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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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의 작가 코맥 매카시는 꼭 말을 하고 싶어 한다고 보기 힘든 면이 있어요. 독자가 알아듣는지 여부에 딱히 관심이 없달까. “잘 모르겠냐? 어쩔 수 없지”라는 식이죠.' _씨네 21, 김혜리가 만난 사람 / 번역가 정영목

편집자에게 신뢰받는 번역가이자 소설 <로드>를 우리말로 옮긴 정영목은, <로드>를 통해 세상과 만나는 코맥 매카시를 그렇게 평가했다. "잘 모르겠냐? 어쩔 수 없지"

번역가 정영목의 말처럼, 로드는 불친절한 소설이다. 장사꾼은 물건을 팔아야하고 글쟁이는 글로 소통해야 하는데, 코맥 매카시는 적어도 <로드>에 있어서만큼은 '독자와의 소통'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독자는 "이거 얼마예요?"라 묻는데 글쟁이는 딴청만 피우고, 재차 "파는 거 아니에요?"라 묻는데 그저 휘휘 파리만 내쫓는 꼴이다. 그렇기에 <로드>에 대한 평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편이고, 텍스트에 대한 호불호 역시 모세가 홍해바다 가르듯 양쪽으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간결함이 주는 매력과 알 수 없는 힘에 끌렸어요. 이게 뭘까, 더 알고 싶었어요... 중략 ... 우리 독자들의 좋은 책에 대한 수용력이 크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_번역가 정영목

<로드>의 문체는 불친절하다. 문장은 간결하다 못해 겨울바람에 휩쓸리는 낙엽처럼 푸석푸석 건조하다. 책장을 넘기다 자칫 실수하면 바스라지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메마르고 단조롭다. <로드>를 통해 읽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말이다. 화장실에서의 쾌변처럼 빠르게 읽히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더부룩한 아랫배와 변비처럼 더디게 읽히는 소설이 있다. <로드>는 단연코 후자다. 작가가 그다지 열심히 설명하려고 들지도 않고 그저 알아들을 놈만 알아들어라, 인생 뭐 있더냐,하는 식으로 자기 할말만 하는 소설, <로드>.

화려한 수상 경력이나 <로드>에 바쳐진 찬사, 영화화 결정, 미국에서만 180만 부 판매 달성 등 외적 아우라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한 백지 상태에서 단지 '알 수 없는 힘에 끌리고 더 알고 싶은 마음'에 번역을 맡았다는 번역가 정영목. 순수하게 '텍스트의 힘'에 매력을 느껴 번역 작업을 맡은 그조차 출간한지 6개월이 안 된 시점에 16만 부라는 판매고를 올리며 <로드>가 스테디셀러에 진입한 것을 두고 '독자들의 좋은 책에 대한 수용력이 크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라고 말했다. 생각할 '수도' 있어요,다. '생각해요'라 하기에는 망설임이 꼬리처럼 붙은 느낌이다. 그만큼 쉽게 생각하고 덤볐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는 소설이 바로 <로드>이다. 

<로드>의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다. 지구상에는 더 이상 '문명'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다. 아니, 모두가 이미 멸망했다. 그리고 제비가 겨울을 이기기 위해 따뜻한 남쪽을 향해 나아가듯, 모든 게 허물어지고 폐허가 되어버린 잿빛 길을 아버지와 아들이 걸어간다. 걷는다 하여 뭐가 있을 것이라고 딱히 기대하진 않는다. 그저 걸을 뿐이다. 어찌보면 임종을 위한 길고 긴 여행과도 같다. 그래, 걷는다. 오직 걷고, 오직 살아서 내일 아침 눈을 뜨길 바랄 뿐이다. 이야기는 길에서 시작해 길에서 끝난다. 

사람들은 늘 내일을 준비했지. 하지만 난 그런 건 안 믿었소. 내일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어.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몰랐지. _<로드> 본문 192쪽 부분 인용, 구약성서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오버랩되는 '엘리'라는 노인의 말

왜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지, 무엇이 인류를 이렇게 파멸시켰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독자들은 그저 인간과 자연 모두 절멸 직전인 잿빛 거리를 책장을 따라 한없이 걸을 뿐이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다. 경작할 온전한 땅도 없고, 생명을 잉태할 씨앗도 없으며, 임산부는 출산한 태아의 창자를 발라낸 후 불에 구워 먹는다. 자기가 살기 위하여. 당연히 모성도 없고 인류애는 더더욱 없다. 창고에는 식량으로 쓸 사람들이 묶여있다. 오늘은 발 하나, 내일은 팔 하나. 사지가 하나씩 잘려나가는 살아있는 식량. 인간은, 살아 있기에 더 비참하다. 그 정도로, 도처엔 죽음 뿐이다. 하지만 왜 이모양이 되었는지 단 한 마디도 설명되지 않는다. 지구를 점령했던 공룡이 일시에 증발하듯 사라진 것을 두고 후배격인 인류는 기후 변화니 운석 충돌이니 가타부타 말이 많지만, <로드>의 인류가 왜 이 지경까지 왔는지 설명해줄 신인류는 아무도 없다. 독자는 알 수가 없다. 코맥 매카시는 그저 말할 뿐이다. 

"자, 모두가 망했고, 아내는 강간당한 후에 식량으로 먹히느니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게 낫다며 고결한 죽음을 택했네. 살아남은 당신의 곁엔 어린 아들이 있지. 그리고 당신에게는 총 한 자루가 있어. 아들을 쏜 다음 자네 머리를 겨눌 총알 정도까지는 탄창에 채워놓았네. 하지만 공격자에게서 자신을 지키기엔 턱없이 모자란 총알이야. 평단에선 나더러 '황야의 세익스피어'라 칭하기도 한다던데, 죽느냐 사느냐 정도의 배부른 고민은 나약한 마마보이 햄릿의 몫이지. 내가 창조한 세계에서는 죽는 게 사는 것보단 분명 쉽고 나은데, 이왕 살 거라면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좋을 걸세."

독자는 이유도 설명도 없이 코맥 매카시가 창조한 절망의 세계에 던져졌다. 그래서 초반의 흡입력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을 완전한 절망과 암흑의 세계에 '아무 이유없이' 덜렁 놓여졌으니, 적응하는데 시차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오직 걷고 또 걷고, 걷는 중 오가는 선문답 같은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를 따라가노라면, 이유 없이 숨이 차고 앞으로 나가기가 힘들어진다. 모호한 대화도 대화려니와 심지어 이들의 대화에는 '따옴표'조차 없다. 그저 잿빛처럼 등장하는 마침표, 그리고 마침표. 걸어가는 길이 더디고 힘들듯, 읽어가기도 더디고 힘들다. 

 
로드에 담긴 두 가지 길, 신의 길과 인간의 길

<로드>의 이유 모를 문명 절멸에 대한 단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있어도 짐작하긴 어렵다만.

시계들은 '1:17'에서 멈추었다. _<로드> 본문 62쪽 부분 인용

재앙이 시작된 시간이다. '1:17'. 굳이 '한 시 십칠 분'이라 풀어 쓰지 않고 '1:17'이라는 식의 생소한 표현을 썼다. 가독성이 떨어지는 시간 표기이다. 그런데 어딘가 낯익다. 바로 성경의 장, 절을 인용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인류의 시간은 BC와 AD로 나뉘는데, AD(Anno Domini), 즉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성경의 장은 마태복음 '1:18', 마태복음 1장 18절이다. 신약성서 가장 처음, 사복음서의 가장 처음인 마태복음 역시 <로드>만큼이나 첫장부터 지루한데, 이는 1장 1절부터 1장 17절까지 예수 탄생 이전의 족보를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그리고 '1:17'다음인 '1:18'이 되면 메시아가 등장한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니까요.
그래.
그리고 우리는 불을 운반하니까요.
우리는 불을 운반하니까. 맞아.
알았어요.
_<로드> 본문147-148쪽

성경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이한 후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 제자들 앞에 나타난다. 여전히 미흡한 제자들이 예수가 곁에 함께 있어주기 바람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오히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하며 승천을 암시한다.(신약성경 요한복음 16:7) 그리고 예수의 승천 후 제자들에게 '불의 혀' 같은 '성령'이 임함으로써 사도의 시대가 열린다. 사복음서까지는 예수의 생에 관한 것이고, 사복음서 바로 뒤에 등장하는 사도행전부터는 예수의 제자들, 즉 '사도'의 활동 등이 기록된 것이며, 성경의 마지막 장 '요한계시록'은 예수가 총애하던 제자 '사도 요한'이 인류의 종말을 예언한 묵시록이다.

<로드>에서는 '불을 운반한다'는 이야기가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사이에 종종 등장한다. '불'에 대한 설명 역시 친절하게 언급된 부분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코맥 매카시는 '불을 운반하'는 행위를 모닥불을 피우고 밥을 짓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오히려 신적인 영역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성경에서 예수가 죽고 부활함으로써 '불의 혀'와 같은 성령이 사도들에게 내려왔고, '성령'을 통해 사도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예수와 함께 한다는 것을 믿게 된다. <로드>에서 아버지는 임종의 순간에도 '불의 운반'에 대해 아들에게 강조한다. 아들은 과연 그 '불'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거냐고 묻지만, 아버지는 '불'이 아들의 '안'에 있다고 말할 뿐이다. 아버지가 죽은 후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사흘'을 더 머무른 후 자신의 길(로드)을 떠난다. 예수는 죽고 사흘만에 부활했으며, 예수가 죽었기에 '불의 혀'와 같은 성령이 임했다. 그 '불'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며, 사도의 영혼에 임해 언제까지나 함께 하는 '성령'이었다. <로드>의 아버지는 죽으며 '불의 운반'을 이야기했고, 아들은 '사흘'동안 아버지 곁을 지켰으며, '사흘 후' 자신의 길을 걸어나가기 시작한다. 아들은 자신을 믿고, 사람을 믿으며, 자신만의 길을 향해 떠나는 것이다. 

소년은 실제로 아버지와 말을 했으며 잊지도 않았다. 여자는 그것으로 됐다고 했다. 신의 숨이 그의 숨이고 그 숨은 세세토록 사람에서 사람에게로 건네진다고. _<로드> 본문 323쪽

위 문장은 아버지의 임종 후를 묘사한 것이다. '실제로 아버지와 말을 했으며', '신의 숨이 그의 숨', '세세토록 사람에서 사람에게로 건네진다'는 등의 표현은 성령에 관한 기독교계의 설명과 유사점이 많다. 

남자가 아는 것이라고는 아이가 자신의 근거라는 것뿐이었다. 남자가 말했다. 저 아이가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신은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는 거야. _<로드> 본문 9쪽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는 말로 풀어내기 어려운 기독교의 핵심인데, <로드>에서는 부자간의 관계가 육체의 둘이 아닌 정신의 하나로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문학의 거장들이 글감으로서 유혹을 받는 몇 가지 소재가 있다면, '자전적 소설' 또는 '인간과 신계, 창조에 관한 일'을 꼽을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개미>, <뇌>, <나무>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최근작 <파피용>을 보면 성서의 요한계시록을 차용한 부분이 보인다. <파피용>에서는 마지막 지구인들이 인류의 미래를 걸고 우주선에 탑승하는데, 탑승 인원이 각계각층에서 선발한 14만 4천 명이다. 14만 4천이라는 숫자는 성서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로 등장한다. 키워드 차용을 넘어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최신 연작을 통해 또다른 세계관을 펼쳐놓으려 하는데, <파피용> 후의 작품이 <신>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하나의 귀결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14만 4천'이라는 숫자처럼, 코맥 매카시 역시 의도였든 아니었든 간에 신화적 키워드를 작품 곳곳에 뿌려놓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관계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성서뿐만이 아니라 '불을 운반하는' 신화적 존재로는 '프로메테우스'를 예로 들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 역시 '불을 운반하고', 인류는 불을 얻음으로써 '신에 다가가는 존재'가 되고, 프로메테우스는 매일 죽으나 매일 재생되어 살아난다 하겠으니, 프로메테우스의 희생으로 인류가 새 국면을 맞이한다는 큰 얼개는 비슷하다고도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로드>의 상업적 성공 등으로 미국 내 언론이 소설에 성서적 분위기를 '덧입혀' 찬사를 바쳤다는 것도 감안할 필요 있겠다. <로드>가 워낙 불친절한 텍스트이다 보니 코맥 매카시의 진의는 알 도리가 없다만.




앞서 '불친절하고 재미 없는' 것으로 <로드>를 묘사했는데, 나 역시 일부러 건조한 투로 얘기했지만 실은 <로드>를 '몇 안 되는 좋은 작품' 중 하나라 평하는 게 솔직한 표현이다. <로드>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는데, 나는 '신의 길'보다는 '인간의 길'을 걸었고, '독자' 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로드>를 읽었기에 내내 가슴이 죄여오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로드>는 코맥 매카시가 늦둥이 아들을 재우고 창밖에 시선을 던졌을 때 그곳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사색에 잠김으로써 구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잿빛 풍경, 노쇠한 아버지와 아직 어린 아들. 둘이 걸어가야 할 길. 코맥 매카시는 헌사를 통해 <로드>를 '존 프랜시스 매카시'에게 바치고 있다. 나는 두 돌이 갓 지난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아버지가 본 뿌연 안개 너머 세상이 어찌 보였을지, 아들의 숨소리가 어떻게 다가왔을지 짐작이 되고 남는다. 불친절한 문장은 잘 잡히지가 않으나, 아버지가 쓴 소설 <로드>는 어떤 마음으로 씌였을지 짐작이 된다. 아버지로서 읽은 <로드>는, 오히려 불친절한 문장 때문에 더 가슴이 아렸다. 차라리 화려한 만연체였다면, 왜 이렇게까지 문명이 절멸했는지 뭔가 이유라도 알려준다면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보고 노력이라도 해 볼 터인데. 그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잿빛 세상에 아들과 아버지만 남았으니 아버지는 오로지 '살아 남아' 아들을 '살게 하는' 것 밖에는 할 수가 없다.

가족을 두고선 '죽어도 죽을 수 없다'는 아버지의 심정. 그 절절한 심정을 알 수 있을런지. 냉혹하다고까지 느껴지는 건조한 문체와 행간 사이로 터벅거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미칠 것만 같은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더디게 나가는 진도 때문에 새벽을 지새우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낮게 코를 골며 잠든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곤 했었다. 눈물마저 말라버린 듯한 인류 종말의 소설을 읽으며 왜 눈물이 났던 걸까. 그저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뿐인데 아들의 아버지인 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비로소, 이런 종말의 순간이라면 나 역시 아들에게 친절할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의 수사와 비유와 설명은 한낱 '사치'에 불과하겠구나. 우리에겐 그저 '길'이 있을 뿐이구나. 아들을 위해 '희망'을 운반해야겠구나.'라고 말이다. 

몰입이 어려웠다면, 낯설고 불친절하게 느껴졌다면, 책 속의 '신의 길'을 찾지 못하였다면. 책 일독 후 책꽂이에 고이 보관하시길 바란다. 그리고 훗날 아버지가 되고 부모가 되었을 때 다시 꺼내서 정독하면 좋겠다. 신이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함을 알리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을 신적 사랑의 모형으로 삼으셨다는데, 아마 아버지가 되어 읽는 <로드>의 길 속에는 신과 인간의 길 두 갈레길 모두가 보이지 않을까 싶다. 행여 지금은 건조하게 읽혔더라도 훗날 누군가를 책임져야만 하는 사람이 되어 <로드>를 다시 읽는다면, 아버지의 목숨으로 쓴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깨닫게 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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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대장 존 비룡소의 그림동화 6
존 버닝햄 지음, 박상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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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존 버닝햄의 그림책을 처음 접했을 때,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야 그 당혹스러움은 ‘내가 잃어버렸던 동심과 환상 세계와의 조우’로 인한 충격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착실히 어른의 길을 걷고 있던 나로서는 그의 작품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대충 그려도 그림책이 되는구나!" 싶었으니까.

그런 트라우마에서 채 회복이 되기도 전에 또 한 번의 당혹스러움을 경험했다. 존 버닝햄의 여러 작품 중 한 권의 그림책을 집어 올리던 나는 “그래도 이 책의 그림이 가장 낫군.”이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책의 속표지를 본 순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장 나아 보였던 그 그림책은, 존 버닝햄의 처녀작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 .

그렇다. 존 버닝햄은 처녀작인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로 불과 이십 대의 나이에 영국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수여하는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내 눈에는 뒤이어 출간된 존 버닝햄의 삐뚤빼뚤한 그림책들보다 그의 처녀작이 가장 좋은 그림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두 번째로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의 영예를 안겨준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는 어떠한가?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한 어수룩한 그의 작품이 처녀작 발표 후 6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에 출간한 작품이라니, 게다가 6년 전 그림책 작가로 영예를 얻은 처녀작보다 더 어수룩하고 맥없는 그림을 보이고 있다니! 


존 버닝햄에게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의 영예를 안긴 처녀작과 후기작.

6년 후에 그려진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 그림이 더 유아적이다.

존 버닝햄의 그림은, 분명 서툰 구석이 있다. 그것도 적당히 서툰 정도가 아니라 그만큼 서툴게 보이려고 애를 써도 흉내내지 못할 만한 부족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의 부족함이 정점에 달했다 할만한 작품 『지각대장 존』을 보자. 초벌 연필 스케치가 그대로 드러나는 그의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에게 얼른 지우개라도 쥐여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것 봐, 이런 지저분한 흔적들은 다 뭐야? 이런 산만한 책을 우리 어린이들에게 보여줄 생각인거야?’ 하면서.

이렇듯 일견 불성실하고 서툰 그림을 그리지만 존 버닝햄이 수십 년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만들어낸 작품들의 매력과 강점은 무엇일까? 아마 그 이유는 그의 '서투른 그림'과 '위로가 담긴 글'에 있지 않나 싶다. 보통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게 되면 아카데믹한 기본기를 쌓기 마련이다. 명암의 단계, 빛과 그림자, 원근법, 강조와 생략 등. 그리고 그러한 기본기를 충실히 쌓은 다음에 비로소 추상, 반추상, 구상 등 각자의 성향에 맞는 화법을 따라 작가로서 유랑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처녀작'이 첫 눈에 ‘가장 괜찮은 그림으로 보였던’ 것은, 그가 아직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것이고, ‘일반적이던 선배들의 영향’을 아직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신인’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반대로 데뷔 후 6년 뒤에 발표된 그의 작품은 그가 이제는 ‘그만의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길을 똑바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예전에 대학에서 그림을 배우며 참 재미있는 수업을 받았던 적이 있다. 석고상 정도는 거의 안 보고도 그릴 정도의 경지(?)에 오른 미술대학 새내기들에게, 교수님께서 우스갯소리로 ‘세계 최고의 뎃생력, 하지만 창피한 창의력’ 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이미 상식의 틀을 따라 굳어버린 우리의 손을 풀어주고자 특이한 과제를 주셨다. 왼손 드로잉과 눈을 감은 채 하는 드로잉, 그리고 양손으로 하는 드로잉이었다. 드로잉이 끝난 후에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우리의 그림은, 우리의 시각으로는 ‘그림’이라고 할 수조차 없을 조악한 형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선, 그 선 하나 하나에 담긴 자유로움과 재미란! 그 순간은 파르라니 머리를 깎고 각을 잡은 해병대원 같은, 거의 기계같이 일정한 수준, 동일한 완성도의 그림을 뽑아내던 풋내기 미대생들에게 ‘그림이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해 준 귀한 시간이었다.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에서 보았듯이, 존 버닝햄이 처음부터 어설픈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한 해 한 해 습작을 거듭하며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서투름’을 화풍으로 만들어냈고, 안정적이고 편안한 텍스트와 함께 자연스레 우리의 마음속에 녹아들었다. 선과 면이 주조가 되는 그의 그림은 너무나도 쉽게, 누구라도 따라서 그릴 수 있을 듯한, 심지어 '내가 그려도 이보다는 낫겠다'싶은 근원 없는 자신감을 우리에게 안겨 주지만, 동일한 상을 수상한 그의 처녀작과 6년 후의 작품을 비교해 볼 때 그렇게 왼손으로 내지른 듯한 시원하고, 자유롭고, 재미있는 선을 갖기 위해 존 버닝햄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잘 그리기 위해 욕심을 낸 작품은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그런 작품은 분명 어딘가에 억지스러움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가장 좋은 작품은 붓이 체화되어 밥을 먹듯, 똥을 누듯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릴 때, 그림이 일상이 되었을 때 나오기 마련이다. 일정한 훈련을 통해 화면에 원근과 입체를 표현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지만 ‘자연스러운’ 그림만큼은 쉽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끔 편하게 그린 아마츄어의 그림이 프로의 그림보다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이다. 하지만 그 순간 ‘정말 느낌이 좋은데요, 한 장 더 그려보시겠어요?’라고 말을 건넸다가는 분명 어깨에 힘이 들어간 어설픈 그림이 나올 수밖에 없다. 존 버닝햄의 ‘서투름’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의 작품에도 동일하게 표현되었다는 것은 그가 서투름, 또는 자연스러움을 훈련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애초에 그림을 못 그렸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처녀작을 통해 그의 기본기를 확인한 바, 그의 서투름은 상당한 훈련과 습작을 통해 터득한 상당한 경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존 버닝햄이 사랑받는 이유는 그림뿐만이 아니다. 그의 처녀작인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는 장애우 문제를 다루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안정’에서 소외받은 존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날지도 못하는 바보 기러기 보르카는 낯선 곳, 낯선 환경 속에서의 새 삶을 통해 안정을 찾게된다. 이 작품을 통해 존 버닝햄이 소외된 이웃과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처녀작부터 드러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의 등교를 막는 사자! 초등학교 등굣길에 사자라니!

 『지각대장 존』의 경우에는 그러한 시선이 더욱 농익어 표출되었다. 숨이 차 부르기조차 어려운 주인공 아이의 이름은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이다. 후반부의 깜짝 놀랄만한 반전이 펼쳐질 때까지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인생은 결국 혼자인 거야!’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하다. 작가인 '존 버닝햄'과 불쌍한 소년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가 같은 ‘존’ 으로 이름을 주고 받는 것으로 보아 존 버닝햄은 자신이 창조한 인물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를 통해 소외와 몰이해의 폐해는 물론, 스스로를 치유하는 주술을 걸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그저 '존'이라 줄여 불러도 좋으련만, 그림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의 이름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를 고집스레 부르고 있다. 그만큼 작가는 '존'을 끝없이 연민하고 응원하는 게 아닐까. 인간은 누구나 자기에게 결핍된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므로 처녀작부터 인권을 다룬 그가 지속적으로 소외 받은 이들을 작품에 등장시킨다는 점도 작가의 심리와 상관관계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지각대장 존』과 구성이 비슷한 책을 함께 읽으면 그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1987년에 원본 초판이 출간된 『지각대장 존』보다 십수년 앞서 출간된 『어리석은 판사』를 보자. (원본 초판 1970년 출간) (* 재미있는 것은, 그림책 부부 작가인 존 버닝햄처럼  『어리석은 판사』의 저자 역시 부부 작가이며, 존 버닝햄이 영국 최고의 어린이책 상인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을 두 번 수상했다면 『어리석은 판사』의 저자는 미국 최고의 어린이책 상인 칼데콧 상을 세 번이나 수상했다는 점이다.)

『어리석은판사』와『지각대장 존』은 진실에 눈을 가린 어리석은 권위와 그러한 존재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점에서 뜻을 같이하고, 구성이나 반전에서도 상당한 구조적 유사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텍스트에 담긴 깊은 맛과 디테일에서는 색과 방향을 달리한다. 『지각대장 존』은 존중받아야할 인격이지만 우리 눈에서 소외된 이들, 약자들, 예컨대 장애우와 어린이 등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서 그들의 손을 들어주는 작품이다. 『어리석은 판사』에서 권위적인 판사에게 무시당하는 이들은 다양한 계층의 여러 존재를 대변하고, 판사로 대변되는 권위는 사회와 사회 구성원 전 계층을 억압하는 권력으로 등장하지만, 『지각대장 존』에서는 오직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한 명만이 융통성 없는 선생님과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존 버닝햄은 사회와 여러 계층이 맞서는 권위보다는 내밀한 자아, 자존감을 억누르는 외부적 환경에 대한 개인의 끝없는 투쟁과 항변을 말했다 하겠다. 

등굣길에 등장하여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의 등교를 막는 악어, 사자, 커다란 파도는 초등학교 등굣길에 등장하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실로 초현실적인 상황일 수밖에 없으나, 초현실로 형상화되는 세상의 편견과 오해는 억눌린 영혼의 성장을 막는 '현실적인' 고통과 억압으로 다가온다. 그저 외부자의 시선을 지닌 선생님에겐 악어나 사자 따위는 '초현실'에 불과하겠지만,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에게는 실존에 직결되는 현실이었다. 장애우나 어린이가 겪는 고통과 아픔이 어른들에게는 이미 잊혀지고 주목할 필요 없는 초현실로 여겨질 수 있으나, 비주류인 그들에게는 곧 실존과 직결된 절박함이 아니던가. 재판장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같은 설명을 반복, 열거하는 현실적이고 권위적인 판사가 등장하는 저 『어리석은 판사』는 사회를 아우르는 보편성을 보이며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초현실적인 상황이 펼쳐지는 『지각대장 존』의 경우가 더욱 입체적으로,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소외된 이들이 겪어야만 하는 '초현실적이지만 실존적인' 고통을 존 버닝햄이 깊이 느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바로 '상대를 이해함'에서 진실의 힘이 비롯되는 것이다.  

그림으로 도달하려는 끊임없는 자유에의 의지, 처녀작을 출간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 작품 한 작품에 혼을 바치며 매너리즘과는 전혀 관계 없는 거장으로 살아가는 존 버닝햄. 삐뚤빼뚤한 그림을 그리지만 여전히 그의 작품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영혼의 자유와 독립을 부르짖는 그림과 상대를 이해함에서 비롯되는 따뜻한 글 때문이 아닐까. '존 버닝햄 할아버지'가 오래 오래 천수를 누리며 더 좋은 작품을 계속 발표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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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거리 문학동네 동시집 3
곽해룡 지음, 이량덕 그림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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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어렵다. 쓰기에도 어렵지만 읽기에도 어렵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 시즌이 되면 항상 거론되는 큰 시인 고은은, 자기에게 있어서만큼은 소설이란 예술적 단계에서 하급이며, 시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 한국 시 100주년을 맞이해 고은 시인이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말을 인용하자면 시는 우주와 교섭하는 행위란다. 시인의 말마따나 소설은 인간의 굴레에서 노는 것일진대 우주와 통하는 시 쓰기는 얼마나 경이롭고 얼마나 초월적인 행위인가. '창작'이란 말이 꼭 들어맞는 문학 장르가 바로 시 쓰기라 하겠다. 국내 생존 시인 중 첫째로 꼽히며 '국민 가수' '국민 여동생' 에 이은 '국민 시인'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고은. 춘추가 무색케 그 누구보다도 왕성한 시작 활동을 펼치는 고은 시인이, '우주와 교섭하는 행위'라 밝힌 시쓰기. 쉽게 생각해도 어렵다. 교단에서 물러나 이제 더 이상 초등학교 선생님이 아닌 김용택 시인이라면 시 쓰기가 별거냐 밭 매는 것과 일반이지, 라고 시 쓰듯 말할지 모르겠다만. 그건 시 쓰기가 밥 먹고 똥 누듯 일상의 경지에까지 오른 사람들이 쉬이 말하는 게 아닐까. 범인이자 한낱 독자에 불과한 나로서는 어렵고도 어렵다.

그러나 시 쓰기보다 더 어려운 게 있다. 바로 '동시 쓰기'이다. 물론 동시는 넘쳐나고 책도 술렁술렁 나오지만, '제대로 된' 동시 쓰기란 참으로 어려운 노릇이다. 그저 강아지 좀 뛰어놀고 나비 좀 팔랑거리고 아가 몇 명 기어 다니고 봄비 부슬부슬 이슬은 초롱초롱 한다고 다 동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팔랑, 부슬, 초롱, 멍멍 하면 동시가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데 있다. 그런 가벼운 생각과 오해를 길게 늘어빼어 연장해 본다면, 소설보다 짧게, 문장은 쉽게, 주인공이 초등학생이면 동화가 된다는 결론 나와 주시겠다.

<맛의 거리>. 홍대 앞 먹자 골목에 이은 또다른 스트리트 인가. 작가 약력을 보니 돈을 벌기 위해 서울행 열차를 타고 중, 고등학교 교과 과정은 검정 고시로 마치고, 현재는 어린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치고 있다 한다. 바둑이나 두며 가끔 아이들과 오목도 두고 더 가끔은 알까기도 하다 보니 동시 쓰기에 생각이 미쳤는가, 저자의 말을 보니 더 걱정이 된다. 자신의 동시를 통해 노숙자와 노점상, 외국인 노동자 이야기를 하겠다 한다. 한마디로 사회 '문제'를 언급하겠다는 소리인데. 걱정이 곱이 된다. 행여 팔랑거리고 부슬거리면 동시 된다 생각하시는 분이 사고치듯 책 내신 것은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그러나. 이 자리 빌어 잠시나마 그런 불경한 마음 품은 것, 작가 분께 사죄드린다. 이 분은, '제대로 된' 동시 작가이며, 우주보다 더 위대한 우리 아이들과 '통'한 분이라 감히 말하겠다. 사회 문제, 물론 말하고 계시지만, 잰 채하거나 내려다 보지 않으면서도 이미 다 알고 있고, 다 말하고 있다. 한편 살짝 옮겨 보겠다.


 매미

허물 벗은 매미가
나무 귀에 대고
그동안
땅속에서 서러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다

지하에 세 들어 살던 우리 가족
2층으로 이사한 날
노래방 마이크에 대고 우리 아버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동시집 <맛의 거리>중 '매미' 전문 발췌


고작 한 철을 울기 위해 매미는 수 년을 땅속에서 빛 없이 살았으니, 얼마나 한스러웠을까. 짝을 찾기 위해 늦은 밤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맴맴맴 울어댈 때, 아파트 주민들은 맴맴맴에 담긴 짧은 삶의 무게를 알고 느꼈을까? 그저 열대야를 더 짜증스럽게 만드는 소음으로 여겼을 터. 빛을 가린 흙의 무게와 억겁같은 시간을 뚫고 올라와 한철을 보내며 또 다시 어둠의 세월과 빛의 한철을 이어갈 새끼들을 낳기 위해, 짝을 찾기 위해 목청을 높여 노래 부를 때. 그 울음이 온전히 기쁨만이었을까? 빛 바래고 습한 지하에서 로얄층도 아닌 겨우 2층에 올라왔을 때, 아이들 양육과 '바깥 양반'이라는 빛없는 흙의 무게에 견줄 삶의 무게를 떨치고 일어나 지상의 세계 - 2층 - 으로 올라왔을 때. 노래방에서의 노래는 기쁨이었을까, 회한이었을까, 안도였을까. 매미와 우리 아버지. 절묘한 조합이고 이미 통했다 하겠다. 

작가의 시는 사회문제만을 언급하진 않는다. 뛰어 노는 아이들의 말갛게 상기된 볼빛이 있고, 흥겨움이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다. 동심이 있고, 동심이 바라본 사회와 이 세상이 있는 것이다. 작가는 동시 작가일 뿐이지 가르치려는 자의 위치에 서지 않고, 운동가나 혁명가의 위치에 서지도 않는다. 그저 시로 노래할 뿐이다. 어른들이 봐도 좋지만 아이들도 즐거이 읽을 수 있는, 쉽게 쓴 듯하나 어렵게 쓴 동시들이 그의 책 <맛의 거리>를 채우고 있다. 

표제작 <맛의 거리>는 먹자 골목이나 길이 아니다. 뭐, 쉽게 말하면 '맛의 주행 거리' 쯤이려나. 재미있고, 기발하고, 단단하다. 애써 쓴 시 전문을 옮기면 시인에게 실례가 될까 하여, 시가 재미있고 맛나다는 것만 밝히겠다.

지금도 좋지만, 앞으로 그가 불러낼 동시가 더 기대된다. 지금도 좋은데 농익으면 또 얼마나 좋을 것인가. 시 쓰기나 읽기는 한가지로 어렵지만, 문학의 어떤 장르이건 좋은 작가를 만나는 것은 참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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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레벨 검 - 본격! 수습불가 만화
오히나타 Go 지음, 천강원 옮김 / 애니북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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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를 위하여

우리 앞에 문제작 하나가 던져졌다. 아니, 납시었다는 표현이 맞겠다. 만화를 즐겨 읽으시는 독자라면 <노다메 칸타빌레>로 잘 알려진 니노미야 토모코의 인사불성 수습불가 주접 알콜릭 만화 <음주가무연구소>를 접해보셨을 듯. 맨정신이 아니라 주신 바커스의 손을 빌려 만화 작업을 하는 게 아닐까 느껴지는, 일본 (일부) 만화가들의 혈관에는 붉은 피 대신 말간 청주가 흐르지 않을까 의심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만화 <음주가무연구소> 말이다. 자자, 다시 한번 그 책 뒤적여 보자. 그러면 어느 페이지엔가 오늘의 주인공 숨어 계시겠다. '로커빌리에 미친 싸움닭 오히나타 고'말이다. 아무리 불경기라도 대리운전 기사가 대리를 거부할 만큼 진탕 퍼마시고 세상의 온갖 주접은 다 벌이고 다니는 니노미야 패밀리의 화려한 멤버 '미친 싸움닭 오히나타 고'. 바로 '문제작'의 '문제적 작가' 되시겠다. 

일단 이 만화책은, 정상인이라면 읽지 말 것을 권한다. 대한민국 평균의 일상을 영위하며 노멀하고 안온한 삶을 사시는 분들. 이 만화는 애초에 펼치지 않는 게 나을 것임을 고백한다. <멋지다 마사루>가 도대체 무슨 소리이며, <이나중 탁구부>는 더러운 저질 지진아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역시 이 만화, 읽으면 안 되겠다. 본격문학에 심취하여 고교 시절 교정에서 단풍잎 좀 주웠다 할만한 문학 소년 소녀들 역시, 이 만화 읽으면 안 되겠다. 매사 진지하고 성실하며 반듯하기만 한 당신 역시, 이 만화는 읽으면 안 되겠다. 이 놈 제외하고 저 놈 제외하면 도대체 누구에게 권장할 만한 양서란 말이더냐. 

그 질문에 대답 들어간다. 바로 '만화 읽기가 제일 쉬웠어요'라고 고백하는 '대한민국 1% 열혈 만화 독자'만을 위한 책이라 할만하니, 만화 섭렵의 내공을 3갑자 쯤 상승시켜 줄 무공비급이 바로 이 책 <유전자 레벨 검> 되시겠다. 그런데 아쉽게도, 짧은 단편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 책 내용 소개는 못하겠다. 그리고 분명, 그림 없이 글빨로만 스토리 라인을 소개하면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건데?'라는 이야기를 들을 게 뻔하니 소개는 관두련다. 그저 이 말로 갈음하자. '진정한 4차원', '허무개그', '뇌 주름이 정상인의 범주를 넘어선 작가가 외계적 DNA의 부름을 받아 빵상빵상 신접하듯 그린 작품'이며, '개연성 없고 서사 없으나 헛웃음을 짓게 만드는 예측불가 허허실실 반전이 매력'인 만화라고 말이다. 그러니 자신이 '대한민국 1% 만화독자'라고 자신하는 분들, 자신의 뇌가 아기 볼기짝마냥 말랑말랑하다고 공신력 있는 국가기관의 인정이나 주변인들이 인정해 준 분들만 읽으시길. 실로 뇌연령 테스트하는 작품 되시겠다.

* 주의: 19세 미만도 자유롭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뇌연령 고령자라면, 분명 '이 딴 게 다 무어야! 젠장, 낚였잖아! 책 값 돌려 줘!' 라는 마음이 치솟아 오를 수 있습니다. 분명히 밝혔으니 제게 돌을 던지진 마시길.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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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 1 : 얼굴을 보고 마음을 읽는다 - 허영만의 관상만화 시리즈
허영만 지음, 신기원 감수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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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은 유명 포털사이트에 연재되는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허영만 화백이 온라인에 만화를 연재한다 하였을 때 기대 반 우려 반이었는데, 온라인은 역시 작가에게 맞지 않는 연재 매체인 듯하다. 지정된 날짜에 꼬박꼬박 업데이트를 하시는 것까진 좋았으나 끝없는 스크롤이 특징인 온라인 만화에 비해 <꼴>은 회당 분량이 너무 짧고, 대중적 서사가 있는 다른 연재작에 비해 너무 단편적이다. 

물론 1회성 에피소드로 채워진 다른 만화들도 많긴 하지만, 그런 작품들의 재미와 빠른 호흡, 넘치는 젊은 감각들과 <꼴>은 전혀 무관해 보인다. 『꼴』은 엄청나게 재미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학술적이거나 진지하지도 않고, 눈부신 대중적 서사가 있지도 않다. 컬러링은 조악하고 관상에 대한 풀이도 공감대가 느껴지기 보다는 반발심이 들 때가 오히려 더 많다.

온라인에 연재되던 작품이 책으로 엮여 나왔는데, 차마 민망하여 지갑을 꺼내기가 어렵다. 온라인 연재분에서 한발도 나아가질 못했다. 작품들이 영화화 되고, 드라마화 되고, 작가 본인은 내로라하는 연예인들도 출연을 학수고대한다는 개그 프로에 나오기까지 하셨는데, 주변에선 이현세 등에 가려진 만년 2인자가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하는데, 어찌 <꼴>이 작가의 최고 전성기에 나온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까.

관상에 대한 풀이는 극단적이고 편협하다. 그러면서 '변수'를 감안하여 항상 빠져나갈 구멍은 마련해 두었다. 펜터치는 매너리즘에 빠져있고 컬러링은 조악하여 안쓰러울 지경이다. 문하생이 아니라 컴퓨터 학원 수강생이나 아르바이트생을 써도 이보단 낫지 않을까. 평면적인 그림과 불성실한 컬러링을 보면서, 이 작품을 두고 과연 거장의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신화화의 아우라를 걷고, 대중적 성공의 눈부심을 걷어내고 냉정하게 보았을 때, 이 작품이 과연 대작으로 불릴 수 있을까. 관상에 대한 소품이라고 말해주면 적당하겠다.

작가의 모든 작품에 혼을 담아달라 말할 수 없고, 작가의 춘추도 무시 못할터이니 체력이 예전만 못하다 말할 수도 있겠으나, 차라리 <꼴>이 허영만 화백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좋겠다. 책은 분명 '허영만'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등에 업고 팔리고 있는데, 나온 책은 브랜드 가치에 한참 못 미치니 이 부조화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  

그래, 차라리 허영만 화백은 아직 거장의 반열에 들지 못했다고 말하자. 그 편이 속 편하겠다. 그러면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러면 실망하지도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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