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같이 돌자 동시 한 바퀴 - 이안 동시 평론집
이안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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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와. 동시 평론집이다. 그렇다면 동시도 읽고 풀이도 읽고. 이렇게 좋을 수가. 평론가가 모아놓은 좋은 동시들을 차려놓은 밥상처럼 먹기가 하면 된다. 게다가 영시도, 한시도 아닌 동시가 아닌가. 동시 평론집은 처음이라 기대를 잔뜩 하고 첫 장을 넘겼는데, 아니나 다를까 처음부터 신선하고 상큼한 동시들이 툭툭 놓여 있다. 하지만 밝고 명랑만 시들만 있는 건 아니다. 사회 비판, 저항, 전복, 성 담론 들도 충분히 동시의 소재가 될 수 있다. 굉장하다.

  며칠 굶은 사람마냥 허겁지겁 책장을 넘긴다. 어른?이 되면서부터 동시를 접할 기회가 자주 없기에 이런 책은 반갑기만 하다. 동시 분석을 읽기 귀찮다고? 안 읽어도 상관없다. 여러 말들 다 빼고 오로지 동시들만 읽어도 이 책은 반짝반짝 빛난다. 감기에 걸려 목도 따끔거리고, 콧물도 나왔지만 앉은 자리에서 다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동시가 너무 예뻐서. 동시가 너무 깊어서. 동시가 너무 아름다워서. 마음이 조금 착해진 기분이 든다. 아, 참으로 좋구나.

 

* 까만 밤 -정유경

 

빨강, 노랑, 파랑이

폭 껴안아

검정이 되었대.

 

깜깜한

오늘 이 밤엔

무엇, 무엇, 무엇이

꼬옥

껴안고 있을까?

 

* Z교시 -신민규

 

식물은 뿌리, 줄기, 잎, 꽃, 열매로 이뤄져 있다

뿌리는 식물체를 지지하고 물과 양분을 꾸벅한다

줄기는 꾸벅을 지탱하고 물과 꾸벅이 이동하는 꾸벅

잎은 꾸벅을 이용하여 꾸벅을 꾸벅

꾸벅은 꾸벅과 꾸벅이 꾸벅

꾸벅 꾸벅 꾸벅 꾸벅 신민규 뒤로 나가! 번쩍

 

* 염소 -정완영

 

염소는 수염도 꼬리도 쬐꼼 달고 왔습니다

울음도 염주알 굴리듯 새까맣게 굴립니다

똥조차 분꽃씨 흘리듯 동글동글 흘립니다.

 

* 소풍 가는 길에서 -안진영

 

너는 왜 자꾸 거기로 가는데?

거기가 길이야?

멀쩡한 길 놔두고 왜 하필이면 그 길로 가니?

 

그냥요.

 

그냥 한번 걸어보고 싶어서요.

 

* 아무리 -남호섭

 

나무 위에 사는

나무늘보가 열심히 나뭇가지를 타면

한 시간에 겨우 구백 미터를 간다.

 

달팽이는

한 시간에 일 미터도 못 간다.

 

아무리 경쟁을 붙여도 소용없다.

자기 속도를 넘길 때는

높은 데서 갑자기

툭,

떨어질 때뿐이다.

 

* 달팽이 -송찬호

 

호박 덩굴 아랫길에서

달팽이를 만난다

둥근 집 등에 지고 오늘 이사 가는구나?

아니요, 학교 가는 길인데요

 

나팔꽃 아랫길에서도

달팽이를 만난다

학교 가는구나?

아니요, 학원 가는 길인데요

 

토란잎 아랫길에서

달팽이를 또 만난다

학교 갔다 와서 학원 가는구나?

아니요, 오늘은 이사 가는 길인데요

 

* 운명 -김환영

 

꼬막 조개 속에

꼬막 새우 한 마리가 들어가 앉았네

 

“야!

무슨 이야기 듣다가

여기까지 따라왔어?“

 

* 이슬 -유강희

 

7층 풀잎 끝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천국으로 갔겠지

 

* 집게 -함민복

 

집게야

너는 집이 있어 좋겠구나

 

그렇지도 않아요

 

우린 외식도 못하고

외박도 못해요

 

* 하루살이 -정유경

 

어느 날 하루살이들은 생각했네.

 

‘어차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하루뿐이라면

밥 먹는 시간도 아껴야겠어.

말하는 시간도 아껴야겠어.‘

 

그래서 하루살이들은

밥도 먹지 않고

말도 하지 않고

무얼 할까 고민도 더는 하지 않고

 

대신 아름다운 하늘을 날기로 했네.

대신 아름다운 사랑을 찾기로 했네.

 

* 니 맘대로 써 -백창우

 

니 맘대로 써

니가 쓰고 싶은 걸

니 맘대로 써

니 말로 말야

니만 좋으면 돼

시 쓰면서 눈치 볼래면

뭐 하러 시를 써

세상에 시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니가 아무리 잘 써 봐

그래도 다 맘에 들어 하진 않아

그냥 니 맘에 들면 돼

니 맘에도 안 든다고?

그럼, 버려

 

* 해바라기씨 -송찬호

 

미국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를 보는데

콧수염을 기른 감독이

엄청나게

해바라기씨를

까먹어 댄다

 

엄청 초조한가 보다

저렇게 쉬지 않고

까먹어 대면

해바라기씨도 엄청 들겠다

 

창문 너머

텔레비전을 훔쳐보던

우리 집 해바라기들도

엄청 초조한가 보다

 

해바라기씨가

까맣게

다 익었다

 

* 소나기 -안도현

 

집으로

뛰는

아이들

 

아이들보다

먼저

뛰는

 

소보다

앞서

뛰는

빗줄기

 

* 호주머니 -윤동주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 자전거 1 -강정규

 

뒷바퀴가

끈질기게

쫓아온다

 

* 민들레꽃의 하루 -안진영

 

아침에 봉오리를 펼치며, 오늘 하루 행복할 거야

저녁에 봉오리를 오므리며, 오늘 하루 행복했어

 

* 응 -안진영

 

해 질 무렵이면

서쪽 하늘에 해가 하나 발그레

바다에도 해가 하나 발그레

수평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 서로 -최승호

 

서로 쳐다보는 두꺼비

서로 아무 말이 없네

서로 쳐다보는 두꺼비

서로 눈만 껌뻑거리네

서로 모르는 사이인가?

 

* 어이없는 놈 -김개미

 

102호에 다섯 살짜리 동생이 살고 있거든

오늘 아침 귀엽다고 말해 줬더니

자기는 귀엽지 않다는 거야

자기는 아주 멋지다는 거야

 

키가 많이 컸다고 말해줬더니

자기는 많이 크지 않았다는 거야

자기는 원래부터 컸다는 거야

 

말이 많이 늘었다고 말해 줬더니

지금은 별로라는 거야

옛날엔 더 잘했다는 거야

 

102호에 다섯 살짜리 동생이 살고 있거든

자전거 가르쳐 줄까 물어봤더니

자기는 필요 없다는 거야

자기는 세발자전거를 나보다 더 잘 탄다는 거야

 

* 지는 해 -정유경

 

친구랑 싸워 진 날 저녁

지는 해를 보았네.

 

나는 분한데

붉게

지는 해는 아름다웠네.

 

지는 해는 왜

아름답냐?

 

지는 해 앞에 멈춰 서서

나는 생각했네.

 

지는 것에 대해서.

 

* 누가 더 섭섭했을까 -윤제림

 

한 골짜기에 피어 있는 양지꽃과 노랑제비꽃이

한 소년을 좋아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소년이 양지꽃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

“ 안녕! 내가 좋아하는

노랑제비꽃!“

 

양지꽃은 온종일 섭섭했습니다

노랑제비꽃도 온종일 섭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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