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장바구니담기


관능적인 작품이다. 아름다움으로 나를 홀리는 작품이다.

손을 내밀어 쓰다듬고 싶으나, 나는 그저 우화에 등장하는 여우마냥 눈 앞의 탐스러운 포도가 너무나 신 맛이 날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돌아서고 만다. 가질 수 없는 게 더 달콤한 법이다. 가질 수 없는 열일곱의 소녀, 은교. 단맛이 날지, 혀와 식도와 위장을 태워버릴 독일지는 알 수 없는 것.


예전, 한참 촛불이 모이던 시기의 광화문을 걷고 있었다. 광화문의 대로는 닭장차의 주차장이 되었고, 전경들은 고등어 염장질의 흩뿌려진 소금마냥 거리에 뿌려져 있었다. 그 때 나는 양복에 넥타이 차림이었다. 의복과 껍질이 부여하는 인상으로, 나는 그들이 규정하는 '시위대'가 아니라 '일상인'이라는 안도감으로 거리를 활보했다. 그런데 그 때 내 눈에 한 여성이 들어왔다.

그 여성은 오와 열을 맞춘 전경들 앞 화단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민소매 티셔츠에 핫팬츠 차림이었다. 그정도의 살빛이야 여름이면 흔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왠지 모를 관능이 느껴져 자꾸 흘끔거리게 되었다. 방패로 몸을 가리고 보호장구로 몸을 감싼, 쉰내나는 사내들의 열 앞에 앉은 여인. 눈부신 햇살을 튕겨내는 그녀의 하얀 허벅지에서 관능이 꿈틀거렸다. 날아온 돌멩이가 뒷줄의 고참들에게까지 미치면 앞줄의 후임병들은 방패로 쪼이는 날 선 군기와 권력의 세계, 철모 안에서 오직 눈만 꺼내놓고 온몸을 가린 사내들과, 그 앞 화단에 앉아 발을 까딱거리며 살빛을 빛내는 여성. 극과 극의 대조가 묘한 관능을 불러왔다. 곁눈질하던 난 신호가 바뀌어 길을 건너는 게 아쉬워 입맛을 다셨다. 그 때 나는 음흉했다. 아니, 나는 그저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다.

소설가 박범신 작가님의 새로운 소설 <은교>는, 내게 있어 전경과 핫팬츠 여성의 대비 만큼이나 강렬한 관능을 품은 작품이다. 70줄에 접어든 천재 노시인과 17살의 여고생. 전경이 눈만 내놓은 권력과 땀내를 두르고 있었다면, 천재 노시인 이적요는 '풍화되고 있는 늙은 몸'을 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17살 여고생 '은교'를 사랑했다. 노시인과 은교의 첫 대면. 여름 날, 노시인의 집에 허락없이 들어와 마당에서 태평하게 잠까지 자고 있던 은교. 어린아이와 같은 마른 몸매, 하지만 가슴은 봉긋했던, 그리고 한없이 투명해 보이는 하얀 피부. 노시인 이적요는 꿈틀거린다. 뭔가 자신 안에서 깨어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사랑의 시작임과 동시에 파국의 시작이었다.


철저하게 전략적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문학계의 모든 인사를 조롱하듯 포장된 이미지로 이미 '성인'의 반열에 오른듯한 절제되고 신비로운 천재 시인 이적요. 그는 늙었으나 그의 몸은 아직 단단하다. 발기되지 않는 성기를 지녔으나 그의 마음만큼은 당장이라도 여러 여인을 품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우직하고 충성스러우나 딱 거기까지인, 충견과도 같은 소설가 서지우가 바짝 엎드려 있다. 그는 능력이 없다. 쓰고자 하나 그에게서는 글이 나오지 않는다. 무능을 덮을만큼의 우직함을 간직한 서지우는, 스승으로 모시는 이적요가 재미 삼아 쓴 글로 등단하게 된다. 세상이 인정한 '서지우의 데뷔작'은 성스러운 이적요가 개껌처럼 던져준, 전혀 그답지 않은, 어찌보면 지저분한, 그저 끼적인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스승의 입장에서는 세상을 희롱하듯 날림으로 끼적인 것에 불과하나, 제자 서지우는 평생을 가도 그런 작품을 낼 수가 없다. 빌려온 서지우의 작품은 이내 베스트셀러가 된다.


아마데우스의 발뒤꿈치만을 바라봐야했던 살리에르의 심정일런가. 노력만으로는 천재를 당할 수 없다. 천부적 재질이 없이 그저 노력과 근성만을 지닌 사람에게 세상은 가혹하다. 더욱 슬픈 건, 천재들은 자신이 천재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고, 천재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도 '노력과 근성'으로 자신을 갈고 닦는다는 점이다. 자질을 지닌 자가 노력하며 즐기는 자를 당할 수 없다는 말은 무능력자가 퍼트린 비겁한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천재들은 자신이 천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은 무능력자가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집약된 노력과 밀도 높은 근성으로 자신의 천재성을 지켜나간다. 그리고 그들은 즐긴다. 그들은 천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창조물에 스스로 감탄할 자격이 있는 천재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명백한 자신의 한계, 그리고 자신이 지니지 않은 천재적 영감을 지닌 스승 이적요 시인. 서지우는 결핍을 좇으며 자신으로서는 꿈조차 꿀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스승 이적요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흠모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순결한 천재'로 세상이 인정하는 이적요 시인의 곁을 맴도는 은교를 용납할 수 없다. 이적요 시인의 열일곱 은교에 대한 사랑은 서지우의 눈에 한낱 욕망이자, 정욕이자, 자신의 데뷔작과도 같은 그저 그렇고 지저분한 나부랭이에 불과하다. 그는 인정할 수 없다. 스승 이적요는 천재로 남아야하며 고결해야만 한다. 이적요 시인의 은교에 대한 사랑이 깊어갈수록 서지우는 은교를 거칠게 탐한다. 한편으로 자신에게는 비록 스승과 같은 재능이 없으나 언제든 구중궁궐의 굵다란 기둥처럼 검붉게 발기할 수 있는 성기가 있다는 것으로 자위한다. 나는, 아직, 설 수 있어. 나는 당신이 갖지 못하는 것을 가졌어.


그의 용두질은 어린 학생이 도색잡지를 보며 자위하다 사정한 뒤끝처럼, 쓸쓸하고 허허롭다. 결국 그는 발표되지 않은 스승의 작품을 훔쳐내고, 결말과 이름을 바꿔 발표하기에 이른다. 씁쓸한 사정의 끝이다. 스승은 이미 다 알고 있고, 어리석고 무능한 제자는 정액이 묻은 비릿한 휴지처럼 이내 들통날 어리석음을 감추기에 급급하다. 한발만 물러서서 본다면 은교는 결코 아름다운 소녀가 아니지만, 풍화되는 육체와 애증과 질시에 사로잡힌 두 남자 사이에서 소녀는 한순간 여신으로 화한다.


천재 시인은 재능이 넘치나 손에 쥔 물처럼 젊음이 흘러갔고, 무능한 제자는 비루하나 젊은 몸뚱이와 스승에 대한 존경이 있고,

여신으로 화한 소녀는 두 남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싱그럽고 풋풋한 청춘이 있다.

딸과도 같은 소녀를 사랑하는 노인. 분명 통속적인 소재다. 하지만 청년작가 박범신은 이 통속적인 소재를 '범상치 않은' 예술적 소설로 승화시켰다. 삶과 죽음에 대하여, 문단의 속됨과 환상에 대하여, 천재와 범재에 대하여, 백주대로에 발가벗겨 내쫓긴 것처럼 <은교>는 통렬하게 보여준다. 백지 한 장 차이인 존경과 애증의 사이, 욕정과 사랑의 사이, 인정받음과 내쳐짐의 아슬아슬한 사이에서, 청년작가 박범신의 글은 버선발로 외줄을 버티고 섰다가 공중으로 뛰어오르고, 몸을 뒤집고, 온갖 놀음을 해보인다. 광대는 줄 위, 그리고 하늘을 품었고, 그걸 쳐다보는 사람들은 고개를 쳐들어 공중의 그를 바라봐야만 한다. 우리는 땅을 딛고 있다. 광대는 하늘을 가졌다.


모래 위에 집을 지을 수 없듯이, <은교>는 '지혜와 관록과 관조'라는 단단한 기초가 없으면 결코 써낼 수 없는 작품이다. 박범신 작가님은 전작 <고산자>에서 지도에 미친 고산자 김정호에 자신을 투영했었다. 지도를 좇고 지식과 인문을 좇는 작품 <고산자>는 한뼘의 지도를 만들듯 쉽지 않고 더디게 나아갔다. 하지만 오욕칠정에 '굴복'치 않고 '극복'한 천재 노시인 - 때론 작가 자신이 읽히기도 하는 - 작품 <은교>는 무언가 둑이 터져나가는 듯 거침없이 읽힌다. 속됨과 속물스러움과 바로 등을 마주대고 있으나 <은교>가 아름답고 성스럽기까지 한 것은, 내면의 고삐가 풀려 '미친듯이' 질주하는 작가의 영혼과 필력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연재 당시 작품 속에 '반전'이 있다고 했으나, 작품의 토씨 하나하나가 이미 놀라움을 내포했기에 반전에 눈돌릴 틈이 없다.


정녕 <은교>는 관능적이며, 아름답게 나를 홀리는 작품이다.

아, 아름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텐도 아라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건 군대 시절이었다. 두께가 결코 만만치 않았던 세 권 짜리 작품, <영원의 아이>. 20대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정말 책에 미쳐 살았던 시기인데, 하루에 한 권에서 두 권씩은 읽었던 듯하다. 그 와중에 군에 갔으니 책을 잡을 수 없는 '쫄병' 시절에는 유일하게 허락된 책인 포켓 성경을 읽어댔고, 군 생활을 한지 일년 몇 개월이 조금 지난 상병 중반 무렵부터 군 생활이 확 풀린 덕분에 다시 책에 빠져들 수 있었다. 하지만 군부대에 책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는가? 내무반에 있던 책을 섭렵한 후 꾀죄죄한 '헬스장'에 있던 병영문고도 섭렵하였지만 갈증은 여전했다. 해서 불침번 근무를 설 때 각 내무실의 취침군기를 확인하고 근무자를 깨우면서, 여러 내무반에 있던 책을 두루두루 살폈다. 그 후 아침이 밝으면 찍어둔 책이 있는 내무반에 찾아가 그 방 고참에게 허락받고 책을 빌려왔고, 그렇게 저인망을 살포하듯 두루 훑던 중에 내 손에 들어온 책이 바로 텐도 아라타의 <영원의 아이>였다.  

 
텐도 아라타 하면 피칠갑하는 추리물 작가로 생각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이는 아사다 지로를 가리켜 <철도원>류의 달달한 가족영화용 글이나 쓰는 작가, 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오해이다. 숨겨둔 애정을 밝히자면, 내가 처음으로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게 텐도 아라타이다. 너스레 떨고 사물놀이 같이 흥겨운 글을 쓰는 탓에 그토록 좋아하는 김훈 작가님의 문장은 오작교 너머 견우 직녀마냥 떨어져 있어 흉내조차 내기 어렵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한낱 들숨과 날숨마저 정절을 지키려는 은장도의 순간적인 번쩍거림처럼 예리하게 잡아내는 신경숙 작가님의 문장은 다다를 수 없는 경지였다. 신경숙 작가님이 쓰면, 그냥 롱테이크도 영원의 예술이 되지 않는가? 그래, 어찌 보면 텐도 아라타가 만만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돌의 내력>의 오쿠이즈미 히카루나 <장송>의 히라노 게이치로만 되었더라도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을 터이니.  

그런데 문장의 쉽고 어려움, 표현의 깊이와 높이를 떠나 텐도 아라타처럼 쓰고 싶다 생각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세상의 낮은 자, 상처받은 자에게 관심이 많았고, 그의 글에는 그런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이의 시선, 여성의 시선, 상처받고 소외받은 아이나 여성의 시선. 그리고 해체되는 가족 틈바구니에서의 위태위태한 시선. 그에게서 높은 경지나 신필의 기운 같은 건 못 느꼈지만, 시선에서 온기가 느껴져 그가, 그리고 그의 작품이 좋았다. <영원의 아이>는 1,200여 페이지의 만만찮은 분량이었다만, 가정 내 아동학대와 아동 성폭력과 상처의 굴레를 수면으로 끌어올린 시도와 용기, 그의 메시지가 좋았다.

그리고 다시 접한 텐도 아라타의 책, <애도하는 사람>. 후배 두 명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이 책을 추천해 주었다. 한 후배는 "과장님은 이 책 읽다가 울지도 몰라요"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고, 다른 한 명은 그러잖아도 작은 실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며 "한 번 읽기 시작하면 화장실도 못 갈 거예요."라 말했다. 실눈 후배는 평소에도 좋은 책을 많이 추천해주는 이인데, 내가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만큼 재밌는 거냐?고 물으니 "아, <칼에 지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좋아요!" 그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후배 두 명을 심히 의식한 나머지 금요일 밤부터 시작하여 토요일 새벽 여섯 시까지 이 책을 읽었다. 두 시간을 자고 일어나, 못 읽은 나머지 부분 약간은 화장실에서 마저 읽었다. 
후배의 장담이 무색하게, 울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울고 싶지 않았다, 참았다'는 편이 맞겠다.

그리고 다시 예전의 오랜 기억을 떠올리며 '아,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탁월한 문장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약간 미심쩍거나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다시금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상처와 아픔을 넘어, 삶과 죽음을 이토록 쉽고 담담하게, 그러나 절절하게 쓸 수 있을까? 특히나 마지막 장면, 주인공 엄마의 임종 장면은 내게 있어 압도적이었다. 내세를 강조하는 기독교인의 경우 성경에 이미 삶과 죽음이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묘사가 있기에 세상의 작품들이 언급하는 삶과 죽음은 싱겁다고 말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쓴 그 어느 작품에서도 난 죽음에 대해 이토록 절절하게 느껴지는 작품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오해 마시라. 나도 기독교인이고, 사촌 동생 내외는 전도사이며, 외가 친척 중에는 목사님이 한분 계시고, 나는 한 때 선교하다 죽는 게 목표였던 사람이었으니.

바꿔 말하자면 종교를 언급하거나 그에 기본을 두지 않았음에도 종교가 항상 다루는 '죽음과 삶'에 대해 이토록 현실감 있게 써내려가기가 쉽지 않다는 소리이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죽은 사람들, 예컨대 비명횡사하거나 자살, 사고사 당한 사람, 병사, 살해당한 사람 등을 굳이 신문까지 뒤져가며 찾아가 '죽음의 현장'에서 애도를 하고 다니는 '애도하는 사람', 소재 선택 자체가 탁월하다고 느껴진다. 죽은 이들을 떠올리며 '고인이 누굴 사랑했는지, 누구에게 사랑받았는지, 어떤 감사를 받았는지'를 알아내 죽은 이를 추억하고 가슴에 담아두는 행위는 초반부에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지만, 가면 갈수록 흡입력 있게 다가왔고 끝내는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이 무슨 비극적 우연인가. <애도하는 사람>을 주말에 다 읽었는데, 출근한 월요일, 신입사원 당시 엄하지만 다정했던 타 부서 팀장의 부음을 접했다. 다른 곳으로 이직하여 소식을 접하지 못한지 한참이 되었다만 좋은 기억으로 남은 사람이었는데, 무척 건강하고 활발했던 사람인데 암이었단다.

그런데 난 조의금 챙겨야지, 발인은 어디에서 하나, 그렇게 고민하다 다음 날 부산 출장을 준비하며 까맣게 잊고 말았다. 유족에게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슬픔이자 상처인데, 나에게는 밥벌이와 출장보다 가벼운 게 '타인의 죽음'이었다. 새삼 '애도하는 사람'이 떠올랐다. 

초라한 죽음이나 죽어 마땅한 사람이란 없다. "쟨 당해도 싸.", "처신을 어떻게 했기에 그런 일을 당해?", "평소 하고 다니는 꼬라지를 봤을 때 그 여자가 먼저 유혹한거야." 등. 죽음보다 더 무서운 오해와 편견 속에서, 애도하는 사람은 진실을 찾고 슬픔을 느낀다. 세상에 이름 모를 잡초가 없듯이, 세상에 가벼운 죽음이란 없다. 고로 가벼운 삶이나 가벼운 사람 또한 없다. 애도하는 사람의 순례여행과도 같은 행적을 좇다 보면 자식을 잃고, 배우자를 잃고, 자기 자신을 잃은 사람들의 진짜 속내를 알게 된다. 그 하나하나가 너무 무겁고 비장하나, 텐도 아라타의 문장은 우리가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릴 만하면 다시 손을 잡아 끌어올린다. 그리고 보게 한다. 죽음 앞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나 다시금 현실을 살아가는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감정적 동정이 능사가 아니라 죽은 이를 기억해 주는 게 고인의 유족들에게 도움이 됨을 말이다.

나는 화려하되 화려하지 않거나 단단하거나 탁월하거나 경지에 오른 문장을 흠모한다.  

하지만 글을 쓴다면 텐도 아라타 같은 글을 쓰고 싶다.

이해하고, 이해받으며, 함께 느끼는 그런 글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홉 가지 이야기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최승자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밀밭의 파수꾼>. 더 말해 무엇하랴. 전 세기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성장소설로 손꼽기에 주저함이 없는 작품이다. 수많은 아티스트에게 영감을 주었고, 글로 밥을 먹는 사람들이 '내 인생의 책'으로 꼽는 작품이기도 한 <호밀밭의 파수꾼>.  

그런데 많은 이들이 샐린저를 떠올릴 때 마치 <무진기행>의 천재 소설가 김승옥처럼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대작을 남기고 칩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긴, 어찌 보면 닮기도 했다. 수많은 문인들이 경의를 바치는 작품을 남기고 김승옥은 절필하여 아쉬움을 남겼고, 많은 이들은 <호밀밭의 파수꾼>만을 곧 J.D.샐린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샐린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마치 열여섯의 콜필드가 격렬하지만 짧은 방황의 시기를 거쳤듯,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처럼 꼭 거쳐야 할 작품이 있다. 바로 <아홉 가지 이야기>다. 어느 누군가 대뜸 '당신이 샐린저를 아느냐, 그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를 알고 사랑한다는 당신의 대답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받았을 때, '난 <아홉 가지 이야기>를 읽었어요. 난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을 느꼈어요.'라 말해주면 되겠다.  

책, 그리고 작품에 대한 평가는 수우미양가,라거나 대학교 학점 매기듯 절대 평가를 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내가 재밌게 읽고, 심지어 눈물을 흘린 작품이라도, 어느 누군가에겐 코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잘 안다. 그렇기에 책에 대한 개인 평을 올릴 때는 항상 신중했고, 견고한 다리라 여겨져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식이었다. 너무 격한 반응 또는 눈부신 찬사는 개인의 경험이고 은밀한 것이기에, 같은 책을 달리 볼 수 있는 사람들을 나름 배려한다면 별 다섯을 주기가 망설여지며, 아무리 형편없이 읽었어도 별 한 개를 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아니다. 나와 다른 눈을 가진 사람이 이 작품을 접했을 때 행여 나의 시선이 외곬구로 느껴지거나 한량처럼 읽어대는 나의 독서력이 그저 지적 허영을 좇는 것으로 여겨질 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샐린저와, <아홉 가지 이야기>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다.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 이외에는 중단편 소설을 써온 작가이며, <아홉 가지 이야기>는 그의 중단편 소설 중에서도 정수만을 고른 작품집이며, 여러 이야기 중에서도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은 내 가슴을 울렸다고 자신 있게 말하겠다. 마치 추운 겨울 녹슨 쇠기둥에 입술이 붙어버렸을 때, 몸을 움직이다 입에서 피가 흐를 때 처럼,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은 살갗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에 빠져든 작품이다.  

<바나나 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은 일본 만화 <바나나피시>에 모티브를 제공하기도 한 작품이다. 수많은 샐린저 중독자를 탄생시킨 작품이기도 하고. 만화 <바나나피시>는 결코 만만한 분량의 작품이 아니다만, 그 속에 흐르는 슬픔과 사랑, 호밀밭의 콜필드처럼 방황하는 청소년이 세상에 휘둘리는 면면을 묘사하여 일본 만화계의 전설로 손꼽히고 있기도 하다. <바나나피시>의 주인공 애시를 보면, 동성에게 유린당하며 숱한 상처를 품었음에도 강건하게 나아간다는 점에서, 콜필드와 대면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말이 너무 길어졌구나. 이 작품은 좋다. 나는 이 작품을 좋아한다.  

나는 샐린저를 좋아한다. 이 작품을 읽었음으로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그 한마디면 될것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짓말 학교 - 제10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35
전성희 지음, 소윤경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고, 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내가 A에게 최고라는 말을 붙였는데, 다수의 다른 이들이 A가 최고라는 칭호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내 식견의 수준은 그저 그런 것으로, 나는 그저 '최고'라는 말을 남발하는 헤픈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럴 때 '어느 정도 식견이 있는 지식인'인 척하려면 별 다섯 개 만점에 네 개나 네 개 반 정도를 부여하며 말미에 시니컬한 문장 하나 덧붙인다면 수준을 인정받음과 동시에 빠져나갈 구멍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혹 반박이나 구멍이 발견될지라도 "거 봐, 정말 뛰어나지만 2% 모자라다고 내가 그랬잖아?"라 한마디면 되니까.

'무엇은 무엇이다!' 라 단정짓는 것만큼 용기가 필요한 건 없다. 단정에는 경험과 확신이 필요한데, 요즘 세상엔 적당히 두루뭉술한 게 더 잘 먹힌다. 황희 정승 흉내내며 "한우가 미국소보다 나은데 대놓고 얘기하면 미국소가 삐지잖아요."하는 게 처세의 키워드이지 않은가? 강바닥은 왜 파헤치는지 모르겠는데 하면 되고, 파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서민 삶은 더 힘들어졌지만 각하는 서민을 위한 영원한 등불이십니다! 라는 속보이는 거짓말도 같은 맥락. 아, 그러고보니 현 정권의 실무자들은 <거짓말 학교>에 등장하는 '거짓말 학교' 최우수 졸업생들인가 보다. 거짓말 학교에서는 말 그대로 국익을 위한 '하얀 거짓말'을 가르치는 게 최우선이므로.

대운하에 배 띄우고 신선 놀음하듯, 너무 길게 돌아왔다. KTX타고 부산 가듯 결론을 재빠르게 말해보자. <거짓말 학교>는 최고다. 대단하다. 뭐? 그럼 <거짓말 학교>는 고결하고 티 없는 순결함을 지녔냐고? 물론, 완전무결하다고 말할 순 없겠지. 아쉬움이 아주 없을 순 없으니. 뭐냐? 그렇담 빠질 구멍을 마련해 놓고 최고라는 말을 갖다 붙인거냐? 라 물으신다면, 단 한 마디로 답하겠다.
한번 써봐라. 이만큼 쓸 수 있겠는가? 하고.
아쉬움이 남는다면, 그건 사람이 썼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사람도 본디 완전무결하여 흠 없는 이는 없으므로. 

<거짓말 학교>는 작품 자체로도 굉장한 미덕과 완성도를 지녔지만, 이 책이 나온 시기 또한 시기적절하다 하겠다. 무릇 어떤 상품이 소위말하는 '대박'을 터뜨리기 위해선 완성도는 기본이오, 시류를 따르거나 리드하는 시의성, 화제성, 독창성이 필요하다 하겠다. 일단 <거짓말 학교>는 탄탄한 완성도를 기본으로 깔고 있다. 그리고 거짓말이 파도치는 이 시기에 나왔으니 시의성 또한 확보했고,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이자 작가의 첫 작품인 점에서 화제성을 지녔고, 그 어느 동화, 아동문학 어느 판에서도 볼 수 없었던 거짓말로 말하는 진실을 담았으니 화제성 또한 담보했다 하겠다. 4대강 파헤치느라 교육과 도서관 예산을 비롯한 복지, 서민 예산이 대폭 삭감되었으니 자신 있게 말하긴 어렵다만, 돗자리 깐 심정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대박감이다. 물리적으로 대박이 안 되다면, 뭐 심정적으로다가 대박이 났다고 해두자. 내가 만약 원로 동화작가라면, 이런 쌩쌩한 후배가 등장해준 것을 축복으로 생각할 터이다.  


앞서 말했듯 거짓말 학교는 국립최고명문의 거짓말 사학으로, 실미도 특수부대 훈련시키듯 외딴 무인도에 세워진 거짓말 특수교육기관이다. 전국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입학 가능한 아이들을 체 치듯 솎아낸 후, 비밀 면담과 테스트를 통해 입학 가능 여부를 최종 심의한다. 민사고? 특목고? 외고? 다 저리 가라해라. 우습다. 거짓말 학교에 한번 입학하면 숙식, 유학, 취업, 100% 국가가 보장해준다. 남극으로 유학을 간다해도 모든 비용은 국가가 처리, 영수증 끊어준다. 단, 수료 후 국내에 복귀하여 아름다운 거짓말로 국익을 위해 일하겠다는 충정만 보이면 된다. 이런 좋은 조건이니, 난다긴다하는 애들 다 모였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되었으니 초등학생과 별반 다르지 않음에도, 거짓말 학교 내부에서의 경쟁은 치열하다. 과제에 필요한 도서관 자료, 몽땅 빌려놓고 없다한다. 리포트 작성 완료했음에도 '아직 다 못했어. 끝나면 책 빌려줄게'라는 거짓말은 아주 앙증맞고 깜찍한 거짓말이다. 대표적인 거짓말인 국회의원 공약을 비디오로 감상하며 거짓말의 허와 실, 거짓말의 단계, 공약이라 쓰고 거짓말이라 읽는 속 뻔한 거짓말의 빈틈을 파헤친다. 우수 졸업생 초청 때는 온갖 구라로 국익에 이익을 안긴 '멀쩡하게 생긴', 심지어 '성공한 기업가'처럼 보이는 구라쟁이가 등장해 주신다. 예컨대 "당신 비만이에요. 비만 기준은 A인데 당신 상태는 B니까 심각한 상태예요. 이 약 한번 먹으면 찜질방에서 땀 빠지듯 살 빠져요."라 말해보자. 이 말을 외국에서 말해보자. 이 진짜 같은 거짓말이 먹히면 외국에 메이드 인 코리아 다이어트 약 대박 수출, 외화 보유고 상승, 국익과 국가 이미지 제고에 엄청 기여한 거다. 

이런 순 거짓말쟁이들.

<거짓말 학교>는 두 소녀의 다테마에와 혼네의 교차편집이다. 앞에서는 '나는 네 친구야.'라 비즈니스 타입으로 말해 주시고, 속으론 '이 기집애야, 늬 부모 이혼한 거 다 알거든? 이 학교 나가면 갈 데 없는 거 다 알거든?'이라거나, '너랑 마음이 통해'라 말해 놓고선 '너 혼자 쿨한 척하지마.' 이런 식이다. 보이는 모습, '내 친구'의 모습은 내 눈에 선하지만, 바로 다음 장에 이어지는 '내 친구'라 생각했던 아이의 속마음은 또 다르다. 속고 속이고, 포장하고 감춘다. 거짓말은 커지고 커져, 진실이 거짓말인지, 거짓말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카오스에 다다른다. 아, 장자의 호접몽이구나. 나는 고등동물 인간인가, 나비목 곤충에 속한 팔랑팔랑 나비인가, 딱 그 수준. 
 

'거짓말 학교'는 근미래 또는 바로 오늘 내일 같은 현실이 배경이지만, 다분히 SF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국가가 나서서 거짓말을 가르치는 국립 거짓말 학교? 말도 안 되는 설정 같지만 저인망 그물처럼 워낙 탄탄하게 얼개가 짜여있어 '진짜 이런 학교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마저 하게 만든다. SF적 상상력의 시발점인 '거짓말 학교'라는 설정이 굉장히 매력적이며, 개연성의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져 창대하게 시작한 SF가 용두사미가 되는 허술함 또한 찾아볼 수 없다. 두 소녀와 주변인물들간의 심리전은 고도의 첩보전을 보는 듯, 미스테리와 추리물의 성격까지 띄고 있으나 전체적인 통일감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반전의 반전이 거듭되기에 마지막 장까지 결말을 예측하지 못하게 만든다. 반전을 위한 반전이나 어설픈 마무리가 아닌, 바짝 얼었던 유리화병에 갑자기 뜨거운 물을 끼얹은 듯한 상황을 맞닥뜨리는 긴장감 또한 백미이다. 화병에는 아름다운 꽃이 꽂혀 있었으나 그것은 보이는 것에 불과했던 것일 뿐. 얼었던 유리화병이 뜨거운 물을 만나 깨지며 드러난 것은 줄기에 숨겨진 가시, 아름다운 꽃이 빨아올리던 더러운 물이다. 뜨거운 물은 진실, 가시와 더러운 물은 거짓이다. 아, 차라리 깨지지 말고 여전히 아름다운 꽃으로 눈이 즐거웠으면 좋았으련만. 뜨거운 물이 표면에 닿자마자 '쨍!'하고 갈라질 때, 이야기 속 아이들의 마음 또한 쩡! 하고 갈라진다. 파편은 아름답지 않다. 반짝이는 사금파리가 아니라 강한 척하지만 사실은 아기 발바닥같은 아이들의 마음에 무수한 상처를 내는 깨진 병 조각에 불과할 뿐이다. 
 

<거짓말 학교>를 통해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불편한 진실. 차라리 진실이라 믿고 싶은 거짓말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로 차라리 어른들과 이 세상에 길들여지는 게 차라리 마음이라도 편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현실 같은 동화, 동화 같은 현실. 
 

아아, 이 작품이 허구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현실 같아 무섭다. 이런 현실에서 살고 있다는 게, 논픽션이 아니라 픽션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현실에서 살고 있음이 개탄스럽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했으니, 모든 언론이 권력의 '펫'이 된 지금 이 시점에, 이런 작품이 현실을 반추하게 만든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일단 감사하자.

<거짓말 학교>는, 정녕 최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돌프에게 고한다 세트 - 전5권 (일반판)
데즈카 오사무 글 그림, 장성주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데즈카 오사무의 유작 산문집 <아톰의 슬픔>을 보면, 그의 작품 <아돌프에게 고한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눈에 띈다. 
'국가권력이 '정의'라는 이름하에 국민들에게 휘두른 폭력의 실상을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기록해두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린 작품이 <아돌프에게 고한다>입니다.'  _<아톰의 슬픔>, '잊을 수 없는 전쟁의 기억' 중. 
데즈카 오사무. 우리는 흔히 그를 <우주 소년 아톰>이나 <밀림의 왕자 레오> <사파이어 왕자>(이하 국내 소개 제목)으로 기억하고 있기에 데즈카 오사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국가권력이나 정의, 폭력 등의 주제는 다소 생소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뚜껑을 열고 보니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다. 데즈카 오사무는 만화의 신이 아니라 '망가의 신'이며, 애니메이션의 창시자가 아니라 '재패니메이션의 창시자'이다. 어렵게 말할 거 뭐 있나. 데즈카 오사무는 일본인이다. 일본은 비록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지만, 최후의 최후까지 수많은 동아시아 국가의 흐르는 핏물 위에 덧없는 황국을 세웠던 나라이다.  

하여 데즈카 오사무가 말하는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와 다름 없는 <아돌프에게 고한다>를 '제대로' 읽기 위하여, 일단 데즈카 오사무가 태어난 나라 - 일본 - 부터 지워야만 했다. 문학이든 예술이든 작가의 출신국가와 성별, 인종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작가가 창조한 결과물, 작품을 주시해야겠다만,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이 잘 따라주지를 않는다. 우리나라의 광복일이자 일본의 무조건 항복일과는 삼만 광년 쯤 떨어져 태어난 젊은 세대들도, 희한하게 가르친 적 없는데 야구든 축구든 대한민국과 일본이 '붙으면' 열에 아홉은 목숨 걸고 우리나라를 응원한다. 나머지 하나는 일본이 패하기를 응원하고.

사정이 이러할진대 '오, 망가의 신 데즈카 오사무의 말년 유작이 드디어 국내에 출간되었다! 미국도 '애스트로 보이'란 애니메이션을 통해 경의를 표한 거장 중의 거장의 말년작,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걸작이 드디어 나왔는가!'라고 호들갑 떨 생각은 없다. 호들갑을 떨기 이전에 내 손은 먼저 태극기부터 찾고 있으니까. 이렇듯 작품을 작품으로 보기에는 편협하기까지 한 선입견이 잔뜩 끼어있는지라, 내 속의 나와 또 다른 내가 맹렬히 불꽃 튀기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대한남아: 뭐야, 데즈카 오사무도 결국은 패전국의 컴플렉스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인물 아냐? 아톰 봐봐, 아톰. 쌍꺼풀 없고 코 낮고 키 작은 동양인 아톰이 덩치 크고 털 숭숭 난 서양 거대 로봇을 무찌르는 것과 뭐가 달라? 패전 후 주둔군 미군에 대한 컴플렉스가 결국은 동양인을 상징하는 아톰의 통쾌한 양놈 때려부수기 액션으로 표현된 거 아냐? 그런데 무슨 평화와 반전이고 아돌프에게 고해? 가해자가 피해자의 마음을 알기나 해? 

피쓰: 피해자만이 역사와 전쟁을 논할 수 있다는 건가? 그럼 아트 슈피겔만의 <쥐> 같은 작품만이 세계대전에 대해 발언할 권리가 있는 거야? 2차 대전에서는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일지 몰라도 슈피겔만의 뿌리인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게 있어서는 악의 축에 다름 아니라고.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기에 피를 피로 갚는 것인가? 왜 독일인에게 당하고 팔레스타인인에게 갚는지 채무관계 청산 방식이 절대 이해 안 되는 바일세.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핍박받은 유대인 아돌프가 결국 독일인 아돌프에게 피로 피를 갚는다는, 전쟁의 끊을 수 없는 업보와 복수의 굴레를 그리는 작품이 아닐까 싶네만.

대한남아: 이해 할 수 없음일세. 독일인 아돌프와 유대인 아돌프, 그리고 전쟁의 핵 아돌프 히틀러까지 모두 정의라는 이름에 눈멀어 폭력을 행사하는 건 역사의 슬픈 귀결이라 이해하겠다만, 왜 <아돌프에게 고한다> 내에서 사건의 관찰자인 일본인 도게 소헤이는 중립적인 저널리스트이자 나치 전복을 꾀하다 살해당한 친동생을 둔 희생자이자 객관적 관찰자로 등장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음일세. 왜 관찰자가 일본인이어야만 하는 것이지? 그것도 피해자이자 중립적인, 지적이기까지 한 저널리스트로 말일세. 

피쓰: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릴세. <아돌프에게 고한다>의 주요 전장은 유럽이지만, 일본에 있어서 일본 내 지식인을 탄압하고 독하게 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인이야. 단지 '깨어서 평화를 추구한다'는 이유 하나로 젊은 여선생의 맨 가슴살을 담뱃불로 지지는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게 자국민인 일본인이란 소리지. 폭력과 광기의 시선은 일본인만을 피해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일본인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대한남아: 그렇게 객관적이어서 진주만 공습이나 중국 양민에 대한 일본인의 학살은 몇 페이지로 얼렁뚱땅 넘어간 건가? 그래놓고서 B29가 공습을 개시하는 일본의 하늘은 그토록 디테일하게 그린 건가? 공습에 의해 희생당하는 도게 소헤이의 아내가 전시 상황에도 귀족이나 다름 없는 생활을 영위한 건 뭐지? 희생자가 순결할수록 그 희생은 더 빛나는 건가? 깨끗하고 가녀린 여인이 무자비한 공습에 의해 희생당함으로 인해 감상만 넘쳐나고 역사와 현실은 뒤로 물러나는 게 아니면 무엇이지?  

피쓰: 그렇게 당당하게 얘기할 건 아닌듯 싶으이. 우리도 우리의 아들들을 두당 달러 얼마로 쳐서 도매가로다가 베트남 파병으로 넘기지 않았는가? 젊은 해병대원들은 조국에 충성하는 충정과 애국으로 파병되어 피를 흘렸지만, 그 위의 보이지 않는 손은 결국 자본과 권력, 정치 상황이 아니었는가? 전쟁의 광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결국 베트남의 수많은 여성에게 한국인의 씨를 뿌리는 불명예를 남겼다는 건 부인할 수 없겠지? 황국의 신민이 다니는 '국민학교' 시절, 국민학교 선생이었던 누군가 내 앞에서 '베트콩의 머리를 잘라서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라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나네. 그게 과연 국민학생 - 지금 말로 하면 초등학생 - 앞에서 할 얘기인가? 자네 말대로 따지면 김정환 시인의 <하노이 서울 시편>과 같은 시집도 결국은 가해자의 말놀음에 불과한 게 아니던가? 누구나 힘을 지닌 채 다른 이의 땅을 밟게 되면, 군인이라는 건 결국 총과 남근을 든 폭력배에 지나지 않는다네. 자국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든 게 아니라면, 베트남 인이 보기에 파병군은 결국 다 남의 잔칫상에 밤 놔라 대추 놔라 끼어드는 불청객이 아니던가.

대한남아: 야, 너 군대 나왔어? 육군 예비역 병장 앞에서 신성한 군인을 모독하는 거야? 그렇게 잘나고 반전주의자라서 지적이고 중립적인 저널리스트이자 관찰자인 도게 소헤이는 작품 속에서 징집도 면제받냐? 왜? 일본인 주인공이 총들고 양민 학살하는 모습은 차마 그리기 싫었나 보지? 위안부 할머니와 한국인 노동자들은 총알받이로 잘도 세우더니만, 일본인은 끝까지 피쓰~를 부르짖는 모습으로 작품에 등장시키고 싶었던 게 아니면 뭐야?

피쓰: 그런 식으로 흘러가면 문학 작품이 어찌 성립되겠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어리석은 폭력을 고발함과 동시에 자연스레 반전과 평화를 말함인데, 스토리 라인에서 하나를 흔들면 작가의 메시지 자체가 흔들리는 게 아닌가. 작가는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이고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메시지를 공고히 하는 출연자들인데 연출자인 작가의 뜻과 달리 마음대로 뻗어나갈 수는 없는 게 아닌가.

대한남아: 그래, 작품? 창작? 좋다 이거야. 하지만 내 불만은 이거야. 반전을 말하고자 했다면 2차 세계대전의 한 축이자 전장이었던 일본을 배경으로 할 수 있음인데 굳이 유럽까지 날아가 '아돌프들'을 끌어냈느냐 이말이지. 일본, 한국, 중국, 이 세 땅덩어리 안에서도 얼마든지 창작을 위한 극적 상황 연출과 스토리 라인 구성은 가능했을 게 아닌가? 객관적으로 자국의 허물을 드러내는 듯하지만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 포커스는 '아돌프 히틀러'를 악의 축으로 묘사하고, 일본의 패악과 살육은 조연으로 가려지게 된 게 아니느냐는 말이지. 

피쓰: 원론적인 소리네만, 일본인이라고 다 전범이거나 전쟁광이 아니라네. 그들 중에서도 전범이 있고, 무력하게 희생당한 양민 피해자가 있어. <아돌프에게 고한다> 작품 속에서도 일본인에게 억압받은 일본인이 있고,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위해 스파이로 활동한 친아들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는 헌병대 장성이 있잖은가.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놓고서 자살로 꾸미는 아비의 심정, 이런 장면이야말로 전쟁의 극단적 폐해를 드러내는 게 아니면 뭐인가?

한 작품 <아돌프에게 고한다>를 두고 서로 다른 입장의 두 사람이 감정 섞인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묘사했다만, 저 둘의 이야기는 내 안에서 하나의 이야기이다. 상찬하는 것도 내 안의 목소리이지만, '대가이기 이전에 일본인이 쓰고 그린 2차 대전 이야기'가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은 것도 나다. 

유독 까탈스러운 나인지라 이토록 삐딱한 시선을 들이대었으나,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충실하고 훌륭한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울 수도 있는 일본인 - 데즈카 오사무의 조국 - 의 과오와 어리석음을 드러내면서까지 전쟁의 이면을 세밀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데즈카 오사무의 말년작인 만큼, 그간의 경험과 연륜을 녹여 진중한 메시지를 발하는, 이전의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과도 차별점을 지닌 작품이 바로 <아돌프에게 고한다>이다.

데즈카 오사무의 세계를 깊이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만, 사실 그의 작품을 그닥 좋아하고 추종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데즈카 오사무의 전작을 돈 주고 산 적도 없다지만, 이 책은 실물도 나오기 전, 예약판매를 하는 시기에 구입했다. 이 책을 낸 출판사 세미콜론의 이름을 믿어서였다. 세미콜론은 '아주 좋거나', 적어도 '문제작'을 내는 출판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이다. 내가 미국인이나 유럽인이었다면 이 작품을 극찬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인'으로서는 입맛이 조금 쓰고 아쉬운 게 사실이다.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내게는 문제작이자 숙제다.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좋은 작품이기도 하지만 문제작이기도 하다. 문학을 문학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작품을 작품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망가의 신을 만화의 신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감정의 간극, 반일의 간극, 일개 독자에게까지 뿌리내린 편견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지 반백년이 다 되었건만, 전쟁과는 전혀 관계없이 자란 21C의 독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니 전쟁이란 역시 무서운 것이다. 작품마저도 작품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정녕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겠다.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에게 데려와 율법대로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하느냐 물었을 때 예수의 대답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그 말을.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인류 중 다른 종족과 이웃을 단 한 번이라도 해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없기에, 나라는 독자의 불편함과는 별개로 <아돌프에게 고한다>의 메시지는 영원히 유효하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