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은 저항이다 - 시스템은 우리를 가질 수 없다
트리샤 허시 지음, 장상미 옮김 / 갈라파고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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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실현. 이 네 글자는 처음 본 이후(아마도 중학교 교과서이지 않을까)부터 지금까지 내게는 난센스다.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데!, 혹시 내가 안 보이나? 뭘 실현하라는 거지?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라는 건가? 노력해서 무언가를 성취해야 내가 나라는 말인가. 실현하지 않으면 나는 없는 건가. 이상하게도 아직도 가끔 저 글자들이 불쑥불쑥 머리에 떠오른다.

자아실현에서 발아된 흑마술은 노력, 인내, 극기, 극복, 도전, 경쟁, 자기계발, 성취, 성공이라는 주문들로 자본주의의 폭력과 모순을 연기처럼 사라지게 한다. 주문에 마취된 개인들은 열심히 자기를 채굴하기에 여념이 없다.

“자본주의는 저항과 파괴에 직면해야 한다. 우리의 시간과 능력을 끊임없이 탈취하는 전 지구적인 폭력이다. 교정이 불가능하며, 언제나 신성한 몸들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는 사악한 힘으로 작용해왔다.” p146

<저항은 휴식이다>의 저자 트리샤 허시의 진단이다. 너무 과격한가? 나의 어떤 시간들, 어떤 이름들, 어떤 얼굴들, 어떤 기사들이 떠오른다. 저 문장들은 과격하지 않다. 허시는 이 책에서 ‘과로 사회’와 그 원인인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갈아 넣는다’, ‘영혼까지 털린다.’는 말이 일상어로 쓰이는 한국 사회에서 허시의 자본주의에 관한 문장들은 너무도 현실적이다.

“휴식은 저항이다”는 허시의 정치적 선언이다. 이 선언은 유구한 자본주의 착취로부터 해방되어 소진된 삶과 해체된 공동체를 복원하고, 우리 육체와 영혼의 신성성을 회복할 것을 지향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허쉬는 휴식을 탐구하고 공동체를 꾸리는 단체 ‘낮잠 사역단’을 창립하고, ‘낮잠의 주교’로서 휴식을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강력한 문화로 정착시키기 위해 전방위로 활동 중이다.

“나에게 진정한 해방이란 끊임없이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면서 할 일 목록에 오른 일들을 지워나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이었다.” p88 ‘존재 함’ 자체로 존중 받는 것. 허시가 생각하는 해방의 정의다. 허시는 과로 문화의 속도와 지속불가능성을 인식하는 정신적 전환이 휴식의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휴식은 일회성 행사가 아니다. 과로문화에 대한 대항 서사로서 휴식이 문화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가차 없고 지속적이며 전복적, 의식적인 전 지구적 사고의 전환”p73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문화로서 우리는 쉬는 법을 모르고 과로 문화의 독성에 노출된 채 휴식을 이해해왔다. 우리는 휴식이 사치이자 특권이며, 탈진과 수면부족으로 시달린 후에야 자신에게 허용할 수 있는 특별조치라고 믿는다.” p70 “우리는 자신을 괴롭히는 수면 부족, 피로, 단절에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온전하고 풍부하게 누리기를 원하는 물질적, 비물질적 대상을 극구 칭송한다.”p94 허시는 휴식을 보상으로 인식시키고, 피로를 소비와 중독으로 해결하게 하는 과로 문화를 직시한다. 특히 계급, 인종, 젠더, 국적, 장애 등으로 차별받는 소수자들은 이 과로문화에서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기 위해”p88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는 점을 허시는 놓치지 않는다. 더불어 그는 피로 문화가 야기하는 개인의 몸과 정신의 소진이 어떻게 공동체 파괴로 이어지는지에 대해 사유한다.


허시에게 휴식은 해방의 도구이며, 몸과 마음은 무한한 지혜의 공간이다. 그는 “과로는 우리를 트라우마의 순환 고리에 붙들어두지만 휴식은 그 고리를 헤집고 뒤집는다.”p89라고 말한다. 휴식은 몸과 마음을 연결시킨다. 이 연결은 자본주의가 주입해온 것들을 인식할 수 있는 역량을 가져다주며, 해방의 출구를 찾아갈 직관과 상상력, 그리고 용기를 되살린다. 이는 우리를 제3의 공간으로 인도한다. “휴식은 발명, 상상, 회복을 위한 현실을 뒤흔들며 공간을 만들어낸다. 휴식은 그저 존재할 공간을 만들어주기에 상상의 도구이다.”p161 휴식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문화적 전환이며 탈식민화이다. 급진적인 휴식은 제3의 공간을 만드는 정치적 운동이다. ‘낮잠 사역단’이라는 집단적 운동이 필요한 이유다.


“흑인은 자본주의의 잔인성에 직접 연결되어 있다. 우리 몸은 미국이 가진 최초의 자본이었고, 그로 인해 휴식과 꿈의 공간을 끊임없이 탈취 당했다.”p81 “나는 미국 도망노예의 능력에서 영감을 얻은 덕분에 자본주의 체제 속에 살면서 휴식을 재상상한다는 개념을 발굴했다. - 중략 - 그들은 달아난 것이 아니라 노예 역할을 거부하고 플랜테이션 농장을 집으로 삼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내가 꾸준히 과로문화로부터 벗어나려 애쓰며 스스로를 바라본 방식과도 직결되는 태도이다.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맹렬히 기세를 떨치는 지금 당장 휴식을 얻고자 한다면 자신을 다를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허시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통찰과 해방에 관한 영감을 준 건은 역사이다. ("역사는 낮잠 사역단의 대단히 중요한 기반이다."p110) 흑인노예역사를 자세히 알게 된 후 허시는 그 앎이 준 슬픔이 영원히 자신의 몸에 새겨졌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역사가 준 것은 슬픔 이상의 것들이다. 조상들의 유산은 허시를 살게 했고, 상상하게 했고, 창조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더불어 살도록 했다. 허시 철학의 출생지, 정치적 실천의 출발점이 된 역사적 사실들은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 나에게도 소중한 앎의 기회를 주었다. 미리 말하지만,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허시의 전복적 사유가 시작된 이 출발점들이다. 2024년 11월 6일 이후니까, 더욱.


휴식과 치유를 말하는 책들은 이전에도 많았다. 꺽이고, 베이고, 움추린, 식은 마음들을 다독여 주는 고마운 책들이다. 그 책들의 많은 진단과 처방은 사적이다. 또한 많은 책들이 사적 트라우마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은 곱게 접어 보이지 않는 곳에 간직해 둔다.


트리샤 허시의 <휴식은 저항이다>는 다르다. 허시는 많은 치유서 저자들이 고이 접어 한쪽에 얌전하게 치워 둔 역사와 체제, 구조에서 휴식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허시는 개인이 역사와 정치의 후손들임을 정확히 인식한다. 200여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자본주의가 고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역사를 가진 우리 몸과 정신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은 그 자체로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휴식의 실종, 휴식의 정의, 휴식이 필요한 이유(세상에! 휴식의 이유를 재정의하고, 재탈환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휴식의 방법, 휴식이 가져오는 무궁한 가능성들까지 모두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다. 이 책은 휴식에 관한 이런 재발견들로 넘실거린다. 그러니 이 책은 휴식에 관한 철학서, 정치론, 명상록, 전략서, 수행서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모 카드 회사의 유명한 카피문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쉼은 조건이 붙는다. 저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휴식은 죄책감과 불편함을 동반한다. 자본이 허락한 휴식이라야 온전하다.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과 하모니를 이룬다. 역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는 늘 함께이다.)


스파, 요가, 명상, 리조트, 휴양림의 광고들은 하나 같이 모두 쉼과 치유를 약속한다. 야무지게 값을 매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휴식을 ‘각오’한 개인은 꼼꼼하게 계획하고, 살뜰하게 휴식을 ‘노동’하고 ‘소비’하고 돌아온다. 휴식마저 이미 자본에게 넘어갔다. 노동은 말할 것도 없고, 호기심, 주의력, 시간, 마음까지 그야말로 참깨처럼 털린 시대에 휴식이라고 침범 불가의 성역일까... 라는 냉소야말로 고이 접어두자. 이 책은 ‘휴식’이야말로 우리가 끝가지 사수해야할 성소라고 말한다. 허쉬가 말하는 그 이유들에 나는 절절하게 공감한다. 허쉬의 강령대로 자본주의의 틈을 파고들어 제3의 공간으로 나는 매 순간, 매일, 있는 힘껏 탈주할 것이다. 일단 , 허쉬의 제안처럼 해야 할 일의 목록이 아닌 하지 않을 일 목록을 적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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