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 - 저항의 문장가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의 정수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작가를 이해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글이 있다. 슬며시 그 작가의 마음 안으로 끌어당겨 주는 글. 그가 세계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망과 온기, 깊이와 조도, 그 바탕을 가늠하게 해주는 글. 윌리엄 해즐릿의 에세이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대하여> 속 에세이들이 그렇다. 특히 후반부에 나란히 실린 두 에세이를 통해 나는 해즐릿의 글을, 이 작가를, 이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그 사람 해즐릿.

국내에 먼저 소개된 해즐릿의 두 권의 에세이집을 차례로 읽고 작가의 혜안과 필력에 놀라움을 느꼈다. 찌르는 듯한 통찰, 세공한 듯한 표현. 본질을 파고드는 타협 없는 사고와 더 없이 세밀하고 정밀한 문장은 후련함을 주었다. 앞선 에세이집들과 비교해 이번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대하여>는 인간과 인생에 대한 해즐릿의 좀 더 내밀한 사유를 엿 볼 수 있어서 각별하다.

청춘을 묘사하는 해즐릿의 문장은 옳다. “청춘은 영원의 예감 속에 살며, 이 예감이야말로 그들을 살아 있게 하는 불꽃이기 때문이다.” 영원의 예감,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가. 청춘, 푸른 봄은 가을과 겨울을 모른다. 아니, 몰라야한다. “청춘은 삶이라는 잔을 갈증 난 듯이 들이키지만 그 잔은 바닥나지 않는다. 기쁨과 희망이 늘 넘쳐흐르고 세상의 온갖 사물을 향한 욕망이 청춘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 아, 찬란하다. 결핍과 낙담에 침잠해 있어도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열정의 창은 늘 열려 있던 시절, 고통조차도 흘러넘치던 시간. 과연 그렇지 않은가.

해즐릿은 청춘의 환희를 이렇게도 표현한다. “시간과 자연이 우리 발아래 모든 보물을 쏟아 붓는 듯한 감각 속에서 우리는 존재하고 행동하며 세상을 향해 문을 연다.” 불행 중에도 온 몸을 순환하는 혈관에 청신하고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감각, 작가는 그 미묘한 느낌을 놓치지 않는다. 해즐릿의 이 싱그러운 청춘 예찬이 뒤이어 몰려올 삭풍의 엄혹함을 대비시킬 청춘 만가(輓歌)임을 예상하면서도 나는 그의 문장에 노곤히 빠져든다. 간지럽고 달짝지근하고, 호방한 기운에 잠시 부푼다. 향긋한 봄바람이 스친다.

만년(晩年)을 묘사하는 해즐릿의 문장은 옳다. “인생의 축제 행렬이 거의 다 지나갔을 때, 가면극이 우리를 배신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과 시간의 기만을 간파하고 그 행렬에 끝이 있음을 믿게 된다.” 작가는 프랑스 혁명이 미완으로 저물었을 때 더 이상 젊다고 느낄 수 없었다고 적었다. 청춘의 끝은 나이 듦과 신체의 노화와 늘 같이 가지는 않는다. 청춘의 피날레는 마음에서 먼저 울려 퍼진다. 나의 프랑스 혁명은 언제였나. 나는 언제 더 이상 스스로 젊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그 자각은 불현 듯 찾아온다. 그리고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자각은 나쁘지 않고, 그 자각과 함께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삭풍은 정신을 맑게 한다.

“모든 것이 겉은 아름답지만 속은 탐욕과 부패로 가득한 회칠한 무덤이다” 세계에 대한 충만한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해체된 무대 위의 황량함과 가면이 벗겨진 얼굴의 옹색함을 직시하는 서늘한 감각이다. 인간과 삶의 실상에 대한 앎은 청춘을 내어준 대가다. 환영이 사라진 자리에 작은 진실의 조각들이 먼지처럼 엉켜 뒹군다. 심상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진실의 보풀들을 알아보고, 겸허하게 품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축복이 아닐까. 해즐릿이 말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항상 타오를 “존재의 흔적”은 소박하지만 숭고한 이 지혜가 아닐까 싶다.

“품위 있게 삶을 마무리 할 수 있다면, 큰 병을 치르지 않고 마음마저 고요하고 단정한 정물화처럼 정돈된 상태에서 무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내가 원하는 전부를 해즐릿은 이렇게 “단정한 정물화”처럼 써놓았다. 하지만 그런 정물화는 현실에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해즐릿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문장이 더 쓸쓸하게, 진실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결국 사소한 상황에 휘둘리는 존대다. (중략) 우리는 사소하고 성가신 현실의 희생양이 된다. 인간의 정신은 숭고하게 부풀 수 있지만, 동시에 비굴과 혐오와 편협함에 익숙하다.” 이래서 해즐릿이 좋다. 그는 인간과 인생에 환상을 품지 않는다. 냉정하다. 우리는 나날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찢겨 나가고, 죽음은 남은 마지막 조각을 무덤으로 데려갈 뿐이라고 해즐릿은 쓴다. 그럼에도 “우리의 욕망과 기대는” 언제나 과도하다고 작가는 꼬집는다. 그래서 비굴해지고 편협해진다는 것이다. 삶의 진상이 여실해진 후에도 여전한 욕망은 얼마나 처치 곤란인가.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대하여” 제목부터 노화를 금기시하고 죽음을 외면하는 현재의 문화를 향해 날리는 날 선 냉소와 같다. 죽는 그 순간까지 청춘이기를 강요하는 자본과 미디어의 확성기들, 그 강요를 기꺼이 경쟁하며 수행하는 개인들이 만든,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을 기대하는 거대한 방부제 덩어리로 변해가는 세계를 떠받드는 망상. 그 망념의 뿌리가 바로 이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이 아닌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이 금언을 새긴다면, 삶의 많은 것들이 단출해질 것이다. 결핍감과 자기기만, 광대짓과 헛발질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해즐릿의 표현대로 언젠가 “존재가 비존재로 전환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은 내가 채웠던 수많은 족쇄를 여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영생에 대한 착오와 착각이 일으킨 무수한 사고와 수행의 오작동들이 우선 진정되기 시작할 것이다.

“사람들이 낙엽처럼 떨어지고 시간의 낫에 풀처럼 베어 나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청춘을 되돌리는 방편일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감한다.” 삶의 유한성을 절감할 때야말로 시간의 농도는 짙어지고, 순간이 밀도 높게 경험되지 않던가.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녹여내 “단 하나의 강렬한 공감의 순간으로 응축”시키는 마법의 시간장. 그 안으로 진입하는 만년의 입춘.

이렇게 두 번째 청춘은 이전과는 다르다. 이 청춘은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이제는 안다. “이 삶이 언젠가 끝날 수 있다”는 진실을 안다. “존재의 허무”를 수신한 후의 청춘이다. 이 청춘은 처음처럼 다시 삶을 경험한다. 하지만 더욱 강렬하게 체감한다. “삶은 참으로 기묘한 선물이며, 그에 따르는 특권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이 새로운 봄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그 모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즐릿은 이 에세이로 말을 건다.

해즐릿은 무상함이 안겨주는 찬란함을 독자에게 일깨우고 이른 낙엽처럼 표표히 떨어져 세상을 떠났다. 갈바람에 가벼이 나부끼며 비상하는 고엽들. 그 사이로 설핏 비치는 삶의 기묘함과 신비함. 그걸 보았냐고, 이 가을 해즐릿이 묻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기와 천재 - 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다. 주로 때늦은 각성이다. 자주 얼굴이 붉어진다. 그때 왜? 돌연한 의문과 이전과는 전혀 다른 해석. 뎅뎅뎅, 공중에서 떨어진 쟁반에 얻어맞은 듯 머리가 울린다. 나이가 드는 건 밖으로 향했던 호기심이 안으로 방향을 바꾸는 건가 싶다.


모든 것을 빨아 들였던 감정의 소용돌이. 몹시도 차갑거나 너무 뜨거워 무언가를 상하게 했던 격렬함. 한시도 그치지 않는 감정의 너울. 용솟음쳤다 곤두박질치는 정동의 파도. 잔잔하게 하지만 단단하게 무언가에 사로잡힘. 한참을 지나서야 그 들뜸이 보인다. 그건 광기였을까.


고명섭 작가의 <광기와 천재>. 천재가 아니라서 천재에 늘 관심이 많고 내 안의 미친 것을 달래느라 늘 에너지를 소진하는 나는 이 책을 가장 좋아하는 가을, 겨울을 위해 아껴두었다. 천재는 너무 멀고 광기는 비교적 가깝다. 그래서 이끌린다. 광기와 천재, 이 둘이 하나의 인간성 안에 전류를 일으키는 양극임을 확인하며 책을 읽는다. 천재는 아득하고 광기는 아찔하다. 숨죽이고 책 속 문제적 인간들에 빠져든다.


‘광기’의 사전적 의미는 미친 듯한 기미이다. ‘미치다’의 사전적 정의는 정신에 이상이 생겨 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이다. 그러니 광기는 보통의 선을 넘어 미침 바로 앞에 선 기미들의 총합이다. 문제는 ‘미치다’인데 그 사전적 정의들에는 ‘보통’과 ‘상식’이란 단어가 중요한 지표로 등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보통과 상식의 의미가 시대와 장소의 소산이라는 것과 따라서 광기의 구성물 또한 시대와 장소의 성분에 따라 달라진다.


광기는 인간성의 스펙트럼 안에 자리한다. 동물로 태어나 사회적 존재로 순치되는 존재. 언어라는 불완전한 도구로 세계를 짓고, 주어진 가치 체계를 따라야 ‘정상’으로 등급 매겨지는 인간. 광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살아가는 게 대단한 것 아닌가. 폭주가 인간성의 한 요소라면 그것을 멈출 수 없는 광기 또한 애써 들여다 봐야할 인간성의 단면이다. 그것이 사유의 폭주라면 더욱 흥미롭다.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 기존의 사유 체계 자체를 의심하여 사유 구조의 살을 발라내고, 그 앙상한 뼈대를 드러내, 그 뼈의 성분마저 분석해내는 치열하고 정밀한 사유의 광기. 이 책은 루소와 푸코, 비트겐슈타인과 카프카가 역사와 사상, 사회 구조 그리고 언어라는 가장 완고하고 친숙한 집을 사유의 도끼로 깨부수는 사유의 도정을 정밀하게 보여준다. 푸코가 그 시대의 정상과 상식의 법전에 굴복했다면? 비트겐슈타인이 동시대 형이상학과 논리학의 한계에 안주했다면? 우리는 어둠이 어둠인줄 모르고, 빛을 등지고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무지에 대한 앎은 앎의 근본이다. 이 광기의 사상가들은 그 앎을 선사한다. 통념의 허구성을 들추어 그 통념을 떠받드는 무지를 밝혀내는 극한의 사유. 어떤 광기는 담론과 정치, 역사의 진보를 견인한다.


천재의 사전적 정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남보다 훨씬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이 책의 천재들은 경이로움과 호기심의 세계로 안내한다. 책을 읽다보면 이 타고난 재주와 재능이 특정 분야에서 완벽함에 도달하는 지능적, 기술적 능력에 제한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세계의 틈을 인식하는 예민함,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비타협성, 목표를 향한 집요한 의지, 집중력과 인내력, 투철함과 철두철미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바위 같은 정신력. 이 정신의 힘이야말로 천재를 천재이게 하는 본질임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이 재능들은 ‘미침’으로 해석되고, 오해되고, 처벌받기도 한다. 유무형의 다양한 낙인과 처벌은 천재를 내외부에서 고사시키기도 한다.


이 책은 천재성을 지닌 인간이 어떻게 사유와 실천을 그 한계 너머까지 밀어붙여 그 시대가 공유한 무지하고 편협한,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보통’과 ‘상식’의 장막을 걷어버리고, 세계의 진보를 앞당기는지 철학사, 사상사,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상가와 철학자, 작가를 통해 잘 보여준다. 그리고 동시에 천재성을 지닌 같은 인간종이 그 재능을 극한까지 발휘해서 어떻게 세계를 암흑에 잠기게 하는지도 또한 잘 보여준다.


푸셰, 네차예프, 히틀러. 이 이름들을 목차에서 보고 피로감이 들었다. (피로감은 내 모든 회피와 방관을 합리화하는 요즘 나의 만능봉이다.) 지금도 이미 국내외 파괴의 천재들이 타전하는 매일 매일의 뉴스들로 충분히 피로해, 악의 천재성에 대해 이미 알만큼 알아, 그런데 굳이?’ 하는 마음의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의문.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를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다고? 히틀러가 천재라고? (그는 그냥 미친X이고. 할 수만 있다면 핀셋으로 집어내 변기에 던져 버린 후 물을 내리고 싶은 인물이라고.)


하지만 조제프 푸셰편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런 의문과 반감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루소에서 시작한 사상사의 천재들이 충만하게 채워준 호기심과 경이로움은 그 반대편에 선 문제적 인물들, 푸셰, 네차예프, 히틀러에 이르러 전혀 다른 성질로 바뀌어 나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들은 미친X으로 치부해 무시해야 할 인물들이 아니었다. 이런 게으른 단정과 속편한 무시야말로 무지의 한 형태였음을 이 장들을 읽으며 알게 됐다.


이들은 망각해서는 안 되는,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분석되고 알려져야 할 인물들이었다. 저자가 분석하는 이 인물들의 내면 풍경을 통해 확인한 건 악에 대한 나의 총체적 순진함. 천재성은 진선미에서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짓, 악함, 추함의 영역에서도 극한의 천재성이 만개할 수 있다. 천재의 정신적 재능이 그 맹렬함을 유지한 채 악을 실현하는데 집중된다. 그것은 소름 끼치는 일이지만, 역사에서 일어났고,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푸셰, 네차예프, 히틀러를 내달리며 읽는다. 앞의 천재들 편에서, 그들의 사유 전개 과정에서 들어나는 통찰의 깊이에 숨을 고를 순간이 필요했다면, 이 악령의 화신 같은 인물들 편에서는 그들의 악행에 비례해 세계에 뿌려진 재앙에 압도되어 그 전말이 궁금해 문장들 사이로 가속이 붙는다. “리옹의 도살자” 푸셰, “20세기 독재자들의 진정한 선구자” 네차예프, “비현실적인 파괴 열망”의 화신 히틀러. 우리가 목격하는 기괴한 정치(?) 현상들의 원본들.


극단으로 치닫는 국내외 정치인들의 거울상들이 거기 있었다. 악에 관한 그들의 신념과 교설은 오늘날 그 후계자들에게는 교본이 되었다. 이 폭력의 광기는 민족주의, 인종주의, 극단주의, 파시즘이 세를 넓혀가는 오늘을 이해하는 단서들이다. 그들은 오래된 현재이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로 고개를 돌려야 하는 이유를 이 책은 잘 보여준다.


진보의 천재성과 퇴행의 천재성을 나란히 병치해 분석함으로써 저자는 인간성에 대한 안목을 확장시킨다. 천재성의 폭발과 그 배경이 되는 정치사회적 조건을 촘촘하게 교직함으로써 천재가 가진 이상과 망상이 역사를 어떻게 진보시키는지, 혹은 야만으로 되돌리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이 또한 얼마나 모순적인 인간인지 작가는 잘 드러낸다. 흥미롭고 흥미롭다. 저자는 천재성이 발아해 성장하고 만개하는 과정을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놓는다.


변신을 거듭하며 단편적인 평가를 따돌리는 천재, 광기를 자가 갱신하는 광기, 인간의 조건을 재설정하는 천재, 논리의 극한으로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세계를 발견한 천재, 자기를 태워 사유의 불을 밝힌 광기, 인식의 사각지대에 환하게 조명을 비춘 천재. 비극으로 여전히 자기 복제 중인 광기, 자기모순의 함정에 빠지는 천재, “인간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게 하는 광기. 역사와 사상사에 대한 밀도 높은 식견과 사물의 본질을 투시하는 통찰. 이 고성능 확대경으로 저자는 인간성의 만화경을 세밀하게 독자 앞에 펼쳐놓는다.


광기와 천재, 천재와 광기. 광기의 화력으로 발화되는 천재, 천재를 전소시키는 광기. 이 책 속의 인간들은 하나같이 델 것처럼 뜨겁다. 실제로 그들은 그들 이전의, 유무형의 세상을 태워버렸다. 그들이 재로 만든 세계에서 무엇이 새로이 움텄는지가 다를 뿐이다. 루소 이후의, 푸코 이후의,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카프카 이후의, 히틀러 이후의 세계는 그 이전과 다르다. 덕분에, 혹은 때문에 우리는 어제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바깥 세계와의 싸움은 곧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모든 투쟁은 자기 투쟁이다.” (16면)


가을이 와서 물드는 건 산과 들만이 아니다. 대기와 습도 변화는 사람의 마음도 물들인다.(물론 핑계다.) 환경과 호르몬 사이의 화학 작용에 무참히 얼룩덜룩 얼룩질 것인가.(망상이다.) 나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이건 진지하다.) 망상과 감상,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자의적이고 터무니없는 해석과 결론. 너 자신을 알라. 금언이다. 그렇다. 언제나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은 우선 나 자신이다. 나의 명암을 비추는 거울로 양서만한 것이 없다. 인간성의 미세한 부분까지 포착해 정확한 언어로 표현해내는 책은 내 시야의 사각지대를 여실히 드러내준다. 이 책 <광기와 천재>가 그렇다.


“자기 배려란 자기를 어르고 달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진실과 대면케 하고 그 진실을 통해 자기를 바르게 형성하는 것이다.” (109면)


“세상 모든 이의 인생이 각각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될 수 없을까? 왜 램프나 주택과 같은 것들은 예술의 대상이 되는데 사람의 인생은 예술 작품이 될 수 없단 말인가?” (109면, 푸코, 저자 인용)


저자는 말한다. 자기가 대면한 진실을 통해 자기를 ‘바르게’ 형성하는 그 과정이 미적 형식을 얻을 때, 우리 각자의 삶이 푸코가 말한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이 책은 역사의 진실, 인간성의 진실에 가닿기 위한 무수한 배를 사유의 바다에 출항시킨다. 그 배는 “광기의 심연을 거쳐 저항과 투쟁의 강을 지나”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앎, 개인 자신에 대한 앎이라는 열린 바다로 향한다. 그 바다는 역사라는 파도로 출렁인다. 책은 개인이 그 격류에 얼마나 속수무책으로 휩쓸릴 수 있는지, 동시에 강한 정신력은 어떻게 그 격랑에도 난파되지 않고 목적지로 향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인간의 삶이라는 거대한 조류를 조망하고 저 멀리 반짝이는 등대(푸코 등대, 비트겐슈타인 등대 등등), 피해 가야할 암초를 가리킨다. 자유라는 저 먼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는 서핑인의 기본기를 돌아보게 한다. “자유의 획득이란 달리 말하면, 세계의 극복임과 동시에 세계와의 화해이며, 자기 자신의 극복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과의 화해이다.” 여러 의미에서 마음 밭을 다져준다. “견딤이야말로 여기서는 저항의 형식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기에 더 없이 좋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기와 천재 - 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


<광기와 천재>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천재들이 호흡했던 역사의 현장으로 독자를 데려간다는 것이다. 18세기에서 20세기까지 유럽사의 격변의 장소. 그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는 듯하다. 저자가 묘사하는 한 시대의 모순과 질적인 변화가 너무 흥미진진해서 역사 자체에 다시 호기심을 갖게 됐다. 인물을 읽다보니, 시대가 읽혔다. 머릿속에 전구불이 번쩍하고 들어오는 순간들.


모순덩어리 루소의 사유의 궤적을 통해 본 18세기의 사상의 변천사,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밝혀낸 푸코가 늘 현장을 지켰던 20세기 중반의 정치적 소용돌이,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천재의 요람으로 방문해보는 세기 변환기의 빈, 그가 참여한 양차 세계대전, 나쓰메 소세키의 변화와 식민지 남성성으로 돌아본 근대 일본, 그리고 기시감에 빠져드는 푸셰의 프랑스 혁명, 네차예프의 러시아 제국, 그리고 히틀러와 2차 세계대전, 그 광기의 역사.


국민의회, 국민공회, 총재정부, 통령정부... 나폴레옹 황제 즉위. 중학교 시절, 시험을 위해 암기했던 프랑스 혁명. 현재와 단절된 박제된 역사였다. 저자가 기록하는 희대의 기회주의자 푸셰의 일대기로 프랑스 혁명을 되돌아보니 정말 너무 흥미로웠다. 프랑스 혁명을 다룬 많은 책과 영화로도 이해가 어려웠던 것이 이 장을 읽으며 드디어 흐름이 보였다.


문제적 인간의 탄생, 그들이 사유와 실천을 확장해가는 과정. 이 모든 극적 변화를 역사적 조건과의 상관관계로 밀도 높게 설명하는 저자의 묘사와 분석이 놀랍도록 정치하다. 그 문장 또한 깊이가 남달라 각각의 장이 매우 공들여 잘 만든 영화 한 편씩을 감상하는 것 같았다. 문장을 읽는 동시에 머릿속에 영사기가 돌아가며 손에 잡힐 듯 맥동하는 시대와 인물의 일대기가 전해진다.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조감할 수 있는 시대와 인물이 나누는 서사시가 철학적 울림과 여운을 남긴다. (호기심에 이 문제적 인물들과 그 시대를 다룬 영화들을 다시 찾아보기도 했다)


“그는 간청하지 않고 명령하고 선포하고 자극하고 억센 손아귀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의 말들은 대중의 은밀한 소망, 곧 복수욕, 증오심, 원한 감정에 아부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마치 신탁을 말하는 자의 당당한 권위로 대중의 비위를 맞추었다. 대중이 듣고자 하는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 )의 연설장은 빈곤과 궁핍과 좌절의 시대에 휩쓸린 대중의 자기 확인, 자기 탐닉의 현장이었다.” 336면


- ( )안에 들어갈 그는 누구일까. 북아메리카의 그, 광화문 광장 연단 위에 섰던 무수한 그들. 이스라엘의 그. 구치소에 있는 그들. 러시아의 그, 00인 3대 쇼핑 방지법을 당론으로 추진한다는 그들, 대선토론에서 여성혐오로 판세를 뒤집으려 했던 그... 그리고 무수한 그들. 이 모든 그들이 ( )안에 들어가려 경쟁하는 듯하다.

“의회주의적 방법을 거부하고 급진적, 혁명적 전망을 제시했다. 대중의 힘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정권을 타도하고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336면


-의회를 해산시키고, 대중을 선동해 그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려 했던 그는 누구일까?


“( ) 주변에서 ‘지도자 숭배’가 시작됐다. .... 중략 .... ( )를 구세주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337면


- 손에 왕자를 쓰고 대선 토론회에 나오고,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이란 생일 노래를 들었던 그는 누구인가?


“탁월한 선동가는 다시 한 번 법정을 자신의 선전장으로 바꾸었다. 내란 수괴로 법정에 선 ( )는 자신에게 부과된 모든 죄목을 스스로 떠맡아 그것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의로운 거사로 바꾸어냈다.” 342

- 이 내란 수괴는 우리가 아는 그 내란 수괴인가?


“( )는 내란죄로 (중략)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중략)로 이송됐다. ( )는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거대한 회의실에서 추종자들을 놓고 강연했고, 하루 여섯 시간씩 방문객을 맞았다. (중략)은 사실 ( )당 중앙당사나 다름없었다.” 342



- 구치소에서 특별 혜택을 누리며 추종자들을 선동하는 그는 누구인가?

“그는 대중을 설득하려면 하나의 적만을 제시하라고 말한다.” 344면


- 앞뒤로 이어지지만 다음 독자를 위해 멈춘다. ( )에 들어갈 인물은? 당장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하지만 히틀러다. 하지만 저 문장들의 주어 자리에 다른 이름이 어른거린다. 히틀러가 선전과 선동으로 대중을 장악하고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해가는 과정은 최근 몇 년간 우리가 겪은 일들과 너무도 유사해, 읽는 내내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이 불안이 매우 구체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라 더 두려웠다. (오늘 뉴스를 보자. 여전히 그들은 태연하게 역사를 노골적으로 왜곡하고, 혐오로 대중을 선동하고, 원색적인 선전으로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


이 책에서 자세히 분석하고 있듯이 히틀러의 폭력은 대중의 결핍과 소외에 뿌리내린 박탈감과 원한을 동력으로 삼았다. 대중의 증오와 분노를 해소시킬 분출구를 그는 혐오에서 찾았다. “청중의 흥분과 전율과 열광은 그에게로 다시 돌아와 더 사나운 고발의 폭포수가 되었다.” 약자에 대한 혐오로 화력을 얻고, 다시 약자에게 그 화력을 분사하는 정치적 전략은 불행하게도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 됐다.

저자는 히틀러주의의 교과서인 <나의 투쟁>의 집필 배경, 과정, 그 내용 또한 자세히 다룬다. 저자의 분석을 통해 <나의 투쟁>을 살펴보면 히틀러는 매우 철저하고 치밀한 광기의 소유자였다. 폭력적 광기가 인간성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강한 의지와 실행력을 만나면 세계에 어떤 재앙을 가져오는지 히틀러는 예증한다. 그런데 그 히틀러, 그 <나의 투쟁>의 망령이 지금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지 않은가.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재판 중인 000 전국방장관이 즐겨 읽은 책이 <나의 투쟁>이라는 건 12.3 내란과 그 전후의 시국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내란 혐의로 재판 중인 전직 대통령의 그간 행적에서 드러나는 세계관과 전국방장관의 <나의 투쟁>은 우리가 호흡하는 시대에 어떤 광기가 깊게 침윤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히틀러 장은 마치 예언서를 읽는 듯했다. 히틀러와 나치당이 치밀한 선전 전략으로 대중을 선동해 성장하고 의회 민주주의를 파괴해 독재를 완성해가는 과정은 우리가 최근 몇 년 동안 목격한 정치의 흐름과 너무나 유사하다.


1923년 내란죄로 수감된 히틀러는 1924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출감했다. (“당은 거의 종교적 공동체로 변신했다”) 나치당 재창설 대회를 연 그는 나치당을 제국의회에 입성시키고, 1933년에는 총리가 되고, 1934년 1인 지배 총통국가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 뒤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참으로 위대한 민중 지도자의 기술이란 민중의 관심을 분열시키지 않고 언제나 어떤 유일한 적에게 집중시키는 데 있다. 민중의 투쟁 의지의 이용이 집중적이면 집중적일수록 운동의 흡입력은 점점 커지고 타격의 강도도 더해지는 것이다.” (344면 히틀러, 저자 인용)


비극의 과거를 과거로만 읽을 수 있는 독자는 복되다. 폭력의 광기가 무덤 속에 있기를 거부하고 대기 속을 떠돌며 후대의 정신에 뿌리 내리고, 개화하는 것을 볼 때 어떻게 전율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은 우리가 편하게 웃고 즐길 수 있는 희화화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감정적이고, 제멋대로인 멍청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확실한 신념 아래 치밀한 전략과 결집력을 갖췄다. 내란 세력의 강고한 심층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역사의 반복이 우리 세대에게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기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이 책은 확인시켜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기와 천재 - 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


“자신의 한계상황까지 밀어붙이고 그럼으로써 삶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 보였던 인간이 이 글이 추적하는 인간이다.” 18 면.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에서 방점이 찍히는 것은 천재와 광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집중한 것은 인간 자체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저자가 이 책 전반에 걸쳐 던지는 질문이다. 이 물음에 대답을 찾는 과정의 실마리가 바로 인간성의 두 요소. 무한한 인간성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이는 천재와 광기이다. 인간이라는 미궁을 탐색해 들어가는데 끝없이 이어지는 실타래가 광기와 천재이다.

인간의 불행에 관한 외면 없는 대면, 그 불행한 조건을 벗어나고자 하는 극한 모험으로의 투신, 한계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숭고함, 인간의 취약함, 종래에는 드러나고야 마는 인간과 삶의 모순, 모순, 모순.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불쑥불쑥 찾아와 인간의 의지를 무색하게 하는 운명의 가차 없음.

천재도 광기도 역사의 자장 안에서, 운명의 소용돌이 안에서 명멸하며 휘몰아치다 사라진다. 책을 읽으며 경이로움과 진저리를 오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으로 사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변형되고 증폭된다. 책을 덮을 때쯤이면 하나의 질문이 오롯이 떠오른다. 그러니 어떻게 살 것인가. 미궁에서 돌아온 자가 가져온 질문이다. 내 안의 미궁으로 초대될 때마다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월딩 : 아마존에서 배우는 세계 허물기 이동시 총서 2
김한민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월딩>은 거울 같은 책이다. 작가가 들려주는 아마존과 원주민 이야기는 동시대를 사는 비원주민의 삶을 역으로 비춰준다. 자본주의가 먹이고 입히고 놀아주며 사회화된 나는 자본주의의 일부이다. 아무리 그 밖을 상상하려 해도, 그 얽힘이 너무 강해 나는 시작부터 주춤한다. 자본주의를 생각함은 내 연루됨을, 내 회피와 방관, 타협과 합리화를 직시하는 것이기에 나는 멈칫한다.


아마존의 어제와 오늘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한 강력한 힘으로 추동되는 정치경제문화의 자장 안에서 안락하게 살아가는 북반구 선진국의 내가 그들의 삶에 대한 글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김한민 작가가 책에서 우려했듯이 나 또한 타자화로 미끄러지는 건 아닐까? 그들에게서 나 역시 무언가를 ‘추출’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 읽는 내내 자기 검열은 어쩔 수 없었다. 타자의 삶, 그것도 진행 중인 착취의 한 가운데에 있는 공동체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와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 부분에 대한 작가의 고민과 생각을 여러 부분에서 읽을 수 있어서 독자로서 안심되고, 배운 것이 많다.


비명 속에 살아가기. 나는 무수한 비명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이명처럼 지니고 산다. 투입과 배출 모두 과잉으로 연명되는 과잉의 체계. 과잉을 유지하기 위해 갈려나가는 존재들의 비명. 김한민 작가는 이러한 현상태를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이미 죽어가는 세계에 대한 무의미한 ‘연명 치료’만 영속화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은 더 많은 것을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종말을 늦추는 방법만 알 뿐이다.” 얼마나 정확한 진단인가. “지구의 모든 자양분을 빨아들여 임종을 연장하면서 새로운 싹이 트지 못하게 가로막고 버티는”낡고 비대해져 죽어가는 괴물이 된 시스템.


어떻게 자본주의로부터 지구를 지켜내고 새로운 세계의 싹을 틔울 수 있을까? 작가는 “언월딩”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언월딩이 제대로 이뤄진 후에 비로소 다른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의미다. 언월딩은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를 괄호 안에 넣어, 낯설게 바라보고, 질문하고,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다. 작가에 의하면 언월딩의 출발은 본질주의적 세계관을 의심하고, 지금까지 “행해진” 것들의 배경을 인식하고, “다르게 행해질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소비와 생산의 무한 반복으로 유지되는 단일 세계의 굴레에서 내려와 그 세계의 폭력성을 인지하는 것이다.


나는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까? 내 생존과 생활 방식이 깊게 연루된 그 체계의 균열과 무너짐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 세계와 불화하며 자기기만과 모순 속에 이런 질문을 하는 이가 나뿐일까. 작가는 언월딩을 먼저 경험한 이들, 세계의 허물어짐을 몸소 경험한 사람들, “세계는 단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아마존 원주민 카리푸나족이다. 이 책은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경험하고, 발견한 것들을 담고 있다.


김한민 작가는 현재 리스본 고등사회과학연구원(ISCTE) 박사 과정에서 인류학을 공부 중이다. 이 책은 학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작성한 에세이들을 기반으로 쓰여졌다. 그런 만큼 책은 인류학 연구자의 시선으로 작가가 가진 문제의식을 벼려낸다. 작가가 자본주의 세계 속에서 전투중인 아마존 원주민의 복잡한 삶의 맥락을 드러낼수록 자본주의의 폭력성과 취약성, 그 존재의 상대성(자본주의 또한 하나의 패러다임일 뿐이다.) 또한 드러난다.


자본주의라는 단일세계 속에 사는 우리는 하나의 이야기에 따라 살아가기를 교육받고 권장 받는다. 이윤 추구와 경쟁이라는 자본주의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사회적 생산자로서 역할을 근면하게 완수하고, 부를 축적한다. 그리고 소비하고, 소비하고, 소비하는, 더 많이 축적하고 소비하는 것이 ‘성공한’, ‘좋은’ 삶이라 평가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세계 80억 인구가 하나의 이야기를 담은 하나의 노래만 부른다면 얼마나 기괴한 일인가. 그런데 세계는 이미 하나의 멜로디에 맞춰 집단적인 군무를 추고 있지 않은가. 작가는 아마존의 이야기는 숲에서 만들어지는 동시에 그 이야기 자체가 숲이라고 말한다. 밀림의 기호를 해석해 가며 “존재하지 않는 길”을 만들어가기. 밀림 속에 새로이 만든 길은 새로운 이야기, 다른 삶의 가능성이다. 단일 세계를 풍요로운 이야기의 숲으로 변화시키려면 “우리의 수용기를 다공적으로 만드는 것이 비결”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숫자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리의 수용기에 무수하게 열린 창을 만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일이 될까.


책은 아마존 원주민과 숲의 현실을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카리푸나족 땅에서 자행되는 삼림 파괴는 비유로써가 아니라 전쟁 그 자체이다. 그 전쟁은 아주 오래 시간을 걸쳐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국제 사회에 만연한 묵인과 방관, 침묵 때문에 주목받지 못할 뿐이다. 저자의 말대로 누군가의 시작이 그들에게 지속적인 종말을 의미해왔다.


카리푸나족은 대대로 이어온 세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목격하며 종말 전문가가 되어 싸우고 있다. 이 부분을 설명하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또 그것을 저 한 문장으로 옮기며 나는 머뭇거린다. 계속 맴도는 단어들, 한 세계의 붕괴와 종말 전문가.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다. 종말을 사는 사람들이 감각하는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진행 중인 상실과 절멸의 예감은 어떻게 감각되어질까. 그 감각은 나에게 낯설기만 한 것일까? 나도 이미 세계의 종말을 감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럼에도 나의 막연한 불안을 그들의 저항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까.


이들은 저항한다. 그들이 내외부의 이들과 상호작용하며,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변화를 수용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지 저자는 이 책에 자세히 기록한다. 동시에 저자는 원주민들의 삶을 지지하고 도움을 주는 방식, 그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주는 방안과 관련한 다양한 쟁점들 또한 보여준다. 언론에서 아주 가끔, 반짝하고 스치는 아마존 관련 기사처럼 매끈한 서사는 어디에도 없다.


10장은 이 책이 던지는 중요한 의문을 잘 보여준다. 거대 테크 기업 아마존이 상징하는 자본주의의 기만성에 새삼 아찔하다. 아마존이 상징하는 생명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파괴하면서 그 이름과 이미지를 재전유하는 그들의 폭력적 전복성과 놀라운 영업력. 소수의 기상천외한 이윤 추구를 위해 자원과 노동 착취로 유지되는 기업 아마존이 번창할수록 생명 그 자체인 아마존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국제적 유통망의 365일 24시간 멈춤 없는 흐름은 자원 투입과 탄소 배출의 멈춤 없는 흐름을 의미한다. 아마존 대 아마존은 자본주의의 부조리와 폭력성을 드러내는 메타포, 아니 지극한 현실이다. 아마존을 살(buy)것인가. 아마존을 살(live)것인가?


인류의 역사에서 자본주의 역사는 500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폐해는 이미 그 이익을 넘어서고 있다. 자본주의가 자초한 기후 위기로 인류의 자멸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수혜를 계산하는 것은 어리석다. 절벽에서 추락하며 지갑 속 현금 생각에 웃을 수 있을까. 저자가 제안하는 언월딩은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관념과 경험을 재사유하고 재구성, 재배치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너머, 그 이후의 세계라는 과제에는 공감하면서도 그 실행의 격변성에 주춤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어떻게 그것을 가능하도록 할 것인가. 언월딩. 저자가 제안하는 언(un)-하기는 인식과 실천의 영역에서 영감의 원천이 된다. 익숙한 세계관과 생활양식을 재고하기, 취소하기, 해체하기, 다르게 살기 위해 이제까지와는 ‘다른 함’을 연마하기. 욕망을 언월딩하고, 일상을 언월딩하고, 관계를 언월딩하기. 구조를 언월딩하도록 힘을 모으기. 무엇보다 상상력을 언월딩하기. 작가가 그랬듯 다른 세계와 접속하기.



어떤 독서는 완결되지 않는다. 이 책을 읽는 것이 그렇다. 이 책의 독서는 행동으로만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타카로 떠나는 시로 시작한 이 책의 맺음말에서 작가는 “오디세이 같은 ‘해피엔드’도 없이, 이 이야기는 완결을 모르고 끝없이 이어지기만 한다.”고 쓴다. 한 배에 올라탄 독자도 끝없이 이어지는 그 항해를 계속해야할 운명을 공유한다. “얽힘이란 그렇게 우리의 질긴 참여를 요구한다.” 160 페이지 얇은 책이 주는 무게가 무겁기만 하다. 질문들이 무겁고, 제일 무거운 것은 내 몫으로 주어진 대답과 그 실천의 무게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웃으며 가볍게 한 발을 내딛는 전략의 언월딩 또한 갖춰야겠다.


책의 마지막, 원주민 노인 아라파는 작가에게 카리푸나족 샤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카리푸나족은 자연존재와 자연현상에 영혼, 정령이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꿈-기술”(오몽거) 속에서 비인간존재들과 춤을 춘다. 따삐르 혹은 페커리와 나란히 서서 팔이 얽힌 상태로 스텝을 밟는다. 인간과 숲의 존재들이 “모두가 정령이 되어” 춤을 추며 하나가 된다. “평범한 환자로 보이는 한 노인이 이토록 풍요로운 세계”를 품고 있음에 작가가 그랬듯 나도 놀란다. 아마존의 영혼들은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분별 너머의 공간에서 만난다. 자신들이 거주하는 대기와 대지만의 독특한 리듬에 맞춰 이들은 서로 얽혀 춤을 춘다. Shall we dance? 저마다 다른 자연 환경 속에서 각각의 환경이 연주하는 서로 다른 리듬에 맞춰 팔을 걸고 스텝을 밟는 비인간과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유연하게 다른 존재에게 여는 것으로부터 언월딩은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