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연인
에이모 토울스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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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것, 원하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 같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되기도 한다. 평생을 미망에 사로잡혀 자기기만 속에 허우적거리는 삶. 한 때의 스케치여도 여성 인물들의 단호하고 변명하지 않는 태도가 산뜻하다.


인생의 어디쯤에선가 그들 또한 후회하고 번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또한 어떠한가.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 속 인물처럼 모였다 흩어지는 한 때의 인물 군상들이 그려내는 정서가 아련하다, 그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나이 듦의 초연함도 좋다. 어쩔 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게 우리들 삶이란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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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블루칼라 여자 - 힘 좀 쓰는 언니들의 남초 직군 생존기
박정연 지음, 황지현 사진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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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흐물흐물해지는 날에, 생의 단단함을 느끼고 싶을 때 짱돌 대신 쥐어들고 싶은 책이다. 깨지지 않는 마음들, 스스로의 존엄을 단단하게 움켜쥔 사람들이 이 책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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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블루칼라 여자 - 힘 좀 쓰는 언니들의 남초 직군 생존기
박정연 지음, 황지현 사진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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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연초에 읽게 되어 운이 좋다. 돌처럼 단단한 사람들의, 흙 같이 살리는 책. 이런 수식어조차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책이다. 오랜 경험에서 육화된 지혜를 심상하게 전하는 화법이 단백하다. 그 단백함의 깊이야말로 진실에서 나오기 때문이 아닐까. 중언부언 사족은 다 털어내고 고갱이만 툭툭 내놓는다. 그들의 생생한 육성에 머리가 화하게 시원해진다.



힘, 당당함, 떳떳함, 자부심, 자유.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단어들이다. 이 여성들을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해 준 현장의 노동과 임금이 그들 삶에 준 목록이다. 물론 그에 합당하게 그들이 치른 대가는 매일의 노동과 버팀이었다. 버티고 애썼던 시간들 또한 인터뷰 전반에 녹아 있다.



인터뷰이들은 남초 직군 현장에서 여성 노동자라 겪게 되는 성희롱과 부당한 처사에 대처했던 경험들 또한 들려준다. 일터의 조건,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대처법들에 그들의 지혜가 담겨있다. 노조가 필요한 이유 또한 이 책을 읽으면 더 분명해진다.



기획도 좋고, 인터뷰 자체도 군더더기 없이 너무 좋다. 다양한 여성 노동 현장의 당사자들을 인터뷰한 책들이 더 많이 출판되었으면 좋겠다. 사회학이나 여성학 측면에서 여성 노동을 분석한 책들은 그것들대로 필요하지만, 현장의 여성 노동자 당사자들의 목소리도 더 알려져야 한다. 이론서, 사회비평과는 확연하게 다른 현장감과 울림이 있다.



30년 전 이 책을 읽었다면 내 삶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때 나는 내 성향을 제대로 알았을까. 다른 선택지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런 의문들이 이어졌다.



마음이 흐물흐물해지는 날에, 생의 단단함을 느끼고 싶을 때 짱돌 대신 쥐어들고 싶은 책이다. 깨지지 않는 마음들, 스스로의 존엄을 단단하게 움켜쥔 사람들이 이 책속에 있다.



모든 인터뷰는 여성 노동자들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로 끝을 맺는다. 올 한해 (아니, 내 남은 평생) 듣고 싶은 덕담을 몰아서 다 들은 것 같다. 이 책에서 제일 연장자인 71세(올해) 레미콘 운전 노동자 정정숙님의 말을 나누고 싶다. “어른이 되고 생활하면서 당당하게 사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아요. 각자의 자리에서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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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낮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8
버지니아 울프 지음, 김금주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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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 겨울에 읽으려고 일 년을 아껴둔 책. 울프의 두 번째 장편 소설인 만큼 소설을 쓰기 시작할 무렵 울프의 마음속을 채웠을 의문과 문제의식, 동기들을 엿볼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지적인 욕망을 간직한 채 철저히 가정의 천사 역할을 수행하는 캐서린. 캐서린이 현대에 태어났다면 천문학이나 수학을 전공했겠지.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과 내면에 들끓는 지성의 요구들 사이에서 절충안을 찾아내려는 캐서린. 그 타협안은 이성애 결혼. 나는 캐서린이 비혼을 선택하기를 바라며 책장을 넘겼다. 여성에게 가혹했던 시대의 한계 안에서 자기에게 충실하려는 캐서린의 심리적 분열과 현실적인 대안을 찾으려는 분투를 울프는 집요하게 따라간다.


극적인 반전으로 독자에게 일시적인 쾌감이나 해방감을 주기보다 인물의 구체적인 고뇌와 갈등, 망설임 자체를 극세밀화처럼 묘사하는 울프. 따라서 인물들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이야기 전개보다 인물의 내면 풍경이 더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다.어떻게 이렇게 내밀한 심리의 흐름을 어떻게 이렇게 세밀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캐서린이 메리와 연인이 되기를 바랐다. 자신이 선택한 가치를 좇는 여성. 자기 마음의 고삐를 단단히 꼭 움켜쥐고 자기가 선택한 길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는 여성. 캐서린, 메리, 데넘 사이에 유지되는 거리들이 좋았다. 타인에 대해 넘겨짚지 않고, 무심할 줄 아는, 존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 (끊임없이 여성에게 훈계하고, 맨스플레인하는 허영에 찌든 남성도 등장한다. 울프는 이 남성을 통해 여성을 미숙한 존재로 규정하고 통제하고 가스라이팅하는 거의 전형화된 남성들의 행태를 자세히 묘사한다. 그럼에도 다른 인물들은 이 남성을 끝까지 존중한다. )


“슬픔 자체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 슬픔의 고통은 그녀가 자신을 배반하는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아, 이 슬픔을 알지. 이 날카로운 슬픔. 내가 나를 배반했을 때의 그 굴욕감. 하지만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던 인물(메리)은 돌아선다.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눈물은 억제할 수 있었다. 이 순간은 그럴 것이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캐서린을 대면할 것이고 좌절된 용기에서 만회할 수 있는 것을 만회할 것이다.” 


슬픔과 굴욕감에 매몰되지 않고, 만회할 수 있는 것을 만회할 것이라고 현실을 직시하는 여성. 울프의 여성답다.



2.

 

나는 계산을 해서 뭔가를 논하고 싶어 - 인간과 관련 없는 뭔가를 말이야. 나는 특별히 사람이 필요하지 않아. 헨리, 나는 엉터리야 - 너희들 모두가 나를 잘못 알고 있다는 뜻이야. 나는 가정적이지도 않고, 혹은 아주 현실적이거나 분별 있지도 않아. 정말이야. 그리고 만약 내가 어떤 것을 계산하고 망원경을 사용할 수 있다면, 그래서 산술을 논해야 하고 내가 틀린 부분을 알게 된다면, 나는 완벽하게 행복할 거야.” 257

 

 

 

3.


"어떻게 당신은 감정에 대해서만 계속 얘기해요! 정말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일에 대해 그렇게 많이 말하지 않고 늘 걱정하지 않는 편이 더 낫지 않나요?" 316


너무 웃겼던 장면. 감정을 잘 말하지 않는 캐서린의 성격에 대해 약혼자였던 남성(여성을 자신의 훈육이 필요한 미성숙한 존재로 보는 바로 그 남성)이 또 불만을 얘기하자 캐서린이 갑자기 저렇게 소리친다. 이성적인 존재로 스스로를 평가해온 남성의 유치한 실상을 한 장면으로 유머러스하게 드러내는 울프. 

 

"그녀는 억지로 말할 수 없었다." 317


시원하다. 


4. 


이 금빛 테두리가 소멸된다면, 만약 삶이 더 이상 환상으로 에워싸여지지 않는다면 (하지만 그것이 정말 환상이었을까?) 그러면 그 삶은 최후까지 견디기에 너무 황량한 일일 것이다. 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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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관하여 - 저항의 문장가 윌리엄 해즐릿 에세이의 정수
윌리엄 해즐릿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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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를 이해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글이 있다. 슬며시 그 작가의 마음 안으로 끌어당겨 주는 글. 그가 세계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망과 온기, 깊이와 조도, 그 바탕을 가늠하게 해주는 글. 윌리엄 해즐릿의 에세이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대하여> 속 에세이들이 그렇다. 특히 후반부에 나란히 실린 두 에세이를 통해 나는 해즐릿의 글을, 이 작가를, 이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그 사람 해즐릿.

국내에 먼저 소개된 해즐릿의 두 권의 에세이집을 차례로 읽고 작가의 혜안과 필력에 놀라움을 느꼈다. 찌르는 듯한 통찰, 세공한 듯한 표현. 본질을 파고드는 타협 없는 사고와 더 없이 세밀하고 정밀한 문장은 후련함을 주었다. 앞선 에세이집들과 비교해 이번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대하여>는 인간과 인생에 대한 해즐릿의 좀 더 내밀한 사유를 엿 볼 수 있어서 각별하다.

청춘을 묘사하는 해즐릿의 문장은 옳다. “청춘은 영원의 예감 속에 살며, 이 예감이야말로 그들을 살아 있게 하는 불꽃이기 때문이다.” 영원의 예감,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가. 청춘, 푸른 봄은 가을과 겨울을 모른다. 아니, 몰라야한다. “청춘은 삶이라는 잔을 갈증 난 듯이 들이키지만 그 잔은 바닥나지 않는다. 기쁨과 희망이 늘 넘쳐흐르고 세상의 온갖 사물을 향한 욕망이 청춘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 아, 찬란하다. 결핍과 낙담에 침잠해 있어도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열정의 창은 늘 열려 있던 시절, 고통조차도 흘러넘치던 시간. 과연 그렇지 않은가.

해즐릿은 청춘의 환희를 이렇게도 표현한다. “시간과 자연이 우리 발아래 모든 보물을 쏟아 붓는 듯한 감각 속에서 우리는 존재하고 행동하며 세상을 향해 문을 연다.” 불행 중에도 온 몸을 순환하는 혈관에 청신하고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감각, 작가는 그 미묘한 느낌을 놓치지 않는다. 해즐릿의 이 싱그러운 청춘 예찬이 뒤이어 몰려올 삭풍의 엄혹함을 대비시킬 청춘 만가(輓歌)임을 예상하면서도 나는 그의 문장에 노곤히 빠져든다. 간지럽고 달짝지근하고, 호방한 기운에 잠시 부푼다. 향긋한 봄바람이 스친다.

만년(晩年)을 묘사하는 해즐릿의 문장은 옳다. “인생의 축제 행렬이 거의 다 지나갔을 때, 가면극이 우리를 배신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과 시간의 기만을 간파하고 그 행렬에 끝이 있음을 믿게 된다.” 작가는 프랑스 혁명이 미완으로 저물었을 때 더 이상 젊다고 느낄 수 없었다고 적었다. 청춘의 끝은 나이 듦과 신체의 노화와 늘 같이 가지는 않는다. 청춘의 피날레는 마음에서 먼저 울려 퍼진다. 나의 프랑스 혁명은 언제였나. 나는 언제 더 이상 스스로 젊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그 자각은 불현 듯 찾아온다. 그리고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자각은 나쁘지 않고, 그 자각과 함께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삭풍은 정신을 맑게 한다.

“모든 것이 겉은 아름답지만 속은 탐욕과 부패로 가득한 회칠한 무덤이다” 세계에 대한 충만한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해체된 무대 위의 황량함과 가면이 벗겨진 얼굴의 옹색함을 직시하는 서늘한 감각이다. 인간과 삶의 실상에 대한 앎은 청춘을 내어준 대가다. 환영이 사라진 자리에 작은 진실의 조각들이 먼지처럼 엉켜 뒹군다. 심상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진실의 보풀들을 알아보고, 겸허하게 품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축복이 아닐까. 해즐릿이 말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항상 타오를 “존재의 흔적”은 소박하지만 숭고한 이 지혜가 아닐까 싶다.

“품위 있게 삶을 마무리 할 수 있다면, 큰 병을 치르지 않고 마음마저 고요하고 단정한 정물화처럼 정돈된 상태에서 무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내가 원하는 전부를 해즐릿은 이렇게 “단정한 정물화”처럼 써놓았다. 하지만 그런 정물화는 현실에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해즐릿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문장이 더 쓸쓸하게, 진실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결국 사소한 상황에 휘둘리는 존대다. (중략) 우리는 사소하고 성가신 현실의 희생양이 된다. 인간의 정신은 숭고하게 부풀 수 있지만, 동시에 비굴과 혐오와 편협함에 익숙하다.” 이래서 해즐릿이 좋다. 그는 인간과 인생에 환상을 품지 않는다. 냉정하다. 우리는 나날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찢겨 나가고, 죽음은 남은 마지막 조각을 무덤으로 데려갈 뿐이라고 해즐릿은 쓴다. 그럼에도 “우리의 욕망과 기대는” 언제나 과도하다고 작가는 꼬집는다. 그래서 비굴해지고 편협해진다는 것이다. 삶의 진상이 여실해진 후에도 여전한 욕망은 얼마나 처치 곤란인가.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대하여” 제목부터 노화를 금기시하고 죽음을 외면하는 현재의 문화를 향해 날리는 날 선 냉소와 같다. 죽는 그 순간까지 청춘이기를 강요하는 자본과 미디어의 확성기들, 그 강요를 기꺼이 경쟁하며 수행하는 개인들이 만든,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을 기대하는 거대한 방부제 덩어리로 변해가는 세계를 떠받드는 망상. 그 망념의 뿌리가 바로 이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이 아닌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이 금언을 새긴다면, 삶의 많은 것들이 단출해질 것이다. 결핍감과 자기기만, 광대짓과 헛발질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해즐릿의 표현대로 언젠가 “존재가 비존재로 전환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은 내가 채웠던 수많은 족쇄를 여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영생에 대한 착오와 착각이 일으킨 무수한 사고와 수행의 오작동들이 우선 진정되기 시작할 것이다.

“사람들이 낙엽처럼 떨어지고 시간의 낫에 풀처럼 베어 나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청춘을 되돌리는 방편일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감한다.” 삶의 유한성을 절감할 때야말로 시간의 농도는 짙어지고, 순간이 밀도 높게 경험되지 않던가.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녹여내 “단 하나의 강렬한 공감의 순간으로 응축”시키는 마법의 시간장. 그 안으로 진입하는 만년의 입춘.

이렇게 두 번째 청춘은 이전과는 다르다. 이 청춘은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이제는 안다. “이 삶이 언젠가 끝날 수 있다”는 진실을 안다. “존재의 허무”를 수신한 후의 청춘이다. 이 청춘은 처음처럼 다시 삶을 경험한다. 하지만 더욱 강렬하게 체감한다. “삶은 참으로 기묘한 선물이며, 그에 따르는 특권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이 새로운 봄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그 모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즐릿은 이 에세이로 말을 건다.

해즐릿은 무상함이 안겨주는 찬란함을 독자에게 일깨우고 이른 낙엽처럼 표표히 떨어져 세상을 떠났다. 갈바람에 가벼이 나부끼며 비상하는 고엽들. 그 사이로 설핏 비치는 삶의 기묘함과 신비함. 그걸 보았냐고, 이 가을 해즐릿이 묻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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