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서설 -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
르네 데카르트 지음, 이현복 옮김 / 문예출판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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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데카르트 프랑스 1596~1650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는『방법서설』보다 8년이나 앞서 집필했던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에서는 21개의 규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원래 이 책은 3장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 장은 12개씩의 규칙을 포함하여 총 36개의 규칙을 제시하려고 했었는데, 저술이 미완성으로 끝나, 21개의 규칙만을 제시하게 되었다. 그중에서 마지막 3규칙은 설명이 없고 제목만 제시되고 있어 이 책이 미완성본임을 입증해준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는 단지 4개의 규칙만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데카르트가 이성의 올바른 사용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규칙이 필요하지 않고 단지 4개의 규칙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네 개의 규칙은 첫째, 명증적으로 참이라고 인식한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 것. 둘째, 검토할 어려움들을 각각 잘 해결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작은 부분으로 나눌 것. 셋째, 내 생각들을 가장 단순하고 가장 알기 쉬운 대상에서 출발하여 순서에 따라 이끌어 나아갈 것. 넷째, 순서에 따른 각 단계들을 아무것도 빠트리지 않도록 완벽하게 열거할 것 등이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퍼옴

   데카르트의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 제목을 보는 순간, 아니 어떻게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이 있을 수 있지? 사람의 정신이라는 것이 지도할 만한 성질의 것인가? 철학자들은 정말 남이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는 것들을 곰곰히 생각하는 사람들이구나.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책을 펼쳤다. 초반의 규칙들은 그나마 이해하기 쉬웠는데 뒤로 갈수록 대체 무슨 말인지 알수가 없는 부분이 많았다. 철학은 이런 것인가? 아는 단어라도 그 단어가 철학에서는 다른 뜻으로 적용될지도 모른다. 철학 관련한 용어들을 좀 공부해야겠다. 몇가지 규칙들만 요약해 보면,

  

    참과 거짓은 명제이다. 확실과 불확실은 인식론이다. 동일한 명제를 인식하는 것은 사람이다.

노하우, 색, 맛 등은 명제적 지식이 아니다.

 

1규칙 - 인식주체가 동일하기 때문에 각각의 인식은 서로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분과를 반박한 것이다. 인식의 확장. 그러나 사람들이 항상 모든 상황을 고려할 수는 없지 않을까?

 

2규칙 - 확실하고 명증한 것이 인식이다. 지식이 충족되는 상황은 intuition(직관)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직관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설명하는 방법밖에 없다. 1+1=2

아무리 복잡한 대상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분석을 하면 수학, 기학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데카르트는 말한다.

독단주의(dogma)는 어떤 상황에 대해 참이다 아니다 똑 부러지게 주장하는 것이다.

반면 회의주의자는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어떤 주장도 정립시킬 수 없다.

 

3규칙 - 계시가 직관보다 더 확실하다고 말한다. 이 장은 교황청에 대한 립 서비스일 것이다. 그 당시 교황청의 힘은 어마어마했고 데카르트는 갈릴레오가 교황청에 불려 들어가서 지구는 돌지 않는다고 말한 소식을 들었다. 그는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지지하였기에 자신의 논문을 출판시키지 않았다. 교황청의 권력은 모두에게 공포였던 것이다.

데카르트는 지식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인간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식 능력으로써 획득할 수 있는 지식에 관심이 있었다. 이것은 상호가능하며, 이 지식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있으니까.

 

4규칙 - 진리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방법이 필요하다. 순서와 척도에 의한.

 

5규칙 - 방안에 앉아서 무슨 철학을 하느냐며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를 비난했다.

 

8규칙 - 형태와 모양이 사물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본성은 물질의 연장이고 연장은 모양과 필연적인 관련이 있다. 우리는 빨간 사과를 보면서 빨간색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빨간 사과를 지각하는 것이다. 통증은 감각으로 지각한다. 인간은 순수물질(육체)과 정신이 합쳐졌기 때문에 통증과 색지각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틀렸다. 왜냐하면 아무리 과학들이 상이한 대상들에 적용된다 할지라도, 그것을 모두 함께 고려할 때는 언제나 동일한 인간의 지혜와 일치하며, 또 태양의 빛에 비치는 것이 각양각색의 것들이라 해서 그것 때문에 그 빛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듯이, 과학들도 이들로부터 생기는 어떤 차이점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지성을 한계지어 제한시켜 버릴 필요는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 그러나 두 사람이 같은 것에 관하여 상반되는 결정에 도달한다면, 둘 중 적어도 한 사람은 틀렸음이 확실하고, 그래서 분명한 것은 다른 한 사람마저도 아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후자의 추리가 확실하고 명증적이라면, 그는 다른 이의 지성도 성공적으로 확신시킬 수 있도록 그것을 그에게 제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알 능력이 있는 것은 오성뿐인데도, 오성은 그 다른 세 능력들, 즉 상상, 감각, 기억에 의하여 도움을 받거나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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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 2012 제12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김인숙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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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올세이프의 신입사원 조효석은 벙커의 내부 문제를 고치는 계약직 A/S맨이다. 그가 입사한 회사는 재난을 예비하는 벙커를 팔고 있다. ‘입사하기 전 조효석을 둘러싼 세계는 비교적 무사태평’했으나 입사 후 그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이동했다. ‘언제라도 핵이 사용될 정도로 정치 상황이 위태롭고, 환경적으로 극심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조효석의 아내는 올세이프에서 전화로 세일즈하는 일을 한다. 그녀는 고객들에게 ‘두려움’을 판다. 벙커를 사려는 사람들은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이므로 그녀는 고객들에게 그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다.

조효석은 벙커를 수리하러 나갔다가 ‘한 떼의 전투기 편대’가 이루어 나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빠진다. 지하에 있는 벙커에 들어가자 그는 안정감을 느낀다. 그리고 벙커 내에 시스템을 초기화 하려고, 어떤 버튼인지는 알지 못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벙커 안은 블랙아웃(정전)이 된다.

 

『블랙아웃』에 관한 편혜영 작가 인터뷰

   “일상은 두 가지 속성이 있어요. 반복적으로 동일하게 영위되는 일상을 거리를 두고 보면 섬뜩하죠. 그런데 그 반복되는 일상을 잃을까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불안해요.”

“지난해 동일본 대지진 이후 벙커 구매자가 늘었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벙커의 주요 목표가 재난 상황에도 일상 생활을 영위토록 해주는 거라고 하더군요. 안전하게 몸을 지키는 벙커가 일상 생활을 유지하는 전제 조건이 된 거죠.”

“자연재해 앞에서 평등하다고 생각하면 덜 불안할 텐데 자연재해에 대비할 수 없는 사람에게 불행이 닥친다는 걸 깨닫게 되며 두려워지는 거에요. 계급 차이 때문에 느끼는 불안이죠.”

“벙커는 일반적으로 갖기 힘든 물건이에요. 그런데 슈퍼마켓 직원도 방재광장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곤 불행함과 불안을 느껴요. 조효석의 두려움은 재난을 당하는 게 아니라 재난을 피할 방재광장이나 소개지, 벙커가 없어서예요. ”

“불확실성은 우연한 계기로 와요. 작은 사고가 결정적인 틈을 만들죠. 일상 도 마찬가지에요. 똑같은 생활이 반복되다 단 한 번 동일성이 깨지는 순간, 균열이 생겨요. 그 균열이 일상을 바꾸지는 않지만 방황하게 하니까요.”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로 써진 편혜영의 소설들은 모두 크고 작은 재난의 상황에 놓여 있다. 그녀의 초기 작품 『아오이 가든』에서는 시체들이 출몰하고, 사람이 개구리 알을 낳으며, 박제되거나 실험실의 해부대 위에 놓인 상황이 된다.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소재들은 사라지나 여전히 그녀의 소설에는 불안감이 내재되어 있다. 편혜영이 다루는 재난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기에 읽는 독자는 불편하고 불쾌하다.

   『블랙아웃』에서 작가가 다루고 있는 재난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이다. (북한의 핵위협, 중국에서 일어났던 사스, 한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광우병과 조류독감, 지구 온난화와 산림 파괴, 쓰나미와 대지진 등) 그러나 평소 사람들은 ‘파국의 조짐이 주는 공포에 질리지 않도록 그것을 간단히 부인하거나 무시’하며 살아간다. 주인공 조효석은 평생을 일해도 벙커를 살 수 없는, 벙커 수리맨이다. ‘그의 두려움은 재난을 당할까 봐서가 아니라 방재광장이나 소개지, 벙커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직접적 접촉 없이 신호로만 이루어지는 ‘단말기’를 들고 벙커의 내부를 수리하러 다닌다. 주인공 조효석은 ‘위험’이나 ‘공포’에는 냉소할 수 있지만 ‘실직’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고, 매일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을 투영한다고 볼 수 있다.

   생기지 않을 질병을 걱정하며 건강 보험에 드는 것과, 지진·홍수·번개·허리케인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할 확률이 극히 적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재난에 대비하여 벙커를 사는 것이 ‘두려움’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 두려움은 과연 누가 조장한 것인가? 재난에 대비해야 한다고 위협하는 목소리 뒤편에 거대한 ‘자본주의’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진짜 재난은 사람과 사람간의 유대관계가 파편화 되고, ‘무관심’과 냉대‘가 심화되며, 돈의 유무에 따라 인간이 ‘불평등’하게 취급받는 현대의 모습이 아닐까?

   사실 나의 경우 ‘재난’이라는 단어는 피상적이며 결코 닥치지 않을 상황으로 여겨진다. 6.25와 같은 전쟁을 겪지도 않았고, 쓰나미와 지진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조류독감·신종플루·사스 등의 질병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죽은 경우도 없다. 그러나 만약 재난이 닥친다면 그것을 피할 방법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분명 죽거나 크게 다칠 것이다. 하지만 미리 걱정하거나 불안해 떨고 싶지는 않다. 다만 재난을 겪을 때, 의연히 맞서거나 버틸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다. 또한 재난을 겪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위로해주고 도움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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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unk Hour (For Elizabeth Bishop)

 

Nautilus Island's hermit

heiress still lives through winter in her Spartan cottage;

her sheep still graze above the sea

Her son's a bishop. Her farmer 

is frist selctman in our village;

she's in her dotage.

 

Thirsting for

the hierarchic privacy

of Queen Victoria's century,

she buys up all

the eyesores facing her shore,

and lets them fall.

 

The season's ill-

we've lost our summer millionaire,

who seemed to leap from an L.L.Bean

catalogue. His nine-knot yawl

was auctioned off to lobstermen.

A red fox stain covers Blue Hill.

 

And now our fairy

decorator brightens his shop for fall;

his fishnet's filled with orange cork,

orange, his cobbler's bench and awl;

there is no money in his work,

he'd rather marry.

 

One dark night,

my Tudor Ford climbed the hill's sckull;

I watched for love-cars. Lights truned down,

they lay together, hull to hull,

where the graveyard shelves on the town....

My mind's not right.

 

A car radio bleats,

"Love, O careless Love....." I hear

my ill-spirit sob in each blood cell,

as fi my hand were at its throat...

I myself am hell;

nobody's here-

 

only skunks, that search

in the moonlight for a bite to eat.

They march on their soles up Main Street:

white stripes, moonstruck eye's red fire

under the chalk-dry and spar spire

of the Trinitarian Church.

 

I stand on top

of our back steps and breathe the rich air-

a mother skunk with her column of swills the garbage pail.

She jabs her wedge-head in a cup

of sour cream, drops her ostrich tail,

and will not 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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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자유다> 중에서 '말의 양심'

 

 

   우리 작가들은 말을 가지고 애를 태웁니다. 말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말은 가리킵니다. 말은 화살입니다. 현실의 거친 가죽에 박힌 화살입니다. 말은 의미심장할수록, 개괄적일수록 방이나 굴을 닮았습니다. 말은 넓어질 수도 있고 안으로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나쁜 냄새로 가득 찰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말은 종종 다른 방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그곳에서 살고 싶은 방이나 아니면 우리가 이미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방이지요. 그곳에서 사는 방법이나 이치를 잊어버린 공간일 수도 있습니다. 더 이상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 수 없는 생각을 담은 책들은 버려지고 문을 닫고 못질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평화’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분쟁이 없음? 망각? 용서? 아니면 지치고 기진하여 적의가 바닥나 버린 것? 제가 보기에는 대부분 사람이 ‘평화’라는 말을 할 때 뜻하는 바는 ‘승리’인 듯합니다. 그들 편의 승리지요. 그들에게는 승리인 ‘평화’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패배를 뜻합니다.

   평화가 원칙적으로는 바람직한 것이지만 정당한 요구를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을 가져온다면 곧 전면전은 아니더라도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럴 때 평화를 주창하는 것은 부당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성급하다고 느껴지겠지요. 평화는 사람들이 더 이상 어떻게 거주해야 할지 모르는 공간이 됩니다. 평화는 다시 정착해야 하는 곳, 다시 개척해야 하는 곳입니다.

 

   ‘명예’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명예가 개인행동의 엄격한 기준이었던 것은 아주 먼 옛날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치켜세우기 위해) 명예를 부여하는 관습은 건재합니다.

   명예를 부여하는 것은 모두 공통으로 지녔다고 믿는 기준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명예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 순간만큼은 그걸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체면치레를 하자면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해야겠죠.) 주어진 명예를 거절하면 무례하고 반우호적이고 오만하게 비칩니다.

   상은 이전에 누구에게 명예를 줄까를 두고 내린 선택에 따라 명예를 축척하고 명예를 부여하는 능력도 쌓아 갑니다.

   이런 기준을 염두에 두고 주장하는 바가 강한 이름이 딸린 예루살렘상을 생각해 봅시다. 이 상은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지만 20세기 후반 최고 작가들에게 수여되었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문학상이지만, “예루살렘 문학상”이라고 불리지 않고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를 위한 예루살렘상” 이라고 불립니다.

   이 상을 받은 작가들 모두 정말로 사회 안에서 개인의 자유를 옹호했나요? 그것이 그 사람들(이제는 “우리”라고 해야겠군요.)의 공통점인가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대변하는 정치적 견해가 이루는 스펙트럼은 폭이 상당히 넓기도 하고 심지어 그들 가운데 몇은 자유, 개인, 사회와 같은 거창한 말은 거의 입에 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작가가 무어라고 말하느냐가 아니라, 작가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작가(문학계의 구성원들을 가리키는 말로 썼습니다.)는 개인의 통찰의 지속성(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저는 ‘개인’이라는 말을 명사보다는 형용사로 쓰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우리 시대가 끝없이 ‘개인’을 외치며 홍보하는 것은 저에게는 아주 미심쩍게 여겨집니다. ‘개인성’이라는 말이 점점 더 이기주의와 동의어가 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성’과 ‘자유’를 드높이는 데 있어 기득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개인성과 자유란 끝없이 자기를 크게 만들 권리, 쇼핑하고 획득하고 사용하고 소비하고 낡은 것을 폐기할 자유에 지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자기 수양 자체에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타주의,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라는 기준이 없는 문화(문화라는 단어는 표준적인 의미로 썼습니다.)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처음에는 독자로서, 나중에는 작가로서 문학이라는 기획에 제가 몰두하게 된 것은 문학이 다른 자아, 다른 영역, 다른 꿈, 다른 언어, 다른 관심사에 대한 공감의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작가, 문학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저는 말하는 사람이자 동시에 숙고하는 사람입니다. 생각이 저를 움직입니다. 그러나 소설은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형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언어의 형식. 표현력의 형식. 저는 머릿속에 형식이 갖춰지기 전에는 이야기를 떠올리지 못합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사물의 형태가 사물보다 선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문학이 무엇이고 어떤 것일 수 있는가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은연중에 혹은 암묵적으로) 소설을 만들어 냅니다.

모든 작가의 작품, 모든 문학적 행위는 문학 자체에 대한 언급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문학을 옹호하는 것이 작가가 주로 다루는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에서 어떤 것이 진실이라면 그 정반대도 역시 진실이다.”라고 했습니다. 와일드의 말에 빗대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문학에 대한 진실은 그 정반대 역시 진실이라고요.

   따라서 문학은(여기서 저는 단순히 그렇다고 설명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자의식이고, 회의고, 양심의 거리낌이고, 깐깐함입니다. 또한(이번에도 역시 그럴 뿐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뜻입니다.) 노래고, 자발성이고, 찬미고, 환희입니다.

   문학에 대한 생각은 (예를 들자면 사랑에 대한 생각 같은 것과는 다르게) 거의 언제나 다른 사람의 생각에 대한 응답으로만 발생합니다. 반사적인 생각입니다.

   당신이 혹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더 큰 열정 혹은 다른 실천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생각이 허락을 내립니다. 저는 다른 감정과 실천을 허락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할 때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단지 작가가 전문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어떤 제도의 성격을 띤 모든 실천(문학은 제도입니다.) 에 있을 수밖에 없는 불균형과 편협함을 바로잡기 위한 것만도 아닙니다. 문학은 본질적으로 모순적인 열망들에 뿌리박은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문학을 두고 한 가지로 단정하는 것은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은 환원적이며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문학에 대해 진실하게 이야기하자면 역설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문학작품, 문학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작품은 ‘단일성’ 또는 ‘유일한 목소리’라는 이상을 구현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축적체인 문학은 ‘복수성, 다양성, 혼합성’이라는 이상을 구현합니다.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문학은 사회 참여 문학, 개인의 영적 추구 문학, 국민문학, 세계문학 등등 정신적인 자족, 허영심 충족, 자축의 형태일 수 있습니다.

   문학은 기준, 야망, 충성의 체계입니다. 그 체계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복수의 체계입니다. 다양성이 중요함을 가르치는 것도 문학의 윤리적 기능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문학은 경계 안에서 작동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 활동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경계가 없는 인간 활동은 죽음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들 대부분이 경계 짓고 싶어하는 바로 그 선이 문학의 창의성과 능력을 동원해 펼칠 수 있는 여지와 자유를 말살시키리라는 겁니다.

   우리는 탐욕을 통합하는 데 몰두하는 문화 속에 삽니다. 그리고 광대하고 눈부시게 다양한 전 세계 언어 가운데 제가 쓰고 말하는 이 언어가 현재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습니다. 영어는 전 세계적인 규모로 퍼져 나가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가 차지하던 역할과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전 지구적이고 다국적인 문화 속에서 살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여러 부족들(실제 부족일 수도 있고 새로 스스로 구성한 부족일 수도 있습니다.)이 내세우는 요구는 점점 파편화되어 갑니다. 문단이나 세계문학 등과 같은 낡은 인문주의적 사고는 사방에서 공격을 받습니다. 이런 생각은 순진할 뿐 아니라 보편적 가치라는 위대한 유럽의 이상(유렵중심주의적 이상이라고도 하겠죠.)에 뿌리를 두기 때문에 순수하지 못하게 느껴집니다.

   ‘자유’와 ‘권리’라는 개념은 최근에 놀라울 정도로 쇠퇴했습니다. 많은 사회에서 집단의 권리가 개인의 권리보다 훨씬 우선입니다.

   이런 때 문학을 만드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유로운 표현과 개인의 권리에 대한 믿음을 암묵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문학 생산자들이 작품을 혹 자기가 속한 부족이나 사회를 위해 바쳤다고 하더라도 작가로서 성취는 그 목적을 넘어설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작가를 중요하다거나 존경할 만하게 만드는 자질은 그 작가의 목소리가 얼마나 특별한가 하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특별함은 혼자서 연마해야 하며 성찰과 고독 속에서 오랫동안 수련하여 얻는데, 작가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요구도 느끼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제가 작가가 공적 문제에 대한 토록에 참여하고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과 공동 전선을 수립하고 연대할 권리가 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활동 때문에 작가가 문학을 만들어 내는, 숨기 좋은 자기만의 내적 공간에서 멀어진다는 말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호라동은 거개가 더 그러니 말입니다.

그러나 양심이나 이해관계가 지시하는 바에 따라 자발적으로 나서고 논쟁에 뛰어들거나 집단행동에 참여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의견(도덕주의적인 문구)을 내놓은ㄴ 것은 별개의 일입니다.

   거기 가 본 적도 그런 일을 한 적도 없으면서 이건 지지하고 이건 반대한다는 식으로.

작가는 의견을 내놓는 기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시를 쓰지 않는다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비난을 받던 미국의 흑인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 시인이 이렇게 말했다지요.

“작가는 주크박스가 아닙니다.”

 

   작가가 가장 중요시해야 할 일은 의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과 그릇된 정보의 공모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문학은 단순하게 만들려는 목소리에 반대하는 뉘앙스와 모순의 집입니다. 작가가 할 일은 정신적 약탈자들의 말을 믿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작가가 할 일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여러 가지 다른 주장과 파편과 경험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작가가 할 일은 현실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추한 현실, 환희의 현실. 문학(문학적 성취의 복수성)이 제공하는 지혜의 본질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그와 다른 어떤 것도 계속된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다른 어떤 것”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저는 늘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권리의 충돌에 시달립니다. 예를 들자면 (때로)진실을 말하는 것이 정의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예를 들자면 (때로) 정의를 가져오려면 상당한 진실을 덮어야 한다는 것.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가들 가운데에는, 공적인 목소리를 내는 와중에 자기가 정당한 대의라고 생각하는 것(그 생각이 옳은 경우가 많았습니다.)을 이루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는 데 공모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진실과 정의 가운데 선택해야만 한다면(물론 그런 선택은 하고 싶지 않지만) 진실을 선택하겠습니다.

 

   물론 저는 바른 행동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작가가 행동하는 사람인가요?

이 세가지는 다른 것입니다. 말하기,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지요. 쓰기, 이 상을 받을 어떤 자격을 저에게 준 것입니다. 존재, 다른 사람과의 적극적 연대에 믿음을 품은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롤랑 바르트가 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요.

“말하는 사람은 쓰는 사람과 다르고, 쓰는 사람은 그 사람의 존재와 다르다.”

당연히 저도 의견이 있고 정치적 견해가 있으며 그 가운데는 직접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독서와 토론·사색을 통해 형성된 것도 있습니다. 제 견해 가운데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직접적으로 아는 문제에 대해 공공연히 취해 온 입장에 비추어 보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견해일 것입니다.

   저는 집단 처벌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는 ‘연대 책임’이라는 개념이 군사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민간인들을 향해 지나친 화기를 사용하여 삶의 터전을 폭파하고 과수원이나 밭을 파괴하고 생계 수단과 고용, 교육, 의료, 이웃 마을과 사회에 자유롭게 드나들 권리를 앗아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민간인들과 상관이 있을 수도, 전혀 없을 수도 있는 적대적 군사행동에 대한 보복으로 말입니다.

   저는 또 팔레스타인 영토에 이스라엘 공동체를 수립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빠른 시일 안에 이런 촌락을 해체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아 둔 군대를 철수하기 전에는 이곳에 평화가 찾아올 수 없습니다.

   제 두 가지 견해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이 여기 많으리라 확신합니다. 공자 앞에서 문자를 쓴 격이지요.

   그러나 이런 견해가 작가인 제 견해인가요? 아니면, 작가라는 지위를 이용해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이들에게 제 목소리를 더하는 것인가요? 작가가 미칠 수 있는 영향은 순전히 우연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연예인 문화의 한 양상일 뿐입니다.

폭넓게 직접적으로 아는 분야가 아닌 문제에 의견을 늘어 놓는 것은 사실 좀 세련되지 못한 태도입니다. 제가 잘 모르는 것, 아니면 수박 겉핥기로 아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건 그냥 ‘말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서두에서 한 이야기로 돌아가, ‘명예’를 위해서입니다. 문학의 명예. 독립된 목소리를 낸다는 과제. 본격 문학 작가들, 문학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은 대중매체의 지배적인 담론과 다른 말을 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닙니다. 뉴스와 토크쇼에서 한목소리로 읊어 대는 단조로운 소리에 반대해야 합니다.

   일단 의견을 내놓으면 바꾸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작가로서 기능할 때 언제나 더 많은 것을 보게 마련입니다.

   어떤 것을 보든 간에 그 이상의 무엇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그와 다른 어떤 것도 계속됩니다.

   거의 3천년 넘는 시간 동안 이어진 문학이라는 대업이 어떤 지혜를 구현한다면,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게 문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개인적, 공동체적 운명의 다중적 성격을 보여 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학은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 사이에 모순이 있고 좁히기 힘든 길들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이것이 ‘비극’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문학은 “또 다른 한편”과 “다른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문학의 지혜란 뚜렷한 견해를 가지는 것과 상반됩니다. “무엇에 대해서건 나의 최종 견해란 없다.”고 헨리 제임스는 말했습니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의견을 내놓는 것은 설사 그것이 정확한 의견이라고 할지라도 소설가와 시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곧 깊이 숙고하게 하고 복잡성을 추구하는 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동입니다.

   정보는 결코 계몽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보하고 비슷한 것처럼 들리지만 그것보다 더 나은 것(아는 상태, 곧 구체적이고 명확하고 자세하며 역사성이 있는, 직접 경험에서 나온 지식을 의미합니다.)은 작가가 공공연히 의견을 표할 때 반드시 필요한 필수조건입니다.

이래라저래라 훈계하고 거짓말하는 것은 다른 이들, 유명인들이나 정치가들에게 맡깁시다. 작가이자 동시에 공적인 목소리여서 좋은 점이 있다면 작가는 의견과 견해를 밝히는 일이 아주 힘겨운 책임이라고 생각하리라는 점입니다.

   의견을 내놓는 것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스스로를 고정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작가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 공감과 새로운 관심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과 다르게 더 나아지려는 열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변화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하는 일입니다.

뉴면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더 높은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살아가는 것이 변화하는 것이며, 완벽하기 위해서는 자주 변해야 한다.”

   “완벽”이란 무얼 의미합니까?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고 한마디만 하렵니다. 완벽은 저를 웃게 합니다. 얼른 덧붙이자면 냉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쁜 웃음입니다.

 

   예루살렘상을 주신 데 무척이나 감사합니다. 이 상을 문학이라는 대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의 영광으로 받아들입니다. 특별한 목소리와 다양한 진실로 이루어진 문학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모든 작가와 독자 여러분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평화의 이름으로, 상처받고 두려워하는 공동체끼리의 화합이라는 이름으로 상을 받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평화. 반드시 필요한 양보와 새로운 조화. 반드시 사라져야 할 고정관념. 반드시 지속되어야 할 대화. 이 상을, 국제도서전이 후원하는 국제적인 상을, 무엇보다도 전 세계 문학계에 영예를 돌리는 일로 생각하면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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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 예술, 종교, 역사철학
N.볼츠 외 지음, 김득룡 옮김 / 서광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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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터 벤야민은 유대계 독일인으로 1892년 7월 베를린에서 태어남. 철학을 공부함. 1915년 게르숌 숄렘을 만남. 1917년 도라 폴락과 결혼하고 베른으로 이주. 철학 박사학위 취득. 1920년 베를린으로 돌아옴. 1926년 12월에 모스크바로 여행. 1930년 도라 폴락과 이혼. 1933년 파리에서 망명. 나치가 집권하자 1940년 9월 피레네 산을 넘어 스페인으로 탈출하려다 실패하자 자살. 그는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여러 가지 상황 때문에 가난하게 살아야 했고, 글을 출판하고자 했던 시도들은 자주 허사로 돌아갔다. 죽을 때까지. 실패로 가득했던 그의 삶. 지금 자신이 이렇게 유명해진 것을 알면 기뻐할까?

   벤야민의 글을 언제쯤이면 이해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벤야민을 이야기해서 도대체 누구인가 싶어 책을 펼쳤다 다시 덮기를 몇 번. 지금까지 <모스크바 일기>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 두 권이 가까스로 읽기를 마친 책이다. 이 책 또한 벤야민의 사상과 글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하여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너무 어렵구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으니 지루할 수밖에. 책은 그의 가장 중요한 주제들을 간단하게 묶어 설명한 것인다. 필수적 형식들, 역 신학, 역사적 인식의 논리, 인간학적 유물론 등. 그중 제 7장 매체미학이 그나마 제일 쉽고 재밌었다. 다른 책을 읽어봐야겠다.

 

# 만일 내가 동시대의 대부분의 작가들보다 독일어를 더 잘 쓰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 내가 20년 동안 하나의 단순한 규칙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그 규칙이란 ”편지 쓸 때를 제외하고는 ‘나’라는 말을 쓰지 말 것“이다.

 

# 희망이 아니라 바닥이다......인간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 때, 절망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 회랑식 상점가의 이념과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마술적 또는 신화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사회 관계를 구성하게 하는 의식이 실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사물의 세계에 자신을 내맡겨 버린다.

그는 상품의 홍수에 직면하며, 그것들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 속에서 일한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그는 타인들 속에서 자신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대로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려고 상가에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매할 자를 찾기 위해 타인들로 하여금 자신을 쳐다보게 하려고 상가에 가는 것이다.

 

#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재를 지각할 때 종종 (현미경, 망원경, 텔레비전 등) 기계적 매개를 통해서만 지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틀은 세계의 “자연적” 면모를 왜곡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미리 틀지운다.

벤야민은 현대의 대도시들을 플래카드의 세계 속으로 응결되는 자료의 홍수로 본다. 광고의 글자들은 문자 그대로 주위를 끄는 데, 그것은 감촉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실제로 읽혀질 목적으로 씌어진 문서가 아니다. 그것들은 대중이 습관적, 일상적 궤도를 따라 움직일 때 대중을 세차게 공격한다. 그리하여 책의 형식은 문화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나버린다. 책들이 수평적으로 읽힌다면, 광고는 수직적으로 읽힌다. 책 속의 문서는 문자 그대로 문서이지만, 광고의 도형은 문서의 이미지이다. 광고는 전적으로 상품을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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