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교사들
안 세르 지음, 길경선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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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퇴르 부부의 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 엘레오노르, 로라, 이네스 세 명은 쾌락에 충실하다. 그리고 그들을 관음하는 사람들. 나는 가정교사들이 본능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매력적이고 눈길을 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본능대로 살 수는 없다. 사회적 존재가 되면서 욕망을 감추기도 하고 본능을 제어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을 관음하는 행동이 멈췄을 때 세 명이 사라져 버린 게 아닐까.

_P.29
그들이 그 남자가 그렇게 가버리도록 둘 리가 없다. 그는 그들이 쳐놓은 광대하고 황량하고 내밀한 덫에 걸린 것이다. 그들은 그물을 꺼내어 그를 잡으러, 가두러 간다. 파란색과 갈색 드레스를 입고 이제 그들이 숲속으로 들어간다. 성큼성큼 걸으며 뾰족한 부츠로 덤불숲을 헤쳐나간다. 아직 멀리 갔을 리 없다. 저쪽에 녹색 점이 나무들 사이로 나아간다. 그 남자다. 사냥이 시작된다.
_P.58
“당신의 이빨로 우리를 데려가세요. 잔디밭을 따라 머리카락을 잡고 우리를 끌고 가주세요. 하지만 철문까지만요. 그리고 거기서 열어주세요. 세상으로 나가는 철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세요. 우리를 데려가주세요. 볼 수 있는 것이라곤 하늘뿐인 이 침묵의 새장에서 우리를 꺼내주세요.“
_P.144
“우리는 작아지고 있어.” 어느 날 엘레오노르가 말했다. “우리는 녹아내리고 있는 거야.” 로라가 대답했다. 걱정에 가득 찬 이네스는 정원으로 나가 의연하게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아직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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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
황모과 지음 / 래빗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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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로놀로지 채널은 과거의 현장을 관찰하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으로 민호와 다카야는 서로 다른 목적으로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때로 간다. 민호의 조선인 학살을 막으려는 노력이 결국 다카야를 변화시키고 달출과 평세의 죽음뿐인 피난길에서 타인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않은 행동이 미야와키를 살렸고 그로 인해 사요를 만나 그들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희망을 만날 수 있다.
아픈 역사를 마주해야 할 때 무력감 때문에 힘들다. 그렇지만 마주해야 한다. 그들이 역사를 은폐하고 왜곡한다면 그에 맞서는 방법은 잊지 않는 것이다. 잊히면 안 될 역사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_P.112
사람이 수없이 쓰러졌다. 쓰러진 이들은 모조리 조선인이었다. 무기를 든 일본인 그림자가 끊임없이 조선인을 살육해 강 아래로 떨어뜨렸다. 현장에서 함께 웃고 떠들던 형님 중 하나일 거였다. 여기까지 와서 만난 것도 인연이라며 이제껏 가족처럼 지내던 사람이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물이 핏물처럼 붉었다.
_P.240
근데 조센징은 어떻게 생겼어?
도깨비처럼 생겼어?
뿔이 있대?
아버지가 그러셨어.
아주 질이 나쁜 놈들이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대.
더럽고 냄새나고 못생겼고 화를 내고 있고 폭탄을 들었대.
일본인들을 죽이고 다니느라 온몸이 피범벅이래!
징그럽고 거짓말도 하고 불을 지르고 털이 많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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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
이시우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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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은 50개의 이력서를 쓰고 합격 통보를 받는다. 3교대를 해야 하고 일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노인이고 그들이 하는 일은 벽에 있는 시계를 바라보는 것. 시침이 3시를 넘어가면 손잡이를 당기고 전화를 하는 것이 일의 전부다. 하는 일에 비해 너무 많은 급여와 혜택들 그리고 이곳에 발을 들인 후 세일은 꿈을 꾼다. 그들이 하는 일을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해주는 사람은 없지만 세일은 자연스럽게 이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고 박 노인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입사원일 때는 선임에게 질문할 수 있고 결정을 하는 입장은 아니다. 그러나 연차가 쌓일수록 내가 결정해야 할 일이 생긴다. 세일에게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고 어떻게 했어야만 했을까.

거인이 지키던 불을 훔친 후 문명이 발생한다. 하루에 8시간씩 시계를 보며 문명을 지키는 파수꾼이 이들이다. 시계의 시침이 3시가 넘어가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아는 이는 없다. 세일에게 손잡이를 당길지 선택할 시간이 왔고 세일은 손잡이를 당기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의 세상이 끝났을까. 그렇다고 해도 다른 문명이 생겨날 것이다.

_P.8
“때론 말이지 문명사회에서 대중의 욕망이란 건 어떤 의지가 만든 지침을 따르는 것처럼 보여. 당신들운 이걸 좋아해야 한다. 당신들은 이걸 싫어해야 한다. 이런 삶이 당신에게는 최선이다.“
_P.45
“원숭이들의 법칙이 먼저 온 자의 권능 앞에서 작용할 수 있을까요?”
_P.291
“다음 주부터 사무실의 운영도 마찬가지지. 자네 스스로 판단하고, 자네 스스로 결정해야만 하네. 변속을 언제 하느냐고 물었지? 엔진 회전수가 분당 3000번이 넘어가면 기어를 올려야 하나? 사무실의 손잡이는 3시가 넘어가면 당겨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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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곳에서 만나요
이유리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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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의 소설에서 아홉 번의 생을 사는 고양이를 제외하고 사람인 화자들은 모두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하고 싶은 것이 남았기 때문이다. 나의 죽음 이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모습을 목격한 뒤 소멸한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좋은 곳으로 가세요.’라고 한다. 죽은 사람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좋은 곳에 있기를 바란다. 사랑이란 감정은 이 책에서 이기적이기보다 이타적이다. 그래서 좋았다.

_P.25
“거기 너랑 내 얘기는 하나도 없었어. 믿어지니, 그게?”
『오리배』

_P.97
나는 심지어 가끔은, 내가 죽은 것이 더할 수 없이 온당하게 느껴져 고소하기까지 해요. 죽어 마땅하지요. 장례식에 찾아와 눈물 한 방울 흘려줄 사람이 없는 것이, 육개장 한 그릇 먹어줄 이가 없는 것이 당연하지요. 마땅히 마주해야 하는 것들을 마주하지 않았으니까요. 비겁하게 도망만 쳤으니까요.
『심야의 질주』

_P.152
매일이 그런 날들이었다.
모든 것이 좋아질 듯 좋아지지 않았고 다만 혜수가 좋았던 날들.
외롭지 않은 건 아니었다. 혜수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혜수가 있어서 조금 덜 외로웠다.
그거면 됐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세상의 끝』

_P.176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사랑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내 시간은 로즈의 집에 있을 때 외에는 낭비였고 내 언어는 그 애와 대화를 나눌 때가 아니면 무의미했다. 그 애의 기둥 주위로 몸을 둥글게 말고 내 가슬가슬한 혀로 기둥을 쓰다듬을 때, 나는 그 애의 가시에 찔릴까 두려워하기보다는 내가 그 애의 가시를 다치게 할까 봐 걱정했다. 나는 또 그 애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뿌리와 단면을 보고 싶었고 사막의 모래와 태양이, 밤이면 그 애의 머리 위로 쏟아졌을 은하수가 궁금했다. 나는 먹이를 조르는 새끼 고양이처럼 그 애에게 들러붙어 그것들을 말해달라고 했고 같은 이야기를 수백 번 들었지만 매번 새로웠다.
『아홉 번의 생』

_P.251
정민아, 뛰어.
『영원의 소녀』

_P.289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가고 싶던 곳에 가고, 하고 싶은 말을 끝내 하고. 아무튼 원하는 건 거의 비슷한데, 거기까지 다다르는 과정이 또 얼마나 다양한지 몰라. 결코 길지 않은 삶을 살면서 어쩜 그렇게들 끈질기게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지. 맘대로 안 되는데도 어떻게든 저들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애쓰는 게 굉장하기도 하고.“
『이 세계의 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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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처럼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7
임솔아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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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 예빈은 이모의 딸이라고 생각했던 채빈이 자신의 친동생임을 알게 된다. 채빈은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엄마 앞에서 입을 열지 않다가 병아리를 키우면서 말을 한다. 그 뒤 집은 병아리를 시작으로 강아지, 가출한 아이들의 쉼터가 된다. 예빈은 채빈과 함께 있다가 죽은 엄마가 왜 죽었는지 묻지만 채빈은 입을 다물고 집을 나간다. 그 뒤 10년이 지나서 돌아온 채빈과 다시 함께 살게 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예빈의 시점이기에 나는 채빈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인간의 기억이 자기중심적이란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채빈이 예빈에게 자주 했던 “언니, 화났어?”란 말은 예빈과 친해지기 위한 채빈의 노력이었고 병아리를 키우고 싶던 사람도 채빈이 아니라 엄마였다는 사실을 예빈이 몰랐던 것처럼 그때의 예빈은 채빈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짐승처럼 산다를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인간중심적으로 생각했구나 싶다.

_P.128
“마음대로 하세요. 사실을 말할 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거짓말을 한 셈이 될 거예요. 얘는 유나니까. 그것만 진실이거든요. 그리고 당신이 입을 여는 순간 유나는 갈 곳을 잃을 거예요.“
_P.138
“난 이제 우리가 가족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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