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에게 고한다 세트 - 전5권 (일반판)
데즈카 오사무 글 그림, 장성주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데즈카 오사무의 유작 산문집 <아톰의 슬픔>을 보면, 그의 작품 <아돌프에게 고한다>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눈에 띈다. 
'국가권력이 '정의'라는 이름하에 국민들에게 휘두른 폭력의 실상을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기록해두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린 작품이 <아돌프에게 고한다>입니다.'  _<아톰의 슬픔>, '잊을 수 없는 전쟁의 기억' 중. 
데즈카 오사무. 우리는 흔히 그를 <우주 소년 아톰>이나 <밀림의 왕자 레오> <사파이어 왕자>(이하 국내 소개 제목)으로 기억하고 있기에 데즈카 오사무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국가권력이나 정의, 폭력 등의 주제는 다소 생소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뚜껑을 열고 보니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다. 데즈카 오사무는 만화의 신이 아니라 '망가의 신'이며, 애니메이션의 창시자가 아니라 '재패니메이션의 창시자'이다. 어렵게 말할 거 뭐 있나. 데즈카 오사무는 일본인이다. 일본은 비록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지만, 최후의 최후까지 수많은 동아시아 국가의 흐르는 핏물 위에 덧없는 황국을 세웠던 나라이다.  

하여 데즈카 오사무가 말하는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와 다름 없는 <아돌프에게 고한다>를 '제대로' 읽기 위하여, 일단 데즈카 오사무가 태어난 나라 - 일본 - 부터 지워야만 했다. 문학이든 예술이든 작가의 출신국가와 성별, 인종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작가가 창조한 결과물, 작품을 주시해야겠다만,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이 잘 따라주지를 않는다. 우리나라의 광복일이자 일본의 무조건 항복일과는 삼만 광년 쯤 떨어져 태어난 젊은 세대들도, 희한하게 가르친 적 없는데 야구든 축구든 대한민국과 일본이 '붙으면' 열에 아홉은 목숨 걸고 우리나라를 응원한다. 나머지 하나는 일본이 패하기를 응원하고.

사정이 이러할진대 '오, 망가의 신 데즈카 오사무의 말년 유작이 드디어 국내에 출간되었다! 미국도 '애스트로 보이'란 애니메이션을 통해 경의를 표한 거장 중의 거장의 말년작,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걸작이 드디어 나왔는가!'라고 호들갑 떨 생각은 없다. 호들갑을 떨기 이전에 내 손은 먼저 태극기부터 찾고 있으니까. 이렇듯 작품을 작품으로 보기에는 편협하기까지 한 선입견이 잔뜩 끼어있는지라, 내 속의 나와 또 다른 내가 맹렬히 불꽃 튀기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대한남아: 뭐야, 데즈카 오사무도 결국은 패전국의 컴플렉스를 작품으로 승화시킨 인물 아냐? 아톰 봐봐, 아톰. 쌍꺼풀 없고 코 낮고 키 작은 동양인 아톰이 덩치 크고 털 숭숭 난 서양 거대 로봇을 무찌르는 것과 뭐가 달라? 패전 후 주둔군 미군에 대한 컴플렉스가 결국은 동양인을 상징하는 아톰의 통쾌한 양놈 때려부수기 액션으로 표현된 거 아냐? 그런데 무슨 평화와 반전이고 아돌프에게 고해? 가해자가 피해자의 마음을 알기나 해? 

피쓰: 피해자만이 역사와 전쟁을 논할 수 있다는 건가? 그럼 아트 슈피겔만의 <쥐> 같은 작품만이 세계대전에 대해 발언할 권리가 있는 거야? 2차 대전에서는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일지 몰라도 슈피겔만의 뿌리인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게 있어서는 악의 축에 다름 아니라고.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기에 피를 피로 갚는 것인가? 왜 독일인에게 당하고 팔레스타인인에게 갚는지 채무관계 청산 방식이 절대 이해 안 되는 바일세.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핍박받은 유대인 아돌프가 결국 독일인 아돌프에게 피로 피를 갚는다는, 전쟁의 끊을 수 없는 업보와 복수의 굴레를 그리는 작품이 아닐까 싶네만.

대한남아: 이해 할 수 없음일세. 독일인 아돌프와 유대인 아돌프, 그리고 전쟁의 핵 아돌프 히틀러까지 모두 정의라는 이름에 눈멀어 폭력을 행사하는 건 역사의 슬픈 귀결이라 이해하겠다만, 왜 <아돌프에게 고한다> 내에서 사건의 관찰자인 일본인 도게 소헤이는 중립적인 저널리스트이자 나치 전복을 꾀하다 살해당한 친동생을 둔 희생자이자 객관적 관찰자로 등장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음일세. 왜 관찰자가 일본인이어야만 하는 것이지? 그것도 피해자이자 중립적인, 지적이기까지 한 저널리스트로 말일세. 

피쓰: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릴세. <아돌프에게 고한다>의 주요 전장은 유럽이지만, 일본에 있어서 일본 내 지식인을 탄압하고 독하게 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일본인이야. 단지 '깨어서 평화를 추구한다'는 이유 하나로 젊은 여선생의 맨 가슴살을 담뱃불로 지지는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게 자국민인 일본인이란 소리지. 폭력과 광기의 시선은 일본인만을 피해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일본인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대한남아: 그렇게 객관적이어서 진주만 공습이나 중국 양민에 대한 일본인의 학살은 몇 페이지로 얼렁뚱땅 넘어간 건가? 그래놓고서 B29가 공습을 개시하는 일본의 하늘은 그토록 디테일하게 그린 건가? 공습에 의해 희생당하는 도게 소헤이의 아내가 전시 상황에도 귀족이나 다름 없는 생활을 영위한 건 뭐지? 희생자가 순결할수록 그 희생은 더 빛나는 건가? 깨끗하고 가녀린 여인이 무자비한 공습에 의해 희생당함으로 인해 감상만 넘쳐나고 역사와 현실은 뒤로 물러나는 게 아니면 무엇이지?  

피쓰: 그렇게 당당하게 얘기할 건 아닌듯 싶으이. 우리도 우리의 아들들을 두당 달러 얼마로 쳐서 도매가로다가 베트남 파병으로 넘기지 않았는가? 젊은 해병대원들은 조국에 충성하는 충정과 애국으로 파병되어 피를 흘렸지만, 그 위의 보이지 않는 손은 결국 자본과 권력, 정치 상황이 아니었는가? 전쟁의 광기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결국 베트남의 수많은 여성에게 한국인의 씨를 뿌리는 불명예를 남겼다는 건 부인할 수 없겠지? 황국의 신민이 다니는 '국민학교' 시절, 국민학교 선생이었던 누군가 내 앞에서 '베트콩의 머리를 잘라서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라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나네. 그게 과연 국민학생 - 지금 말로 하면 초등학생 - 앞에서 할 얘기인가? 자네 말대로 따지면 김정환 시인의 <하노이 서울 시편>과 같은 시집도 결국은 가해자의 말놀음에 불과한 게 아니던가? 누구나 힘을 지닌 채 다른 이의 땅을 밟게 되면, 군인이라는 건 결국 총과 남근을 든 폭력배에 지나지 않는다네. 자국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든 게 아니라면, 베트남 인이 보기에 파병군은 결국 다 남의 잔칫상에 밤 놔라 대추 놔라 끼어드는 불청객이 아니던가.

대한남아: 야, 너 군대 나왔어? 육군 예비역 병장 앞에서 신성한 군인을 모독하는 거야? 그렇게 잘나고 반전주의자라서 지적이고 중립적인 저널리스트이자 관찰자인 도게 소헤이는 작품 속에서 징집도 면제받냐? 왜? 일본인 주인공이 총들고 양민 학살하는 모습은 차마 그리기 싫었나 보지? 위안부 할머니와 한국인 노동자들은 총알받이로 잘도 세우더니만, 일본인은 끝까지 피쓰~를 부르짖는 모습으로 작품에 등장시키고 싶었던 게 아니면 뭐야?

피쓰: 그런 식으로 흘러가면 문학 작품이 어찌 성립되겠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어리석은 폭력을 고발함과 동시에 자연스레 반전과 평화를 말함인데, 스토리 라인에서 하나를 흔들면 작가의 메시지 자체가 흔들리는 게 아닌가. 작가는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이고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메시지를 공고히 하는 출연자들인데 연출자인 작가의 뜻과 달리 마음대로 뻗어나갈 수는 없는 게 아닌가.

대한남아: 그래, 작품? 창작? 좋다 이거야. 하지만 내 불만은 이거야. 반전을 말하고자 했다면 2차 세계대전의 한 축이자 전장이었던 일본을 배경으로 할 수 있음인데 굳이 유럽까지 날아가 '아돌프들'을 끌어냈느냐 이말이지. 일본, 한국, 중국, 이 세 땅덩어리 안에서도 얼마든지 창작을 위한 극적 상황 연출과 스토리 라인 구성은 가능했을 게 아닌가? 객관적으로 자국의 허물을 드러내는 듯하지만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 포커스는 '아돌프 히틀러'를 악의 축으로 묘사하고, 일본의 패악과 살육은 조연으로 가려지게 된 게 아니느냐는 말이지. 

피쓰: 원론적인 소리네만, 일본인이라고 다 전범이거나 전쟁광이 아니라네. 그들 중에서도 전범이 있고, 무력하게 희생당한 양민 피해자가 있어. <아돌프에게 고한다> 작품 속에서도 일본인에게 억압받은 일본인이 있고,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위해 스파이로 활동한 친아들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는 헌병대 장성이 있잖은가. 아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놓고서 자살로 꾸미는 아비의 심정, 이런 장면이야말로 전쟁의 극단적 폐해를 드러내는 게 아니면 뭐인가?

한 작품 <아돌프에게 고한다>를 두고 서로 다른 입장의 두 사람이 감정 섞인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묘사했다만, 저 둘의 이야기는 내 안에서 하나의 이야기이다. 상찬하는 것도 내 안의 목소리이지만, '대가이기 이전에 일본인이 쓰고 그린 2차 대전 이야기'가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은 것도 나다. 

유독 까탈스러운 나인지라 이토록 삐딱한 시선을 들이대었으나,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충실하고 훌륭한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울 수도 있는 일본인 - 데즈카 오사무의 조국 - 의 과오와 어리석음을 드러내면서까지 전쟁의 이면을 세밀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데즈카 오사무의 말년작인 만큼, 그간의 경험과 연륜을 녹여 진중한 메시지를 발하는, 이전의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과도 차별점을 지닌 작품이 바로 <아돌프에게 고한다>이다.

데즈카 오사무의 세계를 깊이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만, 사실 그의 작품을 그닥 좋아하고 추종하는 사람도 아니지만, 데즈카 오사무의 전작을 돈 주고 산 적도 없다지만, 이 책은 실물도 나오기 전, 예약판매를 하는 시기에 구입했다. 이 책을 낸 출판사 세미콜론의 이름을 믿어서였다. 세미콜론은 '아주 좋거나', 적어도 '문제작'을 내는 출판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판단이 옳았다는 생각이다. 내가 미국인이나 유럽인이었다면 이 작품을 극찬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인'으로서는 입맛이 조금 쓰고 아쉬운 게 사실이다.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내게는 문제작이자 숙제다.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좋은 작품이기도 하지만 문제작이기도 하다. 문학을 문학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작품을 작품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망가의 신을 만화의 신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감정의 간극, 반일의 간극, 일개 독자에게까지 뿌리내린 편견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지 반백년이 다 되었건만, 전쟁과는 전혀 관계없이 자란 21C의 독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니 전쟁이란 역시 무서운 것이다. 작품마저도 작품으로 볼 수 없게 만드는 정녕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겠다.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에게 데려와 율법대로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여야 하느냐 물었을 때 예수의 대답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그 말을.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인류 중 다른 종족과 이웃을 단 한 번이라도 해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없기에, 나라는 독자의 불편함과는 별개로 <아돌프에게 고한다>의 메시지는 영원히 유효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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