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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천재 - 루소부터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고명섭 지음 / 교양인 / 2024년 1월
평점 :
1.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아진다. 주로 때늦은 각성이다. 자주 얼굴이 붉어진다. 그때 왜? 돌연한 의문과 이전과는 전혀 다른 해석. 뎅뎅뎅, 공중에서 떨어진 쟁반에 얻어맞은 듯 머리가 울린다. 나이가 드는 건 밖으로 향했던 호기심이 안으로 방향을 바꾸는 건가 싶다.
모든 것을 빨아 들였던 감정의 소용돌이. 몹시도 차갑거나 너무 뜨거워 무언가를 상하게 했던 격렬함. 한시도 그치지 않는 감정의 너울. 용솟음쳤다 곤두박질치는 정동의 파도. 잔잔하게 하지만 단단하게 무언가에 사로잡힘. 한참을 지나서야 그 들뜸이 보인다. 그건 광기였을까.
고명섭 작가의 <광기와 천재>. 천재가 아니라서 천재에 늘 관심이 많고 내 안의 미친 것을 달래느라 늘 에너지를 소진하는 나는 이 책을 가장 좋아하는 가을, 겨울을 위해 아껴두었다. 천재는 너무 멀고 광기는 비교적 가깝다. 그래서 이끌린다. 광기와 천재, 이 둘이 하나의 인간성 안에 전류를 일으키는 양극임을 확인하며 책을 읽는다. 천재는 아득하고 광기는 아찔하다. 숨죽이고 책 속 문제적 인간들에 빠져든다.
‘광기’의 사전적 의미는 미친 듯한 기미이다. ‘미치다’의 사전적 정의는 정신에 이상이 생겨 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이다. 그러니 광기는 보통의 선을 넘어 미침 바로 앞에 선 기미들의 총합이다. 문제는 ‘미치다’인데 그 사전적 정의들에는 ‘보통’과 ‘상식’이란 단어가 중요한 지표로 등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보통과 상식의 의미가 시대와 장소의 소산이라는 것과 따라서 광기의 구성물 또한 시대와 장소의 성분에 따라 달라진다.
광기는 인간성의 스펙트럼 안에 자리한다. 동물로 태어나 사회적 존재로 순치되는 존재. 언어라는 불완전한 도구로 세계를 짓고, 주어진 가치 체계를 따라야 ‘정상’으로 등급 매겨지는 인간. 광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살아가는 게 대단한 것 아닌가. 폭주가 인간성의 한 요소라면 그것을 멈출 수 없는 광기 또한 애써 들여다 봐야할 인간성의 단면이다. 그것이 사유의 폭주라면 더욱 흥미롭다.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 기존의 사유 체계 자체를 의심하여 사유 구조의 살을 발라내고, 그 앙상한 뼈대를 드러내, 그 뼈의 성분마저 분석해내는 치열하고 정밀한 사유의 광기. 이 책은 루소와 푸코, 비트겐슈타인과 카프카가 역사와 사상, 사회 구조 그리고 언어라는 가장 완고하고 친숙한 집을 사유의 도끼로 깨부수는 사유의 도정을 정밀하게 보여준다. 푸코가 그 시대의 정상과 상식의 법전에 굴복했다면? 비트겐슈타인이 동시대 형이상학과 논리학의 한계에 안주했다면? 우리는 어둠이 어둠인줄 모르고, 빛을 등지고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무지에 대한 앎은 앎의 근본이다. 이 광기의 사상가들은 그 앎을 선사한다. 통념의 허구성을 들추어 그 통념을 떠받드는 무지를 밝혀내는 극한의 사유. 어떤 광기는 담론과 정치, 역사의 진보를 견인한다.
천재의 사전적 정의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남보다 훨씬 뛰어난 재주. 또는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이 책의 천재들은 경이로움과 호기심의 세계로 안내한다. 책을 읽다보면 이 타고난 재주와 재능이 특정 분야에서 완벽함에 도달하는 지능적, 기술적 능력에 제한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세계의 틈을 인식하는 예민함,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비타협성, 목표를 향한 집요한 의지, 집중력과 인내력, 투철함과 철두철미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바위 같은 정신력. 이 정신의 힘이야말로 천재를 천재이게 하는 본질임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이 재능들은 ‘미침’으로 해석되고, 오해되고, 처벌받기도 한다. 유무형의 다양한 낙인과 처벌은 천재를 내외부에서 고사시키기도 한다.
이 책은 천재성을 지닌 인간이 어떻게 사유와 실천을 그 한계 너머까지 밀어붙여 그 시대가 공유한 무지하고 편협한,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보통’과 ‘상식’의 장막을 걷어버리고, 세계의 진보를 앞당기는지 철학사, 사상사, 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사상가와 철학자, 작가를 통해 잘 보여준다. 그리고 동시에 천재성을 지닌 같은 인간종이 그 재능을 극한까지 발휘해서 어떻게 세계를 암흑에 잠기게 하는지도 또한 잘 보여준다.
푸셰, 네차예프, 히틀러. 이 이름들을 목차에서 보고 피로감이 들었다. (피로감은 내 모든 회피와 방관을 합리화하는 요즘 나의 만능봉이다.) 지금도 이미 국내외 파괴의 천재들이 타전하는 매일 매일의 뉴스들로 충분히 피로해, 악의 천재성에 대해 이미 알만큼 알아, 그런데 굳이?’ 하는 마음의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의문.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를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다고? 히틀러가 천재라고? (그는 그냥 미친X이고. 할 수만 있다면 핀셋으로 집어내 변기에 던져 버린 후 물을 내리고 싶은 인물이라고.)
하지만 조제프 푸셰편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런 의문과 반감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루소에서 시작한 사상사의 천재들이 충만하게 채워준 호기심과 경이로움은 그 반대편에 선 문제적 인물들, 푸셰, 네차예프, 히틀러에 이르러 전혀 다른 성질로 바뀌어 나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들은 미친X으로 치부해 무시해야 할 인물들이 아니었다. 이런 게으른 단정과 속편한 무시야말로 무지의 한 형태였음을 이 장들을 읽으며 알게 됐다.
이들은 망각해서는 안 되는,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분석되고 알려져야 할 인물들이었다. 저자가 분석하는 이 인물들의 내면 풍경을 통해 확인한 건 악에 대한 나의 총체적 순진함. 천재성은 진선미에서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짓, 악함, 추함의 영역에서도 극한의 천재성이 만개할 수 있다. 천재의 정신적 재능이 그 맹렬함을 유지한 채 악을 실현하는데 집중된다. 그것은 소름 끼치는 일이지만, 역사에서 일어났고,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푸셰, 네차예프, 히틀러를 내달리며 읽는다. 앞의 천재들 편에서, 그들의 사유 전개 과정에서 들어나는 통찰의 깊이에 숨을 고를 순간이 필요했다면, 이 악령의 화신 같은 인물들 편에서는 그들의 악행에 비례해 세계에 뿌려진 재앙에 압도되어 그 전말이 궁금해 문장들 사이로 가속이 붙는다. “리옹의 도살자” 푸셰, “20세기 독재자들의 진정한 선구자” 네차예프, “비현실적인 파괴 열망”의 화신 히틀러. 우리가 목격하는 기괴한 정치(?) 현상들의 원본들.
극단으로 치닫는 국내외 정치인들의 거울상들이 거기 있었다. 악에 관한 그들의 신념과 교설은 오늘날 그 후계자들에게는 교본이 되었다. 이 폭력의 광기는 민족주의, 인종주의, 극단주의, 파시즘이 세를 넓혀가는 오늘을 이해하는 단서들이다. 그들은 오래된 현재이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로 고개를 돌려야 하는 이유를 이 책은 잘 보여준다.
진보의 천재성과 퇴행의 천재성을 나란히 병치해 분석함으로써 저자는 인간성에 대한 안목을 확장시킨다. 천재성의 폭발과 그 배경이 되는 정치사회적 조건을 촘촘하게 교직함으로써 천재가 가진 이상과 망상이 역사를 어떻게 진보시키는지, 혹은 야만으로 되돌리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이 또한 얼마나 모순적인 인간인지 작가는 잘 드러낸다. 흥미롭고 흥미롭다. 저자는 천재성이 발아해 성장하고 만개하는 과정을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놓는다.
변신을 거듭하며 단편적인 평가를 따돌리는 천재, 광기를 자가 갱신하는 광기, 인간의 조건을 재설정하는 천재, 논리의 극한으로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세계를 발견한 천재, 자기를 태워 사유의 불을 밝힌 광기, 인식의 사각지대에 환하게 조명을 비춘 천재. 비극으로 여전히 자기 복제 중인 광기, 자기모순의 함정에 빠지는 천재, “인간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게 하는 광기. 역사와 사상사에 대한 밀도 높은 식견과 사물의 본질을 투시하는 통찰. 이 고성능 확대경으로 저자는 인간성의 만화경을 세밀하게 독자 앞에 펼쳐놓는다.
광기와 천재, 천재와 광기. 광기의 화력으로 발화되는 천재, 천재를 전소시키는 광기. 이 책 속의 인간들은 하나같이 델 것처럼 뜨겁다. 실제로 그들은 그들 이전의, 유무형의 세상을 태워버렸다. 그들이 재로 만든 세계에서 무엇이 새로이 움텄는지가 다를 뿐이다. 루소 이후의, 푸코 이후의,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카프카 이후의, 히틀러 이후의 세계는 그 이전과 다르다. 덕분에, 혹은 때문에 우리는 어제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바깥 세계와의 싸움은 곧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모든 투쟁은 자기 투쟁이다.” (16면)
가을이 와서 물드는 건 산과 들만이 아니다. 대기와 습도 변화는 사람의 마음도 물들인다.(물론 핑계다.) 환경과 호르몬 사이의 화학 작용에 무참히 얼룩덜룩 얼룩질 것인가.(망상이다.) 나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이건 진지하다.) 망상과 감상,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자의적이고 터무니없는 해석과 결론. 너 자신을 알라. 금언이다. 그렇다. 언제나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은 우선 나 자신이다. 나의 명암을 비추는 거울로 양서만한 것이 없다. 인간성의 미세한 부분까지 포착해 정확한 언어로 표현해내는 책은 내 시야의 사각지대를 여실히 드러내준다. 이 책 <광기와 천재>가 그렇다.
“자기 배려란 자기를 어르고 달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진실과 대면케 하고 그 진실을 통해 자기를 바르게 형성하는 것이다.” (109면)
“세상 모든 이의 인생이 각각 하나의 예술 작품이 될 수 없을까? 왜 램프나 주택과 같은 것들은 예술의 대상이 되는데 사람의 인생은 예술 작품이 될 수 없단 말인가?” (109면, 푸코, 저자 인용)
저자는 말한다. 자기가 대면한 진실을 통해 자기를 ‘바르게’ 형성하는 그 과정이 미적 형식을 얻을 때, 우리 각자의 삶이 푸코가 말한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이 책은 역사의 진실, 인간성의 진실에 가닿기 위한 무수한 배를 사유의 바다에 출항시킨다. 그 배는 “광기의 심연을 거쳐 저항과 투쟁의 강을 지나”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앎, 개인 자신에 대한 앎이라는 열린 바다로 향한다. 그 바다는 역사라는 파도로 출렁인다. 책은 개인이 그 격류에 얼마나 속수무책으로 휩쓸릴 수 있는지, 동시에 강한 정신력은 어떻게 그 격랑에도 난파되지 않고 목적지로 향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인간의 삶이라는 거대한 조류를 조망하고 저 멀리 반짝이는 등대(푸코 등대, 비트겐슈타인 등대 등등), 피해 가야할 암초를 가리킨다. 자유라는 저 먼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는 서핑인의 기본기를 돌아보게 한다. “자유의 획득이란 달리 말하면, 세계의 극복임과 동시에 세계와의 화해이며, 자기 자신의 극복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과의 화해이다.” 여러 의미에서 마음 밭을 다져준다. “견딤이야말로 여기서는 저항의 형식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기에 더 없이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