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세상에 나가면 일곱 번 태어나라
아틸라 요제프 지음, 공진호 옮김, 심보선 해설 / 아티초크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은 나를 강인하게 단련시킨 반면 더 이상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견디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1937년, 시인 아틸라 요제프가 입사를 위해 쓴 자기소개서의 일부이다. 그는 이 글을 쓴지 10개월 후 화물열차에 몸을 던졌다. 그의 나이 32살이었다. 기시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더 이상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견디지 못하리라는 자각. 32살 젊은 시인의 문장이 가슴을 때린다. 이 독백은 삶이 자신을 강인하게 단련시키는 중이라고 위무하며 오랫동안 스스로를 단속하고, 닦아세우고, 몰아세웠던 청춘의 자기 고백이다.

사면초가. 태어난 순간부터 시련 속에 시인은 던져진다. 극한의 가난, 세 살 때의 아버지 가출, 열네 살 때의 어머니의 죽음, 일을 해도 어찌해 볼 도리가 가난, 낙인과 조롱, 차별과 처벌. 사방에서 옥죄어 오는 철벽의 현실을 살아내기 위해 시인은 어떻게 정신을 가다듬고, 분투할 수 있었을까.

아틸라 요제프의 바리케이드와 횃불은 시였다. “뼈가 닿는 소리를 아는 나”는 “우리의 입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음식이 아닌 비겁한 침묵”이라는 것을 알기에 “도끼와 칼과 돌을 집으려 손을 내민다.” 그의 시는 세계의 비참과 고통을 증언하고, 반역과 저항의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한다.

이번에 재출간된 아틸라 요제프 시집 ‘세상에 나가면 일곱 번 태어나라’는 국내에서 단행본으로 만날 수 있는 그의 유일한 시집이다. 시편마다 남겨진 거의 1세기 전, 다른 공간을 살았던 청년의 목소리는 지금, 여기 대한민국 청년의 목소리와 공진한다. 여전한 불평등과 차별, 여전한 배제와 억압 속에서 아틸라 요제프의 시들은 일깨운다. 늪이 깊을수록 각성과 저항의 언어를 길어내라고, 어둠이 깊을수록 자기 안에 빛을 스스로 밝히라고. 아틸라 요제프의 음성으로 묻는다.

대답해 보오,

원래 여기 사는 사람이요?

그리움이 무섭게 사무쳐

그치지 않는 이곳

억겁의 세월에 눌린

비참한 현인

말마다 주름마다 표정마다

일그러진 얼굴들

24페이지. <애가> 중에서

우리 각자가, 아니 우리 모두가 무서운 그리움에 사무쳐 그리워하는 그 장소는, 시간은 어디인가? 그곳에 사는 사람은, 그곳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틸라 요제프는 그를 일곱 번째 사람이라 부른다.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할 때에는

적에게 일곱 사람을 보여라-

일요일 하루는 쉬는 사람

월요일에 일하기 시작하는 사람

대가 없이 가르치는 사람

물에 빠져 수영을 배우는 사람

숲을 이룰 씨앗이 되는 사람

야만의 선조들이 보호해 주는 사람

하지만 그들의 재주로는 충분하지 않아 -

너 자신이 일곱 번째라야 해!

29페이지. <일곱 번째 사람> 중에서

아틸라 요제프는 우리에게 태어날 때에도, 저항 할 때에도, 사랑에 빠졌을 때에도, 시인이 되어도 일곱 번 변신하라고, 다시 태어나라고 선언한다. 자기 갱신과 자기 변용. 시인인 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스템과 권력에 의해 대량 복제되는 복사물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을 발명해내는 해방적 주체로 끊임없이 재탄생하라는 기도이다. 일곱 번에 머물 이유도 없다. 여덟 번, 아홉 번... 거듭 태어나는 존재는 전체주의적 폭압에 포획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아틸라 요제프의 ‘일곱 번째 사람’의 무덤에는 단정할 수 없는 무수한 사람이 묻힐 것이다. 또한 그런 이유로 “세상이 너의 비석이 될 거야-” 세상 전체를 비석으로 가진 사람이라니. 상상만 해도 가슴이 확 트인다.

젊은 시인의 전망은 얼마나 눈부신 것이었나. ‘서리’, ‘누런 풀’, ‘유리 제조공’, ‘어머니’ 등 다른 시들을 읽는다. 출구 없는 가난과 노동에 꺾이고 꺾이는 신체와 정신. 이 고단한 목격 속에서 정신의 창발을 위해 애썼던 부단한 그의 고투는 어떤 것이었을까. 시집에 실린 시들이 보여준다. 그의 사랑과, 그의 이상과, 그의 낙담과, 그의 절망을. 그리고 그의 애씀을.

어깨에 봄을 두르고 다니며

가슴에 봄을 먹이는 나

- 중략

아무것도 나의 무릎을 꿇리지 못한다.

잡초로 무성한 어머니의 무덤 말고는, 아무것도.

75페이지, <격려의 노래> 중에서

다시 처음으로. “삶은 나를 강인하게 단련시킨 반면 더 이상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견디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지금쯤 조금은 편안해졌을까. 앞서 간 사람들,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 고된 삶을 살고, 살았던 모든 이들, 그리고 스스로를 애도하는 시를 그는 남겨 두었다. 고즈넉한 별 아래, 따뜻한 빵 조각의 온기를 간직하고 그가 영면하기를.

나는 어른도 아이도

‘헝가리인’도 ‘동포’도 아니다-

여기에 누운 나는 당신처럼 지친 한 사람.

저녁은 고요를 퍼 담고

나는 따뜻한 빵 한 조각인데

고즈넉한 하늘의 별,

강가에 나앉더니 내 머리를 밝히네.

56페이지, <지친 사람>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끝나지 않은 일 비비언 고닉 선집 3
비비언 고닉 지음, 김선형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책들은 한 사람의 지성과 정서에 지워지지 않을 영향을 남긴다. 너무도 당연한 이 사실은 당연한 만큼이나 신비로운 일이다. 가벼운 종이 위에 새겨진 잉크 활자가 한 사람의 마음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그 사람과 내밀한 한 생을 함께 한다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모종의 내통과 연애, 배신과 전쟁을 치루면서.

 

이 에세이는 비비안 고닉이 문자로 건축된 또 다른 세계, 독서에 첫 발을 내딛은 순간부터, 그 미로 같은 궁전의 수많은 언어의 길들을 거쳐, 그만의 건축 설계도, 즉 그만의 글쓰기, 일인칭 저널리즘(personal journalism)을 세공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비비언 고닉은 마르크스와 국제 노동 계급을 절대적 가치로 신봉하는 좌파 집안에서 자랐다. 얼마나 흥미로운지! 사회적 불평등을 향한 열렬한 저항부터 시작해 그녀의 성장 과정은 낱낱이 정치적 삶이었다고 그녀는 회고한다. 독서 또한 그랬다. 그에게 독서는 단 하나의 목적에 복무하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에 얽혀드는 주인공의 행보를 통해 드러내는 대문자 L로 쓰인 Life, 그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그는 책을 읽어왔고, 읽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야기. 여성 해방 시위 취재를 권유하던 동료에게 여성 해방 쪽이 뭔데?’라고 되묻던 그녀가 일주일 만에 완전히전향하게 된 통찰의 순간, 그리고 이후의 의식과 삶의 변화 과정이 에세이에 기록됐다. 이어 그의 고백이 이어진다. 고닉은 흥분에 들떴던 해방과 연대의 전선, 그리고 정치적 분석과 이데올로기, 열렬한 수사와 엄정한 현실 여기저기에서 이론과 실천이 불일치하는 분열된 개인, 그 자신을 발견한다. ‘검증되지 않은 확신이라는 무인지대는 모순적이고 편협한 독선, 고립으로 그를 이끌고 있었다.

 

세계와의 불화와는 또 다른, 자기와의 불협화음이라는 이 절체의 위기. 비비언 고닉은 내면의 번뇌라는 드라마가 그 우주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라고 그 시기를 회고한다. 그악스러운 열패감과 좌절, 좌절. 그는 통찰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 할 수 없음을 똑똑히 깨닫게 된다. 하지만 이 깨달음을 삶에 적용시킬 당사자 또한 온전히 자기 자신이다. 그는 이 두 번째 자각을 안톤 체호프의 언어로 대신한다. ‘타인이 나를 노예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해도, 나 자신을 쥐어짜서 내 안의 노예근성을 한 방울 한 방울 뽑아내야 할 당사자는 바로 나였다’(25)

 

그는 다르게 읽기 시작한다. 읽었던 책들을, 특히 소설들을 다시 꺼내, 다르게 읽는다. 그렇게 다시 펼쳐든 문학의 무대에서 상연되는 중심 드라마는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고 분열된 자아상들의 미스터리였다. 그 미스터리는 주인공들을 무지와 두려움, 수치심으로 질식시키고 있었다. 문학은 거울에 비친 고닉의, 우리의 삶이고, 문학 속 인물들은 우리 자신들이다.

 

반복하는 다시 읽기를 통해 고닉은 글 속에 내재한 힘의 원천 또한 발견한다. 이 힘은 분열하는 자아들이 빠져있는 균열을 봉합하고 갈증을 해소하는데 이정표가 되어 주는데, 그 힘이란 바로 인간의 상상이다. 하지만 이 상상의 힘은 통합된 실존이라는 업적을 지향하지 않는다. 작가는 문학이 견인하는 상상력이란 통합된 실존을 향해 발버둥 치는 인간에게 각인된 분투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에세이 초반에 작가가 썼던 통제할 수 없는 삶의 압력을 버텨내는 문학 속 인물들의 Life를 이끌고 가는 궁극의 힘, 그것은 바로 상상력이었다.

 

비비언 고닉은 여전히 대문자 Life,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읽는다.’ 마찬가지로 그는 독자가 그가 겪은 대로 경험하고, 그가 느낀 것을 체감하기를 바라며 쓴다.’ ‘읽기쓰기는 같은 욕망의 다른 이름들이다.

 

 

삶의 통제 불가능성앞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아연실색하는가. 번번이 고개를 숙이는가.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행히도 이라는 것이 있다. 비비언 고닉이 발견했듯 속에는, ‘문학속에는 삶의 압력에 압사당하지 않으려고 여전히 분투 중인 인물들이 살고 있다. 우리도 비비언 고닉처럼 우리 어깨가 짊어지고 있는 세계의 무게를, 삶의 무게를 느끼려고, 체감하려고 읽는다. 언제고 다시 읽는다.

 

이어지는 장들은 비비언 고닉에게 대문자 Life와 상상력들, 그리고 많은 영감들을 느끼해준 책들에 관한 이야기란다. 자기에게서 시작한 글쓰기는 들뜨지 않는다. 비비언 고닉의 글들이 그렇다. 그가 맞닥뜨렸던 현실, 지금 처한 현실에서 시작한 시선은 겉돌지 않는다. 이 날렵한 관점의 안정감 덕분에 그의 글은 재치와 유머로 여유를 잃지 않는다. 친애하는 작가의 그것도 에 관한, ‘읽기쓰기에 관한 에세이라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르이지 않은가. 거기에 다시읽기라니. 뒤이은 장들이 궁금하다.

 


출판사의 티저북 제공으로 개인적으로 읽고 쓰인 글입니다. 


 









‘내 경험으론, 인생 초년에 중요했던 책을 다시 읽다 보면 긴 의자에 누워 정신 분석을 받는 느낌이 들 때가 꽤 있다.’ - P9

독서는 머릿속 가득한 혼돈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며 순수하고 온전한 안식을 허한다. 이따금, 책 읽기만이 내게 살아갈 용기를 준다는 생각이 든다. - P11

나는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힘에 얽혀드는 주인공의 행보를 통해 (짜릿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대문자 L로 쓰인 Life, 그 삶의 압력을 느끼려고 책을 읽었다. - P13

나는 깨달았다. 일하는 인간이라는 자아 관념을 일차적으로 떠올리지 못하는 무능력, 이제 보기 그것이 바로 여자라는 존재의 핵심적 딜레마였다. - P20

그들이 헤치고 나아가는 삶의 행보는 내가 언감생심 꿈꿀 수 있는 삶과는 결정적인 단절이 있거니와 어느 한구석 닮은 데도 없는데, 독자로 살아온 일평생 나는 그 남자들과 동일시해왔던 것이다. - P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 지음 / 김영사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반팔 티셔츠와 목도리와 외투와 우산과 장화가 늘 곁에 있으니 인간은 날씨 인간이고, 그러니 날씨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싶다.”(7)

 

편한 옷과 모자와 장갑, 장화와 머플러, 그리고 우산과 초콜릿을 늘 곁에 챙기는 나 또한 날씨의 인간이고, 그러니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싶다는 이 철학자의 말은 솔깃하다.

 

철학자 서동욱은 떠도는 구름으로부터 청명한 하늘을 펼쳐내는 니체의 글을 인용하며, “날씨는 바꿀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글에서는 날씨를 바꿀 수 없는 인간의 무능을 동서양의 고전들을 통해 일깨운다. 이 철학자의 결론은 뭘까? 인간은 날씨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에게 인간은 그런 존재이다. 날씨를 만드는 일은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선택과 의지의 영역이다.

 

내 마음은 어둠 속에서도 햇살처럼 커져야 하며, 가뭄 속에서도 그토록 좋아하는 빗소리가 울려 퍼지는 우산 아래의 원형 극장을 만들어야 한다.” (9) 어떻게? “진정 모든 변화는 생각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고 철학자는 말한다. 책의 제목이 나온 사유의 시작이다. 생각은 날씨를 바꾼다. 철학은 세계를, 삶을 만든다, 바꾼다. 의지로서. 이 책은 사유가 사물과 현상을 다르게 해석하여, 종래와는 다른 사물과 현상으로 변이시키는 과정을 보여준다. 철학은 날씨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그래도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는 문장에 의심이 가시지 않는다고? 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이런 의문을 갖는 독자를 위해 철학자 서동욱은 에필로그에 작은 예시를 심어놓았다.

 

차가운 조각상이 된 너의 손을 잡아 내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 중략 - 내 손 안에서 작은 지구가 조금씩 움직여 계절을 바꾸려 했고, 이내 봄과 초여름이 겨우 부화한 동물들처럼 조심조심 움직였다. 그렇게 나는 네 손을, 니 지구 하나를 쥐고 있었고, 두 손이 잠시 피해 있던 외투 주머니 속에선 별자리들이 어지럽게 움직이며 모든 것이 무사할 것이라 말하듯 날씨가 바뀌었다.” 327

 

저자의 예시는 얼마나 따뜻한가. 하지만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라는 문장이 불러오는 첫 번째 이미지는 기후 변화이다. 인간의 이성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는 철학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과학 만능주의, 자본주의는 정말 날씨, 아니 기후를 바꾸었다. 이 책의 제목은 낭만적인 은유가 아니라 현실의 가감 없는 묘사이다.

 

낙관의 가능성은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는 문장을 다시 믿는 것이다. 조물주처럼 기후까지 바꾸어 버린 인류의 오만함을 반성하는 철학만이 변해버린 기후를 그나마 조금이라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손을 녹이는 그 체온을 나눌 수 있는 철학, 욕망의 한계를 스스로 단속할 수 있는 철학이 날씨를, 기후를 바꿀 수 있다. 이번에도, 철학이 날씨를 바꿀 수 있다면, 좋겠다.

 

 

이 책,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는 철학이 세계와 인간을 재발견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그의 철학하기는 철학자와 철학책, 그리고 신화, 역사, 문학, 영화, 그림, 음악, 여기에 장난감, 산책, 혼밥, 게임, 기억, 바다, 우울, 여행, 날씨들 사이를 느긋하게 거닌다. 철학자의 시선은 반복되는 현상과 익숙한 물질이 감추고 있는 기호들을 찾아내고, 파편으로 누설되는 진실에 의거해 세계를 낯설게 재배치한다.

 

그는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통해 해답을 이미 배양 중인 질문하기의 위력과 곤란함, ‘마의 산스타워즈를 관통하는 반복의 창조성, 복수의 텍스트를 통해 선택 가능성을 부정하는 자기기만성에 대해 얘기한다. 철학과 소설, 음악에서 발견되는 자기직면의 탈출(권태와 우울)로서의 여행, 유럽인의 소유물에서 세계 시민의 장소로 거듭 나야하는 바다까지, 철학자의 시선은 열려있다. 관계에 관한 이 철학자의 문장에 공감한다. 서로 다른 채로, 하나 되지 않고, 함께 머물기는 불가능한 이야기일까.

 

 

인간에 폭력은 언제 탄생하는가? 바로 전체라는 저 허구 속에 개별적인 한 삶을 억지로 집어넣으려 할 때 도래한다.” (80)

 

 

남녀 관계에서 인간은 결코 상대방의 소유물이 되지 않는다. 줄곤 상대방을 위해 미소 짓지도 않는다. 각자는 상대방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며 더 많이 미소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서로에게 영원히 들어맞지 않는 퍼즐 조각이며, 전체 그림 같은 것은 결코 맞추어지지 않는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길은 무엇인가? 오로지 상대방의 고유성, 서로 다름, 하나의 전체로 합일하려 하지 않는 상대방의 필연적인 고입을 존중하는 길 밖에 없다” (81)

 

들뢰즈는 자신의 모범으로 삼는 스피노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스피노자는, 타인들이 그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들이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82)

 

어리석은 인간은 자기 앞의 한 사람을 순응시키려 하고, 자신의 식민지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모두와 다른 고유함이라는 타인의 본성이 이를 허용하지 않는 까닭에 그의 시도는 결국 자초하고 만다. 타인은 그가 있는 바 그대로 내버려둘 수 밖에 없다. 각자의 본성에 따라 살도록 놔두기. 이것이 자유인의 공동체가 제일로 삼는 교육이다. (82)

 

 

자기 전에, 깨자마자 늘 날씨를 확인하는 나는 날씨의 인간이다. 마음의 빗장까지 삐걱거리게 하는 바람과 뾰로통한 하늘이 계속된다. 봄은 늘, 이런 식이지, 속으로 볼멘소리를 한다. 하지만 나름의 대처법을 써서 먹장 하늘에도, 공기를 찢는 바람 소리에도 기분을 내지 않는다.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는 철학자의 단언을 믿고, 또 목차를 편다. 오늘의 날씨를 바꿀 수 있는, 제목을 따라가 본다. ‘산책’, ‘염세주의’, ‘유머’, ‘느려질 권리그리고 나이 드는 인간을 위한 철학’,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느려질 권리는 쿤데라의 <느림>을 길게 인용한다. 너무 좋아하는 소설이라 반가워 독서 노트를 찾아보니, 노트해 놓은 부분이 작가가 인용한 부분과 에누리 없이 겹친다. 글에 대한 인상도 길게 남겨 놓았다. 반갑군. 쿤데라. 그의 작품들이 지나간다. 마지막은 무의미의 축제.’ 느림의 공식을 간파했던 쿤데라는 삶의 복잡함 속에서 은밀한 느림의 쾌락을 향유했을까. 그랬기를. 소중한 작가, 소중한 글들.

 

화양영화에서 시작한 느림에 대한 철학자의 사유는 느려질 정치적권리로 맺어진다.

결국 정치적 싸움이란 느려질 권리를 얻는 문제이다. 시간이 느려지지 않는다면, 삶은 그저 노동을 거쳐 사망으로 가는 쾌속 열차인 것이다.” 251

 

 

죽음을 둘러싼 여러 철학적 사유들을 경유하는 챕터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프로이드의 죽음 충동’. 생명 이전의 상태로의 회귀 욕망으로서의 죽음 충동(타나토스). 자주 에로스와 짝해서, 이해되며 넘어갔는데, 아래 인용된 문장을 읽으며, 새삼스레 설득되고, 그만큼 공감하고.

 

모든 생명체의 목적은 죽음이다. (...) 무생물체였던 것 속에 생겨난 긴장은 긴장 그 자체를 없애버리려고 노력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첫 번째 본능, 즉 무생물 상태로 돌아가려는 본능이 생기게 된 것이다.”(314)<쾌락 원칙을 넘어서>, 프로이트, 열린 책들.

 

산책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이든, 언제나 흥미롭다. 철학자 서동욱의 산책에 대한 단상에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줄줄이 등장해 반갑다. 우선, 루소. 이 책에서 작가는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인용하는데, 얼마 전에 인상 깊게 읽었던 에니 아르노의 말에서 노년이 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이 루소의 바로 이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 또한 제발트의 전원에 머문 날들속에 루소의 글을 읽고 몇 년 전에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매일 산책하며 보낸 여가 시간은 종종 유쾌한 명상으로 채워지곤 했는데, 그 기억을 잃어버려 몹시 안타깝다.” 175 (장자크 루소, 문경자 역,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문학동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산책을 빼놓고 어떻게 울프를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런던 거리 헤매기댈러웨이 부인을 통해 그녀는 산책을 통해 보게 되는 것, 생각하게 되는 것, 의미가 부여되는 것에 대해 써왔다. 철학자가 인용한 울프의 산책에 대한 문장은 이렇다.

 

걸을 때는 이런 수만 가지 흥분이 지속되지만, 내일이면 오래되고 죽어버린 구절을 쓰기 위해 앉아 있어야 하죠. (중략) 나는 걸으면서 계획을 세우겠어요.”176 (케리 앤드류스, 박산호 역, ‘자기만의 산책’, 예문아카이브)

 

다음은 니체이다. 산책을 통해 사상을 얻어낸다는 니체의 생각에 동의하며 철학자 서동욱은 산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더 이어간다. “책상과 의자와 서재가 없던 문명의 저 이른 시기부터 인간은 사유해 왔다. 그때의 생각이란 걷는 일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걷는다는 것은 생각함과 몸의 움직임이 일치하는 축복의 체험이다. 불길을 키우듯 산책이 생각의 숨구멍을 열어준다.” 177 걷기를 통해 엉켜있던 생각의 실마리가 풀린 경험을 해본 이들은 철학자의 이 문장에 공감하리라.

 

그리고 친애하는 로베르트 발저. 발저의 산책자를 읽으며 얼마나 달떴던가. 책장에 있는 그 책만 떠올려도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철학자는 산책에 대한 많은 것들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며 다음의 문장을 산책자에서 인용한다.

 

산책을 하다보면 수천 가지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는데, 그것이 내게는 얼마나 아름답고 유용하고 쓸모 있는 일인지 모릅니다.”179

 

 

마지막은 프루스트다. 철학자는 산책이 한 인간의 삶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고 단언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 증거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사실 두 개의 산책로에 관한 이야기다. - 중략 - 한 번의 오후에 다 가볼 수 없는 이 두 산책길은 평생 동안 소설의 주인공 마르셀의 탐구 대상이며 사색거리다.” 180

 

여러 작가들의 산책을 경유해 사색을 이어간 철학자의 산책론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산책에는 삶의 중요한 진실이 있다. 산책에는 단조로움과 새로움이 결합해 있다. 달리 말하면 반복과 반복을 통해 얻는 새로움이 결합해 있다. 늘 똑같은 길로 들어서지만 그것은 늘 새로운 하루이다. 이것이 일상의 구조 자체라는 것 - 중략 - 산책이 그렇듯 반복이 새로움이 아니라면, 일상은 그저 형벌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작과 비평 203호 - 2024.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창작과 비평 2024년 봄 203호는 ‘세계서사,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화두로 시작된다. 기후 변화, 전쟁들, 양극화, 우익화와 반지성주의가 휩쓸고 있는 세계사의 위기 속에서 한국은 현재 어떤 위치에 있으며, 어떤 전망을 가질 수 있을까. 특집으로 구성된 ‘세계서사, 어떻게 쓸 것인가’는 서동진 교수, 박노자 교수, 이일영 교수, 이혜정 교수가 글을 보탰다.

서동진 교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이후 개인의 경험과 자본주의의 총체성을 연결하는 대안적 상징 서사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박노자 교수는 한국의 글로벌 담론의 변화 과정을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별할 수 있도록 서구 중심주의와 주체적 담론의 저항적 움직임으로 큰 맥을 잡아 살펴본다. 이일영 교수는 우리 경제의 현 상황을 세계 경제라는 복잡한 맥락 안에서 분석, 예측하는 ‘한반도 경제’라는 총체적 인식의 틀로 현재의 한국 경제를 읽어낸다. 끝으로 이혜정 교수는 “패권 불가능/부재의 궐위 시대”를 맞아 여러 위기들이 착종되어 나타나는 국제 정세의 지형을 미국의 정세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창비 2024년 봄호에서 눈에 띄는 소설은 전춘화의 ‘여기는 서울’이다. 작가 전춘화는 87년생으로 길림성 화룡시 출신으로 2023년 소설집 ‘야버즈’로 국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번에 실린 단편은 20대 조선족 여성이 서울에 정착하는 과정을 그린다. 화자는 제도권 교육의 경험 차이, 역사에 대한 상이한 이해와 해석, 자본주의의 적나라함을 경험하면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자아를 이해해 보고 싶은 갈증”과 “사춘기 때보다 더 결렬한 혼란”을 겪는다. 우리 사회의 뚜렷한 구성원이지만 그 내밀한 이야기를 듣기 어려운 주체의 목소리이다.

‘이토록 문제적인 인간’이란 타이틀로 황정아 문학 평론가는 켄 리우의 포스트 휴먼 소설들을 들여다본다. 켄 리우의 소설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포스트 휴먼 되기의 기만성과 폭력성에 대해 질문한다. 그의 소설 속에서 “알고리즘으로 환원되지 않는 단독성의 성취”라는 과제를 황정아 문학 평론가는 발견한다. 단독성의 성취는 “가상화 되지 않은 물질 세계”를 돌보는 일로 이어짐을 평론가는 강조한다. 포스트 휴먼 소설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물음으로써, 인간 ‘되기’에 대한 질문에 답하도록 한다.

작가 조명 코너에서는 작년 ‘니들의 시간’을 출간한 김해자 시인의 육성을 듣는다. 화석처럼 굳지 않기 웃는 ‘생존형 웃음’들을 알아보는 시인에게 ‘희망’이란 발굴해내려 노력해야 하는 투쟁이다. 시인은 비극과 참극 속에 울고 있는 사람에게 ‘내 탓이 아니다’라고 말해 줄 있는 반대의 거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구부려 앉아야 얼굴이 보이는 코딱지풀 같은 말, 흰 부추꽃이나 무논 잠시 비껴가는 백로 그림자 같은”(당신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웃었다, 중) 382 시의 귀는 심장 가까이 있어야만 한다는 시인의 목소리는 백로 그림자, 코딱지풀 같이 고요하고 낮은 곳을 향한다.

4.16재단 상임이사 백래군 선생은 4.16운동 10년을 되돌아본다. 10년은 네 시기로 나뉜다. 모든 시민이 참담함과 애도 속에 참사에 주목했던 참사 직후 시기인 첫 번째 기간, 두 번째 시기는 “시민의 힘으로 부정한 권력을 끌어내린 승리의 시간이다.” 세 번째는 진상 규명에 소극적이었던 문재인 정부, 마지막은 윤석렬 정부다. “기소된 관련자들은 무죄로 석방되거나 대통령 사면으로 풀려났다. 생명안전공원 건립은 지연되고 있고, 4.16 재단에 대한 예산 지원은 삭감되었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사회적 참사인 10.29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다. 사회적 참사를 해결하는 정부의 태도는 더욱 퇴행했다.

박래군 선생은 4.16운동이 이전의 사회적 참사 이후의 운동들과 구별되는 사회적 운동의 이정표로서 갖는 의미들을 발견한다. 먼저, 유가족들이 피해자의 위치에 머물지 않고 운동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 이 운동의 우선순위가 보상이 아닌, 진상 규명-책임자 처벌이었다는 것, 또한 기억의 중요성을 일깨워 수많은 기록물들을 축적했다는 점, 더 나아가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은 다른 재난 참사 피해자들과 모여 ‘재난참사피해자연대’를 구성했다는 점 등이 이를 증명한다. 끝으로 기후 위기와 결합된 재난들이 예정된 시대에 생명 존중과 안전 사회를 공공의 의제로 만들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후진적인 정치, “재난 참사를 지우려고만 하는 국가와는 결별”해야만 한다고 박래군 선생은 말한다. 희생자들에게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줄 책임이 시민들에게 있다.

“장터가 아름다워서인지 여느 장과는 다르게 대맹장은 왠지 고즈넉하다. 흔한 호객 소리, 흥정하는 소리, 엿장수의 트로트 메들리.... 같은 소리가 없다. 조용히 팔고 조용히 산다. 다만 장터의 하늘을 뒤덮은 고목 나무 속에서 새가 울고 매미가 울고 가을에 낙엽이 우수수 쏟아지면 어물 장수는 낙엽이 묻은 생선을 팔고, 옷장수는 낙엽이 내려앉은 옷을 팔고 채소장수는 낙엽과 함께 채소를 판다. 팽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 엄나무, 말채나무, 벚나무 이파리들이 1648년의 이파리가, 1717의 이파리가, 1854년의 이파리가 2024년의 생선과 함께, 옷과 함께, 채소와 함께 장바구니에 담겨 온다” 404

이번 203호에 실린 공선옥 작가의 산문 ‘담양산보’의 일부분이다. 아름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판결 너머 자유 - 분열의 시대, 합의는 가능한가 김영란 판결 시리즈
김영란 지음 / 창비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판결 너머 자유 / 김영란

극과 극, 강대 강, 안면몰수와 몰염치. 아침마다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파죽지세의 전장을 인터넷 작은 창으로 접한다. 우리 정치의 현장이다. 정치적 언어들은 자극성과 노골성을 매일 갱신한다. 정치 세력들이 쏟아내는 반지성적인 언어들은 시민들에게 다그친다. 당신은 어느 줄에 서겠습니까. 그럴수록 중간 지대는 좁아진다. 정치 세력의 언어는 시민의 일상에 침윤한다. 모 아니면 도, 제로섬 게임의 언설은 시민들의 사고와 언어까지 오염시켰다.

분열의 시대다. 김영란 선생이 최근 펴낸 이 책 ‘판결 너머 자유’의 프롤로그에 인용된 이청준의 ‘전짓불 앞의 공포’는 여전히 여기의 현실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국면들을 뚫고 나갈 수 있을까. ‘판결 너머 자유’는 시민들의 공존과 상생을 위한 최소한의 합의를 찾을 수 있는 해법에 대한 고민으로 출발한다.

김영란 선생은 극단의 사회 분열을 막는 해법의 실마리를 롤스의 정의론에서 찾는다. 서로 다른 가치관, 신념체계, 정치관을 가졌더라도 바람직한 사회를 위한 최소한의 의견 일치의 영역을 확보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롤수의 정의론은 시작된다. 이렇게 복잡하게 분화된 사회에서 시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공통의 합의 영역이 남아 있을까? 단순하지 않은 문제이기에 이런 질문은 당연하다. 롤스도 그 복잡성을 이미 깊이 파악했다. 그만큼 롤스의 정의론은 고도로 심화된 가정과 예측, 전제들을 통과한 정치 이론이다.

다양한 신념체계와 이해관계를 장착한 이슈들을 공공의 정의 실현을 위해 어느 선에서 어떻게 조정해야 할까. 롤스의 정의론에서 제시된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에 이르게 위한 대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롤스가 그의 사유의 기본 전제들로 정의한 몇 가지의 개념들을 숙지해야 한다. 공적 이성, 포괄적 신념체계, 정치적 정의관, 원초적 계약, 무지의 베일, 중첩적 합의 등이 그것이다. 이 개념들은 개인이 정치적 판단을 할 때 어떤 사고 과정을 통해 결론에 이르는지 자각하게 된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앞으로 시민 개인으로서 공적인 판단을 할 때 무엇을 염두해 두어야 하는지 길잡이가 되어 준다.

이 책 전체를 포괄하는 가치는 공적 이성과 중첩적 합의이다. 롤스에 의하면 공적 이성이란 “민주주의 한 시민으로서, 합당하게 받아들일 만한 혹은 이성적인 추론 과정을 의미한다.”(55) 중첩적 합의란 “기본적 가치관이나 세계관, 진리에 대한 신념 등이 다르더라도 바람직한 사회적 질서에 대하여 대체로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일단 그 중첩된 부분에 한해 성립시키는 합의를 말한다.(49)

김영란 선생은 우리나라 대법원 전원일치 판례들을 위에서 언급한 롤스의 핵심적 전략들로 분석한다. 이 작업은 공적 이성의 표본으로서 우리 대법원의 현주소와 역할을 확인시켜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공적 이성을 대표하는 대법원 판사들은 대립한 신념이 첨예하게 경합하는 사건에서 법의 적용을 두고 다양한 입장을 가진다. 각각의 판결에 따라 판사들은 수동적인 현행 법의 적용자로 머무는가 하면, 바람직한 사회상을 위해 능동적으로 법을 해석하고, 법을 발견해낸다.

공적 이성의 얼굴로서 우리 대법원이 현재 어떤 모색들을 하고 있는지 확인시켜주는 각각의 판례들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우리 사회가 실로 복잡한 가치와 이해가 경합하는 사회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준다. 그런 만큼 판결에 의해 사회적 쟁점들을 가시화하고, 그 쟁점들에 대한 숙의를 통해 헌법과 정의라는 가치를 갱신시키는 대법원 역할의 막중함을 생각하게 한다.

나와 가치관이 대척점에 있는 정치적 이슈를 접했을 때, 그 이슈가 사회가 분열로 치달을 때, 시민 개개인은 최소한의 합의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을까. 또 그 최소한의 합의를 평가할 어떤 준거 기준을 가지고 있을까?

롤스의 정의론에서 제시된 개념들,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를 위해 이 책에서 소개한 그의 정치 판단 과정은 대법원 판사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시민들 먼저 공공의 분열을 최소화하기 위해, 합의의 기준들을 가져야 한다. 공적 이성과 중첩적 합의는 시민들의 정치 판단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우리가 정치적 이슈의 판단에 앞서 고려해야 할 기준들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총선이 다가온다. 어떤 후보가 분열을 방편으로 표를 얻고, 권력을 쟁취하여, 사회를 더 큰 혼란으로 이끌지, 또 다른 어떤 후보가 사회의 공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정의의 개념을 공공의 관점에서 확대시킬지 유권자들은 눈을 밝혀 분별해내야 한다. 이 책에서 소개된 롤스의 정의론과 대법원 판단 과정이 보여준 정치적 사고는 후보를 선택하는데 유용한 정치적 판단의 도구가 된다. 총선 전 필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