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길고 투쟁은 진행 중 - 운동 좀 하던 할머니들의 현재진행형 인생 이야기
변정정희 지음 / 현암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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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에 읽은 <나, 블루칼라 여자>가 좋았다. 그 전에 사무직 여성들을 대상으로 현재 여성 노동을 분석한 책을 읽으며, 사무직 이외의 다양한 직종의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도 궁금했는데, 그 책이 그 목소리들을 담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여성 노동자들의 육성을 담은 책들이 더 많이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다 이 책 <인생은 길고 투쟁은 진행 중> 기사를 봤다. 정말 반가웠다. 작가 변정정희는 1970년대 여성 노동 운동의 최전선에 있었던 여성들을 인터뷰해 이 책에 담았다. 50년, 무려 반세기 전 노동 운동을 이끌었던 여성들의 어제와 오늘이라니. 너무도 필요한, 각별한 기획이다.



팝아트 같이 익살스러운 콜라주 표지에 마음을 턱 놓고 책을 펼쳤다가 바로 정신이 번쩍 들어 정자세로 읽게 된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한 방 먹었다. 멋진 언니들은 항상 이런 식이라니까. 무장해제 시켜놓고, 정곡을 찌른다니까. 그것도 너무도 무심하게, 너무도 단순한 언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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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길고 투쟁은 진행 중 - 운동 좀 하던 할머니들의 현재진행형 인생 이야기
변정정희 지음 / 현암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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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아트 같이 익살스러운 콜라주 표지에 마음을 턱 놓고 책을 펼쳤다가 바로 정신이 번쩍 들어 정자세로 읽게 된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한 방 먹었다. 멋진 언니들은 항상 이런 식이라니까. 무장해제 시켜놓고, 정곡을 찌른다니까. 그것도 너무도 무심하게, 너무도 단순한 언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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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의 산책이 쾌적했고          

바흐의 계절들이 돌아오고

빵이 잘 구워졌고



어제 밤에는 간신히 묶을 수 있을 정도의 짧은 길이로 싹둑 머리를 잘랐다. 
가위로 쓱싹쓱싹 자를 때의, 잘려나갈 때의 쾌감이라니. 덕분에 오늘까지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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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 소통 불가능성의 인문학
정희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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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의 근원적 불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책과 이토록 내밀한 소통이라니. 소통 불가능성을 아는 이만이 소통의 조건을 재사유할 수 있다는 책의 논지를 책 자체로 증명하다니, 역시 대단한 내공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작가는 돌고 돌아 사유의 물길을 독자 자신에게 돌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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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 소통 불가능성의 인문학
정희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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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가 나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 이 곤혹스러운 타자성을 직시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이해할 수 없는 타인’과 어떻게 조우할 것인가라는 소통의 가능성을 다시 물을 수 있습니다.” 192


불통의 근원적인 원인은 ‘나도 나를 모른다’이다. 기득권자는 자신의 위치에 대한 성찰적 메타인지 자체가 부족할 가능성이 크다. 약자는 애초에 이해 불가한 것을 이해해보려 애쓰느라, 자신과 협상하느라 항시 기진한 상태에 놓여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대부분의 개인은 결핍과 필요, 욕망에 이끌려 무지막지한 습(習)의 구심력에 빨려들어 회전중이다. 여기에 다른 의미에서 ‘나’를 강조하는 현대의 매체 생태계는 나르시시스트를 양산한다. 저자는 나르시시스트를 “자기 문제를 남에게 전가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줌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을 직면할 기회”를 회피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나를 직면하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심리적 문제는 언제나 정치적 이슈”라는 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정작 나 자신이야말로 나에게 피상적인 존재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타인과 소통 한다? 넌센스다. 타인과의 어긋남을 통해 내 자신과의 어긋남을 알게 되는 것. 불통의 뜻밖의 효능이다. 저자가 소통을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공부”라고 단언하는 이유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는 이 등대마저 민영화되어 바닷가의 모든 등대가 자본의 의사대로 운영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58p



자기 이해는 타인이라는 거울이 필요하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시대의 소통 창구인 플랫폼은 거대한 자본에 의해 동어반복의 상만을 비춘다. ‘더 많이 소비해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 ‘더 많이 노출하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 서로를 비춰주던 자타의 거울은 광고판이 되었다.

여기에 AI까지 등장해 소통에 합류(??)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느낀 글이 AI가 쓴 글이라면? 어떤 글을 쓴 주체가 사람인지, 기계인지 알 수 없다면? 소통이 자본이 되는 시대에 소통의 의미와 모습은 어떻게 변모되고 있는 걸까. 자본의 동력으로 점멸하는 등대의 안내로 우리가 도착할 곳은 어디일까.


“인간은 단독자다. 인간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 죽는다.” 66p


혼자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이 유일한 진리라고 저자는 쓴다. 엄정한 이 앎이 몸을 통과해 삶을 변화시킬 때 타인과의 소통 가능성도 열린다는 말이다. 자기 몸과 삶의 단독성에 대한 에누리 없는 앎. 이 성찰은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와 존중으로 확장된다. 저자가 말한 대로 타인을 설득하겠다는 오만은 내려놓고. 차이를 견디는 인내의 싹을 우리 안에 품게 한다.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 안의 이방인’입니다.” 192p


우리는 서로 다른 별에서 태어나 성장한다. 저마다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각자 다른 삶의 궤도를 돌고 있는 이방인이다. 그러니 타자를 만나면 ‘너는 왜 그렇게 사니?’라고 묻기 전에, 정 궁금하다면, ‘당신은 어느 별에서 왔습니까?’라고 속으로만 나직이 묻는 것이 낫다. 저자는 ‘타자성’과 ‘소외’라는 이방인의 감각을 어떻게 대면하고 다룰지에 대해 말한다. 자타를 낯설게 인식하는 이방인의 감각이야말로 자타를 재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3/4)


4.

이 책은 말하기와 듣기의 정치, 말하기와 듣기의 윤리에 관한 저자의 오랜 사유를 담았다. 공사의 말길은 누가 어떻게 지배하는가, 권력은 약자의 말길을 어떻게 지우고, 고통을 어떻게 은폐하는가. 약자의 말하기는 어떻게 의심받고 분열되는가, 절박하게 타전하는 약자의 발신을 수신하는 윤리적 듣기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저자의 질문은 독자에게 사유와 실천이라는 응답을 요구한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출신의 번역가이자 연구자인 알라 알카이시는 그의 책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에서 “나는 무엇이 ‘받아들일 만한’ 팔레스타인의 고통인지 결정하는 구조적 장벽들에 맞서 싸우고 있다.”라고 쓴다. 책은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의심받는’ 참상을 ‘믿을 만한 것’으로 순화해야 하는, 그럼에도 ‘가해자’를 주어로, 가해를 능동태로 명시함으로써 서사적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 여기에 더해 그것을 ‘지배자의 언어’로 세계에 증언해야 하는, 팔레스타인 번역가가 처한 다중의 모순과 고통을 통렬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경험을 호기심으로 소비하거나 자신의 사회적, 학술적 자료만 활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147p



책 속의 약자의 말하기와 청자의 윤리에 대한 글을 읽으며 알라 알카이시의 글이 겹쳐졌다. 정희진 작가가 말한 “경험한 자와 말하는 자 사이의 간극”을 조정하려 분투하는 글. 이 절박한 글들을 청자는 어떤 태도로 읽어야 할까. 알라 알카이시의 책을 읽으며 나는 조금 전전긍긍했다. 팔레스타인의 고통에 마음이 무거웠고,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떨쳐지지 않았다. 정희진 작가는 말한다. “듣기 위해선 정말 큰 각오”가 필요하고, 청자의 응답은 태도의 갱신, 즉 책임이라고.

"말의 생사여탈권은 듣는 사람이 쥐고 있는 셈입니다.”155p



작가가 쓴 말의 생사를 결정하는 청자의 힘을 믿는다. 그러니 고통 당사자의 말을 듣기를 멈추지 않고, 세계에 전하는 것이 어쩌면 청자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응답일지도 모르겠다. 목소리가 꺼지지 않게,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지도록 아주 작은 불빛이나마 화력을 보태는 것. 그래서 지배적인 말길을 교란하고 지류의 말길이 힘차게 퍼지도록 힘을 보태는 것. 작가의 표현대로 “중구난방”으로, 시끄럽고 때로는 난잡하게, 막혔던 말길을 뚫는 작은 물살이 되는 것.


“각자의 고립된 자리에서 각자의 언어로 버티고 있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 서늘한 인정의 지점에서 비로소, 우리 삶을 지탱할 작은 대화들이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199p



언제나 그렇듯 정희진 작가의 글은 돌고 돌아 사유의 물길을 독자 자신에게 돌려놓는다. 소통의 조건을 찾아 밖으로 향했던 성찰의 방향은 독자 자신에게 되돌려 진다. 자기 이해와 태도의 부단한 갱신 없이는 타인과의 접점을 탐색할 인식의 지평이 확보될 수 없다고 작가는 전한다. 이런 대화는 실로 오랜만이다. 공감과 각성, 두통과 웃음. 가느다란 빛줄기 같은 웃음.


“소통의 근원적 불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책과 이토록 내밀한 소통이라니. 소통 불가능성을 아는 이만이 소통의 조건을 재사유할 수 있다는 책의 논지를 책 자체로 증명하다니, 역시 대단한 내공이다. 작가는 우연한 조우가 선사하는 “작은 이해의 기적”을 말하지만, 독자는 오래도록 몸이 기억할 깊은 이해의 기적을 기쁘게 누린다.


PS. 이런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1. 정상성 규범에 한 점 의심이 없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늘 ‘너는 왜?’라는 “부당한 질문”을 받고,

본인마저도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를 설명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끼시는 분들.

2. 타고난 성정으로, 혹은 환경의 영향으로,

혹은 이 둘의 조합으로 자기 돌봄과 자기 보호라는 말이

언제나 어색하고 실천이 어려우신 분들

3. 세계 자체가 거대한 부조리로 여겨져

세계 자체와 싸움하느라 늘 탈진(탕진?) 상태인 분들.

4. 자기 자신이 거대한 부조리로 여겨져

자기 자신과 싸움하느라 늘 탈진(탕진?) 상태인 분들.

(1, 2 글들은 뒤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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