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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황정아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초반엔 살짝 무슨 말을 하는지 고개를 갸웃, 중반이 넘거가자 스피드 업, 책을 덮을 때쯤 되니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시 이언 매큐언! 동시대 최고의 작가란 말이 아깝지가 않다."
하나의 사건으로 시작해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서술적 능력에 지식의 보고는 보너스, 자신만의 색으로 입혀내는 탁월함이란!
이언 매큐언은 올 초 영화 <어톤먼트>의 개봉과 함께 대중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작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소개된 바 있겠지만.) 이후 <암스테르담>, <첫사랑 마지막 의식>, <체실 비치에서> 등을 통해 사람들이 회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어두운 속성을 작품의 주 소재로 삼아왔다. 그러나 무작정 어둡고 파괴적이지만은 않다. 이 점이 사람들을 매혹하는 이언 매큐언의 또 다른 매력이지 않을까.
주인공 '조'는 연인 '클라리사'와의 피크닉 중 풍선 기구 사고를 목격하고 사건의 휩쓸린다. 비극적인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그가 마주친 것은 젊은 남자의 비상식적인 사랑 공세였다. 이후 스토커라도 되는 듯 그의 일상을 파고드는 남자 '패리'로 인해 조의 삶은 망가져간다. 연인과의 사랑은 비틀거리고, 주변 사람들은 마치 그를 미친 사람처럼 바라본다. 조는 정말 미쳐 환각을 보는 걸까?
메인 사건인 풍선 기구 사고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갈래를 뻗어나간다. 조와 패리, 조와 클라리사, 조의 내면, 사고로 죽은 로건의 부인인과 주변인물들. 각각의 이야기들은 서로 맞물리지 않을 듯 교묘하게 맞물리며 하나의 큰 스토리를 만들어간다. 사이사이에서 반짝이는 지적 유희의 즐거움도 놓칠 수 없다.
<이런 사랑>에서는 그간 보여줬던 겉으로 보여지는 폭력과 고통이 다소 인간의 내부로 들어왔다. 무의식이라고 하는 세계, 생각과 공상 - 현실 세계 사이의 부조리들이 행동보다는 생각과 인물 간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조의 독백을 듣고 있자면 마치 나의 이야기가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듯 해서 놀랍고, 뻔하지만 우리가 놓치곤 하는 진리에 다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그렇다. 매큐언의 신작을 통해 나는 또 한번, 인간의 처절하고 어리석은 자기 방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가 버리고 싶어하고 아니라고 외면하고 싶어하지만 매일같이 하고 있는 일 -바로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변명하고 이유를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어디까지 속일 수 있는가.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로건 부인에게 남편의 용기에 대해 얘기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나의 무고함, 나의 결백을 말하려고, 그 결백을 확인하려고 온 것이다. -p.153
자신이 옳다고 끊임없이 주장하는 자신의 행동은 얼마나 옹졸한 자기위안일 뿐인지. 그러나 그 사소한 행동을 위한 우리의 발악이란, 차를 타고 그 먼거리를 할 말도 없이 떠나게 만들고, 끊임없이 자기를 속이고 있다. (심지어 속이고 있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하나의 망상에 빠진 자는 어디까지 무서워질 수 있을까. '드 클레랑보 신드롬'이란 벙명으로 소개되는 패리의 조에 대한 집착은 광적이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작은 방에 웅크리고 앉아 조몰락거리며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지도 않은 우리의 상호작용으로 희망과 실망의 드라마를 써 내려가는데. 그는 언제나 물리적 세계를 세밀히 들여다본다. 물리적 세계에 놓인 사물들의 우발적인 배치, 혼란스러운 소음과 색채를 들여다보면서 현재 자신의 감정 상태와의 연관성을 찾아내려 한다. 그렇게 해서 또 늘 만족스러운 결론에 도달한다. ... 이것은 자기 지시적인 사랑의 감옥이었다. -p.202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패리의 모습은 그저 미친 놈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 속에서 그와 비슷한 모습을 발견한다. 아니 누구라도 한 번쯤 그러지 않았을까. 나를 중심에 둔 사고. 나의 만족을 위한 나만의 세계를 세우는 일 말이다.
언제나 내 속의 숨겨진 응어리를 끄집어내는 이언 매큐언. 그러나 인간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기에 그의 글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책을 덮고서도 얼마간 이언 매큐언 이야기 속에서 맴도는 나의 생각들. 자유로운 사색의 시간을 준 그에게 다시 고마음의 마음을 전하며. 발걸음은 아직 읽지 못한 책을 찾으러 서점을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