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필사 노트
박경리 지음, 유선경 엮음 / 다산초당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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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독서인의 목표가 토지 전권 읽기 아닐까. 하지만 나에게 토지는 너무 먼 큰 산 같다. 그래서 토지 필사 노트를 보니 이 정도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엮은이가 선정한 147개의 문장을 필사하며 토지 찍먹을 해보겠다는 거지. 1장 토지란 무엇인가를 필사하고 있는데 명절과 계절에 대한 묘사가 많다. 책의 순서대로가 아닌 주제에 따라 선정된 문장을 만날 수 있다. 연필로 필사를 시작했는데 필사하는 쪽 색이 노란색이라 펜을 사용하다 틀릴 때 수정하면 티가 많이 날 거 같다. 아끼던 블랙윙까지 꺼냈으니 이번 필사책은 꼭 성공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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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 이응
김멜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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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멜라표 이상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화자가 디지털 잡귀고 배꼽에서 나오는 빛이 보이고 복지 서비스가 된 바이브레이터 기계라니. 그러나 이런 이상한 이야기임에도 김멜라가 쓰는 사랑은 자신보다 사랑하는 이를 더 위하기에 나를 울게 한다

P.29
"같이 시루떡 먹을래? 같이 긴 밤 지새울래? 우리 같이 쭉정이 연대 만들래? 너랑 나랑 바위처럼 살지 않을래?"
「지하철은 왜 샛별인가」

P.87
그대로 멈춰 있어도, 아무리 붙잡고 싶어도 우리는 별과 별처럼 멀어질 테지만 사람은 외떨어진 점만은 아니라는 걸. 선은 점이 이동한 경로이니 잘만 찾으면 너와 내가 만나는 외나무다리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좀비 손금」

P.132
〇〇아, 나는 너와 나의 이름을 가리거나 지우지 않을 거야. 너의 빛은 나에게 쏟아져 다시금 세상에 되비칠 거야. 그게 내 빛이 될 거야. 나는 네가 빛날 수 있게 고요히 어두워질게. 그래, 나는 너에게만은 쉬운 사람, 누가 보든 말든 실컷 웃어대는 등대야. 웃는 게 빛나는 거니까. 배꼽에서 빛이 나오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뜨거우니까. 돌아오는 수요일, 나는 일찌감치 자리에 앉아 너를 기다릴 거야. 그날도 우리는 우리 사이의 팔걸이를 비워두겠지만, 그 후로 우리 는 어떤 공연장에 가든 가운데 팔걸이 아래로 손을 맞잡을 거야. 있잖아, 나는 그런 걸 기억해. 아직 오지 않은 우리의 미래를 기억해. 하지만 내가 꿈꾸는 대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마음을 어떤 물질로 증명하지? 내가 느끼는 이 일렁임을 어떻게 너에게 전할까.
「젖은 눈과 무적의 배꼽」

P.139
찬나야, 너는...... 너는 고작 불멸이구나. 나는 이렇게 부지런히 늙어 한쪽 유방도 보내고 동맥에 반짝이는 스텐트도 심었는데.
P.173
무엇을 채우든 삶이란 나날이 금이 번져 종국엔 그릇 터지는 파열음만 남을 뿐이었다. 그 종지음을 꾸밀 수 있나? 기교를 부릴 수 있어?
「드그다 읏따읏따」

P.204
제발 그만둬, 이 번잡스러운 개야. 나한테 침 묻히고 털 묻히고 정 묻히지 말라고. 신조는 배송이가 펼쳐보는 자신의 내면이 못 견디게 거북하면서도 한편으론 배송이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꼼꼼히 읽어주길 바랐다. 스스로는 차마 드러낼 수 없어 덮어둔 페이지를 너라도 펼쳐봐주길.
「아무래짜」

P.232
"그 짓이 맞나 틀리나 긴가민가할 땐 똑같은 짓을 한 번 더 해봐."
P.254
성욕은 단지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바이오리듬에 따라 채워줘야 하는 신체적 욕구일 뿐이었다. 이응은 욕구 해소를 위해 설치된 편의 시설이자 국가가 보장하는 복지 서비스였다.
「이응 이응」

P.300
필라카, 네 말이 맞았어. 몸이 사라져도 기억은 남아서 나와 함께 흐르고 있어. 머리를 잃어도, 손발이 사라져도 너와 보낸 기억은 몸보다 깊은데 새겨져 여전히 내 앞에 아른거려, 언제나 고요하게 감긴 너의 한쪽 눈, 그 눈꺼풀을 가로지르는 붉은 선과 무늬. 그 상처는 네가 아이였을 때 오소리를 피해 달아나다 참나무 가지에 찔려 생긴 거였지. 나는 그 흉터를 오래 바라봤어. 그 안에서 오직 나만이 거니는 좁은 길을 발견했으니까. 나는 조용히 깨달았어. 내가 평생 그 길을 헤맬 거라는 걸. 필라카, 너는 별 보듯 서로의 눈을 보자고 했지만 네가 말한 별은 눈동자가 아니었어. 닫힌 눈꺼풀이, 네가 감은 눈으로 보던 더 깊은 어둠이 내가 바라봐야 할 별이었지.
「물먹은 편지」

P.332
나는 자연스럽지 않은 아이였다. 나이는 여덟 살이지만 마음은 백한 살이었으니까. 왜 이렇게 됐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가출을 많이 해서 그럴까. 아니면 이런 아이라 가출할 수밖에 없는 걸까.
「메께라 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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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고 있지 않았던 장면들 ㅣ 트리플 37
임솔아 지음 / 자음과모음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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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먹먹함을 느낀다. 노력한다고 어쩔 수 없는 것에 그들은 결국 익숙해진다. 그렇지만 진짜 괜찮은 걸까. 그럴 수는 없지. 그래서 난 임솔아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이 자신을 좀 더 사랑해 주길 바라게 된다.

P.25
지윤의 오랜 소외감이 조금 더 또렷해졌다. 자신만 빼고 모두에게 통용되고 있는 은밀한 언어가 따로 있는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은 지윤의 착각이 아니었다.
「금빛 베드 러너」

P.73
"못 건너가요. 막혀 있어요."
"언제부터."
"처음부터요."
「도희의 한 시간」

P.98
화면 속에서 자신이 손을 떨고 있었다. 민영은 자신의 손을 자주 내려다보게 되었다. 아무 감정도 일지 않았고 아무 상처도 받지 않은 것만 같았는데, 손이 계속 떨려왔다. 자기 손이 아닌 것 같았다.
「쉴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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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지도
우케쓰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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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케쓰의 소설답게 시각적인 즐거움이 추가된 이야기다. 존재하는지 몰랐던 외할머니가 남긴 지도를 찾은 후 구리하라는 조사를 시작한다. 소설의 시작과 끝에서 같은 지도가 다르게 보이게 될 것이다.(우케쓰의 다른 소설들도 그렇지만) 복잡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정리하고 이해도를 높여주는 그림이 많고 사건이 하나로 연결되는데 전형적이지 않아서 재밌게 읽었다.

P.75
기운이 없어져서 여행을 그만둔 게 아니다. 조사가 끝났기에 나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즉, 마지막 여행에서 외할머니는 어떤 '진상'에 도달했다.
P.214
"즉 야비쓰 회장은 모조산 터널 공사를 꺼렸다는 뜻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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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못생기게 나오는 카메라
신이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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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서 주어진 가족과 이름, 종교를 벗어나 '신이인'이라는 이름과 스스로 선택한 집, 가족을 갖게 된 시인의 이야기가 재밌다. 그런데 왜 자신의 집을 '뒤주'라고 부를까. 시인의 유머이려나. 반려 도마뱀들의 이름을 인파(인류 파괴)와 인재(인류 재건)라고 부른 건 시인의 욕망을 반영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시인은 그렇게 기존의 것을 부수고 자신만의 세상을 갖고 싶었던 거라고. 그게 자신을 더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P.15
태어났을 때부터 신춘문예에 당선되기 직전까지 나는 예은으로 불렸다. 예은은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다. 예수님의 은혜.
P.26
내가 선택한 전략은 '외계인 되기'였다. 저는 이상한 사람이 맞으니까 받아들이세요. 대신 재미있기도 할 겁니다. 예쁘게 봐주세요. 양해해주시고 남는 자리 하나만 주십시오. 시인이 된 건 그런 외계인 라이선스를 따낸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사람들은 내가 그들이 판단하기에 부자연스러운 언행을 해도 '예술가잖아', '외계인이잖아' 하고 넘어가준다
P.40
어느덧 주문은 내 목소리로 들린다. 설령 세상 사람들이 전부 나를 싫어한다 해도 나까지 나를 싫어할 수는 없지. 어쩔 수 없지. 이 또한 무리에서 벗어난 존재의 생존 본능이다. 나를 보호하는 건 내 마음이다.
P.47
내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 맞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 집에서 독립은 상상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다. 내 인생엔 늘 그런 사건에 뛰어가 몸을 부딪쳐야 하는 때가 있었다. 교회 안 가기. 학원 안 가기. 몰래 연애하기. 담임 선생님이 학부모 호출하는 상황 만들기. 부모님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허파에 바람들기. 아르바이트하기. 통금 어기기. 외박하기. 정신과 가기. 멀쩡한 직장 때려치기. 언니에게 없고 나에게만 있는 순간들. 그때마다 나는 어떻게 했더라? 언니가 부딪치지 않아 더욱 굳건해진 장벽을 어떻게 뚫어야만 했던가.
P.64
나는 인파의 펑키함이 귀여웠다. 업자들의 판단 기준을 거스르는 것도 모자라 혹까지 달고 있는데 성격도 말괄량이라니, 그렇지만 아주 건강하다니. 이 모든 사실이 사랑스러웠다. 그런 도마뱀과 가족이 되는 일은 내 적성에 잘 맞았다.
P.119
오랫동안 곁을 지켜주었으면 하는 사랑의 모습을 이곳에 적어 희망해본다. 유순했으면 좋겠다. 산책, 아니 탐험을 좋아했으면 좋겠다.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밤길을 안내해주었으면 좋겠다. 두려움을 덜어주었으면 좋겠다. 같이 춤을 출 수 있었으면 좋겠다. 수명이 길었으면 좋겠다. 나를 보호하되 내가 더 강해지는 동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P.175
퇴사를 하고 시를 쓰기 시작하자 직장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달라 보였다. 속도 없다고 생각했던 동료는 씩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잔소리를 하던 선배는 남을 챙겨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첨하거나 모욕감을 주던 관리자는 안쓰러운 사람이었다. 나는 부끄러워졌고, 궤도 바깥에 남아 세상으로부터 이탈되는 가치를 주운 다음 띄워 올려야 할 의무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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