다.”p198

 

데버러의 시야는 남성 범죄자들이 모든 자원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일 때”p193 작품이 무시된 사람들이나 작품이 완성되지도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넓혀진다. 표면으로 보이는 것 이면에 여전히 강고한 차별들을 그는 직시한다. 괴물 예술 남성 창작자들에게 짓밟힌 여성 창작자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는 여전히 그 여성 창작자들을 남성 창작자의 이름과 함께, 그들의 그늘 안에서만 호명하는 현실을 만난다. 하물며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여성 창작자들은 어떨까. 작가는 말한다. “가끔은 창피하고 시끄럽고 멋있지 않은 방식으로 공격해야 할 때도 있다”p201

 

여성이 글을 쓰거나 예술을 창작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할 때 우리 여성들은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도 냉큼 그렇게 우리를 묘사한다.”p218

 

괴물 판독기는 사회의 편견을 그대로 반영해 이중적이다. 남성 예술가의 실제 행해진 범죄는 천재성의 인증으로 면죄부를 받는데, 여성 예술가들은 창작만으로도 스스로를 괴물로 여긴다. 데더러 자신의 고백과 이어지는 여성 작가들의 삶을 보면 예술가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이 이중적인 잣대가 너무 선명해서 기가 차다. 남성 예술가들은 삶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을 특정 종류의 불안과 두려움, 죄책감과 분열. 그리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원색적인 비난들. 그럼에도 여성 예술가들은 강철 같은 정신”p256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너무나 거대하고 소모적이라 그 힘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고 잊히고 당연시되는 힘에 맞서는 일상적 투쟁을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하면 무엇을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겠는가?”p274

 

작가는 남성의 지배로부터 행동으로 탈주하려 했던 여성 예술가들을 조명한다. 그들은 작품에서 남성들의 폭력을 적나라하게 고발할 뿐만 아니라 그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자신들을 던진다. 이 저항, 이 폭력을, 이 여성 괴물들을 대하는 사회의 이중 잣대 또한 섬뜩하다. “남성 예술가의 폭력은 그들의 위대함과 연결되어 있다. 그 폭력은 충동이다, 자유다. 여성 예술가의 폭력이나 자해는 감수성의 표시이거나 광기의 증거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 있는 창의적이고 도덕적인 힘의 증거로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p275

 

소략한 내용은 이 책의 지극히 일부분 일뿐이다. 안티 몬스터 챕터는 너무도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다. 독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인지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비평가란, 비평이란 바로 이런 존재이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예술을 향유하는 주체의 소비자 정체성 면에서 자본주의 내의 예술 소비의 윤리적 실천을 고민하는 술꾼들 챕터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질문들을 던진다.

 

예술 작품을 소비한다는 것은 두 사람의 인생이 만나는 일이다. 예술가의 인생이 예술의 소비를 방해할 수도 있고, 한 관객의 인생이 예술 감상의 경험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다.”p309

 

어떤 작곡가의 음악들은 내 삶의 메인 테마가 된다. 삶을 그 음악의 템포에 맞춰 살고, 사유하는 일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니 그 음악을 처음 만났던 순간은 충분히 사건이다. 처음에 말했듯이, 데더러는 문제적 창작자와 창작물 사이의 간극을 들여다보기 위해 심연으로 헤엄쳐 들어갔고 갈수록 그의 질문들은 더 풍요로워지고, 심오해진다. 데더러는 예술을 향유하는 그 사건의 본질에까지 직진해 들어간다.

 

데더러가 괴물들이 사는 바다를 헤엄치며 만드는 파문들은 실로 겹겹이고, 매우 드넓다. 이 책은 탁월한 예술 비평서이다. 주류 비평이 여전히 의도적으로 묵인하거나 혹은 무신경하게 간과하는 예술가와 창작물 사이에 제기되는 불편한 질문들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범죄를 저지른 창작자와 창작물, 향유자의 수용 행위를 둘러싼 이슈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쟁점들을 데더러는 이 책에 담는다. 하나의 질문이 이렇게 확장되는 것을 독서로 경험하는 것은 독자에게 분명 기쁜 일이다. 이 딜레마를 막연하게 인식하고 이 책을 펼친 나는 저자가 축적해가는 질문들과 그가 밀어 붙이는 인식의 깊이에 계속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심각하고 딱딱할 것이라 짐작한다면 오산이다. 이 책은 너무 재미있다. 페이지를 읽으며, 다음 페이지를 기대하게 책이다. 작가는 매우 명석하고, 재치가 넘치고, 사려 깊다. 작가 클레어 데더러는 자신의 식견과 경험과 사유를 이 책에 꽉 찬 밀도로 펼쳐 놓는다. 정말 이 작가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아껴 두지 않고, 이 책에 이 이슈에 관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구나 하는 생각을 읽는 내내 했다. ( “고마워요, 데더러.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아껴놓지 않아서요.” p253 문장의 변주.) 독자에게 이런 포만감을 안기는 책은 그 자체로 귀하다.

 

내 연인이 이 책에 괴물로 등장한다고 이 책을 읽기 전 고백했다. 내 사랑의 현재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흐릿한 뉘앙스로. 나는 이 책을 수일 전에 다 읽었지만, 그가 나오는 챕터를 남겨두었다. 그 부분만 읽지 말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그러다 오늘 오후에 읽었다. 다행이 (데더러, 고마워요. 나는 또 운다) 그에 관한 페이지는 두 페이지였고, 데더러의 신랄함이 그 페이지에서만 조금은 약했다. (데더러, 혹시 당신도..? 어쨌든 다시 고마워요.)

 

그래서 그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 사랑은? 여전하다. 뿐만 아니라 내 사랑은 가을 하늘처럼 더 환해지고, 껑충 더 높아졌다. 왜냐하면 이 책으로 사랑하는 이가 또 한 사람 생겼기 때문이다. 누구냐고? 바로 클레어 데더러다. 이렇게 영리하고, 강단 있고, 솔직하고, 유머 감각 뛰어난 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인이 질투하지 않겠냐고? 그는 어느 책에선가 순수한 사랑, 단순한 사랑, 온전한 사랑. 시작부터 사심이 없는 사랑에 대해 말했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도 데더러를 사랑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렇게 더 풍요로워졌다.


<이 서평은 출판사의 도서 제공으로 쓰였으나 지극히 개인적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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