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스타샤
조지수 지음 / 베아르피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두근거림, 열정, 충족, 안타까움, 위안, 공감, 이해, 존경, 동정, 이러한 것들이 사랑을 통해 나스타샤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었다. p421 


사실을 고백하자면, 책의 앞부분을 읽으며 나는 내 자신이 조금 불편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는 속도가 느려지고, 자꾸만 책을 내려 놓게 됐다.
책이 펼쳐놓은 철학적, 종교적 사유가 나의 독서력을 감소 시켰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내 독서력을 방해했다고 보기에는, 나는 내가 절대 이해 못할 만큼 어려운 책을 읽고 뇌를 혹사시키는 일에 즐거움을 찾는 기질이 있었다. 
내가 책을 불편하게 느꼈던 것은, 주인공 조지가 느낀 공허와 부정적 사고와 허무였다.
앎은 때로 우리를 불편한 진실과 조우하게 한다. 그렇게 조우하게 된 진실은 우리를 패배하게 하고, 미래를 희망하지 않게 한다.
또한 주위의 모든 것을 '이해'하게 하지만, 그것은 '이해'가 아닌, 일종의 '무관심'이다.
'희망'하지 않는 것은 '욕심'내지 않는 것이다. 그것으로도 우리는 사심없이 주위를 '관조'할 수 있는 것이다. 
희망없는 갈증과 허무한 사고는 불편하다.
그것은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조금은 극단적일 지라도, 정체된 그 공기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는, 하지만 그럴 용기없음의 자기 위안이다. 
 

나의 인생은 실패였고 계속해서 실패해가고 있다. 행복할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살기보다는 관찰하려 했고, 느끼기보다는 느낌을 이해하려 했을 뿐이다. 사람들에게 진실과 겸허와 소박함을 촉구했지만 먼저 나 자신에게 그것을 촉구했어야 했다.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생겼을까? 왜 나는 이런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까? 그러고 보면 나에게는 진심으로 행복했던 순간이 없었다. 행복과 기쁨조차도 두려워했다. p219
 

나는 꼭 그런 사람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이 내겐 불편했던 것이리라.
 

나는 절망하는 나 자신과 관련하여 외로웠고, 삶과 세계가 주는 혼돈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삶은 무의미였다. 누군가가 좀 더 일찍 삶이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말해주었어야 했다. 나는 얼마나 많이 나의 과거의 교수들을 원망했는지 모른다. 왜 그들은 내게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는가. 내가 얼마나 절박하게 구하고 있었는가. 그들은 그들 세계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기만적 만족을 누렸는가. 나는 구원의 호소 없이 살아왔고 위안과 공감 없이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나스타샤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있고 모든 것을 의탁하고 있다. 내가 나스타샤를 보살피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녀 덕분에 살고 있었다. 그녀의 깊고 다정스러운 눈빛과 이해와 미소가 오히려 나를 보살피고 있었다. p265
 

내가 책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책의 중반이 다다를 무렵이었다.
정확하게는 나스타샤가 등장하고 부터일 것이다.
장대한 대자연의 서정이 녹아 있는 캐나다의 풍경과 그 풍경 안에서 또 다른 자연이 되었을 조지와 그렉.
그들이 낚시한 것은 단순한 물고기가 아닌, 자유과 자연과 삶의 미학이 었을 것이다.
제 2의 고향이 되었을, 안정과 인간애를 느끼게 해준, 웰드릭.
그 안에서의 고독은 자연을 구속하고 문명을 만들어 낸, 인간의 죄값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끼리끼리 등을 붙이고 있어야, 온기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조지의 외등은 그의 안에서 더욱 외로운 고랑을 만들고 있었을 것이라고.
조지는 자연과 닮은 여자와 사랑을 했다.
그것은 문명이 만들어낸 조지 내부의 허무에 자연의 거대한 풍경이 채워지는 것과 같았다.
자연의 절경 앞에 눈과 귀와 피부가 온몸으로 열광하는 것과 같이, 필연이었고, 저항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자연을 알고 자연 속에서 살게 된 인간은 문명 속에서 뿌리 내릴 수 없다. 뿌리 없는 삶일 뿐이다.
그 속에서 물과 햇빛과 공기를 얻을 수 없다. 끝내 그렉이 베시를 떠나고 자연 속으로 떠나 버린 것과 같이, 그것이 운명이다.
그리고 조지의 자연이었던 나스타샤와의 사랑은 운명이었다.
운명은 장엄하다. 그것을 느낀 사람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살(煞)'이다. 벗어나서나려 하면 나를 찌를 '살기'로 돌아오는.
조지는 운명과 만났다. 
나스타샤. 
나는 감히 '사랑의 전설'이란 말을 한다. '사랑의 서사시'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당신을 만나고 나서 내 두려움의 근거를 알았고 그것을 이겨낼 수 있게 되었어. 내 두려움의 근거는 삶에 대한 거짓 환상이야. 이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내 환상이 두려움의 근거였어. 그것을 망칠까 봐 두려워했던 거지. p426-427 


조지의 개인 서사는 나스타샤란 운명으로 완성되었다. 나스타샤를 만나고 순환하기 시작한 조지 안의 공기는 나스타샤로 정화되었다.
나스타샤가 없는 조지는 '살(煞)'을 잃는 운명이다. 그것은 죽음일 뿐이다. 
어쩌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과 운명과 자연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사랑'으로 살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그리고 하나하나 '사랑'으로 살고 있는 이야기가, 다시 또 자연으로 돌아가 '전설'이 되는 것이라고.
우리가 아무리 무언가를 만들고, 규정하고, 생각하고, 안다고 해도, 그 모든 것에 감정이 없다면 빈껍데기 일 뿐이라고.
그 감정이란 것은 우리 주변에 들풀처럼 혹은 거대한 산맥처럼 놓은 '사랑'이란 것이라고.
책을 덮고 조금은 미소지었고, 조금은 쓸쓸 했지만, 나의 가슴에도 조지가 품었을 대자연의 숨이 느껴지는 듯 했다. 
나는 책을 서정으로 자연을 노래했고, 사랑을 서사시로 읊었다 기억할 것이다. 그 이름은 '나스타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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