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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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오랫동안 문학 비평을 공부하신 분께 여쭤보았다.

어떤 작품을 좋아하세요? 음, 글쎄. 롤리타? 왜요? 음, 문장이 아름다워서.

그 한 마디 때문에 500쪽에 다다르는 두꺼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당장 읽고 정리해야 할 책들이 있었지만, 매우 중요한 일들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혹은 너무 강렬했다. 러시아인인 작가가 미국으로 망명하여 영어로 작품을 썼기에 원서로 읽으면 최상이지만, 그럴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우선 읽고 좋으면 원서로 다시 읽자. 예전에 본 영화(롤리타)를 떠올려 보니 한 중년 남성이 어린 소녀에게 성욕을 느끼는 영화로만 기억이 남아 있기에 좋아봤자 얼마나 좋겠어 하는 심정이었다.

  아, 그러나 ‘얼마나 좋겠어’는 곧 ‘이렇게 좋다니!’로 바뀌었다. 이것은 책이 아니다. 한 권의 시이다. 주인공 험버트가 롤리타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문장들은 성경의 아가서를 읽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롤리타의 나이가 12살이 아니었다면, 이 소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로맨스 소설로 뽑힐 것이다. 지인의 말이 맞았다. 문장은 아름답고 언어 유희는 뛰어나다.

  주인공 험버트(일명 H.H)는 어렸을 적 첫사랑 애너벨을 병으로 잃게 된다. 그리고 어른이 된 후 우연히 하숙하게 된 집에서 롤리타를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서 애너벨의 상실을 채우려고 한다. 험버트는 소아성애자인데 그의 마음을 흔드는 소녀들을 ‘님펫’이라고 부른다. 님펫의 자격조건은 아홉 살에서 열네 살까지이며 그 나이가 지나면 님펫의 자격을 상실한다. 즉 험버트의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다. 험버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롤리타와 살기 원하기에 롤리타의 엄마와 결혼하여 의붓아버지가 된다. 험버트는 롤리타를 훔쳐보며 그녀를 찬양하는 일기를 쓰고, 어느 날 일기장을 발견한 롤리타의 엄마는 충격을 받아 울며 뛰쳐나가다가 차에 치여 죽는다. 뜻밖의 행운?을 갖게 된 험버트는 롤리타를 데리고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롤리타와 사랑을 나눈다. 그녀를 협박하고 회유하고 애걸하면서. 어린 롤리타는 상처받고, 피폐해지나 그에게 벗어날 수 없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다른 남자와 사라지고, 2년 후 험터트와 롤리타는 재회한다.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임신한 롤리타에게 그는 롤리타 엄마의 재산을 주고 떠난다.

  소설의 구조는 독특하다. 험버트는 임신한 롤리타를 만나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들은 후 극자가 퀼티가 롤리타를 유혹해 타락시켰다고 생각하여 그를 찾아가 살해한다. 살해 혐의로 감옥에 갖힌 험버트는 ‘롤리타’라는 회고록을 쓰게 되고, 그 소설은 존 레이 박사에게 건내진다. 존 레이 박사는 서문에서 이 원고에 대해 간략한 정보를 소개한 후 소설이 시작된다. 따라서 험버트의 수기 <롤리타:어느 백인 홀아비의 고백>과 작가 나보코프의 <롤리타>는 같지만 다르다. 이 둘은 중첩되고 어긋난다. 우리는 험버트의 수기를 읽으며 의심한다. 화자의 말이 모두 사실일까? 믿을 수 있을까? 리얼리티와 픽션 사이에서의 선택.

  작품 해설을 쓴 이현우 씨는 롤리타 자체가 ‘잃어버린 시간’의 은유라고 말한다. 님펫이 나이가 들면 님펫 자격을 상실하듯, <롤리타>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유년 시절에 대한 회환이고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소멸해가는 육체에 대해 생각하였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늙어가는 인간 육체의 유한함. 영화 <그레이트 뷰티>가 떠오른다. 우리의 ‘아름다운 시절’은 이미 지나갔을까?..

 

 

*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 17.

 

* 우리는 색마가 아닙니다! 우리는 유능한 군인들과 달리 강간을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비록 불행하지만 온순하고 신사적이며 강아지처럼 착한 눈매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어른들이 있는 곳에서는 자신의 충동을 억누르는 자제력을 지녔지만 님펫을 한 번 만져볼 수만 있다면 인생에서 몇 년이나 몇십 년쯤은 기꺼이 희생할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건대 우리는 결코 살인자가 아닙니다. 시인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143

 

* 커피를 그녀 앞에 가져다놓고 아침 의무를 끝내기 전에는 안 주겠다고 말할 때면 얼마나 즐거웠던가. 나는 정말 사려깊은 친구처럼, 정말 자상한 아빠처럼, 정말 유능한 소아과의사처럼 이 갈색머리 소녀의 육체를 구석구석 정성껏 사랑해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안팎을 훌렁 뒤짚어놓고 롤리타의 어린 자궁에도,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심장에도, 진줏빛 간에도, 모자반 허파에도, 귀여운 쌍둥이 콩팥에도 탐욕스럽게 입맞춤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자연의 섭리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263.

 

* 나의 롤리타는 충분히 탄력 있게 서브 동작을 시작하면서 왼쪽 무릎을 구부려 높이 드는 버릇이 있었는데, 이때 땅을 디딘 발끝과 싱싱한 겨드랑이와 빛나는 팔과 한껏 뒤로 젖힌 라켓 등이 햇빛 아래서 절묘한 균형을 이룬 채 한순간 그대로 멈추었고, 그녀가 반짝이는 이를 드러내고 방긋 웃으며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작은 천체 하나가 높이 떠 있었는데, 그곳이야말로 바야흐로 황금빛 채찍을 휘둘러 청아하고 낭랑한 소리를 내면서 강타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그녀가 창조한 힘차고 우아한 우주의 정점이었다. 369

 

* 지금 나는 들소와 천사를,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물감의 비밀을, 예언적인 소네트를,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떠올린다. 너와 내가 함께 불멸을 누리는 길은 이것뿐이구나, 나의 롤리타. 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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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0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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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멋진 책을 이제야 읽다니. 왜 아무도 이 책을 권하지 않았던가 라고 항변하고 싶지만 울스턴 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어떤 내용인지 알면서도 미루고 미뤄 아직까지 제대로 읽지 않았으니 할 말이 없다. 울프의 소설 중 <댈러웨이 부인>과 <제이콥의 방>을 읽으며 그 난해함과 지루함 덕분에 울프의 다른 책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는데 이 책은 정말이지 소설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강연을 글로 옮겼기에 다를 수 밖에) 읽으면서 이게 정말 울프가 쓴 거 맞아 의심이 들 정도이다. 우선 재밌다. 그녀의 수준높은 유머가 곳곳에 숨어 있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또한 울프가 글에도 언급했듯이 책을 읽고 나면 시야가 한층 넓어진다.

   이 글은 한 여자 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을 작가가 정리하여 6개의 장으로 만든 글이다. 19세기를 살고 있는 작가는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강연 청탁을 받고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생각하면서 대학 주변을 거닌다. 그러다 도서관에 자료를 찾으러 들어가려는데 문 밖에서 한 신사가 여성이 도서관에 들어가려면 대학 연구원을 동반하거나 소개장을 소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작가의 탐구가 시작된다. 왜 여성은 역사에서 소외받아야만 하는지, 왜 여성은 가난해야 하는지, 왜 훌륭한 여성 작가는 나올 수가 없는지. 울프의 글을 읽다보면 같은 여성으로써 공감이 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남녀가 평등하다고 믿는 21세기를 사는 현재의 여성으로써도 이토록 화가 나는데 19세기를 살았던 여성들은 오죽했을까. 특히 영민하지만 자신의 예술적 자질을 발휘하지 못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마음은 얼마나 분노와 아픔으로 가득 찼을까. 울프는 말한다. 여성이 일 년에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이 있다면, 그렇다면 여성도 셰익스피어 같은 글을 쓸 수 있다고.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울프는 내가 알던 난해하고 어렵던 울프가 아니었다. 예전에 한 작가가 어느 글에서 자신에게 딸이 있다면 <보바리 부인>을 꼭 읽힐 거라고 이야기했는데, 나는 꼭 이 책을 딸에게 읽으라고 권할 것이다. 맨 처음 언급한 두 권의 책도 함께. 왜냐하면 아직도 울프가 저항했던 수많은 분야들이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실상 마음과 몸, 두뇌가 함께 결합되어 있고, 앞으로 백만 년이나 지나면 모를까 각각의 칸막이 속에 격리 수용된 것이 아니기에, 훌륭한 저녁 식사는 훌륭한 대화를 나누는 데 대단히 중요한 요인이지요. 저녁 식사를 잘 하지 못하면 사색을 잘할 수 없고 사랑도 잘할 수 없으며 잠도 잘 오지 않습니다. 32

 

* 여성은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 크기의 두 배로 확대 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지닌 거울 노릇을 해 왔습니다........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폴레옹과 무솔리니는 여성의 열등함을 아주 힘주어 강조합니다. 만일 여성이 열등하지 않다면 거울은 남성을 확대시키기를 그만둘 테니까요. 56-7

 

* 왜냐하면 걸작이란 혼자서 외톨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일단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생각한 결과입니다.....지금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어 있는 에이프라 벤의 무덤에 모든 여성들은 꽃을 바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성들에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준 사람이 그녀였으니까요. 101.

 

* 하지만 전반적으로 만연되어 있는 것은 남성의 가치입니다. 조야하게 말하자면, 축구와 스포츠는 중요합니다. 반면 유행의 숭배와 옷의 구입은 하찮은 일입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삶에서 픽션으로 불가피하게 전달됩니다. 이것은 전쟁을 다루므로 중요한 책이라고 비평가들은 평가합니다. 이 책은 응접실에 앉은 여성의 감정을 다루고 있으므로 보잘것없습니다. 전쟁터에서의 한 장면은 상점에서의 한 장면보다 더 중요하지요. 도처에서 더욱 미묘하게 가치의 차별이 지속됩니다. 113.

 

* 여성은 자기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예술로서 글을 쓰기 시작하겠지요. 122

 

* “클로이는 올리비아를 좋아했다”(마리 카마이클 <사랑의 창조> 소설 중) 나는 이 문장을 읽었지요. 그리고 그곳에 거대한 변화가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아마 문학사상 처음으로 클로이는 올리비아를 좋아했을 것입니다.....문학 작품에 나타난 여성들 간의 관계는 문학 작품에 전시된 빛나는 허구의 여성들을 재빨리 회상하면서 생각하건대, 너무나 단순합니다. 아주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고 시도조차 되지 않았습니다.......그러나 거의 예외없이 여성은 남성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만 제시됩니다.

 

* <리어 왕> <엠마> 또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를 읽으며 나는 최소한 그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이런 책들을 읽고 나면 감각기관이 신기한 개안수술을 받은 듯 그 이후로는 사물이 더욱 강렬하게 보이지요. 세상은 그 덮개를 벗고 더욱 강렬한 삶을 드러내는 듯합니다. 166

 

* 나는 그저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고 간단하게 그리고 평범하게 중얼거릴 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겠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오 하고 나는 말할 겁니다. 그 말을 고귀하게 들리게끔 표현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오로지 사물을 그 자체로 생각하십시오.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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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같이 돌자 동시 한 바퀴 - 이안 동시 평론집
이안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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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와. 동시 평론집이다. 그렇다면 동시도 읽고 풀이도 읽고. 이렇게 좋을 수가. 평론가가 모아놓은 좋은 동시들을 차려놓은 밥상처럼 먹기가 하면 된다. 게다가 영시도, 한시도 아닌 동시가 아닌가. 동시 평론집은 처음이라 기대를 잔뜩 하고 첫 장을 넘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처음부터 신선하고 상큼한 동시들이 툭툭 놓여 있다. 하지만 밝고 명랑만 시들만 있는 건 아니다. 사회 비판, 저항, 전복, 성 담론 들도 충분히 동시의 소재가 될 수 있다. 굉장하다.

  며칠 굶은 사람마냥 허겁지겁 책장을 넘긴다. 어른?이 되면서부터 동시를 접할 기회가 자주 없기에 이런 책은 반갑기만 하다. 동시 분석을 읽기 귀찮다고? 안 읽어도 상관없다. 여러 말들 다 빼고 오로지 동시들만 읽어도 이 책은 반짝반짝 빛난다. 감기에 걸려 목도 따끔거리고, 콧물도 나왔지만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동시가 너무 예뻐서. 동시가 너무 깊어서. 동시가 너무 아름다워서. 마음이 조금 착해진 기분이 든다. 아, 참으로 좋구나.

 

* 까만 밤 -정유경

 

빨강, 노랑, 파랑이

폭 껴안아

검정이 되었대.

 

깜깜한

오늘 이 밤엔

무엇, 무엇, 무엇이

꼬옥

껴안고 있을까?

 

* Z교시 -신민규

 

식물은 뿌리, 줄기, 잎, 꽃, 열매로 이뤄져 있다

뿌리는 식물체를 지지하고 물과 양분을 꾸벅한다

줄기는 꾸벅을 지탱하고 물과 꾸벅이 이동하는 꾸벅

잎은 꾸벅을 이용하여 꾸벅을 꾸벅

꾸벅은 꾸벅과 꾸벅이 꾸벅

꾸벅 꾸벅 꾸벅 꾸벅 신민규 뒤로 나가! 번쩍

 

* 염소 -정완영

 

염소는 수염도 꼬리도 쬐꼼 달고 왔습니다

울음도 염주알 굴리듯 새까맣게 굴립니다

똥조차 분꽃씨 흘리듯 동글동글 흘립니다.

 

* 소풍 가는 길에서 -안진영

 

너는 왜 자꾸 거기로 가는데?

거기가 길이야?

멀쩡한 길 놔두고 왜 하필이면 그 길로 가니?

 

그냥요.

 

그냥 한번 걸어보고 싶어서요.

 

* 아무리 -남호섭

 

나무 위에 사는

나무늘보가 열심히 나뭇가지를 타면

한 시간에 겨우 구백 미터를 간다.

 

달팽이는

한 시간에 일 미터도 못 간다.

 

아무리 경쟁을 붙여도 소용없다.

자기 속도를 넘길 때는

높은 데서 갑자기

툭,

떨어질 때뿐이다.

 

* 달팽이 -송찬호

 

호박 덩굴 아랫길에서

달팽이를 만난다

둥근 집 등에 지고 오늘 이사 가는구나?

아니요, 학교 가는 길인데요

 

나팔꽃 아랫길에서도

달팽이를 만난다

학교 가는구나?

아니요, 학원 가는 길인데요

 

토란잎 아랫길에서

달팽이를 또 만난다

학교 갔다 와서 학원 가는구나?

아니요, 오늘은 이사 가는 길인데요

 

* 운명 -김환영

 

꼬막 조개 속에

꼬막 새우 한 마리가 들어가 앉았네

 

“야!

무슨 이야기 듣다가

여기까지 따라왔어?“

 

* 이슬 -유강희

 

7층 풀잎 끝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천국으로 갔겠지

 

* 집게 -함민복

 

집게야

너는 집이 있어 좋겠구나

 

그렇지도 않아요

 

우린 외식도 못하고

외박도 못해요

 

* 하루살이 -정유경

 

어느 날 하루살이들은 생각했네.

 

‘어차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하루뿐이라면

밥 먹는 시간도 아껴야겠어.

말하는 시간도 아껴야겠어.‘

 

그래서 하루살이들은

밥도 먹지 않고

말도 하지 않고

무얼 할까 고민도 더는 하지 않고

 

대신 아름다운 하늘을 날기로 했네.

대신 아름다운 사랑을 찾기로 했네.

 

* 니 맘대로 써 -백창우

 

니 맘대로 써

니가 쓰고 싶은 걸

니 맘대로 써

니 말로 말야

니만 좋으면 돼

시 쓰면서 눈치 볼래면

뭐 하러 시를 써

세상에 시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니가 아무리 잘 써 봐

그래도 다 맘에 들어 하진 않아

그냥 니 맘에 들면 돼

니 맘에도 안 든다고?

그럼, 버려

 

* 해바라기씨 -송찬호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를 보는데

콧수염을 기른 감독이

엄청나게

해바라기씨를

까먹어 댄다

 

엄청 초조한가 보다

저렇게 쉬지 않고

까먹어 대면

해바라기씨도 엄청 들겠다

 

창문 너머

텔레비전을 훔쳐보던

우리 집 해바라기들도

엄청 초조한가 보다

 

해바라기씨가

까맣게

다 익었다

 

* 소나기 -안도현

 

집으로

뛰는

아이들

 

아이들보다

먼저

뛰는

 

소보다

앞서

뛰는

빗줄기

 

* 호주머니 -윤동주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 자전거 1 -강정규

 

뒷바퀴가

끈질기게

쫓아온다

 

* 민들레꽃의 하루 -안진영

 

아침에 봉오리를 펼치며, 오늘 하루 행복할 거야

저녁에 봉오리를 오므리며, 오늘 하루 행복했어

 

* 응 -안진영

 

해 질 무렵이면

서쪽 하늘에 해가 하나 발그레

바다에도 해가 하나 발그레

수평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 서로 -최승호

 

서로 쳐다보는 두꺼비

서로 아무 말이 없네

서로 쳐다보는 두꺼비

서로 눈만 껌뻑거리네

서로 모르는 사이인가?

 

* 어이없는 놈 -김개미

 

102호에 다섯 살짜리 동생이 살고 있거든

오늘 아침 귀엽다고 말해 줬더니

자기는 귀엽지 않다는 거야

자기는 아주 멋지다는 거야

 

키가 많이 컸다고 말해줬더니

자기는 많이 크지 않았다는 거야

자기는 원래부터 컸다는 거야

 

말이 많이 늘었다고 말해 줬더니

지금은 별로라는 거야

옛날엔 더 잘했다는 거야

 

102호에 다섯 살짜리 동생이 살고 있거든

자전거 가르쳐 줄까 물어봤더니

자기는 필요 없다는 거야

자기는 세발자전거를 나보다 더 잘 탄다는 거야

 

* 지는 해 -정유경

 

친구랑 싸워 진 날 저녁

지는 해를 보았네.

 

나는 분한데

붉게

지는 해는 아름다웠네.

 

지는 해는 왜

아름답냐?

 

지는 해 앞에 멈춰 서서

나는 생각했네.

 

지는 것에 대해서.

 

* 누가 더 섭섭했을까 -윤제림

 

한 골짜기에 피어 있는 양지꽃과 노랑제비꽃이

한 소년을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소년이 양지꽃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

“ 안녕! 내가 좋아하는

노랑제비꽃!“

 

양지꽃은 온종일 섭섭했습니다

노랑제비꽃도 온종일 섭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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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상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 상실에 대한 153일의 사유
량원다오 지음, 김태성 옮김 / 흐름출판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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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 작가이다. 낯선 이름이라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제목이 눈길을 끈다. 저자 소개를 보니 홍콩에서는 꽤 유명한 작가라고 한다. 치유에 관한 글인가 싶어 슬쩍 들춰봤는데 콘래드와 에드워드 호퍼가 언급된다. 음, 관심이 가는군. 이 책은 153일 동안 작가가 사랑의 상실에 관해 매일매일 쓴 일기체 형식의 글을 모은 것이다. 원래는 신문의 칼럼에 연재되었던 것이라고 적혀있다. 작가의 사적인 목소리이기에 글들은 무겁지 않다. 어느 쪽을 펼쳐 읽어도 상관없다. 읽다보면 작가의 개인사까지 관심을 가지고 읽어야 하나 의문이 드는 부분도 생기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 하는 생각도 든다. 사실 이 작가를 잘 알고 있었더라면 그의 사적 이야기도 무척 관심을 갖고 읽었을 것 같다. 무더운 여름 가만히 앉아 한가로이 읽기에 좋다. 음악도 듣고 차도 마시면서 말이다.

 

*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우리는 분류할 수 없는, 심지어 이상형에서 벗어나는 그 특성으로 강하게 우리를 끌어당기는 사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놀라운 순수함이다. 순수함은 뜻밖에, 그리고 갑자기 나타나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서술하거나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어떤 유형으로도 분류하지 못한다. 언어는 항상 뭔가를 분류하기 때문이다. 문자 언어에 색을 입힐 수 없듯이, 아토포스(분류되지 않는 것)는 이처럼 분류될 수 없는 순수함이다. 20.

 

* 모리스 블랑쇼가 말했듯이 작품의 고독은 가장 근본적인 고독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중단, 나와 언어가 하나로 결합된 연계를 중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소에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고, 언어가 자신을 표현해주리라고 굳게 믿는다. 그러나 진정한 작품은 어떤 것도 표현하지 않고 어떤 것도 소통하지 않는다. 병속에 담긴 편지처럼 완성되는 그 순간 작자와의 관계는 단절되고 독자들과의 관계도 단절된다. 존재하는 동시에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97.

 

* 덕분에 그(헨리 제임스)는 진정으로 고독을 즐길 수 있었다.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사랑도 좋아한다. 사랑의 상태에 있을 때만 가장 깊이 고독을 만날 수 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은 이루지 말아야 한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혼자 살면 진정한 고독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의 마음과 자신의 작은 방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고 해도 결국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때부터 고독은 더 완전하고 아름다워진다. 132.

 

* 전화도 없고 이메일도 없고 휴대전화는 더더욱 없던 시대에 우리는 편지를 썼다. 편지를 통해 시공의 광활함을 느꼈다. 시공의 거리와 예측 불가능성이 전부 한 통의 편지에 체현되어 있었다. 나는 ‘그’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사실 그가 이미 날 미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편지를 쓴 후에, 또는 편지를 부치는 그 순간에, 그것도 아니면 편지가 바다를 건너 내 테이블에 도착하기 전에 그는 이미 날 미워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의 목숨도 한순간에 사라지는데 사람의 감정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편지를 읽는 그 순간에 그의 감정이 어떤 상태로 변해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나는 네가 밉다”라는 문구를 읽을 때 나는 그가 지금 나를 미워한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나를 미워했던 기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편지는 일종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우편배달부가 필요하던 시대에 우리는 편지를 읽으면서 적어도 잠재의식 속에서 이 점을 고려했다. 시간과 시간 사이의 변화가 열독의 배경이자 맥락이 되었다.

  편지를 읽는 것은 수수께끼를 푸는 일이기도 했다. 편지에 있는 모든 문자와 부호의 의미가 시간과 공간의 거리 안을 떠돌고, 우리는 이를 읽으면서 발신자가 이 편지를 쓰는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 문자들이 드러내는 감정을 발신자는 여전히 견지하고 있을까. 심지어 아직 살아있을까.

  만일 내가 답장을 한다면, 내가 그 순간의 생각과 느낌을 사실대로 기술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가 과거에 남긴 것에 대한 반응일 수밖에 없다. 그가 내 답장을 받으면 그가 읽게 되는 것 역시 과거의 메아리일 뿐이다. 이처럼 편지란 일종의 지연이자 돌아봄이다. 편지는 영원히 우리 두 사람의 ‘현재’를 따라잡지 못한다. 우리가 편지에서 읽는 현재는 전부 과거일 수밖에 없다. 328-9

 

* “우리 이제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라는 문자메세지를 받았다. 30초 후에 “하지만 나는 성실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을 거야.”라고 회신을 보냈다. 약 5초 뒤엔 그는 나의 회신을 읽게 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직접 전화로 했다면 우리는 35초를 절약하고 거의 실시간으로 뜻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실시간의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

  보행에서 마차로, 마차에서 철도로, 철도에서 비행기로 변천해오면서 우리는 공간을 암축했고, 이제 세상에는 ‘너무 멀리 떨어지 구석’이 없어졌다. 모든 위치가 사실은 동일한 위치인 셈이다. 기술이 모든 공간을 압축해버렸듯이 시간도 각종 기술과 기기에 의해 압축되었다.

  시간의 암축이란 교통과 통신에 필요한 시간이 짧아졌다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예컨대 과거 중국에서 미국으로 편지를 보내려면 일주일이 걸렸지만 지금은 5초면 해결된다. 이러한 시간의 암축은 생활 전체의 시제를 변화시킨다. 과거가 없어지고 현재만 남는다.

  과거에 편지를 한 통 읽는 것은 두 개의 시간점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편지를 쓰는 순간의 시간점과 편지를 읽는 순간의 시간점이다. 한 통의 편지는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횡단한다. 하지만 실시시간 통신 기술이 시간의 간격을 소멸시켜버렸다. 심지어 시간대의 틀을 허물어버렸다. 프랑스의 기술 사상가 파울 비릴리오는 이렇게 말했다.

“ 이런 사회는 미래도 없고 과거도 없는 사회다. 공간의 외연도 없고 시간의 확장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쪽과 저쪽이 밀집된 상태로 모든 것이 동시에 나타나는 사회나. 다시 말해서 전자 전송의 과정에서 세계 전체가 드러나는 사회다.”

  사랑은 원래 일종의 시간 현상이고 연애편지는 사랑의 가장 좋은 표징이다. 시간의 확장이 소멸되어 버렸는데, 어떻게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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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적 사유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 번역총서 10
마이크 크랭 & 나이절 스리프트 엮음, 최병두 옮김 / 에코리브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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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노라 하는 학자들이 모두 모였다. `공간`과 관련하여 다들 한마디씩 하고 있는데, 와우 다들 멋지신걸요! 여기서 `공간` 개념은 기본적으로 지리학적인 접근 방법이지만, 여러 글들을 읽다보면 다양한 형태의 `공간적 사유`들이 전진 전진. 가격이 저렴하진 않지만, 소장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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