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친구나 가족에게는 더더욱 할 수 없었다.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지금보다 더 별나 보이고 싶진 않았다. 내가 찾은 피난처는 책이었다. 어머니에게서 배운 독서 습관은 아주 어릴 적부터 배어 있었다. 내가 지루하다고 짜증 낼 때, 나를 인도네시아 국제학교에 보낼 여력이 없을 때, 애 봐줄 사람이 없어 나를 데리고 일하러 가야 할 때 어머니는 으레 책을 내밀었다. 가서 책을 읽으렴. 다 읽고 나서 뭘 배웠는지 말해줘.

p27



어머니는 인도네시아에서 일을 계속하며 내 동생 마야를 키우느라 나를 하와이에 보내 외조부모와 몇 년간 살 게 했다. 잔소리하는 어머니가 없어지자 예전만큼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고 성적도 금방 표가 났다. 그러다 10학년 즈음에 변화가 찾아왔다. 우리 아파트 맞은편 센트럴 유니언 교회의 바자회에서 오래된 양장본이 담긴 통 앞에 서 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떤 이유에선지 나는 관심이 가거나 막연히 친숙해 보이는 책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랠프 엘리슨과 랭스턴 휴스, 로버트 펜워런과 도스토옙스키, D.H, 로런스와 랠프 월도 에머슨의 책들이었다. 중고 골프채를 눈여겨보던 외할아버지는 책 담은 상자를 들고 가는 나를 보고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도서관 열 작정이냐?"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에게 조용히 하라며 문학에 대한 나의 느닷없는 관심을 대견해하면서도, 언제나 실용주의자였던 분답게 <죄와 벌>을 파고들기 전에 학교 숙제에 집중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나는 이 책들을 모두 읽었다. 때로는 친구들과 농구하고 맥주를 마신 뒤 집에 돌아와 밤늦게, 때로는 일요일 오후 보디서핑을 즐길 후 외할아버지의 낡아빠진 포드 그라나다에 홀로 앉아 좌석이 젖을까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책을 읽었다. 바자회에서 산 책을 다 읽고는 다른 벼룩시장에 가서 더 읽을 것들을 찾아보았다. 그 때 읽은 것들 대부분은 막연하게만 이해했다. 낯선 단어는 동그라미를 쳐뒀다가 사전에서 찾아봤지만, 발음은 깐깐히 따지지 않았다. 20대에 훌쩍 접어들고도 뜻은 아는데 발음하지 못하는 단어는 많았다. 나의 지식엔 체계가 없었다. 운율도 패턴도 없었다. 나는 집 차고에서 낡은 브라운관과 볼트와 남은 전선을 모으는 꼬마 기술자 같았다. 이걸로 뭘 할지는 몰랐지만, 내 소명의 성격을 알아내는 날엔 쓸모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P28




¶ 메모


2021년 8월 23일

책이 정말 무겁다. 두 손으로 들고 읽으면 얼마 못가 팔 통증으로 내려놓게 되고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읽으면 자세가 구부정해서 그것도 얼마 못간다. 그래서 독서대에 올려두고 읽는데 진도가 많이 나가지 못해서 책이 쫙 펴지지 않고 기우뚱하다. 이러나 저러나 불편한 무게 실로 오랜만에 온몸으로 채감하며 읽는 맛도 나쁘진 않지만 다음 개정판이 나오거든 무게를 줄이는 방향은 어떠실런지.


읽은 페이지까지 정리하자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유년기 시절의 회고하는 이야기. 그 중에서 백안관 관저 안에 있는 로즈 가든에 관한 시선도 좋았는데 백안관 가든에서 일한지 40년이 되었다던 에드 토머스와 첫 만남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핏줄과 마디가 나무 뿌리처럼 굵은 그의 손이 내 손을 감쌌다.'


오바마 대통령이 이토록 문학적인 사람이었단 말이야? 라는 감탄의 끝에 어린 시절 책을 참 열심히 읽었다는 회고에 의문을 풀게 되었다. 역시 '책'이었구나. 힘든 사람, 아픈 사람, 즐거운 사람, 기쁜 사람. 외로운 사람, 좌절한 사람 등등 어떤 사람에게나 공평하게  즐길 수 있는 바로 그것! 물론 본인이 원해야 얻을 수 있다는 조건이 붙지만.


전직 대통령의 글이라 읽기 어려울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편안하게 읽고 있다. 아직 초입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또 열심히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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