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대장 존 비룡소의 그림동화 6
존 버닝햄 지음, 박상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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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존 버닝햄의 그림책을 처음 접했을 때,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야 그 당혹스러움은 ‘내가 잃어버렸던 동심과 환상 세계와의 조우’로 인한 충격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착실히 어른의 길을 걷고 있던 나로서는 그의 작품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대충 그려도 그림책이 되는구나!" 싶었으니까.

그런 트라우마에서 채 회복이 되기도 전에 또 한 번의 당혹스러움을 경험했다. 존 버닝햄의 여러 작품 중 한 권의 그림책을 집어 올리던 나는 “그래도 이 책의 그림이 가장 낫군.”이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책의 속표지를 본 순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장 나아 보였던 그 그림책은, 존 버닝햄의 처녀작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 .

그렇다. 존 버닝햄은 처녀작인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로 불과 이십 대의 나이에 영국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수여하는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내 눈에는 뒤이어 출간된 존 버닝햄의 삐뚤빼뚤한 그림책들보다 그의 처녀작이 가장 좋은 그림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두 번째로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의 영예를 안겨준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는 어떠한가?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한 어수룩한 그의 작품이 처녀작 발표 후 6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에 출간한 작품이라니, 게다가 6년 전 그림책 작가로 영예를 얻은 처녀작보다 더 어수룩하고 맥없는 그림을 보이고 있다니! 


존 버닝햄에게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의 영예를 안긴 처녀작과 후기작.

6년 후에 그려진 <검피 아저씨의 뱃놀이> 그림이 더 유아적이다.

존 버닝햄의 그림은, 분명 서툰 구석이 있다. 그것도 적당히 서툰 정도가 아니라 그만큼 서툴게 보이려고 애를 써도 흉내내지 못할 만한 부족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의 부족함이 정점에 달했다 할만한 작품 『지각대장 존』을 보자. 초벌 연필 스케치가 그대로 드러나는 그의 그림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에게 얼른 지우개라도 쥐여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것 봐, 이런 지저분한 흔적들은 다 뭐야? 이런 산만한 책을 우리 어린이들에게 보여줄 생각인거야?’ 하면서.

이렇듯 일견 불성실하고 서툰 그림을 그리지만 존 버닝햄이 수십 년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만들어낸 작품들의 매력과 강점은 무엇일까? 아마 그 이유는 그의 '서투른 그림'과 '위로가 담긴 글'에 있지 않나 싶다. 보통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게 되면 아카데믹한 기본기를 쌓기 마련이다. 명암의 단계, 빛과 그림자, 원근법, 강조와 생략 등. 그리고 그러한 기본기를 충실히 쌓은 다음에 비로소 추상, 반추상, 구상 등 각자의 성향에 맞는 화법을 따라 작가로서 유랑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처녀작'이 첫 눈에 ‘가장 괜찮은 그림으로 보였던’ 것은, 그가 아직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것이고, ‘일반적이던 선배들의 영향’을 아직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신인’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반대로 데뷔 후 6년 뒤에 발표된 그의 작품은 그가 이제는 ‘그만의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길을 똑바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예전에 대학에서 그림을 배우며 참 재미있는 수업을 받았던 적이 있다. 석고상 정도는 거의 안 보고도 그릴 정도의 경지(?)에 오른 미술대학 새내기들에게, 교수님께서 우스갯소리로 ‘세계 최고의 뎃생력, 하지만 창피한 창의력’ 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이미 상식의 틀을 따라 굳어버린 우리의 손을 풀어주고자 특이한 과제를 주셨다. 왼손 드로잉과 눈을 감은 채 하는 드로잉, 그리고 양손으로 하는 드로잉이었다. 드로잉이 끝난 후에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우리의 그림은, 우리의 시각으로는 ‘그림’이라고 할 수조차 없을 조악한 형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선, 그 선 하나 하나에 담긴 자유로움과 재미란! 그 순간은 파르라니 머리를 깎고 각을 잡은 해병대원 같은, 거의 기계같이 일정한 수준, 동일한 완성도의 그림을 뽑아내던 풋내기 미대생들에게 ‘그림이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해 준 귀한 시간이었다.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에서 보았듯이, 존 버닝햄이 처음부터 어설픈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한 해 한 해 습작을 거듭하며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서투름’을 화풍으로 만들어냈고, 안정적이고 편안한 텍스트와 함께 자연스레 우리의 마음속에 녹아들었다. 선과 면이 주조가 되는 그의 그림은 너무나도 쉽게, 누구라도 따라서 그릴 수 있을 듯한, 심지어 '내가 그려도 이보다는 낫겠다'싶은 근원 없는 자신감을 우리에게 안겨 주지만, 동일한 상을 수상한 그의 처녀작과 6년 후의 작품을 비교해 볼 때 그렇게 왼손으로 내지른 듯한 시원하고, 자유롭고, 재미있는 선을 갖기 위해 존 버닝햄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잘 그리기 위해 욕심을 낸 작품은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그런 작품은 분명 어딘가에 억지스러움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가장 좋은 작품은 붓이 체화되어 밥을 먹듯, 똥을 누듯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릴 때, 그림이 일상이 되었을 때 나오기 마련이다. 일정한 훈련을 통해 화면에 원근과 입체를 표현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지만 ‘자연스러운’ 그림만큼은 쉽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끔 편하게 그린 아마츄어의 그림이 프로의 그림보다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이다. 하지만 그 순간 ‘정말 느낌이 좋은데요, 한 장 더 그려보시겠어요?’라고 말을 건넸다가는 분명 어깨에 힘이 들어간 어설픈 그림이 나올 수밖에 없다. 존 버닝햄의 ‘서투름’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의 작품에도 동일하게 표현되었다는 것은 그가 서투름, 또는 자연스러움을 훈련했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애초에 그림을 못 그렸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처녀작을 통해 그의 기본기를 확인한 바, 그의 서투름은 상당한 훈련과 습작을 통해 터득한 상당한 경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존 버닝햄이 사랑받는 이유는 그림뿐만이 아니다. 그의 처녀작인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는 장애우 문제를 다루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안정’에서 소외받은 존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날지도 못하는 바보 기러기 보르카는 낯선 곳, 낯선 환경 속에서의 새 삶을 통해 안정을 찾게된다. 이 작품을 통해 존 버닝햄이 소외된 이웃과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처녀작부터 드러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의 등교를 막는 사자! 초등학교 등굣길에 사자라니!

 『지각대장 존』의 경우에는 그러한 시선이 더욱 농익어 표출되었다. 숨이 차 부르기조차 어려운 주인공 아이의 이름은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이다. 후반부의 깜짝 놀랄만한 반전이 펼쳐질 때까지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는 '인생은 결국 혼자인 거야!’라고 온몸으로 외치는 듯하다. 작가인 '존 버닝햄'과 불쌍한 소년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가 같은 ‘존’ 으로 이름을 주고 받는 것으로 보아 존 버닝햄은 자신이 창조한 인물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를 통해 소외와 몰이해의 폐해는 물론, 스스로를 치유하는 주술을 걸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그저 '존'이라 줄여 불러도 좋으련만, 그림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의 이름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를 고집스레 부르고 있다. 그만큼 작가는 '존'을 끝없이 연민하고 응원하는 게 아닐까. 인간은 누구나 자기에게 결핍된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므로 처녀작부터 인권을 다룬 그가 지속적으로 소외 받은 이들을 작품에 등장시킨다는 점도 작가의 심리와 상관관계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지각대장 존』과 구성이 비슷한 책을 함께 읽으면 그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1987년에 원본 초판이 출간된 『지각대장 존』보다 십수년 앞서 출간된 『어리석은 판사』를 보자. (원본 초판 1970년 출간) (* 재미있는 것은, 그림책 부부 작가인 존 버닝햄처럼  『어리석은 판사』의 저자 역시 부부 작가이며, 존 버닝햄이 영국 최고의 어린이책 상인 케이트 그리너웨이 상을 두 번 수상했다면 『어리석은 판사』의 저자는 미국 최고의 어린이책 상인 칼데콧 상을 세 번이나 수상했다는 점이다.)

『어리석은판사』와『지각대장 존』은 진실에 눈을 가린 어리석은 권위와 그러한 존재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점에서 뜻을 같이하고, 구성이나 반전에서도 상당한 구조적 유사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텍스트에 담긴 깊은 맛과 디테일에서는 색과 방향을 달리한다. 『지각대장 존』은 존중받아야할 인격이지만 우리 눈에서 소외된 이들, 약자들, 예컨대 장애우와 어린이 등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서 그들의 손을 들어주는 작품이다. 『어리석은 판사』에서 권위적인 판사에게 무시당하는 이들은 다양한 계층의 여러 존재를 대변하고, 판사로 대변되는 권위는 사회와 사회 구성원 전 계층을 억압하는 권력으로 등장하지만, 『지각대장 존』에서는 오직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한 명만이 융통성 없는 선생님과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존 버닝햄은 사회와 여러 계층이 맞서는 권위보다는 내밀한 자아, 자존감을 억누르는 외부적 환경에 대한 개인의 끝없는 투쟁과 항변을 말했다 하겠다. 

등굣길에 등장하여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의 등교를 막는 악어, 사자, 커다란 파도는 초등학교 등굣길에 등장하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실로 초현실적인 상황일 수밖에 없으나, 초현실로 형상화되는 세상의 편견과 오해는 억눌린 영혼의 성장을 막는 '현실적인' 고통과 억압으로 다가온다. 그저 외부자의 시선을 지닌 선생님에겐 악어나 사자 따위는 '초현실'에 불과하겠지만, '존 패트릭 노먼 맥헤너시'에게는 실존에 직결되는 현실이었다. 장애우나 어린이가 겪는 고통과 아픔이 어른들에게는 이미 잊혀지고 주목할 필요 없는 초현실로 여겨질 수 있으나, 비주류인 그들에게는 곧 실존과 직결된 절박함이 아니던가. 재판장이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같은 설명을 반복, 열거하는 현실적이고 권위적인 판사가 등장하는 저 『어리석은 판사』는 사회를 아우르는 보편성을 보이며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초현실적인 상황이 펼쳐지는 『지각대장 존』의 경우가 더욱 입체적으로,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소외된 이들이 겪어야만 하는 '초현실적이지만 실존적인' 고통을 존 버닝햄이 깊이 느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바로 '상대를 이해함'에서 진실의 힘이 비롯되는 것이다.  

그림으로 도달하려는 끊임없는 자유에의 의지, 처녀작을 출간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 작품 한 작품에 혼을 바치며 매너리즘과는 전혀 관계 없는 거장으로 살아가는 존 버닝햄. 삐뚤빼뚤한 그림을 그리지만 여전히 그의 작품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영혼의 자유와 독립을 부르짖는 그림과 상대를 이해함에서 비롯되는 따뜻한 글 때문이 아닐까. '존 버닝햄 할아버지'가 오래 오래 천수를 누리며 더 좋은 작품을 계속 발표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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