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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 - 여성의 몸, 자아, 욕망, 트라우마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현대의 페르세포네들을 위한 새로운 하이브리드 텍스트
멀리사 피보스 지음, 송섬별 옮김 / 갈라파고스 / 2024년 11월
평점 :
“섹스 역시 도덕적 의무로 만들되, 섹스에 담긴 쾌락은 범죄로 만들어라” p66
걸레, 암캐, 꽃뱀, 창녀, 잡년. 이 단어들을 처음 인지했을 때는 언제였을까, 이 단어들이 추적하는 레이다망에 걸리지 않기 위해 마음 단속, 몸단속을 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사회가 허락하는 경계 안에서 옷을 고르고, 육체를 관리하고, 신체의 가동 범위를 좁히고, 언어를 선택하고, 가방 속 물건을 의식하기 시작한 건 소녀 시절부터이다.
“내게는 지금 일어나는 일을 설명 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 p51
취약함. 안타깝게도 나는 이 단어 외에 ‘소녀 시절’을 설명할 언어를 찾지 못하겠다. 몸의 성장과 더불어 강력한 외적 명령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아름답고 조신한 여성이라는 신화, 공사 공간을 막론하고 소녀를 죄어오는 성폭력의 가능성들, 공기처럼 만연한 미세한 성차별에 대한 선명한 자각. 이 억압의 부조리를 설명할 언어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소녀는 “고통을 선택하는 게, 고통이 너를 선택하게 두는 것보다 낫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나는 이 문장 앞에 멈춰 섰다. 한때 나이기도 했던, 여전히 나이기도 한, 소녀들의 폭식과 절식, 침잠과 과잉행동, 편집증, 자해와 중독에 뒤엉킨 무수한 시간들.
“그 애는 그저 자기가 아는 최선의 방법으로 살아남았던 거다” p57
이 문장들의 주인공 작가 멀리사 피보스는 십대의 그녀를 혼돈 속으로 몰아넣던 세계와 그 혼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통을 선택했던 자신을 만나기 위해 소녀 시절을 향해 항해를 떠난다. 왜? 그 고통의 일렁임이 아직도 세포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소녀를 어둠에 잠기게 했던 억압과 폭력이, 그 상흔이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고통의 근원을 찾아 떠난 피보스의 항해 기록이 이 책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에 펼쳐진다. “항해사이자 수평선인”(31)인 나는 몸의 언어로 물살을 헤치며 멀리 보이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현재라는 수평선으로 나아간다.
"사회가 너를 만든다. 그들은 이미 너를 잡년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p88
사회에는 낙인이라는 것이 있고 낙인은 혐오와 배제를 불어온다는 것을 소녀들은 몸의 변화와 함께 체득한다. 식별 가능한 젠더를 안주시킬 몸이 성장한다는 것은, 그 몸에 사회의 지문이 새겨진다는 걸 의미한다. 조각의 주체는 남성 중심 사회인지라 조각의 칼날은 소녀의 신체와 정신에 가부장적 질서를 날카롭게 새긴다. 소녀들의 육체와 정신은 깍이고, 조여지고, 조립된다. 소녀는 "거울상과 자신을 동일시한다.“p69, 사회에 비춰진 나와 나의 경험, 욕망 사이에서 “자기 소외가 시작된다.”p69
"망각은 과거를 지울 수 없다. 그저 다음 생까지 지고 갈 폐허를 숨길 뿐이다“p58
대대적인 사회문화적 수술대 위에서 소녀들은 두려움과 고통, 의문과 적응, 저항과 순응 사이에서 피 흘리고 분열한다. 소녀 시절이라는 내외과적 수술 기간 동안, 누군가는 순수한 소녀, 모범적인 소녀, 평범하고 수수한 소녀로 판명되고, 누군가는 암캐, 걸레, 꽃뱀, 잡년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이 구분 사이에는 무수한 찢김과 출혈이 있고, 어느 소녀도 이 시험대 위에서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경험을 상처로 규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며, 그 경험이 남긴 결과를 검토하고 싶다.“ p250
그러나 동의한 적 없는 일방적인 숭배와 혐오의 그물 안에 포획되지 않으려 저항하며, 소녀들은 생존해왔고, 생환자로서 목소리를 내는 순간은 오고야 만다. 그러니 <내 어둠은 지상에서 내 작품이 되었다>는 생존기이자 생환기이다. 피보스는 사회적 내러티브와 자신의 실존, 욕망 사이에서 분열되는 정동의 심연, 자신을 자기부정과 자기혐오의 늪에서 길을 잃게 만드는 혼란의 진앙지, 그 어둠, 소녀 시절로 몸을 던져 헤엄쳐 들어갔다. 내 경험을 규정할 언어를 선택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여정이다.
“돌아가자. 그 애가 아주 오래전에 남긴 자국들이 모두 보인다. 나는 물속으로 손을 뻗어 그 익숙한 형태를 어루만진다.” p375
소녀에서 수많은 정체성을 가진 성인으로 성장한 작가는 소녀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둘 수 없다. 동시에 소녀가 절실히 필요하다. 생존과정에서 얻은 풍요로운 사유의 힘을 가지고 소녀를 찾아가는 작가는, 자연과 분리되기 이전의 충만한 활력으로 넘치는 소녀를 만난다. 현재의 나는 용기와 지혜라는 무기를 가지고 과거의 소녀를 구하고, 과거의 소녀는 자연의 권능과 혼돈의 힘으로 현재의 나를 구한다. 소녀였던 나와 성인이 된 나는 서로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어줌으로써 계속 이어질 대화를 시작한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구원을 노래하는 서사시이다. 지금도 쓰여 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어서 쓰여 질 세대를 잇는 여성 연대의 서사시이다.
"수치심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고립되도록 길들인다. 사회 구조는 그 구조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천재적이다.”p122
피보스는 이 책을 통해 회고록, 에세이, 인터뷰, 신화, 미디어 컨텐츠, 문학, 철학, 문화비평을 유기적으로 직조해 여성의 몸, 정체성, 욕망, 낙인과 폭력, 감정의 사회적 속성, 트라우마를 해부한다. 이 지난하고 복잡한 해부 과정이 필요한 이유는 여성의 경험과 고통을 재해석하기 위해서다. 강요된 역할과 수치심과 자기혐오는 “내 몸 바깥의 표현”p150이기에 여성 경험의 사회문화적 토대를 드러내는 것은 필수적이다. 재해석된 여성의 경험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이야기되는 여성의 삶을 스스로 재배치하고 재규정할 수 있는 언어와 힘을 얻는다.
“우리 몸의 진실을 무시하면, 몸이 지닌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p301
이 책은 여성의 생애 과정을 관통하는 혼돈과 고통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그 작업이 이렇게 고통스럽지만 종래는 아름답게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이 포기되지 않는 수행이 여성을 성찰과 해방의 장소로 인도한다는 희망을 증명한다. 이 책은 다시 쓰는 소녀 시대이며, 소녀였던 그들에게 언젠가, 언제나 다시 쓰기를 당부하는 연대의 손길이다.
PS. 피보스의 회고와 그가 수행한 정말 많은 여성들의 인터뷰들을 읽는 내내, 여성 대상 불법촬영, 스토킹, 딥페이크 범죄, 여성혐오가 스포츠처럼 행해지는 지금 우리의 현실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분노와 슬픔으로 자주 책을 덮고 눈을 감거나 누워야 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 소녀 시대가 끝나지 않았으며, 나는 여전히 많은 것을 폐허 속에 감추고 있음을 들여다봐야 했다.
“책(청소년용 성교육을 의미한다.^^)은 내 몸에 일어나고 있던 일이 세상에서의 내 가치를 변화시키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다.”p42 이 문장에 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정말 그랬다. 여성으로서 몸의 변화, 임신 가능성을 알려주는 책이나 어른들은 있었지만, 어쩌면 이후 우리 삶을 더 쥐고 흔들 뿌리 깊은 젠더, 차별과 편견, 성폭력의 가능성들, 그것들에 대해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어떤 실천을 할 수 있는지 얘기해주는 어른들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아무도 없었다.
"내가 청소년 때 이 글을 읽었더라면 나는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고 쓴 김멜라 작가의 추천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너무나 악하고 너무나 뻔뻔해서 기이하고, 고통스러운, 이 기괴한 세계를 살아가는 여성 시민들이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피보스에게 그랬듯이, 소녀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피보스와 소녀가 그랬듯이, 우리도 한때 우리 자신이었던 그 소녀들과 더 없이 매혹적인 연대를 이어가길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