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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 -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
클레어 데더러 지음, 노지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평점 :
괴물들 그리고 MONSTERS, 표지 위 제목들이 겹쳐진 채 어긋난다. 누군가를, 혹은 나 자신을 괴물이라 명명할 때 내면에서 일어나는 지극한 혼란과 분열. 초점을 잃어 착시를 일으키는 이성과 감정, 숭배와 혐오의 불협화음. 이 흔들리는 초점을 정확히 맞춰줄 렌즈가 있을까.
작가 클레어 데더러는 <괴물들>을 통해 창작물과 범죄를 일으킨 창작자, 그리고 수용자의 애착과 반감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심연을 들여다본다. 오랜 역사로 축적된 예술과 대중문화를 향유하는 사람이라면 이 애증의 트라이앵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을까. 인터넷이 가져다준 축복(?)으로 우리는 우리가 즐기는 창작물과 창작자를 분리할 수 없게 됐다. 데더러는 말한다. “창작자의 전기를 떨쳐 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우리는 전기 속에서 헤엄친다. 전기는 질릴 정도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p73
읽고, 보고, 듣고, 나는 매일 누군가가 창작한 것을 향유하고 감상한다. 그런데 그 ‘누군가’가 ‘몬스터’라면? 나는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반드시 혼자라도 그의 캐럴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가 아내와 아이들을 학대했다면?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나는 울었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창작물들을 즐기고, 그것들의 창작자들 중 생각보다 많은 이가 문제적 인물들이라서 창작자와 창작물, 그리고 수용자인 나 사이의 무수한 함수관계는 늘 나를 괴롭힌다. 한마디로 개운치가 않다. 이 괴로운 심연을 언젠가는 진지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작가 클레어 데더러는 그 심연으로 첨벙 뛰어든다. 나는 그의 등에 올라타고 안전하고 깊숙하게 그 무수한 딜레마들의 한복판 안으로 들어간다. 처음 그와 이 여행에 동참했을 때 나는 이렇게 멀리까지, 이렇게 깊이까지 가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스스로 윤리적 사고를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은 도덕적 감정을 품고 있다” p43
작가는 창작물과 창작자에게 개인이 특정 방식으로 반응하는 정동의 결들을 아주 세심히 분석한다. 우리는 감정을 의견으로 치환한다. 분노와 관용의 기준은 생각보다 감정에 좌우된다. 뿐만 아니라 괴물을 향한 공개 비난은 화살의 방향을 돌리기 위한 방어일 수도 있다. “나는 괴물이 아니니까. 저기를 보라”p61, '괴물‘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는 복잡한 맥락이 숨어 있다.
"나에게 괴물의 의미는 특정 행동으로 인해 우리가 어떤 작품을 작품 자체로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람이다.”p65
괴물은 작품에 ‘얼룩’을 낸 사람이다. 작가는 이 얼룩은 무엇이고, 그것의 파급력은 어떤 것이며, 수용자가 그것을 제거할 수 있을지 파헤친다. 창작자와 작품뿐만이 아니라 개인사에 적용해 봐도, 작가가 분석해내는 얼룩은 인생의 문제이다. 절절히 공감하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얼룩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나 자신의 어떤 조각을 잃을 가능성도 높아진다.”p80
소비자는 창작자와 작품 밖에서도 그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소비자는 자기 정체성의 일부를 창작자에게서 가져온다. 데더러는 팬덤 문화를 개인의 정체성의 문제, 수치심과 연결해 분석한다. 그는 유사 사회관계의 측면에서 소비자의 감정은 더욱 취약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고 분석한다. 점점 더 우려되는 현상이다.
“자신의 관점이 파이 전체가 아니라 그 파이를 이루는 작은 조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p100
작가는 우리의 초점이 흔들리는 요인 중 하나로 ‘비평’과 ‘비평가’들을 지목한다. 공급자도 남성, 수요자도 남성, 비평가도 남성. 이 역학은 범죄를 은닉하고, 객관과 균형이라는 명목으로 범죄와 피해를 말하는 이들의 입을 막는다. 자신의 의견에 주관적 관점이 없다고 믿을 수 있는 그 권력을 데더러는 해체한다. 통쾌하다.
“천재가 남성성과 결합할 때, 이 남성성이 계속해서 스스로를 복제하고 내세울 때, 누군가는 분명 제외되고 있다.” p135
누군가는 제외될 뿐만 아니라 삶이 제거된다. 데더러는 대표적인 마초 남성 예술가들의 삶을 통해 저 문장이 어떻게 현실에서 피해자들을 양산해냈는지 보인다. 영감, 충동, 자유는 천재들의 놀이동산의 만능 이용권이며, 이 이용권은 특히 여성들을 학대하는데 주로 쓰인다. 동시에 그 학대에 면죄부를 주어왔다.
“과거라는 개념은 ‘괴물’이라는 단어와 같은 방식으로 기능한다. 우리를 인간의 나쁜 특질들과 분리해준다. - 중략 - 과거의 철없는 행동은 지나갔고 우리는 성숙해졌다.”p166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 여성혐오는 계몽되지 않은 ‘과거’의 관점이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이 논리는 과거 예술가들의 명백한 비윤리적 행적들을 무마하는 논리다. 하지만 그 과거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작가는 미래가 ‘저절로’ 나아지리라는 자유주의자들의 망상을 깨뜨린다. 데더러는 ‘과거’ 예술가들에게서 “우리가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한 증거”p168를 찾기보다는 우리를 비춰줄 거울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유색인 여성은 제도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할 뿐만이 아니라 동료 예술가에 의해서도 침묵 당한다는 이야기다.”p198
데버러의 시야는 “남성 범죄자들이 모든 자원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일 때”p193 작품이 무시된 사람들이나 작품이 완성되지도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넓혀진다. 표면으로 보이는 것 이면에 여전히 강고한 차별들을 그는 직시한다. 괴물 예술 남성 창작자들에게 짓밟힌 여성 창작자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우리는 여전히 그 여성 창작자들을 남성 창작자의 이름과 함께, 그들의 그늘 안에서만 호명하는 현실을 만난다. 하물며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여성 창작자들은 어떨까. 작가는 말한다. “가끔은 창피하고 시끄럽고 멋있지 않은 방식으로 공격해야 할 때도 있다”p201
“여성이 글을 쓰거나 예술을 창작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할 때 우리 여성들은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도 냉큼 그렇게 우리를 묘사한다.”p218
괴물 판독기는 사회의 편견을 그대로 반영해 이중적이다. 남성 예술가의 실제 행해진 범죄는 천재성의 인증으로 면죄부를 받는데, 여성 예술가들은 창작만으로도 스스로를 괴물로 여긴다. 데더러 자신의 고백과 이어지는 여성 작가들의 삶을 보면 예술가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이 이중적인 잣대가 너무 선명해서 기가 차다. 남성 예술가들은 삶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을 특정 종류의 불안과 두려움, 죄책감과 분열. 그리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원색적인 비난들. 그럼에도 여성 예술가들은 “강철 같은 정신”p256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너무나 거대하고 소모적이라 그 힘을 휘두르는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고 잊히고 당연시되는 힘에 맞서는 일상적 투쟁을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하면 무엇을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겠는가?”p274
작가는 남성의 지배로부터 행동으로 탈주하려 했던 여성 예술가들을 조명한다. 그들은 작품에서 남성들의 폭력을 적나라하게 고발할 뿐만 아니라 그 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자신들을 던진다. 이 저항, 이 폭력을, 이 여성 괴물들을 대하는 사회의 이중 잣대 또한 섬뜩하다. “남성 예술가의 폭력은 그들의 위대함과 연결되어 있다. 그 폭력은 충동이다, 자유다. 여성 예술가의 폭력이나 자해는 감수성의 표시이거나 광기의 증거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 있는 창의적이고 도덕적인 힘의 증거로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p275
소략한 내용은 이 책의 지극히 일부분 일뿐이다. 안티 몬스터 챕터는 너무도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다. 독자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인지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비평가란, 비평이란 바로 이런 존재이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예술을 향유하는 주체의 소비자 정체성 면에서 자본주의 내의 예술 소비의 윤리적 실천을 고민하는 술꾼들 챕터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질문들을 던진다.
“예술 작품을 소비한다는 것은 두 사람의 인생이 만나는 일이다. 예술가의 인생이 예술의 소비를 방해할 수도 있고, 한 관객의 인생이 예술 감상의 경험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다.”p309
어떤 작곡가의 음악들은 내 삶의 메인 테마가 된다. 삶을 그 음악의 템포에 맞춰 살고, 사유하는 일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니 그 음악을 처음 만났던 순간은 충분히 ‘사건’이다. 처음에 말했듯이, 데더러는 문제적 창작자와 창작물 사이의 간극을 들여다보기 위해 심연으로 헤엄쳐 들어갔고 갈수록 그의 질문들은 더 풍요로워지고, 심오해진다. 데더러는 예술을 향유하는 그 ‘사건’의 본질에까지 직진해 들어간다.
데더러가 괴물들이 사는 바다를 헤엄치며 만드는 파문들은 실로 겹겹이고, 매우 드넓다. 이 책은 탁월한 예술 비평서이다. 주류 비평이 여전히 의도적으로 묵인하거나 혹은 무신경하게 간과하는 예술가와 창작물 사이에 제기되는 불편한 질문들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범죄를 저지른 창작자와 창작물, 향유자의 수용 행위를 둘러싼 이슈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쟁점들을 데더러는 이 책에 담는다. 하나의 질문이 이렇게 확장되는 것을 독서로 경험하는 것은 독자에게 분명 기쁜 일이다. 이 딜레마를 막연하게 인식하고 이 책을 펼친 나는 저자가 축적해가는 질문들과 그가 밀어 붙이는 인식의 깊이에 계속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심각하고 딱딱할 것이라 짐작한다면 오산이다. 이 책은 너무 재미있다. 페이지를 읽으며, 다음 페이지를 기대하게 책이다. 작가는 매우 명석하고, 재치가 넘치고, 사려 깊다. 작가 클레어 데더러는 자신의 식견과 경험과 사유를 이 책에 꽉 찬 밀도로 펼쳐 놓는다. 정말 이 작가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아껴 두지 않고, 이 책에 이 이슈에 관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구나 하는 생각을 읽는 내내 했다. ( “고마워요, 데더러.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아껴놓지 않아서요.” p253 문장의 변주.) 독자에게 이런 포만감을 안기는 책은 그 자체로 귀하다.
내 연인이 이 책에 괴물로 등장한다고 이 책을 읽기 전 고백했다. 내 사랑의 현재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흐릿한 뉘앙스로. 나는 이 책을 수일 전에 다 읽었지만, 그가 나오는 챕터를 남겨두었다. 그 부분만 읽지 말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그러다 오늘 오후에 읽었다. 다행이 (데더러, 고마워요. 나는 또 운다) 그에 관한 페이지는 두 페이지였고, 데더러의 신랄함이 그 페이지에서만 조금은 약했다. (데더러, 혹시 당신도..? 어쨌든 다시 고마워요.)
그래서 그 이 책을 읽고 난 후 내 사랑은? 여전하다. 뿐만 아니라 내 사랑은 가을 하늘처럼 더 환해지고, 껑충 더 높아졌다. 왜냐하면 이 책으로 사랑하는 이가 또 한 사람 생겼기 때문이다. 누구냐고? 바로 클레어 데더러다. 이렇게 영리하고, 강단 있고, 솔직하고, 유머 감각 뛰어난 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인이 질투하지 않겠냐고? 그는 어느 책에선가 “순수한 사랑, 단순한 사랑, 온전한 사랑. 시작부터 사심이 없는 사랑”에 대해 말했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도 데더러를 사랑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렇게 더 풍요로워졌다.
<이 서평은 출판사의 도서 제공으로 쓰였으나 지극히 개인적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