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이야기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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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주변부는 우리에게 늘 불가사의한 무력함을 안겨주므로.”p47 는 단편 ‘녹색 아이들’의 마지막 문장이다. 화자인 폴란드 국왕 주치의는 우크라이나 서부에 볼히니아 숲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온 피부가 녹색인 두 명의 아이들을 만난다. 이 아이들의 존재와 이 아이들이 떠나온 미지의 세계는 그야말로 낯설고 기이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야기의 기묘한 허구성을 현실에 대한 의심으로 전도시킨다.

현실은 얼마나 불투명한가. 중심은 얼마나 허구적인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단편집 <기이한 이야기>를 통해 세계의 익숙함에 질문을 던지도록 집요하게 독자를 몰아간다. 현실의 허구성은 비현실적인 것을 통해 드러난다. 중심의 기만성은 주변주의 생생함을 통해 누설된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무지는 우리의 앎을 통해 밝혀진다.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카르추크의 국내 최초의 단편집 <기이한 이야기>는 놀랍도록 기이한, 놀랍도록 예민한 장소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 낯선 장소는 어쩌면 너무 익숙해서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세계(승객, 병조림, 실화, 솔기, 모든 성인의 산, 인간의 축일력)이거나 이미 당도했을지 모를 미래의 세계(방문, 모든 성인의 산, 인간의 축일력)이거나, 혹은 한때 우리 자신이었으나 잃어버린 세계 (심장, 트란스푸기움, 녹색 아이들, 모든 성인의 산)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세계들은 하나이다.

토카르추크가 그려내는 미지의 영역은 동시에 인간 의식의 무능 또는 소실 또한 드러낸다. 우리는 ‘자연(인류를 포함한)’이라 부는 것의 정체를 알지 못하며 (녹색 아이들, 심장), 우리는 자신을 알지 못한다. (승객, 병조림, 솔기, 실화, 심장, 인간의 축일력), 우리는 다가오는 미래를 알지 못한다. (트란스푸기움, 모든 성인의 산). 따라서 우리는 조금 자중해야 한다.

‘승객’은 이 단편집의 승선 세리머니 선물 같은 작품이다. ‘녹색 아이들’로 고도가 높아지고, ‘병조림’과 ‘솔기’로 토카르추크 월드의 기류를 타기 시작한다. ‘방문’으로 고도가 한껏 높아지고, 뒤로 갈수록 이야기들은 더 깊은 음영의 낯선 상공 속을 여행한다.

공포, 상실, 죽음, 익숙함, 냉혹함과 취약함, 어리석음과 폭력성, 잔인함과 나약함, 구원의 가능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미래를 그리는 이야기들은 너무도 기이하고, 낯설어서 한번 읽으면 쉬이 잊히지 않을 선명한 이미지들을 마음에 새긴다. "언어나 말은 그 뒤에 이미지가 버티고 있어야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p82 ‘방문’ 속 화자의 말처럼 토카르추크의 단편들은 이미지로 각인된다. 작가가 ‘실화’에서 인용한 네덜란드 화가들인 멜키오르드 혼데쾨터와 헤리 멧 드 블레의 그림들처럼 이야기들은 “불길한 징조”와 “의미와 숨겨진 징후”들로 가득 차 있다.

번역자인 최성은 선생은 올가 토카르추크를 ‘단편 장인’라 평가한다. 과연 그렇다. 책을 읽다 덮고, 다른 일을 해야 할 때도 마지막 읽은 문장은 독자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문장에 갈고리라도 달린 것처럼. 불가사의한 이야기들은 불가사의한 공모로 서둘러 독자를 기어코 책 앞에 앉힌다.

“목걸이를 손에 집어 드는 순간, 녹슨 줄이 끊어지면서 빛바랜 구슬들이 바닥으로 와르르 떨어졌고, 그는 결국 꽤 많은 구슬을 찾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잠 못 드는 밤이면, 그 구슬들이 과연 어디에서 무념무상의 둥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먼지 덩이 속에 정착했으며, 바닥의 틈새 어디쯤 둥지를 틀었는지 종종 궁금한 마음이 들곤 했다.”p59

구슬들이 아직 목걸이였을 때를 기억하기에, 그 목걸이를 했던 사람과의 추억을 간직하기에, 남자는 흩어져 사라진 구슬들의 현재가 궁금하다. 올가 토카르추크야말로 기억하고, 간직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이기에 이런 이야기들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사라지고, 망각되고, 다가오는, 그리고 되풀이되는 세계에 대한 연민과 애도의 마음이 이 책 <기묘한 이야기>들 전편에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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