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 속의 유령 암실문고
데리언 니 그리파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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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올리어리를 위한 애가』에 매료되어 시인 아일린 더브의 삶을 따라가지만 기록을 찾기 쉽지 않다. 데리언 니 그리파가 여성의 텍스트라는 문장을 반복하지만 여성의 이야기는 남자들의 삶 주변부에서만 겨우 발견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아일린 더브의 영향을 받은 데리언 니 그리파는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고 그가 찾아낸 아일린 더브의 기록은 또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기록되지 않는 여성의 삶을 단 한 명이라도 잊지 않았다면 텍스트로 남지 않았어도 기록되고 있는 것이겠지.

_P.270
나는 내가 찾는 여자들의 자취를 단 하나라도 찾아내기 위해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한 방들 하나하나를 샅샅이 뒤진다. 그들의 생애가 담겨 있는 것이라면 그 어떤 작은 흔적이라도 좋다. 단추 하나, 펜촉 하나, 촛대 하나, 귀고리 한쪽…… 하지만 아무것도 없다.
_P.337
마침내, 여기 그가 있다. 또다시 어머니이자 누이로 기록된 우리의 아일린 더브가. 나는 아일린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아내기를 열망하며 굿윈의 삶 속을 뒤지고 또 뒤져 왔고, 이제 이렇게 마지막 순간에, 짜잔! 아일린이 나타난 것이다. 또다시, 남자들의 삶 주변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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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장미
온다 리쿠 지음, 김예진 옮김 / 리드비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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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다 나치는 부모님이 죽고 삼촌 부부와 지내다가 매년 여름에 열리는 이와쿠라 캠프에 참여한다. 이와쿠라에 도착한 뒤 캠프의 의미도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신체의 변화를 겪는다. 피를 토하는 행위는 ‘변질’이 된다는 것이고 변질을 통해 적성이 맞는다면 허주 승선원의 자격을 갖춘 것이다. 허주 승선원은 오랜 시간 우주선을 타야 하기에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는 것이고 이와쿠라의 아이들은 허주 승선원이 될 가능성이 타지역 아이들보다 높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수가 줄고 있다. 변질이 시작되면 피먹임을 해야하는데 나치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면서 타인의 피를 먹는 행위에 거부감을 갖고 피먹임을 거부한다. SF, 판타지, 로맨스가 적절히 혼합되어 600쪽이 넘지만 재밌게 읽었다. 나치가 자신의 숨겨진 능력을 알게 되고 진실에 다가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와타세 유우의 『천녀전설 아야』가 생각났다.

_P.122
그렇게까지 해서 허주 승선원이 되어야만 하는 걸까.
문득 근본적인 의문이 솟아났다.
다들 그것이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주위에서도 그렇게 되도록 애써 준다는 것도 알았다. 아마치 마사키의 어른스러운 말투에서도, 배를 올려다보는 후카시의 부러움 가득한 눈빛에서도 그것은 충분히 느껴졌다.
하지만 왜 내가? 다카다 집안의 삼촌과 숙모도 싫어하고, 전혀 관심도 없고, 지식도 없는 내가 왜 그렇게나 멀고 새까만 외해로 나가야만 하는 걸까? 다들 그렇게까지 해서 허주 승선원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뭘까?
_P.400
“우리는 나이를 먹지 않아. 그것이 오랜 동안 허주 승선원의 조건이었지. 그런데 실은 우리 자체가 허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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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테이블 너머로 건너갈 때
조나단 레덤 지음, 배지혜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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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필립과 물리학자 앨리스는 같은 대학의 교수로 연애 중이다. 물리학과의 실험 중에 발생한 웜홀은 예상과 다른 결과로 ‘결함’이라 불린다. 결함은 물건을 선택적으로 흡수하고 앨리스는 결함을 ‘그’라고 칭하며 빠져드는 모습을 보인다. 필립은 앨리스가 결함을 사랑한다는 걸 깨닫고 앨리스는 이를 인정한다. 앨리스는 결함에게 선택받고 싶어 하지만 결함은 앨리스를 흡수하지 않는다. 필립은 앨리스를 포기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결함을 연구하다 떠나는 브라시아 교수에게서 결함이 앨리스의 취향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확인하고 싶어진다. 결함이 그를 받아들인다면 앨리스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거니까. 사랑이란 이성을 마비시켜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 사실을 인지해도 멈추지 못하고 반복한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영화를 한 번쯤 봤다면 왜 이 소설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_P.212
앨리스가 결함과 단둘이 있다. 나는 혼자였다. 그녀는 이 시간을 나보다 흥미롭게 보내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마음을 사로잡은 대상과 함께였고 나는 지루하게 혼자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 지루하고, 배고프고, 외로운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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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사들
안 세르 지음, 길경선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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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퇴르 부부의 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 엘레오노르, 로라, 이네스 세 명은 쾌락에 충실하다. 그리고 그들을 관음하는 사람들. 나는 가정교사들이 본능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매력적이고 눈길을 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본능대로 살 수는 없다. 사회적 존재가 되면서 욕망을 감추기도 하고 본능을 제어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을 관음하는 행동이 멈췄을 때 세 명이 사라져 버린 게 아닐까.

_P.29
그들이 그 남자가 그렇게 가버리도록 둘 리가 없다. 그는 그들이 쳐놓은 광대하고 황량하고 내밀한 덫에 걸린 것이다. 그들은 그물을 꺼내어 그를 잡으러, 가두러 간다. 파란색과 갈색 드레스를 입고 이제 그들이 숲속으로 들어간다. 성큼성큼 걸으며 뾰족한 부츠로 덤불숲을 헤쳐나간다. 아직 멀리 갔을 리 없다. 저쪽에 녹색 점이 나무들 사이로 나아간다. 그 남자다. 사냥이 시작된다.
_P.58
“당신의 이빨로 우리를 데려가세요. 잔디밭을 따라 머리카락을 잡고 우리를 끌고 가주세요. 하지만 철문까지만요. 그리고 거기서 열어주세요. 세상으로 나가는 철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세요. 우리를 데려가주세요. 볼 수 있는 것이라곤 하늘뿐인 이 침묵의 새장에서 우리를 꺼내주세요.“
_P.144
“우리는 작아지고 있어.” 어느 날 엘레오노르가 말했다. “우리는 녹아내리고 있는 거야.” 로라가 대답했다. 걱정에 가득 찬 이네스는 정원으로 나가 의연하게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아직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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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자들의 목소리
황모과 지음 / 래빗홀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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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로놀로지 채널은 과거의 현장을 관찰하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으로 민호와 다카야는 서로 다른 목적으로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때로 간다. 민호의 조선인 학살을 막으려는 노력이 결국 다카야를 변화시키고 달출과 평세의 죽음뿐인 피난길에서 타인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않은 행동이 미야와키를 살렸고 그로 인해 사요를 만나 그들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희망을 만날 수 있다.
아픈 역사를 마주해야 할 때 무력감 때문에 힘들다. 그렇지만 마주해야 한다. 그들이 역사를 은폐하고 왜곡한다면 그에 맞서는 방법은 잊지 않는 것이다. 잊히면 안 될 역사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_P.112
사람이 수없이 쓰러졌다. 쓰러진 이들은 모조리 조선인이었다. 무기를 든 일본인 그림자가 끊임없이 조선인을 살육해 강 아래로 떨어뜨렸다. 현장에서 함께 웃고 떠들던 형님 중 하나일 거였다. 여기까지 와서 만난 것도 인연이라며 이제껏 가족처럼 지내던 사람이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물이 핏물처럼 붉었다.
_P.240
근데 조센징은 어떻게 생겼어?
도깨비처럼 생겼어?
뿔이 있대?
아버지가 그러셨어.
아주 질이 나쁜 놈들이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대.
더럽고 냄새나고 못생겼고 화를 내고 있고 폭탄을 들었대.
일본인들을 죽이고 다니느라 온몸이 피범벅이래!
징그럽고 거짓말도 하고 불을 지르고 털이 많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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