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과 낮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김금주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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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 겨울에 읽으려고 일 년을 아껴둔 책. 울프의 두 번째 장편 소설인 만큼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 울프의 마음속을 채웠을 의문과 문제의식, 동기들을 엿볼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지적인 욕망을 간직한 채 철저히 가정의 천사 역할을 수행하는 캐서린. 캐서린이 현대에 태어났다면 천문학이나 수학을 전공했겠지.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과 내면에 들끓는 지성의 요구들 사이에서 절충안을 찾아내려는 캐서린. 그 타협안은 이성애 결혼. 나는 캐서린이 비혼을 선택하기를 바라며 책장을 넘겼다. 여성에게 가혹했던 시대의 한계 안에서 자기에게 충실하려는 캐서린의 심리적 분열과 현실적인 대안을 찾으려는 분투를 울프는 집요하게 따라간다.


극적인 반전으로 독자에게 일시적인 쾌감이나 해방감을 주기보다 인물의 구체적인 고뇌와 갈등, 망설임 자체를 극세밀화처럼 묘사하는 울프. 따라서 인물들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이야기 전개보다 인물의 내면 풍경이 더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다.어떻게 이렇게 내밀한 심리의 흐름을 어떻게 이렇게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캐서린이 메리와 연인이 되기를 바랐다. 자신이 선택한 가치를 좇는 여성. 자기 마음의 고삐를 단단히 꼭 움켜쥐고 자기가 선택한 길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는 여성. 캐서린, 메리, 데넘 사이에 유지되는 거리들이 좋았다. 타인에 대해 넘겨짚지 않고, 무심할 줄 아는, 존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 (끊임없이 여성에게 훈계하고, 맨스플레인하는 허영에 찌든 남성도 등장한다. 울프는 이 남성을 통해 여성을 미숙한 존재로 규정하고 통제하고 가스라이팅하는 거의 전형화된 남성들의 행태를 자세히 묘사한다. 그럼에도 다른 인물들은 이 남성을 끝까지 존중한다. )


“슬픔 자체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 슬픔의 고통은 그녀가 자신을 배반하는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아, 이 슬픔을 알지. 이 날카로운 슬픔. 내가 나를 배반했을 때의 그 굴욕감. 하지만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던 인물(메리)은 돌아선다.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눈물은 억제할 수 있었다. 이 순간은 그럴 것이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캐서린을 대면할 것이고 좌절된 용기에서 만회할 수 있는 것을 만회할 것이다.” 


슬픔과 굴욕감에 매몰되지 않고, 만회할 수 있는 것을 만회할 것이라고 현실을 직시하는 여성. 울프의 여성답다.



2.

 

나는 계산을 해서 뭔가를 논하고 싶어 - 인간과 관련 없는 뭔가를 말이야. 나는 특별히 사람이 필요하지 않아. 헨리, 나는 엉터리야 - 너희들 모두가 나를 잘못 알고 있다는 뜻이야. 나는 가정적이지도 않고, 혹은 아주 현실적이거나 분별 있지도 않아. 정말이야. 그리고 만약 내가 어떤 것을 계산하고 망원경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래서 산술을 논해야 하고 내가 틀린 부분을 알게 된다면, 나는 완벽하게 행복할 거야.” 257

 

 

 

3.


"어떻게 당신은 감정에 대해서만 계속 얘기해요! 정말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일에 대해 그렇게 많이 말하지 않고 늘 걱정하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나요?" 316


너무 웃겼던 장면. 감정을 잘 말하지 않는 캐서린의 성격에 대해 약혼자였던 남성(여성을 자신의 훈육이 필요한 미성숙한 존재로 보는 바로 그 남성)이 또 불만을 얘기하자 캐서린이 갑자기 저렇게 소리친다. 이성적인 존재로 스스로를 평가해온 남성의 유치한 실상을 한 장면으로 유머러스하게 드러내는 울프. 

 

"그녀는 억지로 말할 수 없었다." 317


시원하다. 


4. 


이 금빛 테두리가 소멸된다면, 만약 삶이 더 이상 환상으로 에워싸여지지 않는다면 (하지만 그것이 정말 환상이었을까?) 그러면 그 삶은 최후까지 견디기에 너무 황량한 일일 것이다. 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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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 - 저항의 문장가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의 정수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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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를 이해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글이 있다. 슬며시 그 작가의 마음 안으로 끌어당겨 주는 글. 그가 세계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망과 온기, 깊이와 조도, 그 바탕을 가늠하게 해주는 글. 윌리엄 해즐릿의 에세이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대하여> 속 에세이들이 그렇다. 특히 후반부에 나란히 실린 두 에세이를 통해 나는 해즐릿의 글을, 이 작가를, 이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그 사람 해즐릿.

국내에 먼저 소개된 해즐릿의 두 권의 에세이집을 차례로 읽고 작가의 혜안과 필력에 놀라움을 느꼈다. 찌르는 듯한 통찰, 세공한 듯한 표현. 본질을 파고드는 타협 없는 사고와 더 없이 세밀하고 정밀한 문장은 후련함을 주었다. 앞선 에세이집들과 비교해 이번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대하여>는 인간과 인생에 대한 해즐릿의 좀 더 내밀한 사유를 엿 볼 수 있어서 각별하다.

청춘을 묘사하는 해즐릿의 문장은 옳다. “청춘은 영원의 예감 속에 살며, 이 예감이야말로 그들을 살아 있게 하는 불꽃이기 때문이다.” 영원의 예감,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가. 청춘, 푸른 봄은 가을과 겨울을 모른다. 아니, 몰라야한다. “청춘은 삶이라는 잔을 갈증 난 듯이 들이키지만 그 잔은 바닥나지 않는다. 기쁨과 희망이 늘 넘쳐흐르고 세상의 온갖 사물을 향한 욕망이 청춘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 아, 찬란하다. 결핍과 낙담에 침잠해 있어도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열정의 창은 늘 열려 있던 시절, 고통조차도 흘러넘치던 시간. 과연 그렇지 않은가.

해즐릿은 청춘의 환희를 이렇게도 표현한다. “시간과 자연이 우리 발아래 모든 보물을 쏟아 붓는 듯한 감각 속에서 우리는 존재하고 행동하며 세상을 향해 문을 연다.” 불행 중에도 온 몸을 순환하는 혈관에 청신하고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감각, 작가는 그 미묘한 느낌을 놓치지 않는다. 해즐릿의 이 싱그러운 청춘 예찬이 뒤이어 몰려올 삭풍의 엄혹함을 대비시킬 청춘 만가(輓歌)임을 예상하면서도 나는 그의 문장에 노곤히 빠져든다. 간지럽고 달짝지근하고, 호방한 기운에 잠시 부푼다. 향긋한 봄바람이 스친다.

만년(晩年)을 묘사하는 해즐릿의 문장은 옳다. “인생의 축제 행렬이 거의 다 지나갔을 때, 가면극이 우리를 배신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과 시간의 기만을 간파하고 그 행렬에 끝이 있음을 믿게 된다.” 작가는 프랑스 혁명이 미완으로 저물었을 때 더 이상 젊다고 느낄 수 없었다고 적었다. 청춘의 끝은 나이 듦과 신체의 노화와 늘 같이 가지는 않는다. 청춘의 피날레는 마음에서 먼저 울려 퍼진다. 나의 프랑스 혁명은 언제였나. 나는 언제 더 이상 스스로 젊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그 자각은 불현 듯 찾아온다. 그리고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자각은 나쁘지 않고, 그 자각과 함께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삭풍은 정신을 맑게 한다.

“모든 것이 겉은 아름답지만 속은 탐욕과 부패로 가득한 회칠한 무덤이다” 세계에 대한 충만한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해체된 무대 위의 황량함과 가면이 벗겨진 얼굴의 옹색함을 직시하는 서늘한 감각이다. 인간과 삶의 실상에 대한 앎은 청춘을 내어준 대가다. 환영이 사라진 자리에 작은 진실의 조각들이 먼지처럼 엉켜 뒹군다. 심상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진실의 보풀들을 알아보고, 겸허하게 품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축복이 아닐까. 해즐릿이 말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항상 타오를 “존재의 흔적”은 소박하지만 숭고한 이 지혜가 아닐까 싶다.

“품위 있게 삶을 마무리 할 수 있다면, 큰 병을 치르지 않고 마음마저 고요하고 단정한 정물화처럼 정돈된 상태에서 무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내가 원하는 전부를 해즐릿은 이렇게 “단정한 정물화”처럼 써놓았다. 하지만 그런 정물화는 현실에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해즐릿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문장이 더 쓸쓸하게, 진실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결국 사소한 상황에 휘둘리는 존대다. (중략) 우리는 사소하고 성가신 현실의 희생양이 된다. 인간의 정신은 숭고하게 부풀 수 있지만, 동시에 비굴과 혐오와 편협함에 익숙하다.” 이래서 해즐릿이 좋다. 그는 인간과 인생에 환상을 품지 않는다. 냉정하다. 우리는 나날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찢겨 나가고, 죽음은 남은 마지막 조각을 무덤으로 데려갈 뿐이라고 해즐릿은 쓴다. 그럼에도 “우리의 욕망과 기대는” 언제나 과도하다고 작가는 꼬집는다. 그래서 비굴해지고 편협해진다는 것이다. 삶의 진상이 여실해진 후에도 여전한 욕망은 얼마나 처치 곤란인가.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대하여” 제목부터 노화를 금기시하고 죽음을 외면하는 현재의 문화를 향해 날리는 날 선 냉소와 같다. 죽는 그 순간까지 청춘이기를 강요하는 자본과 미디어의 확성기들, 그 강요를 기꺼이 경쟁하며 수행하는 개인들이 만든,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을 기대하는 거대한 방부제 덩어리로 변해가는 세계를 떠받드는 망상. 그 망념의 뿌리가 바로 이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이 아닌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이 금언을 새긴다면, 삶의 많은 것들이 단출해질 것이다. 결핍감과 자기기만, 광대짓과 헛발질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해즐릿의 표현대로 언젠가 “존재가 비존재로 전환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은 내가 채웠던 수많은 족쇄를 여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영생에 대한 착오와 착각이 일으킨 무수한 사고와 수행의 오작동들이 우선 진정되기 시작할 것이다.

“사람들이 낙엽처럼 떨어지고 시간의 낫에 풀처럼 베어 나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청춘을 되돌리는 방편일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감한다.” 삶의 유한성을 절감할 때야말로 시간의 농도는 짙어지고, 순간이 밀도 높게 경험되지 않던가.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녹여내 “단 하나의 강렬한 공감의 순간으로 응축”시키는 마법의 시간장. 그 안으로 진입하는 만년의 입춘.

이렇게 두 번째 청춘은 이전과는 다르다. 이 청춘은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이제는 안다. “이 삶이 언젠가 끝날 수 있다”는 진실을 안다. “존재의 허무”를 수신한 후의 청춘이다. 이 청춘은 처음처럼 다시 삶을 경험한다. 하지만 더욱 강렬하게 체감한다. “삶은 참으로 기묘한 선물이며, 그에 따르는 특권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이 새로운 봄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그 모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즐릿은 이 에세이로 말을 건다.

해즐릿은 무상함이 안겨주는 찬란함을 독자에게 일깨우고 이른 낙엽처럼 표표히 떨어져 세상을 떠났다. 갈바람에 가벼이 나부끼며 비상하는 고엽들. 그 사이로 설핏 비치는 삶의 기묘함과 신비함. 그걸 보았냐고, 이 가을 해즐릿이 묻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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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천재 - 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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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다. 주로 때늦은 각성이다. 자주 얼굴이 붉어진다. 그때 왜? 돌연한 의문과 이전과는 전혀 다른 해석. 뎅뎅뎅, 공중에서 떨어진 쟁반에 얻어맞은 듯 머리가 울린다. 나이가 드는 건 밖으로 향했던 호기심이 안으로 방향을 바꾸는 건가 싶다.


모든 것을 빨아 들였던 감정의 소용돌이. 몹시도 차갑거나 너무 뜨거워 무언가를 상하게 했던 격렬함. 한시도 그치지 않는 감정의 너울. 용솟음쳤다 곤두박질치는 정동의 파도. 잔잔하게 하지만 단단하게 무언가에 사로잡힘. 한참을 지나서야 그 들뜸이 보인다. 그건 광기였을까.


고명섭 작가의 <광기와 천재>. 천재가 아니라서 천재에 늘 관심이 많고 내 안의 미친 것을 달래느라 늘 에너지를 소진하는 나는 이 책을 가장 좋아하는 가을, 겨울을 위해 아껴두었다. 천재는 너무 멀고 광기는 비교적 가깝다. 그래서 이끌린다. 광기와 천재, 이 둘이 하나의 인간성 안에 전류를 일으키는 양극임을 확인하며 책을 읽는다. 천재는 아득하고 광기는 아찔하다. 숨죽이고 책 속 문제적 인간들에 빠져든다.


‘광기’의 사전적 의미는 미친 듯한 기미이다. ‘미치다’의 사전적 정의는 정신에 이상이 생겨 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이다. 그러니 광기는 보통의 선을 넘어 미침 바로 앞에 선 기미들의 총합이다. 문제는 ‘미치다’인데 그 사전적 정의들에는 ‘보통’과 ‘상식’이란 단어가 중요한 지표로 등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보통과 상식의 의미가 시대와 장소의 소산이라는 것과 따라서 광기의 구성물 또한 시대와 장소의 성분에 따라 달라진다.


광기는 인간성의 스펙트럼 안에 자리한다. 동물로 태어나 사회적 존재로 순치되는 존재. 언어라는 불완전한 도구로 세계를 짓고, 주어진 가치 체계를 따라야 ‘정상’으로 등급 매겨지는 인간. 광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살아가는 게 대단한 것 아닌가. 폭주가 인간성의 한 요소라면 그것을 멈출 수 없는 광기 또한 애써 들여다 봐야할 인간성의 단면이다. 그것이 사유의 폭주라면 더욱 흥미롭다.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 기존의 사유 체계 자체를 의심하여 사유 구조의 살을 발라내고, 그 앙상한 뼈대를 드러내, 그 뼈의 성분마저 분석해내는 치열하고 정밀한 사유의 광기. 이 책은 루소와 푸코, 비트겐슈타인과 카프카가 역사와 사상, 사회 구조 그리고 언어라는 가장 완고하고 친숙한 집을 사유의 도끼로 깨부수는 사유의 도정을 정밀하게 보여준다. 푸코가 그 시대의 정상과 상식의 법전에 굴복했다면? 비트겐슈타인이 동시대 형이상학과 논리학의 한계에 안주했다면? 우리는 어둠이 어둠인줄 모르고, 빛을 등지고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무지에 대한 앎은 앎의 근본이다. 이 광기의 사상가들은 그 앎을 선사한다. 통념의 허구성을 들추어 그 통념을 떠받드는 무지를 밝혀내는 극한의 사유. 어떤 광기는 담론과 정치, 역사의 진보를 견인한다.


천재의 사전적 정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남보다 훨씬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이 책의 천재들은 경이로움과 호기심의 세계로 안내한다. 책을 읽다보면 이 타고난 재주와 재능이 특정 분야에서 완벽함에 도달하는 지능적, 기술적 능력에 제한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세계의 틈을 인식하는 예민함,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비타협성, 목표를 향한 집요한 의지, 집중력과 인내력, 투철함과 철두철미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바위 같은 정신력. 이 정신의 힘이야말로 천재를 천재이게 하는 본질임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이 재능들은 ‘미침’으로 해석되고, 오해되고, 처벌받기도 한다. 유무형의 다양한 낙인과 처벌은 천재를 내외부에서 고사시키기도 한다.


이 책은 천재성을 지닌 인간이 어떻게 사유와 실천을 그 한계 너머까지 밀어붙여 그 시대가 공유한 무지하고 편협한,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보통’과 ‘상식’의 장막을 걷어버리고, 세계의 진보를 앞당기는지 철학사, 사상사,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상가와 철학자, 작가를 통해 잘 보여준다. 그리고 동시에 천재성을 지닌 같은 인간종이 그 재능을 극한까지 발휘해서 어떻게 세계를 암흑에 잠기게 하는지도 또한 잘 보여준다.


푸셰, 네차예프, 히틀러. 이 이름들을 목차에서 보고 피로감이 들었다. (피로감은 내 모든 회피와 방관을 합리화하는 요즘 나의 만능봉이다.) 지금도 이미 국내외 파괴의 천재들이 타전하는 매일 매일의 뉴스들로 충분히 피로해, 악의 천재성에 대해 이미 알만큼 알아, 그런데 굳이?’ 하는 마음의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의문.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를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다고? 히틀러가 천재라고? (그는 그냥 미친X이고. 할 수만 있다면 핀셋으로 집어내 변기에 던져 버린 후 물을 내리고 싶은 인물이라고.)


하지만 조제프 푸셰편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런 의문과 반감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루소에서 시작한 사상사의 천재들이 충만하게 채워준 호기심과 경이로움은 그 반대편에 선 문제적 인물들, 푸셰, 네차예프, 히틀러에 이르러 전혀 다른 성질로 바뀌어 나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들은 미친X으로 치부해 무시해야 할 인물들이 아니었다. 이런 게으른 단정과 속편한 무시야말로 무지의 한 형태였음을 이 장들을 읽으며 알게 됐다.


이들은 망각해서는 안 되는,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분석되고 알려져야 할 인물들이었다. 저자가 분석하는 이 인물들의 내면 풍경을 통해 확인한 건 악에 대한 나의 총체적 순진함. 천재성은 진선미에서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짓, 악함, 추함의 영역에서도 극한의 천재성이 만개할 수 있다. 천재의 정신적 재능이 그 맹렬함을 유지한 채 악을 실현하는데 집중된다. 그것은 소름 끼치는 일이지만, 역사에서 일어났고,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푸셰, 네차예프, 히틀러를 내달리며 읽는다. 앞의 천재들 편에서, 그들의 사유 전개 과정에서 들어나는 통찰의 깊이에 숨을 고를 순간이 필요했다면, 이 악령의 화신 같은 인물들 편에서는 그들의 악행에 비례해 세계에 뿌려진 재앙에 압도되어 그 전말이 궁금해 문장들 사이로 가속이 붙는다. “리옹의 도살자” 푸셰, “20세기 독재자들의 진정한 선구자” 네차예프, “비현실적인 파괴 열망”의 화신 히틀러. 우리가 목격하는 기괴한 정치(?) 현상들의 원본들.


극단으로 치닫는 국내외 정치인들의 거울상들이 거기 있었다. 악에 관한 그들의 신념과 교설은 오늘날 그 후계자들에게는 교본이 되었다. 이 폭력의 광기는 민족주의, 인종주의, 극단주의, 파시즘이 세를 넓혀가는 오늘을 이해하는 단서들이다. 그들은 오래된 현재이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로 고개를 돌려야 하는 이유를 이 책은 잘 보여준다.


진보의 천재성과 퇴행의 천재성을 나란히 병치해 분석함으로써 저자는 인간성에 대한 안목을 확장시킨다. 천재성의 폭발과 그 배경이 되는 정치사회적 조건을 촘촘하게 교직함으로써 천재가 가진 이상과 망상이 역사를 어떻게 진보시키는지, 혹은 야만으로 되돌리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이 또한 얼마나 모순적인 인간인지 작가는 잘 드러낸다. 흥미롭고 흥미롭다. 저자는 천재성이 발아해 성장하고 만개하는 과정을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놓는다.


변신을 거듭하며 단편적인 평가를 따돌리는 천재, 광기를 자가 갱신하는 광기, 인간의 조건을 재설정하는 천재, 논리의 극한으로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세계를 발견한 천재, 자기를 태워 사유의 불을 밝힌 광기, 인식의 사각지대에 환하게 조명을 비춘 천재. 비극으로 여전히 자기 복제 중인 광기, 자기모순의 함정에 빠지는 천재, “인간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게 하는 광기. 역사와 사상사에 대한 밀도 높은 식견과 사물의 본질을 투시하는 통찰. 이 고성능 확대경으로 저자는 인간성의 만화경을 세밀하게 독자 앞에 펼쳐놓는다.


광기와 천재, 천재와 광기. 광기의 화력으로 발화되는 천재, 천재를 전소시키는 광기. 이 책 속의 인간들은 하나같이 델 것처럼 뜨겁다. 실제로 그들은 그들 이전의, 유무형의 세상을 태워버렸다. 그들이 재로 만든 세계에서 무엇이 새로이 움텄는지가 다를 뿐이다. 루소 이후의, 푸코 이후의,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카프카 이후의, 히틀러 이후의 세계는 그 이전과 다르다. 덕분에, 혹은 때문에 우리는 어제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바깥 세계와의 싸움은 곧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모든 투쟁은 자기 투쟁이다.” (16면)


가을이 와서 물드는 건 산과 들만이 아니다. 대기와 습도 변화는 사람의 마음도 물들인다.(물론 핑계다.) 환경과 호르몬 사이의 화학 작용에 무참히 얼룩덜룩 얼룩질 것인가.(망상이다.) 나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이건 진지하다.) 망상과 감상,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자의적이고 터무니없는 해석과 결론. 너 자신을 알라. 금언이다. 그렇다. 언제나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은 우선 나 자신이다. 나의 명암을 비추는 거울로 양서만한 것이 없다. 인간성의 미세한 부분까지 포착해 정확한 언어로 표현해내는 책은 내 시야의 사각지대를 여실히 드러내준다. 이 책 <광기와 천재>가 그렇다.


“자기 배려란 자기를 어르고 달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진실과 대면케 하고 그 진실을 통해 자기를 바르게 형성하는 것이다.” (109면)


“세상 모든 이의 인생이 각각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될 수 없을까? 왜 램프나 주택과 같은 것들은 예술의 대상이 되는데 사람의 인생은 예술 작품이 될 수 없단 말인가?” (109면, 푸코, 저자 인용)


저자는 말한다. 자기가 대면한 진실을 통해 자기를 ‘바르게’ 형성하는 그 과정이 미적 형식을 얻을 때, 우리 각자의 삶이 푸코가 말한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이 책은 역사의 진실, 인간성의 진실에 가닿기 위한 무수한 배를 사유의 바다에 출항시킨다. 그 배는 “광기의 심연을 거쳐 저항과 투쟁의 강을 지나”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앎, 개인 자신에 대한 앎이라는 열린 바다로 향한다. 그 바다는 역사라는 파도로 출렁인다. 책은 개인이 그 격류에 얼마나 속수무책으로 휩쓸릴 수 있는지, 동시에 강한 정신력은 어떻게 그 격랑에도 난파되지 않고 목적지로 향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인간의 삶이라는 거대한 조류를 조망하고 저 멀리 반짝이는 등대(푸코 등대, 비트겐슈타인 등대 등등), 피해 가야할 암초를 가리킨다. 자유라는 저 먼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는 서핑인의 기본기를 돌아보게 한다. “자유의 획득이란 달리 말하면, 세계의 극복임과 동시에 세계와의 화해이며, 자기 자신의 극복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과의 화해이다.” 여러 의미에서 마음 밭을 다져준다. “견딤이야말로 여기서는 저항의 형식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기에 더 없이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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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천재 - 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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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광기와 천재>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은 천재들이 호흡했던 역사의 현장으로 독자를 데려간다는 것이다. 18세기에서 20세기까지 유럽사의 격변의 장소. 그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는 듯하다. 저자가 묘사하는 한 시대의 모순과 질적인 변화가 너무 흥미진진해서 역사 자체에 다시 호기심을 갖게 됐다. 인물을 읽다보니, 시대가 읽혔다. 머릿속에 전구불이 번쩍하고 들어오는 순간들.


모순덩어리 루소의 사유의 궤적을 통해 본 18세기의 사상의 변천사,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밝혀낸 푸코가 늘 현장을 지켰던 20세기 중반의 정치적 소용돌이,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천재의 요람으로 방문해보는 세기 변환기의 빈, 그가 참여한 양차 세계대전, 나쓰메 소세키의 변화와 식민지 남성성으로 돌아본 근대 일본, 그리고 기시감에 빠져드는 푸셰의 프랑스 혁명, 네차예프의 러시아 제국, 그리고 히틀러와 2차 세계대전, 그 광기의 역사.


국민의회, 국민공회, 총재정부, 통령정부... 나폴레옹 황제 즉위. 중학교 시절, 시험을 위해 암기했던 프랑스 혁명. 현재와 단절된 박제된 역사였다. 저자가 기록하는 희대의 기회주의자 푸셰의 일대기로 프랑스 혁명을 되돌아보니 정말 너무 흥미로웠다. 프랑스 혁명을 다룬 많은 책과 영화로도 이해가 어려웠던 것이 이 장을 읽으며 드디어 흐름이 보였다.


문제적 인간의 탄생, 그들이 사유와 실천을 확장해가는 과정. 이 모든 극적 변화를 역사적 조건과의 상관관계로 밀도 높게 설명하는 저자의 묘사와 분석이 놀랍도록 정치하다. 그 문장 또한 깊이가 남달라 각각의 장이 매우 공들여 잘 만든 영화 한 편씩을 감상하는 것 같았다. 문장을 읽는 동시에 머릿속에 영사기가 돌아가며 손에 잡힐 듯 맥동하는 시대와 인물의 일대기가 전해진다.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조감할 수 있는 시대와 인물이 나누는 서사시가 철학적 울림과 여운을 남긴다. (호기심에 이 문제적 인물들과 그 시대를 다룬 영화들을 다시 찾아보기도 했다)


“그는 간청하지 않고 명령하고 선포하고 자극하고 억센 손아귀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의 말들은 대중의 은밀한 소망, 곧 복수욕, 증오심, 원한 감정에 아부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마치 신탁을 말하는 자의 당당한 권위로 대중의 비위를 맞추었다. 대중이 듣고자 하는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 )의 연설장은 빈곤과 궁핍과 좌절의 시대에 휩쓸린 대중의 자기 확인, 자기 탐닉의 현장이었다.” 336면


- ( )안에 들어갈 그는 누구일까. 북아메리카의 그, 광화문 광장 연단 위에 섰던 무수한 그들. 이스라엘의 그. 구치소에 있는 그들. 러시아의 그, 00인 3대 쇼핑 방지법을 당론으로 추진한다는 그들, 대선토론에서 여성혐오로 판세를 뒤집으려 했던 그... 그리고 무수한 그들. 이 모든 그들이 ( )안에 들어가려 경쟁하는 듯하다.

“의회주의적 방법을 거부하고 급진적, 혁명적 전망을 제시했다. 대중의 힘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정권을 타도하고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336면


-의회를 해산시키고, 대중을 선동해 그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려 했던 그는 누구일까?


“( ) 주변에서 ‘지도자 숭배’가 시작됐다. .... 중략 .... ( )를 구세주의 모습으로 그려냈다.” 337면


- 손에 왕자를 쓰고 대선 토론회에 나오고,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이란 생일 노래를 들었던 그는 누구인가?


“탁월한 선동가는 다시 한 번 법정을 자신의 선전장으로 바꾸었다. 내란 수괴로 법정에 선 ( )는 자신에게 부과된 모든 죄목을 스스로 떠맡아 그것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의로운 거사로 바꾸어냈다.” 342

- 이 내란 수괴는 우리가 아는 그 내란 수괴인가?


“( )는 내란죄로 (중략)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중략)로 이송됐다. ( )는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거대한 회의실에서 추종자들을 놓고 강연했고, 하루 여섯 시간씩 방문객을 맞았다. (중략)은 사실 ( )당 중앙당사나 다름없었다.” 342



- 구치소에서 특별 혜택을 누리며 추종자들을 선동하는 그는 누구인가?

“그는 대중을 설득하려면 하나의 적만을 제시하라고 말한다.” 344면


- 앞뒤로 이어지지만 다음 독자를 위해 멈춘다. ( )에 들어갈 인물은? 당장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하지만 히틀러다. 하지만 저 문장들의 주어 자리에 다른 이름이 어른거린다. 히틀러가 선전과 선동으로 대중을 장악하고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해가는 과정은 최근 몇 년간 우리가 겪은 일들과 너무도 유사해, 읽는 내내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이 불안이 매우 구체적인 근거가 있는 것이라 더 두려웠다. (오늘 뉴스를 보자. 여전히 그들은 태연하게 역사를 노골적으로 왜곡하고, 혐오로 대중을 선동하고, 원색적인 선전으로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


이 책에서 자세히 분석하고 있듯이 히틀러의 폭력은 대중의 결핍과 소외에 뿌리내린 박탈감과 원한을 동력으로 삼았다. 대중의 증오와 분노를 해소시킬 분출구를 그는 혐오에서 찾았다. “청중의 흥분과 전율과 열광은 그에게로 다시 돌아와 더 사나운 고발의 폭포수가 되었다.” 약자에 대한 혐오로 화력을 얻고, 다시 약자에게 그 화력을 분사하는 정치적 전략은 불행하게도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 됐다.

저자는 히틀러주의의 교과서인 <나의 투쟁>의 집필 배경, 과정, 그 내용 또한 자세히 다룬다. 저자의 분석을 통해 <나의 투쟁>을 살펴보면 히틀러는 매우 철저하고 치밀한 광기의 소유자였다. 폭력적 광기가 인간성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강한 의지와 실행력을 만나면 세계에 어떤 재앙을 가져오는지 히틀러는 예증한다. 그런데 그 히틀러, 그 <나의 투쟁>의 망령이 지금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지 않은가.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재판 중인 000 전국방장관이 즐겨 읽은 책이 <나의 투쟁>이라는 건 12.3 내란과 그 전후의 시국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이다. 내란 혐의로 재판 중인 전직 대통령의 그간 행적에서 드러나는 세계관과 전국방장관의 <나의 투쟁>은 우리가 호흡하는 시대에 어떤 광기가 깊게 침윤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히틀러 장은 마치 예언서를 읽는 듯했다. 히틀러와 나치당이 치밀한 선전 전략으로 대중을 선동해 성장하고 의회 민주주의를 파괴해 독재를 완성해가는 과정은 우리가 최근 몇 년 동안 목격한 정치의 흐름과 너무나 유사하다.


1923년 내란죄로 수감된 히틀러는 1924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출감했다. (“당은 거의 종교적 공동체로 변신했다”) 나치당 재창설 대회를 연 그는 나치당을 제국의회에 입성시키고, 1933년에는 총리가 되고, 1934년 1인 지배 총통국가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 뒤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참으로 위대한 민중 지도자의 기술이란 민중의 관심을 분열시키지 않고 언제나 어떤 유일한 적에게 집중시키는 데 있다. 민중의 투쟁 의지의 이용이 집중적이면 집중적일수록 운동의 흡입력은 점점 커지고 타격의 강도도 더해지는 것이다.” (344면 히틀러, 저자 인용)


비극의 과거를 과거로만 읽을 수 있는 독자는 복되다. 폭력의 광기가 무덤 속에 있기를 거부하고 대기 속을 떠돌며 후대의 정신에 뿌리 내리고, 개화하는 것을 볼 때 어떻게 전율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들은 우리가 편하게 웃고 즐길 수 있는 희화화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감정적이고, 제멋대로인 멍청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확실한 신념 아래 치밀한 전략과 결집력을 갖췄다. 내란 세력의 강고한 심층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역사의 반복이 우리 세대에게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기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이 책은 확인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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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천재 - 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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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한계상황까지 밀어붙이고 그럼으로써 삶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내 보였던 인간이 이 글이 추적하는 인간이다.” 18 면.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에서 방점이 찍히는 것은 천재와 광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집중한 것은 인간 자체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저자가 이 책 전반에 걸쳐 던지는 질문이다. 이 물음에 대답을 찾는 과정의 실마리가 바로 인간성의 두 요소. 무한한 인간성의 스펙트럼을 펼쳐 보이는 천재와 광기이다. 인간이라는 미궁을 탐색해 들어가는데 끝없이 이어지는 실타래가 광기와 천재이다.

인간의 불행에 관한 외면 없는 대면, 그 불행한 조건을 벗어나고자 하는 극한 모험으로의 투신, 한계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숭고함, 인간의 취약함, 종래에는 드러나고야 마는 인간과 삶의 모순, 모순, 모순.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불쑥불쑥 찾아와 인간의 의지를 무색하게 하는 운명의 가차 없음.

천재도 광기도 역사의 자장 안에서, 운명의 소용돌이 안에서 명멸하며 휘몰아치다 사라진다. 책을 읽으며 경이로움과 진저리를 오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으로 사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변형되고 증폭된다. 책을 덮을 때쯤이면 하나의 질문이 오롯이 떠오른다. 그러니 어떻게 살 것인가. 미궁에서 돌아온 자가 가져온 질문이다. 내 안의 미궁으로 초대될 때마다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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