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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노동 - 산업혁명부터 데이팅 앱까지, 데이트의 사회문화사 ㅣ Philos Feminism 11
모이라 와이글 지음, 김현지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10월
평점 :
“우리가 하는 돌봄은 천연자원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결과로 여성의 노동은 계산에 반영되지 않는다.”p30
“재생산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은 여성의 본성이라는 이와 같은 허구는, 여성에게 막대한 중압감을 안긴다. 그리고 많은 여성을 옥죈다.”p386
신랑(?) 밥은? 애들 요즘 시험기간 아니야? 요점은 너는 지금 네 몫의 노동을 하지 않고 밖에 나와 있다는 의미다. 남성들은 평생 들을 일 없는 질문들이다. 살림과 양육, 재생산 노동은 여성의 책임이다. 왜냐고? 정상적이고, 좋은 엄마라면 가족들을 ‘사랑하니까.’ 정상성과 도덕, 애정의 진위까지. 삼중의 구속이 여성을 억누른다. 내가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나쁜 배우자, 양육자인가. 자체 검열에 들어간다. 노동은 사회적 정상성의 기준, 그리고 감정의 정동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필로스 시리즈 신간 <사랑은 노동>은 ‘사랑’이라는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해 보이는 감정과 사회경제적 동인으로 기획되고, 거래되는 ‘노동’이 만나는 접점들을 미국 현대사와 문화사를 통해 분석한다. 미국을 배경으로 연구가 진행됐지만, 한국의 현실도 여실하게 투영된다. 정치경제, 기술, 대중문화가 하나의 리듬으로 출렁이며 급변하는 세계이니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이 지닌 현실감은 자연스럽다.
“데이팅의 구조에 깊이 내재한 거래 논리는, 사랑을 남들과 경쟁해서 얻는 어떤 것으로 바라보도록 부추긴다.” p426
“사랑을 위해 노력하는 삶보다 더 나은 삶은 없다. - 중략 - 하지만 우리 문화는 노동과 사랑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노동도 사랑도 평가절하한다.” p17
하버드대 비교문학과 교수인 저자 모이라 와이글이 이 책을 쓴 동기가 읽히는 문장들이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구조를 영속하기 위해 사랑과 노동을 왜곡시키고, 비틀고, 쥐어짠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결탁해 만들어내는 사랑에 관한 이미지들은 ‘정상성’이라는 명령어로 개인들을 특정 역할과 노동의 실천으로 몰아간다. 시즌별로 갱신되는 사랑의 이미지 속에서 실속을 차리는 것은 언제나 권리로 무장한 가부장들, 거대한 플랫폼들과 소비시장을 소유한 자본들이다.
"사랑을 수행하는 방식을 우리가 마음대로 이끌어 갈 자유가 있을 때, 노동은 골칫거리가 아니다." p428
모이라 와이글은 사랑과 노동의 가치를 되찾아 오기 위해 사랑의 역사, 데이트의 사회 문화사를 써내려간다. 산업 혁명기부터 데이팅 앱의 대중화까지 데이트의 변천사는 실로 역동적이다. 하지만 그 변화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지리멸렬할 정도로 일관되다. 그것은 젠더 이분법에 기초한 불평등과 차별이다. 차별과 폭력을 은폐하고, 유포하는 기술과 화법이 더욱 세련되어지고, 기만적으로 변해왔을 뿐이다.
욕망이 거래되는 장면을 포착한 ‘속임수’, 가용자원으로서 취향을 분석한 ‘애호’, 데이트의 대중화와 직결되는 공간으로서 ‘밖’, 욕망의 교환(훅업) 장소였던 ‘학교’, 장기 투자로서 선호된 ‘오래 사귀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선포된 평등이 어떻게 여성에게 재갈이 됐는지 묻는 ‘자유’, 비지니스가 된 데이트를 파헤치는 ‘틈새 시장’, 데이트 쇼핑을 위해 소비자가 지켜야 할 ‘소통 규약’, 임신과 출산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적 압력을 파고드는 ‘계획’, 감정노동의 메뉴얼로 여성을 비인간화시키는 사회문화적 명령으로서 ‘조언’. 모이라 와이글은 이렇게 열 개의 키워드로 데이트의 변천사 속에서 개인들이 수행한 역할, 노동을 분석한다.
“이제 사람들은 연애의 ‘비용-편익 분석’을 수행하고 가벼운 성관계의 ‘낮은 위험부담과 낮은 투자비용” 운운하며 “스스로를 포지셔닝 해 낭만적 관계의 선택지를 최적화하려고 씨름한다.”p40
이 최적화 방법으로 와이글이 가져온 구체적 사례들에 끄덕이게 된다. 와이글은 상품과 서비스가 된 사랑과 노동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양태들을 분석한다. 영화, 음악, 드라마, 매거진 등 대중 문화는 자본화된 욕망을 반영한다. 저자의 분석은 탁월하다. 한 시절을 함께한 너무도 친숙한 영화, 팝송, 드라마들이 호명되고, 발가벗겨진다. 너무도 흥미롭다.
기후 위기, 심화되는 양극화, 구조적 장기 침체, 불안정한 노동, 사회적 불안. 와이글은 미국의 정치경제 현실의 렌즈로 욕망의 변천사를 들여다본다. 2016년 출간된 이 책에서 와이글이 묘사하는 당시 미국 노동자 계층의 현실(시간제 노동, 프리랜서, 긱 노동, 투잡과 쓰리잡)은 지금 우리 현실과 너무도 닮았다. 그런 현실에서 개인들이 사랑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또는 포기하는 모습도 또한 유사하다.
개인의 욕망 실현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슈다. 하지만 ‘개인’의 범주는 늘 문제적이다. 사회경제적 소수자들은 여전히 개인의 범주에서 자주 탈락된다. 와이글은 이렇게 기울어진 세계에서 소수자들이 어떻게 사랑이라는 노동을, 역할을 수행해왔는지도 또한 탐색한다.
“젠더화 된 노동 분업은 여성을 정서적 과로 상태, 남성을 정서적 무능 상태로 만든다.”p146
“여성은 사랑을 위해 성관계를, 남성은 성관계를 위해 사랑을 교환한다.”p410
이 책은 우리가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 사랑이라 부르는 것이 정치경제적 구조에 의해 설계되고, 주입되는 경로를 잘 보여준다. 와이글은 감정이 자원화 되어 관리되고 거래되는 무수한 장면들에 주목한다. 이 장면들에서 여전히 여성들은 더 취약하고, 더 착취당하고, 더 기만당하고, 더 소진된다. (제8장 자유, 제9장 계획, 제10장 조언은 한숨과 분노로 눈을 뗄 수 없다.)
노동의 사전적 의미는 몸을 움직여 일을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는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이다. 사랑은 노동이다. 어떻게 이 문장을 부정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이를 위해 밥을 짓는 것은 노동이다. 누군가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기 위해 취향을 관리하고 그의 비위를 맞추고, 그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도 노동이다. 환전 가능한 감정을 관리하는 것도 노동이다.
빛에 따라 다양하게 발색하는 매혹적인 핑크색 책 표지에 이끌린 나의 선택은 현명했다. 로맨틱한 핑크색을 정중앙에서 날렵하게 가르는 쟁기를 닮은 대문자 L의 존재를 인식하는데 시간이 걸린 나는 우둔했다. Love(사랑)와 Labor(노동)는 떼려야 땔 수 없다. 사랑이 곧 노동이며, 노동이 곧 사랑이다. L은, 사랑은, 노동은 굳은 대지를 깨부순다. 악습을 깨부순다. 협소한 자아를 깨부순다. 우리는 이렇게 창조적인 사랑과 노동의 의미를 재인식할 수 있을까. 그 가치들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얼마 전 “여성은 소유물이다”이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중인 텍사스 주립대 남학생의 사진이 SNS에 공유됐다. 개인의 일탈이라기엔 최근 몇 년 국내외 분위기가 너무도 증후적이다. (여기에 쓰기도 어려운 최근 기사까지 생각하니 팔다리에 힘이 빠진다.) 사랑?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사랑해야 하고, 노동해야 할까.
정희진 선생은 이 책을 “사랑에 대한 최고의 교과서”라고 평했다. 좋은 교과서는 문장을 낭비하지 않는다. 모든 장에 대해 할 얘기가 쏟아져 나온다. 여성들에게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특히 후배나 딸에게는 이 책을 꼭 선물하라고 말하고 싶다. 여성들이 깨닫고, 재확인해야 할 여성들의 위치, 조건, 상황들을 이 책은 상세하게 탐구한다.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아니 절실한 분석과 통찰이이다.
(여성들이여, 더 정신 차리자. 제발 정신 똑바로 붙잡고 살자. 이 책에 관해, 와이글이 시작한 대화에 응답해, 하고 싶은 말은 넘치지만, 일단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