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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로드>의 작가 코맥 매카시는 꼭 말을 하고 싶어 한다고 보기 힘든 면이 있어요. 독자가 알아듣는지 여부에 딱히 관심이 없달까. “잘 모르겠냐? 어쩔 수 없지”라는 식이죠.' _씨네 21, 김혜리가 만난 사람 / 번역가 정영목
편집자에게 신뢰받는 번역가이자 소설 <로드>를 우리말로 옮긴 정영목은, <로드>를 통해 세상과 만나는 코맥 매카시를 그렇게 평가했다. "잘 모르겠냐? 어쩔 수 없지"
번역가 정영목의 말처럼, 로드는 불친절한 소설이다. 장사꾼은 물건을 팔아야하고 글쟁이는 글로 소통해야 하는데, 코맥 매카시는 적어도 <로드>에 있어서만큼은 '독자와의 소통'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독자는 "이거 얼마예요?"라 묻는데 글쟁이는 딴청만 피우고, 재차 "파는 거 아니에요?"라 묻는데 그저 휘휘 파리만 내쫓는 꼴이다. 그렇기에 <로드>에 대한 평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편이고, 텍스트에 대한 호불호 역시 모세가 홍해바다 가르듯 양쪽으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간결함이 주는 매력과 알 수 없는 힘에 끌렸어요. 이게 뭘까, 더 알고 싶었어요... 중략 ... 우리 독자들의 좋은 책에 대한 수용력이 크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_번역가 정영목
<로드>의 문체는 불친절하다. 문장은 간결하다 못해 겨울바람에 휩쓸리는 낙엽처럼 푸석푸석 건조하다. 책장을 넘기다 자칫 실수하면 바스라지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메마르고 단조롭다. <로드>를 통해 읽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말이다. 화장실에서의 쾌변처럼 빠르게 읽히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더부룩한 아랫배와 변비처럼 더디게 읽히는 소설이 있다. <로드>는 단연코 후자다. 작가가 그다지 열심히 설명하려고 들지도 않고 그저 알아들을 놈만 알아들어라, 인생 뭐 있더냐,하는 식으로 자기 할말만 하는 소설, <로드>.
화려한 수상 경력이나 <로드>에 바쳐진 찬사, 영화화 결정, 미국에서만 180만 부 판매 달성 등 외적 아우라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한 백지 상태에서 단지 '알 수 없는 힘에 끌리고 더 알고 싶은 마음'에 번역을 맡았다는 번역가 정영목. 순수하게 '텍스트의 힘'에 매력을 느껴 번역 작업을 맡은 그조차 출간한지 6개월이 안 된 시점에 16만 부라는 판매고를 올리며 <로드>가 스테디셀러에 진입한 것을 두고 '독자들의 좋은 책에 대한 수용력이 크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라고 말했다. 생각할 '수도' 있어요,다. '생각해요'라 하기에는 망설임이 꼬리처럼 붙은 느낌이다. 그만큼 쉽게 생각하고 덤볐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는 소설이 바로 <로드>이다.
<로드>의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다. 지구상에는 더 이상 '문명'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다. 아니, 모두가 이미 멸망했다. 그리고 제비가 겨울을 이기기 위해 따뜻한 남쪽을 향해 나아가듯, 모든 게 허물어지고 폐허가 되어버린 잿빛 길을 아버지와 아들이 걸어간다. 걷는다 하여 뭐가 있을 것이라고 딱히 기대하진 않는다. 그저 걸을 뿐이다. 어찌보면 임종을 위한 길고 긴 여행과도 같다. 그래, 걷는다. 오직 걷고, 오직 살아서 내일 아침 눈을 뜨길 바랄 뿐이다. 이야기는 길에서 시작해 길에서 끝난다.
사람들은 늘 내일을 준비했지. 하지만 난 그런 건 안 믿었소. 내일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어.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몰랐지. _<로드> 본문 192쪽 부분 인용, 구약성서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오버랩되는 '엘리'라는 노인의 말
왜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지, 무엇이 인류를 이렇게 파멸시켰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독자들은 그저 인간과 자연 모두 절멸 직전인 잿빛 거리를 책장을 따라 한없이 걸을 뿐이다.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다. 경작할 온전한 땅도 없고, 생명을 잉태할 씨앗도 없으며, 임산부는 출산한 태아의 창자를 발라낸 후 불에 구워 먹는다. 자기가 살기 위하여. 당연히 모성도 없고 인류애는 더더욱 없다. 창고에는 식량으로 쓸 사람들이 묶여있다. 오늘은 발 하나, 내일은 팔 하나. 사지가 하나씩 잘려나가는 살아있는 식량. 인간은, 살아 있기에 더 비참하다. 그 정도로, 도처엔 죽음 뿐이다. 하지만 왜 이모양이 되었는지 단 한 마디도 설명되지 않는다. 지구를 점령했던 공룡이 일시에 증발하듯 사라진 것을 두고 후배격인 인류는 기후 변화니 운석 충돌이니 가타부타 말이 많지만, <로드>의 인류가 왜 이 지경까지 왔는지 설명해줄 신인류는 아무도 없다. 독자는 알 수가 없다. 코맥 매카시는 그저 말할 뿐이다.
"자, 모두가 망했고, 아내는 강간당한 후에 식량으로 먹히느니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게 낫다며 고결한 죽음을 택했네. 살아남은 당신의 곁엔 어린 아들이 있지. 그리고 당신에게는 총 한 자루가 있어. 아들을 쏜 다음 자네 머리를 겨눌 총알 정도까지는 탄창에 채워놓았네. 하지만 공격자에게서 자신을 지키기엔 턱없이 모자란 총알이야. 평단에선 나더러 '황야의 세익스피어'라 칭하기도 한다던데, 죽느냐 사느냐 정도의 배부른 고민은 나약한 마마보이 햄릿의 몫이지. 내가 창조한 세계에서는 죽는 게 사는 것보단 분명 쉽고 나은데, 이왕 살 거라면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지'를 고민하는 게 좋을 걸세."
독자는 이유도 설명도 없이 코맥 매카시가 창조한 절망의 세계에 던져졌다. 그래서 초반의 흡입력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을 완전한 절망과 암흑의 세계에 '아무 이유없이' 덜렁 놓여졌으니, 적응하는데 시차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오직 걷고 또 걷고, 걷는 중 오가는 선문답 같은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를 따라가노라면, 이유 없이 숨이 차고 앞으로 나가기가 힘들어진다. 모호한 대화도 대화려니와 심지어 이들의 대화에는 '따옴표'조차 없다. 그저 잿빛처럼 등장하는 마침표, 그리고 마침표. 걸어가는 길이 더디고 힘들듯, 읽어가기도 더디고 힘들다.
로드에 담긴 두 가지 길, 신의 길과 인간의 길
<로드>의 이유 모를 문명 절멸에 대한 단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있어도 짐작하긴 어렵다만.
시계들은 '1:17'에서 멈추었다. _<로드> 본문 62쪽 부분 인용
재앙이 시작된 시간이다. '1:17'. 굳이 '한 시 십칠 분'이라 풀어 쓰지 않고 '1:17'이라는 식의 생소한 표현을 썼다. 가독성이 떨어지는 시간 표기이다. 그런데 어딘가 낯익다. 바로 성경의 장, 절을 인용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인류의 시간은 BC와 AD로 나뉘는데, AD(Anno Domini), 즉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알리는 성경의 장은 마태복음 '1:18', 마태복음 1장 18절이다. 신약성서 가장 처음, 사복음서의 가장 처음인 마태복음 역시 <로드>만큼이나 첫장부터 지루한데, 이는 1장 1절부터 1장 17절까지 예수 탄생 이전의 족보를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그리고 '1:17'다음인 '1:18'이 되면 메시아가 등장한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니까요.
그래.
그리고 우리는 불을 운반하니까요.
우리는 불을 운반하니까. 맞아.
알았어요. _<로드> 본문147-148쪽
성경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이한 후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 제자들 앞에 나타난다. 여전히 미흡한 제자들이 예수가 곁에 함께 있어주기 바람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오히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하며 승천을 암시한다.(신약성경 요한복음 16:7) 그리고 예수의 승천 후 제자들에게 '불의 혀' 같은 '성령'이 임함으로써 사도의 시대가 열린다. 사복음서까지는 예수의 생에 관한 것이고, 사복음서 바로 뒤에 등장하는 사도행전부터는 예수의 제자들, 즉 '사도'의 활동 등이 기록된 것이며, 성경의 마지막 장 '요한계시록'은 예수가 총애하던 제자 '사도 요한'이 인류의 종말을 예언한 묵시록이다.
<로드>에서는 '불을 운반한다'는 이야기가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사이에 종종 등장한다. '불'에 대한 설명 역시 친절하게 언급된 부분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코맥 매카시는 '불을 운반하'는 행위를 모닥불을 피우고 밥을 짓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오히려 신적인 영역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성경에서 예수가 죽고 부활함으로써 '불의 혀'와 같은 성령이 사도들에게 내려왔고, '성령'을 통해 사도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예수와 함께 한다는 것을 믿게 된다. <로드>에서 아버지는 임종의 순간에도 '불의 운반'에 대해 아들에게 강조한다. 아들은 과연 그 '불'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거냐고 묻지만, 아버지는 '불'이 아들의 '안'에 있다고 말할 뿐이다. 아버지가 죽은 후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사흘'을 더 머무른 후 자신의 길(로드)을 떠난다. 예수는 죽고 사흘만에 부활했으며, 예수가 죽었기에 '불의 혀'와 같은 성령이 임했다. 그 '불'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며, 사도의 영혼에 임해 언제까지나 함께 하는 '성령'이었다. <로드>의 아버지는 죽으며 '불의 운반'을 이야기했고, 아들은 '사흘'동안 아버지 곁을 지켰으며, '사흘 후' 자신의 길을 걸어나가기 시작한다. 아들은 자신을 믿고, 사람을 믿으며, 자신만의 길을 향해 떠나는 것이다.
소년은 실제로 아버지와 말을 했으며 잊지도 않았다. 여자는 그것으로 됐다고 했다. 신의 숨이 그의 숨이고 그 숨은 세세토록 사람에서 사람에게로 건네진다고. _<로드> 본문 323쪽
위 문장은 아버지의 임종 후를 묘사한 것이다. '실제로 아버지와 말을 했으며', '신의 숨이 그의 숨', '세세토록 사람에서 사람에게로 건네진다'는 등의 표현은 성령에 관한 기독교계의 설명과 유사점이 많다.
남자가 아는 것이라고는 아이가 자신의 근거라는 것뿐이었다. 남자가 말했다. 저 아이가 신의 말씀이 아니라면 신은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는 거야. _<로드> 본문 9쪽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는 말로 풀어내기 어려운 기독교의 핵심인데, <로드>에서는 부자간의 관계가 육체의 둘이 아닌 정신의 하나로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문학의 거장들이 글감으로서 유혹을 받는 몇 가지 소재가 있다면, '자전적 소설' 또는 '인간과 신계, 창조에 관한 일'을 꼽을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개미>, <뇌>, <나무>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최근작 <파피용>을 보면 성서의 요한계시록을 차용한 부분이 보인다. <파피용>에서는 마지막 지구인들이 인류의 미래를 걸고 우주선에 탑승하는데, 탑승 인원이 각계각층에서 선발한 14만 4천 명이다. 14만 4천이라는 숫자는 성서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로 등장한다. 키워드 차용을 넘어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최신 연작을 통해 또다른 세계관을 펼쳐놓으려 하는데, <파피용> 후의 작품이 <신>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하나의 귀결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14만 4천'이라는 숫자처럼, 코맥 매카시 역시 의도였든 아니었든 간에 신화적 키워드를 작품 곳곳에 뿌려놓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관계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성서뿐만이 아니라 '불을 운반하는' 신화적 존재로는 '프로메테우스'를 예로 들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 역시 '불을 운반하고', 인류는 불을 얻음으로써 '신에 다가가는 존재'가 되고, 프로메테우스는 매일 죽으나 매일 재생되어 살아난다 하겠으니, 프로메테우스의 희생으로 인류가 새 국면을 맞이한다는 큰 얼개는 비슷하다고도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로드>의 상업적 성공 등으로 미국 내 언론이 소설에 성서적 분위기를 '덧입혀' 찬사를 바쳤다는 것도 감안할 필요 있겠다. <로드>가 워낙 불친절한 텍스트이다 보니 코맥 매카시의 진의는 알 도리가 없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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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불친절하고 재미 없는' 것으로 <로드>를 묘사했는데, 나 역시 일부러 건조한 투로 얘기했지만 실은 <로드>를 '몇 안 되는 좋은 작품' 중 하나라 평하는 게 솔직한 표현이다. <로드>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는데, 나는 '신의 길'보다는 '인간의 길'을 걸었고, '독자' 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로드>를 읽었기에 내내 가슴이 죄여오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로드>는 코맥 매카시가 늦둥이 아들을 재우고 창밖에 시선을 던졌을 때 그곳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사색에 잠김으로써 구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잿빛 풍경, 노쇠한 아버지와 아직 어린 아들. 둘이 걸어가야 할 길. 코맥 매카시는 헌사를 통해 <로드>를 '존 프랜시스 매카시'에게 바치고 있다. 나는 두 돌이 갓 지난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아버지가 본 뿌연 안개 너머 세상이 어찌 보였을지, 아들의 숨소리가 어떻게 다가왔을지 짐작이 되고 남는다. 불친절한 문장은 잘 잡히지가 않으나, 아버지가 쓴 소설 <로드>는 어떤 마음으로 씌였을지 짐작이 된다. 아버지로서 읽은 <로드>는, 오히려 불친절한 문장 때문에 더 가슴이 아렸다. 차라리 화려한 만연체였다면, 왜 이렇게까지 문명이 절멸했는지 뭔가 이유라도 알려준다면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보고 노력이라도 해 볼 터인데. 그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잿빛 세상에 아들과 아버지만 남았으니 아버지는 오로지 '살아 남아' 아들을 '살게 하는' 것 밖에는 할 수가 없다.
가족을 두고선 '죽어도 죽을 수 없다'는 아버지의 심정. 그 절절한 심정을 알 수 있을런지. 냉혹하다고까지 느껴지는 건조한 문체와 행간 사이로 터벅거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미칠 것만 같은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더디게 나가는 진도 때문에 새벽을 지새우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낮게 코를 골며 잠든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곤 했었다. 눈물마저 말라버린 듯한 인류 종말의 소설을 읽으며 왜 눈물이 났던 걸까. 그저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뿐인데 아들의 아버지인 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비로소, 이런 종말의 순간이라면 나 역시 아들에게 친절할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의 수사와 비유와 설명은 한낱 '사치'에 불과하겠구나. 우리에겐 그저 '길'이 있을 뿐이구나. 아들을 위해 '희망'을 운반해야겠구나.'라고 말이다.
몰입이 어려웠다면, 낯설고 불친절하게 느껴졌다면, 책 속의 '신의 길'을 찾지 못하였다면. 책 일독 후 책꽂이에 고이 보관하시길 바란다. 그리고 훗날 아버지가 되고 부모가 되었을 때 다시 꺼내서 정독하면 좋겠다. 신이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함을 알리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을 신적 사랑의 모형으로 삼으셨다는데, 아마 아버지가 되어 읽는 <로드>의 길 속에는 신과 인간의 길 두 갈레길 모두가 보이지 않을까 싶다. 행여 지금은 건조하게 읽혔더라도 훗날 누군가를 책임져야만 하는 사람이 되어 <로드>를 다시 읽는다면, 아버지의 목숨으로 쓴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깨닫게 되리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