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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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적인 작품이다. 아름다움으로 나를 홀리는 작품이다.

손을 내밀어 쓰다듬고 싶으나, 나는 그저 우화에 등장하는 여우마냥 눈 앞의 탐스러운 포도가 너무나 신 맛이 날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돌아서고 만다. 가질 수 없는 게 더 달콤한 법이다. 가질 수 없는 열일곱의 소녀, 은교. 단맛이 날지, 혀와 식도와 위장을 태워버릴 독일지는 알 수 없는 것.


예전, 한참 촛불이 모이던 시기의 광화문을 걷고 있었다. 광화문의 대로는 닭장차의 주차장이 되었고, 전경들은 고등어 염장질의 흩뿌려진 소금마냥 거리에 뿌려져 있었다. 그 때 나는 양복에 넥타이 차림이었다. 의복과 껍질이 부여하는 인상으로, 나는 그들이 규정하는 '시위대'가 아니라 '일상인'이라는 안도감으로 거리를 활보했다. 그런데 그 때 내 눈에 한 여성이 들어왔다.

그 여성은 오와 열을 맞춘 전경들 앞 화단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민소매 티셔츠에 핫팬츠 차림이었다. 그정도의 살빛이야 여름이면 흔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왠지 모를 관능이 느껴져 자꾸 흘끔거리게 되었다. 방패로 몸을 가리고 보호장구로 몸을 감싼, 쉰내나는 사내들의 열 앞에 앉은 여인. 눈부신 햇살을 튕겨내는 그녀의 하얀 허벅지에서 관능이 꿈틀거렸다. 날아온 돌멩이가 뒷줄의 고참들에게까지 미치면 앞줄의 후임병들은 방패로 쪼이는 날 선 군기와 권력의 세계, 철모 안에서 오직 눈만 꺼내놓고 온몸을 가린 사내들과, 그 앞 화단에 앉아 발을 까딱거리며 살빛을 빛내는 여성. 극과 극의 대조가 묘한 관능을 불러왔다. 곁눈질하던 난 신호가 바뀌어 길을 건너는 게 아쉬워 입맛을 다셨다. 그 때 나는 음흉했다. 아니, 나는 그저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다.

소설가 박범신 작가님의 새로운 소설 <은교>는, 내게 있어 전경과 핫팬츠 여성의 대비 만큼이나 강렬한 관능을 품은 작품이다. 70줄에 접어든 천재 노시인과 17살의 여고생. 전경이 눈만 내놓은 권력과 땀내를 두르고 있었다면, 천재 노시인 이적요는 '풍화되고 있는 늙은 몸'을 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17살 여고생 '은교'를 사랑했다. 노시인과 은교의 첫 대면. 여름 날, 노시인의 집에 허락없이 들어와 마당에서 태평하게 잠까지 자고 있던 은교. 어린아이와 같은 마른 몸매, 하지만 가슴은 봉긋했던, 그리고 한없이 투명해 보이는 하얀 피부. 노시인 이적요는 꿈틀거린다. 뭔가 자신 안에서 깨어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사랑의 시작임과 동시에 파국의 시작이었다.


철저하게 전략적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문학계의 모든 인사를 조롱하듯 포장된 이미지로 이미 '성인'의 반열에 오른듯한 절제되고 신비로운 천재 시인 이적요. 그는 늙었으나 그의 몸은 아직 단단하다. 발기되지 않는 성기를 지녔으나 그의 마음만큼은 당장이라도 여러 여인을 품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우직하고 충성스러우나 딱 거기까지인, 충견과도 같은 소설가 서지우가 바짝 엎드려 있다. 그는 능력이 없다. 쓰고자 하나 그에게서는 글이 나오지 않는다. 무능을 덮을만큼의 우직함을 간직한 서지우는, 스승으로 모시는 이적요가 재미 삼아 쓴 글로 등단하게 된다. 세상이 인정한 '서지우의 데뷔작'은 성스러운 이적요가 개껌처럼 던져준, 전혀 그답지 않은, 어찌보면 지저분한, 그저 끼적인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스승의 입장에서는 세상을 희롱하듯 날림으로 끼적인 것에 불과하나, 제자 서지우는 평생을 가도 그런 작품을 낼 수가 없다. 빌려온 서지우의 작품은 이내 베스트셀러가 된다.


아마데우스의 발뒤꿈치만을 바라봐야했던 살리에르의 심정일런가. 노력만으로는 천재를 당할 수 없다. 천부적 재질이 없이 그저 노력과 근성만을 지닌 사람에게 세상은 가혹하다. 더욱 슬픈 건, 천재들은 자신이 천재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고, 천재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도 '노력과 근성'으로 자신을 갈고 닦는다는 점이다. 자질을 지닌 자가 노력하며 즐기는 자를 당할 수 없다는 말은 무능력자가 퍼트린 비겁한 자기 합리화일 뿐이다. 천재들은 자신이 천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은 무능력자가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집약된 노력과 밀도 높은 근성으로 자신의 천재성을 지켜나간다. 그리고 그들은 즐긴다. 그들은 천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창조물에 스스로 감탄할 자격이 있는 천재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명백한 자신의 한계, 그리고 자신이 지니지 않은 천재적 영감을 지닌 스승 이적요 시인. 서지우는 결핍을 좇으며 자신으로서는 꿈조차 꿀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스승 이적요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흠모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순결한 천재'로 세상이 인정하는 이적요 시인의 곁을 맴도는 은교를 용납할 수 없다. 이적요 시인의 열일곱 은교에 대한 사랑은 서지우의 눈에 한낱 욕망이자, 정욕이자, 자신의 데뷔작과도 같은 그저 그렇고 지저분한 나부랭이에 불과하다. 그는 인정할 수 없다. 스승 이적요는 천재로 남아야하며 고결해야만 한다. 이적요 시인의 은교에 대한 사랑이 깊어갈수록 서지우는 은교를 거칠게 탐한다. 한편으로 자신에게는 비록 스승과 같은 재능이 없으나 언제든 구중궁궐의 굵다란 기둥처럼 검붉게 발기할 수 있는 성기가 있다는 것으로 자위한다. 나는, 아직, 설 수 있어. 나는 당신이 갖지 못하는 것을 가졌어.


그의 용두질은 어린 학생이 도색잡지를 보며 자위하다 사정한 뒤끝처럼, 쓸쓸하고 허허롭다. 결국 그는 발표되지 않은 스승의 작품을 훔쳐내고, 결말과 이름을 바꿔 발표하기에 이른다. 씁쓸한 사정의 끝이다. 스승은 이미 다 알고 있고, 어리석고 무능한 제자는 정액이 묻은 비릿한 휴지처럼 이내 들통날 어리석음을 감추기에 급급하다. 한발만 물러서서 본다면 은교는 결코 아름다운 소녀가 아니지만, 풍화되는 육체와 애증과 질시에 사로잡힌 두 남자 사이에서 소녀는 한순간 여신으로 화한다.


천재 시인은 재능이 넘치나 손에 쥔 물처럼 젊음이 흘러갔고, 무능한 제자는 비루하나 젊은 몸뚱이와 스승에 대한 존경이 있고,

여신으로 화한 소녀는 두 남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싱그럽고 풋풋한 청춘이 있다.

딸과도 같은 소녀를 사랑하는 노인. 분명 통속적인 소재다. 하지만 청년작가 박범신은 이 통속적인 소재를 '범상치 않은' 예술적 소설로 승화시켰다. 삶과 죽음에 대하여, 문단의 속됨과 환상에 대하여, 천재와 범재에 대하여, 백주대로에 발가벗겨 내쫓긴 것처럼 <은교>는 통렬하게 보여준다. 백지 한 장 차이인 존경과 애증의 사이, 욕정과 사랑의 사이, 인정받음과 내쳐짐의 아슬아슬한 사이에서, 청년작가 박범신의 글은 버선발로 외줄을 버티고 섰다가 공중으로 뛰어오르고, 몸을 뒤집고, 온갖 놀음을 해보인다. 광대는 줄 위, 그리고 하늘을 품었고, 그걸 쳐다보는 사람들은 고개를 쳐들어 공중의 그를 바라봐야만 한다. 우리는 땅을 딛고 있다. 광대는 하늘을 가졌다.


모래 위에 집을 지을 수 없듯이, <은교>는 '지혜와 관록과 관조'라는 단단한 기초가 없으면 결코 써낼 수 없는 작품이다. 박범신 작가님은 전작 <고산자>에서 지도에 미친 고산자 김정호에 자신을 투영했었다. 지도를 좇고 지식과 인문을 좇는 작품 <고산자>는 한뼘의 지도를 만들듯 쉽지 않고 더디게 나아갔다. 하지만 오욕칠정에 '굴복'치 않고 '극복'한 천재 노시인 - 때론 작가 자신이 읽히기도 하는 - 작품 <은교>는 무언가 둑이 터져나가는 듯 거침없이 읽힌다. 속됨과 속물스러움과 바로 등을 마주대고 있으나 <은교>가 아름답고 성스럽기까지 한 것은, 내면의 고삐가 풀려 '미친듯이' 질주하는 작가의 영혼과 필력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연재 당시 작품 속에 '반전'이 있다고 했으나, 작품의 토씨 하나하나가 이미 놀라움을 내포했기에 반전에 눈돌릴 틈이 없다.


정녕 <은교>는 관능적이며, 아름답게 나를 홀리는 작품이다.

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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