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그램 질로크 지음, 노명우 옮김 / 효형출판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그램 질로크/ 노명우 역

    이 책은 도시를 주제로 벤야민이 쓴 많은 작품들을 재료로 하여 어떻게 하면 맛있게 요리하여 독자가 먹기 편하게 할까 고민한 책이라고 보여진다. 벤야민은 19세기 파리에 관한 연구 <파사젠베르크>을 완성하지 못하고 자살했다. 벤야민의 도시에 관한 생각들은 놀랍고 재미있다. 그는 도시를 사랑하면서도 싫어했다. 그가 매료되었던 도시 베를린과 파리. 그곳에서 그는 도시를 연구했고 도시 안에 사는 군중을 분석하였다. 책에는 그가 여행했던 나폴리와 모스크바에 관한 단상도 나오는데, 두 도시에 관한 설명이 꽤 재미있다. 벤자민이 명명한 도시의 영웅주의자?인 산책자, 댄디, 창녀, 넝마주의 등의 정의와 묘사도 기발하다. 벤야민은 도시의 물리적 구조와 그 안에서 발견되는 구체적 대상들, 사람들의 사소한 경험과 행동, 물건과 사람의 상품화, 실내화(파리의 아케이드) 도시 환경에 관심을 기울였다. 도시에 관한 사유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글을 읽다보니 서울에 살면서도 한번도 벤자민처럼 진지하게 도시에 관해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 죄스러울 정도이다.

    책은 서론, 1~4장, 결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도시의 이미지들 이란 제목으로 그가 여행했던 나폴리와 모스크바에 관한 글과 이야기들이 나온다. 2장은 도시의 기억들로 벤야민이 태어난 도시 베를린과 그가 1933년부터 1940년까지 살았던 제 2의 고향 파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3장은 변증법적 이미지 로 1927년에 소박하게 시작했던 ‘파사주 프로젝트’가 점점 거대해지는 과정과 대도시 파리에 관한 글들이다. 4장은 도시의 알레고리 로 거리의 산책자와 보들레르와 관련한 벤자민의 글들이다.

    책을 읽으니 벤야민이 어떠한 글을 썼는지, 그의 사상이 어떤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이 책으로 워밍업을 했으니 다음엔 직접 벤야민이 쓴 작품을 읽으면 훨씬 수월할 것 같다. 그러나 아직 벤야민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그는 도시의 철학자인가? 그러고 보니 누군가의 글을 읽을 때 작가가 소설가인지, 저널리스트인지, 정치가인지, 시인인지 명확하게 구분이 되어야 마음이 편한 것 같다. 아마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저자의 글은 마음속에 명확히 구분해놓은 공간 중 어디에 넣어두어야 할지 난감해서일 것이다. 벤야민, 당신을 어디다 모시면 좋을까요.

 

# “나폴리에 뿌리내린 벌이는 운에 의존하는 게임과 비슷하며, 공휴일에 들러붙어 있다. 잘 알려진 일곱 개의 주요 죄악의 항목은 제노바의 자만심, 플로렌스의 인색함, 베니스의 낭비, 밀라노의 식탐, 볼로냐의 분노, 로마의 질투, 나폴리의 게으름이다.” 68. <나폴리>

 

# 놀이를 할 때 어린아이는 대상으로 부터 떨어져 관조하지 않고, 대상을 손에 쥔 채 미메시스적으로 대상의 일부가 된다. 126.

 

# “개선 행진에 의기양양하게 참석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패배하여 굴복한 사람들 위를 가로질러 넘어간다. .....모든 문명의 기록은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다.”

기념물은 확실히 그런 ‘기록’이다. 기념물은 그 자체를 숭배의 대상으로 제시하고, 변함없는 예전의 광채와 업적을 영원히 상기시킨다. 기념물은 이중으로 신화적이다. 기념물은 한편으로 거짓된 역사를 환기시키며, 동시에 자신의 영속성을 스스로 선언한다. 기념물은 화석화된 신화이다. 146. <일루미네이션>

 

#실내를 채운 상품들은 지속적이지 않은 ‘일시적인 형상’일 뿐이다. 실내는 거들먹거리며 맹목적으로 ‘영원함을 확신’하지만, 실내의 상품들은 악화되고 쇠퇴한다. 파사주처럼 부루주아의 실내는 한때는 유행했던 욕망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진부해지고 우스꽝스러운 사물들의 안식처이다. 162.

 

# “오늘날 시민들은 한 번도 죽음을 접해 보지 않은, 즉 영원성이 사라진 메마른 주거 공간에서 살고 있고 또 만약 그들의 마지막이 가까이 오게 되면 그들은 그들의 상속자들에 의해 요양소나 병원에 옮겨져 차곡차곡 안치된다.” 166. <일루미네이션>

 

# 죽음은 제거되어, 특별한 장소에 한정된다. 시체는 일상적 지각 영역으로부터 사라지기에 현대 개인은 신체 부패로 인한 공포에 직면하지 않는다.

가난한 자는 시야에서 벗어나고 관심에서도 멀어진다. 이들은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도 감추어진다. 가난한 자는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들은 숨겨지고 잊혀진다. 185.

 

# 벤야민이 보기에 현대적인 것은 이미 낡은 것이다. 유행과 진보 개념의 본질은 낡은 것이 새로운 체하며 분장한 것이다. 이러한 통찰이야말로 실제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수 있는 실현 가능성이다. 잠들어 있다는 의식은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225.

# 벤자민에게 상품 문화는 근본적인 면모는 상품 숭배였다. 상품은 현대성의 우상이다. 도시는 “상품이 제왕이 되고 오락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공간을 구성한다. 현대 대도시는 중세도시처럼 신성한 순례의 장소이다. 파사주, 부티그와 백화점은 상품의 성소이며, 존경을 표해야 하는 신전이다. 벤야민은 “세계박람회는 상품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순례의 장소였다.”고 주장한다. 241.

 

# 벤야민에게 산책자는 거리를 둔 독립성과 거드름 피우는 개인성을 오만하게 유지하기 때문에 영웅적이다. 댄디는 산책자를 현란하고 눈부시게 잘 체현한다.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멋지고 눈부신 최신의 옷을 입은 댄디는 위험하게 걸으며 때로 부르주아의 상품 취향과 온건함의 한계를 넘어서 자기 스타일을 유지하는 걸어다니는 공작새이다. 그래서 벤야민은 루이 토마를 인용한다. “댄디는 방해받지 않고 숭고함을 열망해야 한다고 보들레르는 말했다. 댄디는 거울 앞에서 살고, 거울 앞에서 잠에 든다.” 305.

 

# 댄디로서 산책자는 외양을 통해 자신을 군중들과 구별한다. 댄디는 부가적으로 그의 행동 혹은 행동의 부재를 통해 군중과 자신을 구별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이 산책자의 유일한 일이다. 산책자는 특이한 옷차림새와 게으름이라는, 평범하지 않은 직업을 통해 자신의 개인성을 주장한다. 그는 유한계급과 같은 인상을 전달하려 한다. 산책자는 도시의 거리를 조용하고 서둘지 않으며 그렇기에 위엄있는 태도로 행진한다. 그는 발로 천천히 걷기에 이중적 의미로 보행인이다.“.....그것은 또한 부지런함에 대한 저항이다. 1840년경에 파사주에서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걷는 것은 재빨리 유행이 되었다.” 댄디의 사치와 산책자의 무위는 기묘한 이미지로 수렴된다. 댄디는 의복의 단일성에 저항하며, 게으름뱅이는 동작의 단일성에 저항한다. 이들은 한편으론 값비싼 의복을, 다른 한편으로 시간이라는 귀중한 상품을 과시한다. 산책자는 느릿느릿 빈둥대며 걸어다닌다. 그는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그는 현대적 삶의 리듬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나 있다. 그의 영웅주의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의 평정심은 상품생산의 속도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에 다름 아닐 것이다.” 게으른 사람은 산업 시대의 비인간적인 기계의 시간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 나태는 영웅적이다. 307.

 

# “여기서 우리는 일상의 쓰레기를 모으는 임무를 지닌 사람을 본다. 거대 도시가 버린 모든 것, 분실된 모든 것, 혐오스러운 모든 것, 깨진 모든 것을 그는 분류하고 수집한다. 그는 방탕의 목록과 쓰레기의 비축량을 연구한다. 그는 구두쇠가 보물을 모으는 것처럼 영리하게 선택하고 철저히 분류한다. 그는 산업의 신성을 깨뜨리는 쓰레기를 모아 유용하고 흐뭇한 인공물로 변화시킨다.” <전집 5>

넝마주의는 도시의 폐기물을 수집하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 물건을 수집하는 사람이다.....넝마주의는 현대성의 폐허에 서식하면서 폐허를 재생한다. 그들은 도시의 ‘고고학자’이다. 그들은 새로운 상품 역시 동일한 낡은 폐물이라는 새로운 상품의 진실을 밝혀 주는 유행에 처진 상품을 발굴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더독의 글쓰기 - 아시아계 미국문학의 지형도 미국학 총서 9
윤성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언더독 - 사회, 정치적 부정의 희생자/생존경쟁의 패배자/시합, 선거 등에서 승산이 적은 사람   

 

    처음 제목만 보았을 때는 ‘글쓰기’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평소 쓰는 것에 관심이 많았기에 기대를 잔뜩 품고 책을 펼쳤는데(아시아계 미국문학의 지형도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아뿔싸, 이 책의 목적은 아시아계 미국문학의 지형도를 그리는 것이라고? 왠지 속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글을 읽어가며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아시아계 미국 문학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까지 읽은 아시아계 미국 문학 작가들의 작품이 이창래의『영원한 이방인』과 킹스턴의『여전사』단 두 권밖에 없었다는 놀라운 사실까지 깨닫게 되었다.

    책은 크게 보면 총 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언더독에게 과연 ‘미국’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해 답을 차근차근 찾아보고 있다. 이때 신화와상징학파, 수정주의적 시각과 신미국학 등장, 트랜스내셔널 등의 담론들이 정신없이 등장하는데, 아시아계 미국문학의 기본 지식이 하나도 없었기에 읽을수록 머리가 점점 복잡해지는 느낌이었다. 2장은 언더독과 재현의 문제에 관해 다루고 있는데 오카다 작가의『노노보이』와 ‘프랭크 친 일병 구하기’라는 글들을 통해 이해하기가 좀 더 쉬웠다. 1장의 난감함을 2장이 누그러뜨려 줬다면 3장에서 저자는 이창래 문학 작품을 꼼꼼히 분석하며 읽는 이에게 엄청난 재미를 안겨주었다.

    책을 통해 수많은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가장 충격적이었던 점은 1942년 미국정부가 일본계 미국인을 감금하기 위해 ‘재정착센터’를 세웠다는 점과, 1830년경부터 미국이 인종적 타자 만들기 작업을 위하여 골상학적 증거 수집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책을 읽으면서 아시아계 미국 문학 작품과 더불어 ‘낯선 땅 이방인’(하인라인의 소설 제목처럼)으로 살아야 했던 아시아계 미국인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저자는 아시아계 미국 문학 작가인 ‘Chang-Rae Lee’를 ‘이창래’로 부르는 관행의 이면에 그의 작품 속에 표현된 ‘한국적’인 요소를 찾아 그것을 ‘우리 것’으로 환원하려는 욕망이 숨어 있는 건 아닌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렇구나. 내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러고 보면 어느 경우에건 ‘우리’라는 범주를 벗어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 같다. 사실 인간은 서로에게 모두 이방인이 아닌가? 모두가 서로에게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 경계를 인식하고 ‘서로 다른 기호의 (불협)화음에 진정으로 귀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 책을 읽으며 정확한 뜻을 알지 못했던 용어들 정리

전경화 - 언어를 비일상적으로 사용하여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하는 일

명예백인 -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자에게 백인과 동등한 법적권리를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부여한 호칭

다원주의 - 개인이나 여러 집단이 기본으로 삼는 원칙이나 목적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

쇼비니즘 -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는 광신적인 애국주의나 국수적인 이기주의

속어주의 - ??

 

* 궁금한 점

앤드루 잭슨식의 전원 주의적 민주주의 전통이란 무엇인가

수정주의적 시각이란 무엇인가

용광로 담론, 샐러드볼 이론이란

해석공동체는 무엇인가

 

* 맞춤법에 실수가 있는 듯한 문장

단선전인 → 단선적인 (109쪽)

정치한 → 정치적 (113쪽)

노농자들의 → 노동자들의 (119)

정치해진 → 정교해진 (137)

사전을 찾아보니 ‘정치하다’가 정교하고 치밀하다 라는 뜻이 있다고 나온다. 그러나 네이버에서 정치해진/정치한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문장을 만든 경우는 찾을 수가 없어서 편집자의 실수가 아닐 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단어가 있다면 죄송합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육체와 예술 현대의 문학 이론 34
피터 브룩스 지음, 이봉지 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0월
평점 :
절판


   제목만 봐도 읽고 싶어지는 책. 육체를 주로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걸친 문학과 서양 미술의 예를 들며 설명하고 있다.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예로 들고 있는데, 얼마나 재밌는지 소개된 책을 당장이라도 사서 읽고 싶어진다. 저자는 육체 위에 쓰여진 이야기, 텍스트에 담겨 있는 욕망의 대상들을 차근차근 분석해간다. 이 때 많은 부분이 정신분석에 의거하고 있고, 그러기에 프로이트, 라캉 같은 인물들의 이론을 지지한다. 저자는 육체 중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부분은 성적인 측면(성적 존재로서의 자아개념)이라고 말한다.

    5장에 나온 에밀졸라의 『나나』(어서 읽어봐야겠다)와 6장의 고갱과 타이티 여인의 육체에 관한 글(고갱의 숨겨진 뒷이야기를 읽는 듯한)들이 특히 재밌었다. 나체에 관한 그림들에 대한 자세한 배경과 설명도 멋지다. 이렇게 풍부한 내용이 담긴 책을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했다는 사실이 새삼 기쁘다. 초반에는 살짝 지겨움을 참아야 했지만(책의 흐름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기에) 2장 루소의 『고백론』과 관련된 글이 시작되면서부터는(고백론을 읽은 사람이라면 별로 재미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눈이 번쩍 뜨였다. 역시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엿보는 것은 재밌구나. 책에 소개된 문학 작품들만 다 읽어도 일 년이 걸릴 듯 싶다. 지금까지 나는 대체 무엇을 읽어 왔던 것인가. 요즘 소설 이외의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거지만 수많은 책에서 벤야민, 톨스토이, 라깡, 플로베르에 관한 글이 빠지지 않고 나온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 근대 서사 문학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주인공은 육체를 욕망하고, 또 육체는 욕망 충족, 권력, 의미의 열쇠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주인공에게 있어 육체는 궁극적인 선이 된다. 책읽기의 경우, 육체와 육체의 비밀을 알고자 하는 욕망은 텍스트의 상징적 체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즉 지식, 쾌락, 의미 창조의 열쇠가 된다. 말하자면 육체에 대한 욕망은 텍스트의 상징적 체계의 본질에 다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듯 보인다. 그러므로 이야기와 서술의 내재적 원동력으로서의 서사적 욕망은 육체에 대한 지식과 소유를 추구한다. 서사물은 그러한 육체를 기호화하려고 한다. 즉 언어적, 서술적 기호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35

 

# 물론 응시는 매우 남근 숭배적이다. 왜냐하면 서양문학(그리고 철학과 예술) 전통은 주로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는 것을 표현해왔기 때문이다. 37

 

# 우리는 혼자,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소설을 읽는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소설의 경우 많은 부수가 인쇄되고, 또한 책을 입수한 경위야 어떻든 책을 읽는 동안 만큼은 책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게 된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사적 소비는 현대 출판 제도에 의해 책이 대중적으로 유통됨으로써 더욱 활발해졌다. 여기서 우리는 소설의 대두라는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역설을 생각할 수 있다. 즉 독서의 사적 소비를 가능케 한 소설 장르는 역설적이게도 제작과 배포 과정에 있어 당시 태동기에 있던 자본주의에 의해 도입된 대량 생산, 복제, 유통 제도를 통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적 경험으로서의 책읽기에 대응되어 나타난 것이 사적인 글쓰기였다. 이처럼 사적으로 글을 쓸 경우 작가는 이야기꾼, 음유 시인, 극작가들과 달리 청중들로부터 아무런 즉각적 반응도 얻을 수 없다. 인류학자, 언어학자들에 의하면 언어의 의미는 그것을 쓸 때의 상황에 크게 좌우된다고 한다. 그러나 글쓰기, 그중에도 특히 인쇄에 의해 복제된 글쓰기는 작가에게서 떨어져나와 결국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 ‘자율적 담론’을 창조하게 되었다. 소설의 독자와 마찬가지로 소설가는 사실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데 있어 직접 독자에게 확인할 수가 없게 되어 문맥 없는 담론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적 생활이란 한편으로는 고립을 뜻하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이 점을 “소설 독자는....다른 어떤 독자들보다도 고립되어 있다.”고 표현하였다. 이처럼 고독하고 고림된 독서인 까닭에 소설 읽기는 문학적인 경험 중 가장 내밀한 것이 된다. 또한 배우나 이야기꾼이라는 매개체가 없기 때문에 소설의 독자는 등장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정서적 친밀감을 느낀다. 74

 

# 미덕의 공화국(프랑스)에서 여성이 공적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여성의 미덕은 가정적, 사적인 것이었고 여성은 결코 나서서 설쳐대지 말아야 했다. 우트람이 지적하였듯이 “남성들이 군중 앞에 나서면 정치가가 되지만 여성들이 군중 앞에 나서면 창녀 취급을 받았다.” 126

 

# “모든 광신자들이 그렇듯 코랄리도 자기 우상을 장식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녀는 사랑하는 그녀의 시인에게 우아한 남자가 갖추어야 할 우아한 옷차림에 어울릴 소품을 사주느라 파산할 지경에 이른다.” 발자크 『고급 매춘부의 영화와 비참』중. 143.

 

# 이 전통에 따르면 이러한 남근적 자국 자신과 자기 육체를 완전히 주려는 욕망, 즉 남성의 욕망에 자신을 노예처럼 종속시킴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여성의 심리와 일치한다. 156.

 

# 바르트는 특히 『텍스트의 쾌락』에서 서술적 드러냄이 내포하고 있는 물신적 성격을 지적하였다. “우리 육체 중에서 가장 에로틱한 부분은 바론 ‘옷 사이로 드러난 부분’이 아니겠는가?” 210.

 

# 완전한 지식은 탐구자를 눈멀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신화 속의 극단적인 보기일 뿐이다. 실제 현실에 있어 우리는 결코 완전하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전체가 아닌 부분만으로, 또한 몇몇 계시적 순간들과 옷을 벗는 순간들, 그리고 베일 사이로 보이는 틈새만으로 만족하여야 한다. 245.

 

# 『에로티시즘』을 쓴 조르주 바타유에게 있어 에로틱함이란 본래 터부와 제한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인간은 원래 ‘단절된’ 존재, 즉 타인들의 육체가 그들에게 닫혀 있기 때문에 타인과 깊이 교제할 수 없는 유한하고 폐쇄적인 존재이다. 에로틱한 만남을 할 때 순간적이나마 단절과 유한성이 깨진다. 5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검은 미술관 - 미술이 개인과 사회에 던지는 불편한 질문들
이유리 지음 / 아트북스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트북스.

  

    제목이 특이하다. 검은 미술관이라니. 요즘 자꾸 제목에 마음이 끌린다. 어느 책에서 인상 깊은 그림을 봤는데 뒤에 참고 문헌을 보니 『검은 미술관』에서 인용한 것이기에 읽기 시작한 책이다. 책에 실린 대부분의 그림들은 어둡고, 잔혹하고, 반항적이다. 작가는 그 그림이 그려진 배경과 이유를 쉽고 재밌게 설명해준다. 페이지가 쑥쑥 넘어간다.

    새로운 화가의 그림들도 만났다. 까미유 클로델이 로댕 때문에 희생당한 건 알았지만, 로댕이 로즈라는 애인과 바람을 피우고, 결국 클로델을 떠났다는 건 몰랐다.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클로델. 프리다 칼로와 다를 바가 없구나. 오스트리아 화가 율리우스 클링어(1876-1942)의 그림 <살로메 1909> 그림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포르투갈의 화가 파울라 레고(1935-)의 <가족 1988> 연작 시리즈도 인상깊었다. 남편을 20년간 병수발 하느라 몸과 마음이 지쳐버린 작가의 심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 묶여버린 그녀. 남편을 개로 묘사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였지만 현실에서는 남편이 죽을 때까지 정성을 다해 돌보았다고 한다.

    슬로베니아의 화가 조란 무시치(1909-2005)의 작품 <우리가 마지막이 아니다 1971>은 한 남자가 입을 벌리고 탄식하는 장면이다. 그림은 온통 혼탁하고 우울한 잿빛으로 가득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수용소에 끌려갔던 그는 기억하기도 싫은 그때를 떠올리며 그림을 그렸다. 여전히 세계 한쪽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자본주의가 인간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상황을 보며 그는 말하고 있다. 우리가 끝이 아니라고. 한효석 화가의 작품 <감추어져 있어야만 했는데 드러나고 만 어떤 것들에 대하여 2007-08>은 섬뜩하다. 그의 그림에서 여성의 얼굴은 살가죽이 벗겨져 있다. 작가의 다른 그림들도 다 이런 식이며, 작품 모델은 여자나 아이, 외국인 등 한국 사회의 소수자들이다. 작가는 우리에게 껍데기 한 꺼풀만 벗기면 당신과 내가 다른 것이 무엇이 있는가? 묻고 있다. 독일의 화가 게오르게 그로츠(1893-1959)의 작품 <생일파티 1923>는 독일의 정치인, 성직자들을 유쾌하게 비꼬고 있는 그림이다. 희화화된 인물들이 우스꽝스럽다. 모처럼 마음 편히 읽은 책이다.

 

# 베이컨은 “푸줏간에 갈 때면 나는 언제나 놀란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고깃덩어리가 놓여 있으니 말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6.

 

# 남성이 미를 승인한다면 여성은 미를 승인받는다. 93

 

# 한국의 여성 작가 고등어(1984-)는 여성들이 자기만의 언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여성들이 남성보다 먹는 것이나 몸에 민감한 것은 욕구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여성들이 생각이나 내면을 표현할 마땅한 수단이나 방법이 없기에, 먹거나 먹지 않은 행위에 그다지도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 그 죽음의 불안은 삶에서 시시각각 우리를 옥죈다. 그 불안을 잊기 위해 현대인들은 순간순간 뭔가를 수집한다. 드라마를 보며 위장된 해피엔드의 삶을 모으고, 술을 마시며 거짓 슬픔의 치료제를 모으고, 농담을 하며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모은다. 그리고 혼자일 때 자신에 대한 남들의 견해를 곱씹어 모은다.....열정에 사로잡히는 건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 심장이 뛴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본능이다. 그런데 그 본능을 현대인들은 모두 소비로 해결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화의 위치 - 탈식민주의 문화이론, 수정판
호미 바바 지음, 나병철 옮김 / 소명출판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병철 역.

 

   호미바바. 한국식으로 이름을 부르면, 꽤 독특한 느낌이다. 처음 작가를 알게 되었을 때이름 때문에 이유 없이 호감이 갔다. 그러고 보면 이름은 꽤 중요한 것이군. 이름에 비해 책의 제목은 정말 호감이 가지 않는다. 문화의 위치라니, 제목만 놓고 보면 역사의 흐름에 서 서양 중심의 문화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여겨져 왔고, 동양, 아프리카, 캐리브해 연안 등의 문화는 낮다고 여겨졌으니 그렇다면 저자는 이것에 대해 비평하는 것이겠군 정도의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목차를 보니 식민주의 담론, 근대국가의 한계 영역, 탈식민주의 등의 단어가 보인다. 갈수록 호감이 가지 않는다. 프란츠 파농이나 아렌트 등의 단어가 살짝 끌리긴 하나 썩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책장을 펼친다.

   호미 바바는 문화이론 연구의 권위자로 학계에서는 대부분 알 것이다. 그의 탈식민주의 문화이론은 매우 유명하나, 현대에 들어 바바가 계급에 관해서만 이야기했지 젠더 문제는 다루지 않았다고 하여 스피박 등 페미니스트들에게 비판을 듣고 있다고 한다. 제 3세계 여성은 외부와 내부 모두에게 희생자가 되는 이중 식민지화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여성들은 집안에서도 남성의 권위에 복종해야 되는 위치에 놓여 있으니.

    바바의 양가성(혼성성) 개념도 나온다. 서구의 식민주의적 시선은 피식민자(혹은 이주민)에게 오리엔탈리즘적인 정체성을 부여하려 한다. M.Butterfly에서 서양 남자 주인공처럼. 그러나 피식민자의 진정한 정체성은 그런 시선에 의해 결코 ‘보여질 수 없으며’ 실종된 인격이나 탈락된 정체성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피식민자의 눈은 식민주의적 시선을 혼란시키는 ‘응시’로 되돌아 오며, 이 시선은 ‘양가적으로’ 분열될 수밖에 없다. (M.Butterfly의 남자 주인공이 감옥에서 연기를 하며 자살을 하는 장면만 보더라도) 양가성의 순간은 피식민자(타자)를 서구의 시선에 가두려는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이며, 바로 그 분열의 틈새에서 타자의 저항의 계기가 만들어진다. 여기서 바바가 말하는 ‘3의 공간’이 나오는데 이 공간은 중심과 주변이 겹쳐지는 잡종성과 혼합주의의 공간이다.

   열심히 읽으려고 노력은 했으나,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많았다. 라깡과 데리다와 벤자민이 툭툭 나온다. 어쩔 수 있나. 그냥 넘어가야지. 지금은 탈식민주의 시대라고 말하지만 글쎄. 자본주의로 인해 오히려 예전보다 더 식민주의적 세계가 형성된 것 같다. 아시아 여성으로써 바라보는 이 세상은, 아직 갈 길이 멀다.

 

# 문화의 문제를 어떤 넘어선 것의 영역에 위치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수사학이다.

 

# 이론은 어쩔 수 없이 사회, 문화적으로 특권하된 엘리트적인 언어라는 유해하고 자기패배적인 가정이 있다.

 

#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의 내용을 환상, 상상적 글쓰기, 본질적 관념들의 무의식적 저장소 같은 것으로 인식한다.

 

# 번역은 문화적 의사소통의 수행적 본질이다. 그것은 놓여있는 언어라기보다는 발현하는 언어이다.

 

# 모방에서는 동일성과 의미의 재현이 환유의 축을 따라 재분절된다. 라캉이 말했듯이 모방은 위장과 같은 것이며, 그것은 차이를 억누르는 조화가 아니라 현존을 부분적 환유적으로 드러내어 현존을 지키면서 그와 구분되는 어떤 닮음의 형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