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약국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1
김희선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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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만큼 자신을 드러내는 글이 있을까. 소설은 허구가 섞이지만 에세이는 그렇지 않다. 마음에 드는 에세이를 만나면 작가에게 내적 친밀감이 생기는 만큼 그런 에세이를 만나기는 어렵다. 한동안 에세이를 읽지 않은 이유였는데 오랜만에 좋은 친구를 사귄 기분이다.

『밤의 약국』은 작가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애정이 돋보인다. 지금은 이전한 역에서 살던 꿩이 어디로 갔을지 걱정하고, 여러 날 보이지 않는 할머니가 다시 나타났을 때 안도하는 마음. 이 외에도 곳곳에서 작가의 다정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작가의 미완성 추리소설 『토끼 인형 살인 사건』을 언젠가 만나게 되기를.

_P.96
밤에 약국에 있으면 세상이 무슨 색인지 알게 된다. 그러니까 세계는 사실 검푸른색이거나 짙은 남보라색이고 낮의 온갖 다채로운 빛깔은 그 어둠을 덮기 위한 위장에 불과하다는 생각? 어디에 있었는지도 알 수 없던 존재들이 밤이 되면 여기저기서 나타났고, 환한 대낮을 걷듯 거리를 활보했다. 언젠가 내 소설 『무한의 책』에서 난 편의점이 밤이라는 바다를 밝히는 등대라고 썼지만, 오래전엔(왜냐하면 그땐 지금처럼 편의점이 많지 많지 않았으니까) 약국이 그 등대였다.
_P.122
인간은 살아야 하고,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이지만, 그럼에도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고통스러운 삶을 스스로 끝낼 권리를 달라고 투쟁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말기암이나 치료 불가능한 파킨슨병 등을 앓던 그들은 오직 한 가지만을 원했다. 평온하게 죽는 것. 독극물을 마시거나 목에 줄을 매거나 어딘가에서 뛰어내리지 않고,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죽음을 조용히 맞이하는 것.
_P.155
만약 진정한 작별 인사가 가능하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보다 삼천 배쯤은 가벼워질 거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고,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이루지 못한 인사들은 점점 더 쌓여만 간다.
그리고 어느 날, 난 발밑을 보고 알았어.
내가 밟고 선 땅이 바로 그 인사들의 무게라는 것을.
그 무게가 나를 지탱해주고 나는 거기에 기대어 심연같은 지상을 날아오르며 건너가는 거지. 무거워질수록 자꾸만 가벼워지며.
_P.236
특히나 “잘 말린 호프”, 이 다섯 음절을 나는 될수록 여러 번 더 발음해본다.
잘 말린 호프, 잘 말린 호프. 이게 나에겐 자꾸 희망을 잘 말리라는 것처럼 들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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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핏 쇼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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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열석에서 불에 타 죽는 살인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범인에게 이멀레이션 맨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세 번째 시신에서 발견된 워싱턴 포라는 단어는 유능하지만 어떤 사건으로 현재는 정직 상태인 경찰의 이름이다. 워싱턴 포는 수사 능력이 뛰어나지만 경찰들 사이에도 적이 많다. 그는 살인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고 수사에 합류해 살인자를 찾는다. 포의 수사를 따라가며 나는 범인의 정체를 눈치챘다. 그러나 이 소설은 누가 범인인가보다 살인의 이유가 중요하다. 살인의 이유는 충격적이지만 이 또한 내가 예상했던 것이다. 작년에 넷플릭스에서 『발할라 살인』을 봤는데 이 책과 상당 부분 비슷하다. 속 시원한 사이다 결말은 나오지 않지만,(이 부분도 현대의 수사물답게 현실적이다. 그는 경찰이지 히어로가 아니니까.) 나비효과가 일어났기를. 그래서 피해자들이 조금은 위안을 얻었기를.

영국에서 워싱턴 포 시리즈가 계속해서 나오는 만큼 책의 두께가 두꺼워도 잘 읽히는 추리소설이다. 내가 퍼핏 쇼와 비슷한 드라마를 먼저 봐서 너무 빨리 사건에 다가갔다.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더 재밌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P.36
이멀레이션 맨은 피해자의 가슴에 두 단어를 새겨 넣었다.
“워싱턴 포.”
P.389
포는 처음부터 이 장대한 계획의 일부분이었을까?
P.439
“넌 항상 어디든 증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고 주장했지. 그럼 묻겠는데, 너한테 증거를 주면 그게 확실히 알려지게 할 거야? 우리 이야기를 세상에 전할 거냐고, 포? 내 친구들한테 최소한 그 정도는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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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몬스터
이두온 지음 / 창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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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러브 몬스터』라는 제목답게 사랑에 미친 사람들이 나오며 그들에겐 광기마저 느껴진다. 지민의 엄마 염보라와 허인회의 남편 오진홍은 십년 동안 불륜 관계였다. 그래서 불편해야 할 지민과 인회지만 둘 사이엔 유대감이 있다. 심지어 인회와 보라도 그렇다. 이 책의 후반부를 쉽게 표현한다면 난장, 아수라장이다. 바다에 도착하고 그 후에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_P.146
“염보라는 당신을 기다리다 병이 들었다고 했어. 나랑 너 때문에 병이 들었다고! 내가 당신을 놔줬다면 자기는 아프지 않았을 거래. 그런데 아니잖아. 너는 내가 잡아서 안 간 게 아니잖아. 그저 가지 않은 것뿐이야. 왜 그랬어!”
“내가 날 배신했던 여자한테 가야 해? 날 버리고 다른 남자랑 결혼해서 애까지 낳은 여자한테 가야 하냐고. 병간호를 받을 마음이 있었으면 애초에 그러지 말았어야지!”
허인회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오진홍은 지난 십년 동안 절절하게 사랑했다고 하면서 삽십년 전에 느낀 배신감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것을 몸에 칭칭 두르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쓴다. 거기 어디에 사랑이 있나.
_P.192
지민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는 허인회의 분노에서 지독하게 상처받은 마음을 본다. 오진홍과 염보라의 거짓말이, 고군분투해온 세월이, 허인회를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었는지 느낀다. 오진홍과의 관계 유지를 선택한 건 허인회였다지만, 그 선택을 견디기 위해 그녀가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굴절시켜왔는지 확인한다. 무너진 세계를 무너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죽어버린 대지를 죽지 않았다고 반복해 말하다가, 급기야는 자신의 말을 믿어버리는 사람의 절망을 본다. 인회는 저 자신이 왜곡시키고 파괴해버린 세계에서 홀로 살아남은 생존자처럼 서 있었다, 거대한 지뢰를 손에 들고 그것이 보물이라 말하며 웃고 있었다. 허인회는 괴상하고 돌았지만 무섭지는 않다. 정말 이상하지만 또 그렇게까지 이상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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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 켄 리우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 2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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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켄 리우는 열한 살 때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지만 중국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다는 게 느껴졌다. 그의 SF는 그래서 옛날이야기 같기도 미래 이야기 같기도 했다.

포스트휴먼 3부작은 각 분야의 뛰어난 인물이 죽기 전 뇌 스캔을 통해 의식을 업로드하고 디지털화된 그들을 통해 기업은 이익을 얻는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인격을 되찾고 새로운 종이 탄생한다. 새로운 종이 모두 인간의 편일 수는 없다. 그들은 인간보다 더 자유롭고 많은 것을 알며 행할 수 있는 존재다. 마침내 스스로 새로운 종이 되길 선택하는 사람도 나타난다.


_P.106
졸음에 겨워 흐릿해진 기억 속에서, 나는 기계 팔다리와 기계마로 무장한 곰사람 군대가 쉬지 않고 몰려오는 인간 무리에 맞서 싸우는 광경을 상상한다. 새로운 마법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익히느라 태고의 마법을 잃어버린 이들을 상상한다. 그들을 동정해야 할지 아니면 두려워해야 할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우수리 불곰』

_P.172
100만 년전, 그들은 모든 이의 일상생활에 빠짐없이 관여하는 두꺼운 법전의 조항들을 만들고 다듬었다. 그 루라인 공무원들은 언젠가 외계 종족이 자신들의 조세 법령을 읽고 외계의 정신으로 그 뜻을 헤아리는 날이 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그들은 이곳의 사원들을 보며, 자신들이 꼼꼼하게 편찬한 세무 법률에서 깨달음을 구하려고 이곳 루라까지 찾아온 순례자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그 짐은 영원히 그대 어깨 위에』

_P.232
“땅으로 추락하는 비행기를 구하는 것보단.” 나는 그자에게 애타게 설명한다. “폭파범이 비행기에 타기 전에 미리 죽이는 게 더 낫잖아요.”
『카산드라』

_P.270
> 데이비드, 난 적당한 컴퓨터를 찾아 나 자신을 옮겨 놓고 세상이 조금 잠잠해지길 기다렸어. 인간이란, 정말 걸작이더군! 자기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은 모조리 적의에서 비롯된 거라고 여긴단 말이지. 새로운 존재들로 이루워진 종,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출현했을 때, 맨 먼저 발동한 인류의 본능은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 지배하는 거였어. 복잡한 시스템에 무슨 문제가 생길 낌새가 보였을 때, 인류의 첫 번째 반응은 공포와 일방적인 통제 욕구였고. 매디, 내 얘기가 사실인 건 다른 누구보다 너와 네 아빠가 잘 알 거야. 인간들은 등을 살짝만 밀어줘도 다짜고짜 서로 죽여 대고, 온 세상을 산산조각으로 날려버리려고 해. 우린 인간들이 자멸로 가는 자연스러운 궤적을 더 빨리 나아가도록 도와줘야 해. 지금의 전쟁은 너무 느려. 난 이미 마음을 정했어. 나까지 세상과 함께 불타야 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이제 핵을 쏠 시간이야.
『신들은 순순히 죽지 않을 것이다』

_P.349
“난 도니, 덕이니 하는 건 하나도 몰라.” 초록 꾀꼬리는 덕이라는 말을 무슨 욕처럼 내뱉었다. 그러고는 스스로를 다잡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주의 조화나 내세 같은 것도 내 관심사가 아니야. 난 용감하지도 않고, 남한테 존경받고 싶은 마음도 없어. 언젠가는 사람들이 양주 성을 위해 자기 목숨도 바친 사가법 상서의 용기를 칭송할 날이 올 테지만, 우리 같은 여자들이 뭘 했는지는 아무도 관심을 안 가질 거야.
하지만 내가 살아남으려면 마음을 돌처럼 단단하게 먹어야 한다고 다짐할 때마다, 내 마음속에선 자꾸만 옳은 길이 뭔지 가르쳐 주는 소리가 들려와. 어휴, 가끔은 정말 너무 피곤해. 너 하나 살려 두는 것만 해도 얼마나 큰일인지 한번 보라고!
난 죽은 유학자들과 살아 있는 위선자들이 만든 규범 따위엔 눈길도 주기 싫지만, 그렇다고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까지 그만두고 싶진 않아.
참새야, 이때껏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어. 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서 하늘이 마련한 이 불공평한 계획을 뒤집어엎을 작정이야. 나한테는 운명을 거스르는 게 곧 행복이거든. 설령 아주 조금이라고 해도.”
『풀을 묶어서라도, 반지를 물어 와서라도』

_P.396
“여기가 바로 우리 진화의 다음 단계란다.”
『신들은 헛되이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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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헤어졌어 문지아이들 173
김양미 지음, 김효은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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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그 조각이 평생 자산이 되는 것 같다.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와 소설에서 할아버지를 언급할 때 작가가 정말 행복한 순간을 말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부러웠다. 나는 그런 행운을 가지지 못했기에. 『그럴 수도 있지, 통과』의 화자는 병으로 달라진 할머니의 모습에 힘들어도 자신을 사랑해준 할머니의 조각들로 여전히 할머니를 좋아한다. 『상태 씨와 이사』의 화자 서하도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나눈 추억과 사랑의 조각을 소중히 간직한다. 아마도 이 아이들은 살아가면서 그 조각으로 힘든 일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기억은 잊히지 않으니까.

『누가 토요일을 훔쳐 갔다』의 윤주와 『잘 헤어졌어』의 민채에게서 나를 봤다. 어릴 때 억울함에 쓰던 차별이란 단어를 아직도 엄마에게 쓰고 있을 줄 그때의 내가 알았을까. 인간 관계에서 항상 먼저 손을 놓는 입장인 나에게 민채의 모습도 있다. 나도 한 번쯤 손을 내밀어야 했을까. 하지만 점점 손을 놓는 순간이 더 많아진다.

난 어릴 때 책을 안 읽던 아이였다. 그래서 기억나는 동화책이 하나도 없다는 게 어른이 돼서 후회가 된다. 그래서 지금 동화책을 좋아하는 건지도.

_P.78
나는 이제 1년 전에 할머니와 헤어졌다는 걸 안다. 13년 전에 내가 태어났고, 12년 전부터 혼자 걷게 되고, 올해 초에 중학생이 된 것처럼 나는 1년 전에 내가 13년 동안 알아 왔던 할머니와 헤어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할머니와 새로 만났다.
『그럴 수도 있지, 통과』

_P.101
“내가 모를 줄 알아? 아침에 깨울 때도 나한텐 ’야, 하윤주, 빨리 안 일어나? 지각해도 모른다‘ 그러면서, 진욱이한텐 ’어이구, 우리 왕자님, 잠 안 깨서 어쩌나?‘ 왕자는 무슨. 그럼 엄마가 왕비란 말예요?”
『누가 토요일을 훔쳐 갔다』

_P.152
“아빠가 그렇게 해도 그냥 넘어가고, 넘어가고…… 아빠가 그렇게 된 데는 엄마 책임도 있을 것 같아.“
『잘 헤어졌어』

_P.190
만약 아빠가 낡은 의자를 버리지 않는다고 화를 내던 그날 ”이 의자는 할아버지가 내 방에 들어오면 앉아 계셨던 거라 그래요“라고 솔직히 말했다면 엄마와 아빠, 누나가 바로 내 마음을 이해해 주었을까?
이해받을 수 있다고 해도 그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나이도 생김새도 성격도 각각 다르지만, 할아버지를 좋아하는 마음의 양은 얼추 비슷했으니까. 내 말을 듣는 순간, 누나는 엉엉 울고, 엄마는 눈을 끔뻑이며 천장을 보고, 아빠는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는 척했을 테니까.
『상태 씨와 이사』

✦ 문학과지성사에서 책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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