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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며칠 전 오랫동안 문학 비평을 공부하신 분께 여쭤보았다.
어떤 작품을 좋아하세요? 음, 글쎄. 롤리타? 왜요? 음, 문장이 아름다워서.
그 한 마디 때문에 500쪽에 다다르는 두꺼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당장 읽고 정리해야 할 책들이 있었지만, 매우 중요한 일들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혹은 너무 강렬했다. 러시아인인 작가가 미국으로 망명하여 영어로 작품을 썼기에 원서로 읽으면 최상이지만, 그럴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우선 읽고 좋으면 원서로 다시 읽자. 예전에 본 영화(롤리타)를 떠올려 보니 한 중년 남성이 어린 소녀에게 성욕을 느끼는 영화로만 기억이 남아 있기에 좋아봤자 얼마나 좋겠어 하는 심정이었다.
아, 그러나 ‘얼마나 좋겠어’는 곧 ‘이렇게 좋다니!’로 바뀌었다. 이것은 책이 아니다. 한 권의 시이다. 주인공 험버트가 롤리타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문장들은 성경의 아가서를 읽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롤리타의 나이가 12살이 아니었다면, 이 소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로맨스 소설로 뽑힐 것이다. 지인의 말이 맞았다. 문장은 아름답고 언어 유희는 뛰어나다.
주인공 험버트(일명 H.H)는 어렸을 적 첫사랑 애너벨을 병으로 잃게 된다. 그리고 어른이 된 후 우연히 하숙하게 된 집에서 롤리타를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서 애너벨의 상실을 채우려고 한다. 험버트는 소아성애자인데 그의 마음을 흔드는 소녀들을 ‘님펫’이라고 부른다. 님펫의 자격조건은 아홉 살에서 열네 살까지이며 그 나이가 지나면 님펫의 자격을 상실한다. 즉 험버트의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다. 험버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롤리타와 살기 원하기에 롤리타의 엄마와 결혼하여 의붓아버지가 된다. 험버트는 롤리타를 훔쳐보며 그녀를 찬양하는 일기를 쓰고, 어느 날 일기장을 발견한 롤리타의 엄마는 충격을 받아 울며 뛰쳐나가다가 차에 치여 죽는다. 뜻밖의 행운?을 갖게 된 험버트는 롤리타를 데리고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롤리타와 사랑을 나눈다. 그녀를 협박하고 회유하고 애걸하면서. 어린 롤리타는 상처받고, 피폐해지나 그에게 벗어날 수 없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다른 남자와 사라지고, 2년 후 험터트와 롤리타는 재회한다.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임신한 롤리타에게 그는 롤리타 엄마의 재산을 주고 떠난다.
소설의 구조는 독특하다. 험버트는 임신한 롤리타를 만나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들은 후 극자가 퀼티가 롤리타를 유혹해 타락시켰다고 생각하여 그를 찾아가 살해한다. 살해 혐의로 감옥에 갖힌 험버트는 ‘롤리타’라는 회고록을 쓰게 되고, 그 소설은 존 레이 박사에게 건내진다. 존 레이 박사는 서문에서 이 원고에 대해 간략한 정보를 소개한 후 소설이 시작된다. 따라서 험버트의 수기 <롤리타:어느 백인 홀아비의 고백>과 작가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같지만 다르다. 이 둘은 중첩되고 어긋난다. 우리는 험버트의 수기를 읽으며 의심한다. 화자의 말이 모두 사실일까? 믿을 수 있을까? 리얼리티와 픽션 사이에서의 선택.
작품 해설을 쓴 이현우 씨는 롤리타 자체가 ‘잃어버린 시간’의 은유라고 말한다. 님펫이 나이가 들면 님펫 자격을 상실하듯, <롤리타>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유년 시절에 대한 회환이고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소멸해가는 육체에 대해 생각하였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늙어가는 인간 육체의 유한함. 영화 <그레이트 뷰티>가 떠오른다. 우리의 ‘아름다운 시절’은 이미 지나갔을까?..
*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 17.
* 우리는 색마가 아닙니다! 우리는 유능한 군인들과 달리 강간을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비록 불행하지만 온순하고 신사적이며 강아지처럼 착한 눈매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어른들이 있는 곳에서는 자신의 충동을 억누르는 자제력을 지녔지만 님펫을 한 번 만져볼 수만 있다면 인생에서 몇 년이나 몇십 년쯤은 기꺼이 희생할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건대 우리는 결코 살인자가 아닙니다. 시인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143
* 커피를 그녀 앞에 가져다놓고 아침 의무를 끝내기 전에는 안 주겠다고 말할 때면 얼마나 즐거웠던가. 나는 정말 사려깊은 친구처럼, 정말 자상한 아빠처럼, 정말 유능한 소아과의사처럼 이 갈색머리 소녀의 육체를 구석구석 정성껏 사랑해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안팎을 훌렁 뒤짚어놓고 롤리타의 어린 자궁에도,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심장에도, 진줏빛 간에도, 모자반 허파에도, 귀여운 쌍둥이 콩팥에도 탐욕스럽게 입맞춤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자연의 섭리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263.
* 나의 롤리타는 충분히 탄력 있게 서브 동작을 시작하면서 왼쪽 무릎을 구부려 높이 드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때 땅을 디딘 발끝과 싱싱한 겨드랑이와 빛나는 팔과 한껏 뒤로 젖힌 라켓 등이 햇빛 아래서 절묘한 균형을 이룬 채 한순간 그대로 멈추었고, 그녀가 반짝이는 이를 드러내고 방긋 웃으며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작은 천체 하나가 높이 떠 있었는데, 그곳이야말로 바야흐로 황금빛 채찍을 휘둘러 청아하고 낭랑한 소리를 내면서 강타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그녀가 창조한 힘차고 우아한 우주의 정점이었다. 369
* 지금 나는 들소와 천사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밀을, 예언적인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4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