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가지 이야기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지음, 최승자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밀밭의 파수꾼>. 더 말해 무엇하랴. 전 세기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성장소설로 손꼽기에 주저함이 없는 작품이다. 수많은 아티스트에게 영감을 주었고, 글로 밥을 먹는 사람들이 '내 인생의 책'으로 꼽는 작품이기도 한 <호밀밭의 파수꾼>.  

그런데 많은 이들이 샐린저를 떠올릴 때 마치 <무진기행>의 천재 소설가 김승옥처럼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대작을 남기고 칩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긴, 어찌 보면 닮기도 했다. 수많은 문인들이 경의를 바치는 작품을 남기고 김승옥은 절필하여 아쉬움을 남겼고, 많은 이들은 <호밀밭의 파수꾼>만을 곧 J.D.샐린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샐린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마치 열여섯의 콜필드가 격렬하지만 짧은 방황의 시기를 거쳤듯,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처럼 꼭 거쳐야 할 작품이 있다. 바로 <아홉 가지 이야기>다. 어느 누군가 대뜸 '당신이 샐린저를 아느냐, 그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를 알고 사랑한다는 당신의 대답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받았을 때, '난 <아홉 가지 이야기>를 읽었어요. 난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을 느꼈어요.'라 말해주면 되겠다.  

책, 그리고 작품에 대한 평가는 수우미양가,라거나 대학교 학점 매기듯 절대 평가를 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내가 재밌게 읽고, 심지어 눈물을 흘린 작품이라도, 어느 누군가에겐 코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잘 안다. 그렇기에 책에 대한 개인 평을 올릴 때는 항상 신중했고, 견고한 다리라 여겨져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식이었다. 너무 격한 반응 또는 눈부신 찬사는 개인의 경험이고 은밀한 것이기에, 같은 책을 달리 볼 수 있는 사람들을 나름 배려한다면 별 다섯을 주기가 망설여지며, 아무리 형편없이 읽었어도 별 한 개를 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아니다. 나와 다른 눈을 가진 사람이 이 작품을 접했을 때 행여 나의 시선이 외곬구로 느껴지거나 한량처럼 읽어대는 나의 독서력이 그저 지적 허영을 좇는 것으로 여겨질 지 모르겠다만, 적어도 샐린저와, <아홉 가지 이야기>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다.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 이외에는 중단편 소설을 써온 작가이며, <아홉 가지 이야기>는 그의 중단편 소설 중에서도 정수만을 고른 작품집이며, 여러 이야기 중에서도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은 내 가슴을 울렸다고 자신 있게 말하겠다. 마치 추운 겨울 녹슨 쇠기둥에 입술이 붙어버렸을 때, 몸을 움직이다 입에서 피가 흐를 때 처럼,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은 살갗이 떨어지는 듯한 기분에 빠져든 작품이다.  

<바나나 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은 일본 만화 <바나나피시>에 모티브를 제공하기도 한 작품이다. 수많은 샐린저 중독자를 탄생시킨 작품이기도 하고. 만화 <바나나피시>는 결코 만만한 분량의 작품이 아니다만, 그 속에 흐르는 슬픔과 사랑, 호밀밭의 콜필드처럼 방황하는 청소년이 세상에 휘둘리는 면면을 묘사하여 일본 만화계의 전설로 손꼽히고 있기도 하다. <바나나피시>의 주인공 애시를 보면, 동성에게 유린당하며 숱한 상처를 품었음에도 강건하게 나아간다는 점에서, 콜필드와 대면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도 했다.  

말이 너무 길어졌구나. 이 작품은 좋다. 나는 이 작품을 좋아한다.  

나는 샐린저를 좋아한다. 이 작품을 읽었음으로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그 한마디면 될것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