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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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텐도 아라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건 군대 시절이었다. 두께가 결코 만만치 않았던 세 권 짜리 작품, <영원의 아이>. 20대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정말 책에 미쳐 살았던 시기인데, 하루에 한 권에서 두 권씩은 읽었던 듯하다. 그 와중에 군에 갔으니 책을 잡을 수 없는 '쫄병' 시절에는 유일하게 허락된 책인 포켓 성경을 읽어댔고, 군 생활을 한지 일년 몇 개월이 조금 지난 상병 중반 무렵부터 군 생활이 확 풀린 덕분에 다시 책에 빠져들 수 있었다. 하지만 군부대에 책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는가? 내무반에 있던 책을 섭렵한 후 꾀죄죄한 '헬스장'에 있던 병영문고도 섭렵하였지만 갈증은 여전했다. 해서 불침번 근무를 설 때 각 내무실의 취침군기를 확인하고 근무자를 깨우면서, 여러 내무반에 있던 책을 두루두루 살폈다. 그 후 아침이 밝으면 찍어둔 책이 있는 내무반에 찾아가 그 방 고참에게 허락받고 책을 빌려왔고, 그렇게 저인망을 살포하듯 두루 훑던 중에 내 손에 들어온 책이 바로 텐도 아라타의 <영원의 아이>였다.  

 
텐도 아라타 하면 피칠갑하는 추리물 작가로 생각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이는 아사다 지로를 가리켜 <철도원>류의 달달한 가족영화용 글이나 쓰는 작가, 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오해이다. 숨겨둔 애정을 밝히자면, 내가 처음으로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 게 텐도 아라타이다. 너스레 떨고 사물놀이 같이 흥겨운 글을 쓰는 탓에 그토록 좋아하는 김훈 작가님의 문장은 오작교 너머 견우 직녀마냥 떨어져 있어 흉내조차 내기 어렵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한낱 들숨과 날숨마저 정절을 지키려는 은장도의 순간적인 번쩍거림처럼 예리하게 잡아내는 신경숙 작가님의 문장은 다다를 수 없는 경지였다. 신경숙 작가님이 쓰면, 그냥 롱테이크도 영원의 예술이 되지 않는가? 그래, 어찌 보면 텐도 아라타가 만만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돌의 내력>의 오쿠이즈미 히카루나 <장송>의 히라노 게이치로만 되었더라도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안 했을 터이니.  

그런데 문장의 쉽고 어려움, 표현의 깊이와 높이를 떠나 텐도 아라타처럼 쓰고 싶다 생각했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그는 세상의 낮은 자, 상처받은 자에게 관심이 많았고, 그의 글에는 그런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이의 시선, 여성의 시선, 상처받고 소외받은 아이나 여성의 시선. 그리고 해체되는 가족 틈바구니에서의 위태위태한 시선. 그에게서 높은 경지나 신필의 기운 같은 건 못 느꼈지만, 시선에서 온기가 느껴져 그가, 그리고 그의 작품이 좋았다. <영원의 아이>는 1,200여 페이지의 만만찮은 분량이었다만, 가정 내 아동학대와 아동 성폭력과 상처의 굴레를 수면으로 끌어올린 시도와 용기, 그의 메시지가 좋았다.

그리고 다시 접한 텐도 아라타의 책, <애도하는 사람>. 후배 두 명이 서로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이 책을 추천해 주었다. 한 후배는 "과장님은 이 책 읽다가 울지도 몰라요"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고, 다른 한 명은 그러잖아도 작은 실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며 "한 번 읽기 시작하면 화장실도 못 갈 거예요."라 말했다. 실눈 후배는 평소에도 좋은 책을 많이 추천해주는 이인데, 내가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만큼 재밌는 거냐?고 물으니 "아, <칼에 지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좋아요!" 그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후배 두 명을 심히 의식한 나머지 금요일 밤부터 시작하여 토요일 새벽 여섯 시까지 이 책을 읽었다. 두 시간을 자고 일어나, 못 읽은 나머지 부분 약간은 화장실에서 마저 읽었다. 
후배의 장담이 무색하게, 울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울고 싶지 않았다, 참았다'는 편이 맞겠다.

그리고 다시 예전의 오랜 기억을 떠올리며 '아,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탁월한 문장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약간 미심쩍거나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다시금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상처와 아픔을 넘어, 삶과 죽음을 이토록 쉽고 담담하게, 그러나 절절하게 쓸 수 있을까? 특히나 마지막 장면, 주인공 엄마의 임종 장면은 내게 있어 압도적이었다. 내세를 강조하는 기독교인의 경우 성경에 이미 삶과 죽음이나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묘사가 있기에 세상의 작품들이 언급하는 삶과 죽음은 싱겁다고 말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쓴 그 어느 작품에서도 난 죽음에 대해 이토록 절절하게 느껴지는 작품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오해 마시라. 나도 기독교인이고, 사촌 동생 내외는 전도사이며, 외가 친척 중에는 목사님이 한분 계시고, 나는 한 때 선교하다 죽는 게 목표였던 사람이었으니.

바꿔 말하자면 종교를 언급하거나 그에 기본을 두지 않았음에도 종교가 항상 다루는 '죽음과 삶'에 대해 이토록 현실감 있게 써내려가기가 쉽지 않다는 소리이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죽은 사람들, 예컨대 비명횡사하거나 자살, 사고사 당한 사람, 병사, 살해당한 사람 등을 굳이 신문까지 뒤져가며 찾아가 '죽음의 현장'에서 애도를 하고 다니는 '애도하는 사람', 소재 선택 자체가 탁월하다고 느껴진다. 죽은 이들을 떠올리며 '고인이 누굴 사랑했는지, 누구에게 사랑받았는지, 어떤 감사를 받았는지'를 알아내 죽은 이를 추억하고 가슴에 담아두는 행위는 초반부에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지만, 가면 갈수록 흡입력 있게 다가왔고 끝내는 가슴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이 무슨 비극적 우연인가. <애도하는 사람>을 주말에 다 읽었는데, 출근한 월요일, 신입사원 당시 엄하지만 다정했던 타 부서 팀장의 부음을 접했다. 다른 곳으로 이직하여 소식을 접하지 못한지 한참이 되었다만 좋은 기억으로 남은 사람이었는데, 무척 건강하고 활발했던 사람인데 암이었단다.

그런데 난 조의금 챙겨야지, 발인은 어디에서 하나, 그렇게 고민하다 다음 날 부산 출장을 준비하며 까맣게 잊고 말았다. 유족에게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슬픔이자 상처인데, 나에게는 밥벌이와 출장보다 가벼운 게 '타인의 죽음'이었다. 새삼 '애도하는 사람'이 떠올랐다. 

초라한 죽음이나 죽어 마땅한 사람이란 없다. "쟨 당해도 싸.", "처신을 어떻게 했기에 그런 일을 당해?", "평소 하고 다니는 꼬라지를 봤을 때 그 여자가 먼저 유혹한거야." 등. 죽음보다 더 무서운 오해와 편견 속에서, 애도하는 사람은 진실을 찾고 슬픔을 느낀다. 세상에 이름 모를 잡초가 없듯이, 세상에 가벼운 죽음이란 없다. 고로 가벼운 삶이나 가벼운 사람 또한 없다. 애도하는 사람의 순례여행과도 같은 행적을 좇다 보면 자식을 잃고, 배우자를 잃고, 자기 자신을 잃은 사람들의 진짜 속내를 알게 된다. 그 하나하나가 너무 무겁고 비장하나, 텐도 아라타의 문장은 우리가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릴 만하면 다시 손을 잡아 끌어올린다. 그리고 보게 한다. 죽음 앞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나 다시금 현실을 살아가는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감정적 동정이 능사가 아니라 죽은 이를 기억해 주는 게 고인의 유족들에게 도움이 됨을 말이다.

나는 화려하되 화려하지 않거나 단단하거나 탁월하거나 경지에 오른 문장을 흠모한다.  

하지만 글을 쓴다면 텐도 아라타 같은 글을 쓰고 싶다.

이해하고, 이해받으며, 함께 느끼는 그런 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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