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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밭에 쓴 수필
정목일 지음, 이목일 그림 / 문학수첩 / 2008년 6월
평점 :
우리네 삶은 얼마나 빡빡하고 좁았던가. 서정 수필이란 말이 아깝지 않은 그의 글들을 읽다 보면 무엇인가 몸에서 무엇인가 하나하나 빠져나감이 느껴진다. 글자들을 잡으려는 머리 속 지식들까지도 한 거풀씩 벗겨지는 게 처음엔 어색하기만 하다. 소설을 읽는 마냥 앞으로 돌아가 다시 글자를 머리에 집어넣는데 금방 다시 지워져 내린다. 아이고야, 왜 그런가 했더니 제목 봐라. 모래밭에 쓴 수필이란다. 모래밭에 쓴 글이 어디 오래 남아있겠나. 내 머리도 모래밭이 된 듯 하다.
그러나 글자는 지워져도 그 감정만은 오롯이 남아 몸을 적셔 내린다. 내가 책을 붙잡고 읽는지 책이 나를 붙잡고 읽는지 모를 일이다. 글 한 편을 곱씹기 전에 손과 눈이 먼저 다음 장을 넘긴다. 왠지 모르게 책을 내려놓을 수 없다.
처음엔 수필집이라 하여 조금씩 읽어나갈 참이었는데, 어째 읽기 시작하니 놓기가 아쉽다. 그저 이 얘기 저 얘기 들려주는 맛에 취했나 싶다. 결국 앉은 자리에서 수십 페이지가 훌떡훌떡 넘어간다.
네 가지 이야기다. 별에 대한 명상, 타악기의 명인, 연꽃의 집, 아름다운 간격. 무슨 기준으로 나누어놨나 슬쩍 다시 열어보는데 봐도 모르겠다. 그저 가까운 풍물을 읊고, 사람 이야기도 몇 번 해보고, 과거로 밟아 들어가는 길도 걸어본다. 자신의 이야기도 슬그머니 꺼내놓는다.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살아야겠는지 수필이란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글이라더니, 정말 정목일이란 수필가가 오롯이 글 속에 남아있다.
그럼에도 아직 붙잡을 욕망으로 가득 찬 나에게는 다소 먼 그대였는지 모르겠다. 그저 왔다 가는 글귀들이 잠깐 마음을 편히 해주었고, 어느 저녁 놀 소파에서 뒹굴 거리며 듣는 할머니 이야기 같아 푸근했을 뿐이었다. 수필을 아는 사람, 지나온 삶이 많은 사람이라면 더 공감하기 쉽지 않을까. 그 구절 하나가 마음 속에 자리잡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책 중간 어디쯤 경봉선사와의 만남 이야기가 있었다. 처음 친견한 자리에서 이리 물으셨다는 경봉선사.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 애꿎은 대답을 하고 모르겠다 해야 했는데 라며 후회스러운 저자의 이야기가 아직은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경봉선사의 물음 하나는 그대로 마음에 박힌다.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 나라면 어찌 대답할까. 이리 대답하진 않을까. "그럼에도 길 따라 왔지요."라고. 아니, 그 자리에선 말 한마디 못하고 애꿎은 웃음만 지을 지 모를 일이다.
수필이란 놈을 쓰는 것도 읽는 것도 매한가지 아닐까. 사람 사는 걸 적은 글이라면 거기에 무슨 길이 있겠나. 소설처럼 이리 쓰라고 알려줄 길이 있는 바도 아니고, 그저 자신이 걸어온 시간, 지혜로 쓰는 글인 것을. 아니, 비단 수필 뿐이겠나. 인생살이가 길에 대한 질문일지 모른다. 그래, 당신은 없는 길 어찌 가고 있습니까.
그저 한 판 잔잔하니 쏟아 부은 글이라 지겨울지 모르겠다 싶었는데, 웬걸 사람 잡아 끄는 힘이 여느 자극적인 소설 못지않다. 오늘은 책 한 권 집어 들고 권하러 할머니 댁을 찾을까 한다. 읽으시는 내내 그렇지, 이거구나 하는 추임새를 넣어가시며 읽으신다면 더 바랄 게 없는 추천이겠는데.
잊을 뻔했는데 똑같이 목일이란 이름으로 맺은 글, 그림의 인연이 놀랍다. 나무 아래 뜨신 햇살 받으며 책을 써내지야 않았겠지만 왠지 그렇게 읽는다면 책 맛이 더 살아날 법하다. 투박한 듯 정겨운 글과 그림의 매력에 한 판 빠져보실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