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슨 인 케미스트리 1 - 개정판
보니 가머스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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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닌 자신으로 살기 위해 투쟁해야 하는 현실이 잘못된 것이지 잘못된 시스템을 바꾸려는 여자들은 죄가 없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조트를 응원한다.

_P.89
“그게 문제야. 날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엘리자베스는 평생 이런 감정을 느끼며 살아왔다. 자신이 이룬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동에 따라 규정되는 삶을 이어온 것이다. 과거 그녀는 방화범의 자식, 남편을 갈아 치우는 여자의 딸, 목매달아 죽은 동성애자의 동생 아니면 호색한으로 유명한 교수 밑에 있던 대학원생일 뿐이었다. 지금은 유명한 화학자의 여자친구가 되었다. 오롯이 엘리자베스 조트로 받아들여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_P.215
“그대가 살아갈 날은 많......다. 많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캘빈과 함께 누워 그가 어린 시절 주문처럼 되뇌었던 말을 들려줬던 슬픈 밤을 떠올렸다. 살아갈 날은,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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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
페터 슈탐 지음, 임호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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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의 크리스토프는 16년 전 젊은 자신의 도플갱어를 만난다. 그때의 연인이었던 막달레나의 도플갱어에 이 상황을 설명한다. 그 시절 그들의 이야기와 도플갱어의 이야기는 같은 듯 하지만 오차가 있다. 도플갱어가 나일까. 내가 그의 삶에 개입한다면 나에게 변화가 생길까. 미래가 확정되어 있다면 어떤 선택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책이 아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나의 작은 선택에도 변할 것이다. 어느 날 내 도플갱어를 만난다면 다정스러운 무관심으로 지나치기로 하자.

_P.96
선생님은 우리의 삶에 개입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으신가요? 레나가 말했다. 선생님이 범한 오류를 수정하고, 우리의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싶은 유혹 말이에요. 아니면 단지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시험해보고 싶은 호기심이랄까요. 겁이 나오. 내가 말했다. 뭐가 튀어나올지 누가 알겠소?
_P.139
전 미래가 저에게 뭘 가져다줄는지 전혀 알고 싶지 않지만 미래가 확정되어 있다는 상상은 좋아해요. 저에게 일어나는 일이 이미 한 번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라는 상상, 다시 말해 연관과 의미를 지녔다는 상상 말이에요. 마치 제 인생이 하나의 이야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책에서 항상 좋아했던 대목이 바로 그런 거예요. 책은 확고부동해요.

✦ 문학과지성사에서 책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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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구멍 속의 유령 암실문고
데리언 니 그리파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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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올리어리를 위한 애가』에 매료되어 시인 아일린 더브의 삶을 따라가지만 기록을 찾기 쉽지 않다. 데리언 니 그리파가 여성의 텍스트라는 문장을 반복하지만 여성의 이야기는 남자들의 삶 주변부에서만 겨우 발견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아일린 더브의 영향을 받은 데리언 니 그리파는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고 그가 찾아낸 아일린 더브의 기록은 또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기록되지 않는 여성의 삶을 단 한 명이라도 잊지 않았다면 텍스트로 남지 않았어도 기록되고 있는 것이겠지.

_P.270
나는 내가 찾는 여자들의 자취를 단 하나라도 찾아내기 위해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한 방들 하나하나를 샅샅이 뒤진다. 그들의 생애가 담겨 있는 것이라면 그 어떤 작은 흔적이라도 좋다. 단추 하나, 펜촉 하나, 촛대 하나, 귀고리 한쪽……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_P.337
마침내, 여기 그가 있다. 또다시 어머니이자 누이로 기록된 우리의 아일린 더브가. 나는 아일린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아내기를 열망하며 굿윈의 삶 속을 뒤지고 또 뒤져 왔고, 이제 이렇게 마지막 순간에, 짜잔! 아일린이 나타난 것이다. 또다시, 남자들의 삶 주변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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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장미
온다 리쿠 지음, 김예진 옮김 / 리드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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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다 나치는 부모님이 죽고 삼촌 부부와 지내다가 매년 여름에 열리는 이와쿠라 캠프에 참여한다. 이와쿠라에 도착한 뒤 캠프의 의미도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신체의 변화를 겪는다. 피를 토하는 행위는 ‘변질’이 된다는 것이고 변질을 통해 적성이 맞는다면 허주 승선원의 자격을 갖춘 것이다. 허주 승선원은 오랜 시간 우주선을 타야 하기에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고 이와쿠라의 아이들은 허주 승선원이 될 가능성이 타지역 아이들보다 높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수가 줄고 있다. 변질이 시작되면 피먹임을 해야하는데 나치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면서 타인의 피를 먹는 행위에 거부감을 갖고 피먹임을 거부한다. SF, 판타지, 로맨스가 적절히 혼합되어 600쪽이 넘지만 재밌게 읽었다. 나치가 자신의 숨겨진 능력을 알게 되고 진실에 다가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와타세 유우의 『천녀전설 아야』가 생각났다.

_P.122
그렇게까지 해서 허주 승선원이 되어야만 하는 걸까.
문득 근본적인 의문이 솟아났다.
다들 그것이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주위에서도 그렇게 되도록 애써 준다는 것도 알았다. 아마치 마사키의 어른스러운 말투에서도, 배를 올려다보는 후카시의 부러움 가득한 눈빛에서도 그것은 충분히 느껴졌다.
하지만 왜 내가? 다카다 집안의 삼촌과 숙모도 싫어하고, 전혀 관심도 없고, 지식도 없는 내가 왜 그렇게나 멀고 새까만 외해로 나가야만 하는 걸까? 다들 그렇게까지 해서 허주 승선원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뭘까?
_P.400
“우리는 나이를 먹지 않아. 그것이 오랜 동안 허주 승선원의 조건이었지. 그런데 실은 우리 자체가 허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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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테이블 너머로 건너갈 때
조나단 레덤 지음, 배지혜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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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필립과 물리학자 앨리스는 같은 대학의 교수로 연애 중이다. 물리학과의 실험 중에 발생한 웜홀은 예상과 다른 결과로 ‘결함’이라 불린다. 결함은 물건을 선택적으로 흡수하고 앨리스는 결함을 ‘그’라고 칭하며 빠져드는 모습을 보인다. 필립은 앨리스가 결함을 사랑한다는 걸 깨닫고 앨리스는 이를 인정한다. 앨리스는 결함에게 선택받고 싶어 하지만 결함은 앨리스를 흡수하지 않는다. 필립은 앨리스를 포기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결함을 연구하다 떠나는 브라시아 교수에게서 결함이 앨리스의 취향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확인하고 싶어진다. 결함이 그를 받아들인다면 앨리스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거니까. 사랑이란 이성을 마비시켜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 사실을 인지해도 멈추지 못하고 반복한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영화를 한 번쯤 봤다면 왜 이 소설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_P.212
앨리스가 결함과 단둘이 있다. 나는 혼자였다. 그녀는 이 시간을 나보다 흥미롭게 보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음을 사로잡은 대상과 함께였고 나는 지루하게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 지루하고, 배고프고, 외로운 채로.

✦ 황금가지에서 책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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