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9일.
독서일기 #8
육아를 시작하기 전 독서 스타일은 한 권의 책을 다 읽기 전에는 다른 책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그런데 육아를 하고 늘 잠과 시간에 쫓기다보니 독서 시간은 줄어들고 줄어든 독서시간에 비해 읽고 싶은 책들은 늘 넘쳐났다. 하루는 읽고 있던 책이 있음에도 너무 궁금한 책을 펼쳐들었는데 그만 홀딱 빠져서 읽게 되었고 그 궁금증이 해소되어가던 찰라 또 다른 궁금한 책을 펼쳐들었다가 또 빠져들어서 읽게 되었다. 결국은 약 두 달에 걸쳐 찝적거리며 읽던 책들을 모두 읽었고 매우 만족스러웠는데 굳이 한 권의 책만 읽어야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이런 자유로운 독서도 괜찮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문학과 육아와 투자서라는 하나의 연결점도 없는 주제들 사이에서 매일 관심사로 찝적대며 책을 읽고 있다. 아이가 커가면 내게 '여유'가 조금 생길 줄 알았는데 얼마나 헛된 희망이었는지 뼈져리게 느껴가는 나날들이다. 아이의 요구 사항은 더욱 거세고 거대해지며 아이의 체력은 슈퍼맨과 아이언맨 그 경계 어디쯤에 있는 듯하다. 그래서 시간이 날 때마다 궁금했던 책들을 이 책 저 책 조금씩 맛을 봤더니 그만 이렇게 쌓이게 되었다. 모두 즐겁기는 하다. 단 하나 이언 매큐언의 <스위트 투스>만 빼고.
요즘 정말이지 거대한 이야기, 스토리가 나를 집어 삼켜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육아와 떨어져 들어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세계가 나의 책장, 내 책들 사이 어딘가에 존재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래서 한때 라이트 노벨이라 불리우는 <알바뛰는 마왕님>이란 소설을 즐겁게 읽기도 했다.
<알바뛰는 마왕님>의 간략 스토리는 인간 세계에서 군림하던 마왕이 용사에게 쫓겨 게이트로 도망쳤는데 도망친 곳이 일본이라는 설정. 그런데 일본에 왔더니 마력을 쥐어짜야 겨우 나오는 수준이라 한마디로 무일푼에 집도 절도 없는 신세. 할 수 없이 여러가지 일을 하며 겨우 돈을 마련해 작은 집세를 얻고 맥도날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정식 직원이 되는 꿈을 품고서 열심히 알바를 뛴다는 스토리. 내용이 참신하고 재미도 있고 일본 거리와 문화를 잘 표현해서 내쳐 4권까지 재밌게 읽었는데 아마도 4권 말인가 5권쯤 부터 스토리가 점점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늘어지는 김에 잠시 쉬기로 하고 그 늘어지는 부분을 잡아줄 다음 책으로 이언 매큐언의 <스위트 투스>를 집어들었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 '세리나'에게 너무 실망한 나머지 매 장을 넘기면서 더 읽어야 하나 말아야하나 질척거리다가 결국 중간 부분에 덮고야 말았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이라면 <속죄>와 <칠드런 액트>를 읽었기에 그간 보여준 그의 저력을 의심하지 않았건만 세리나를 통해 드러나는 그의 변태적 욕망이 빤하고 저속해보여서 그만 놓아주기로 했다. 거기다 더해 영국의 과거사에 한톨의 궁금증도 없었던 내게 탁상공론만 이어지는 늙다리 요원들의 토론은 어느 곳에서 웃어야 할지 알 수 없기도 했다. 읽으며 화가 부글부글 차올랐고 눈을 비벼가며 읽어보려고 노력했던 헛된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을 날려버릴 책 한 권을 책장에서 뽑아들었는데 그게 바로 지금 읽고 있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약속의 땅>이다.
책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첫 느낌은 표지를 보고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는 것과 책의 두께 때문에 흉기로 느껴졌다. 책의 페이지가 무려 800쪽이 넘는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자서전 2권이 또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아직 몇 페이지 못 읽었지만 백악관에서의 생활과 8년간 임기를 지내며 갖게 된 생각들 사상들 관점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들어가는 글부터 나쁘지 않았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나의 대통령 임기가 끝난 직후이자 미셸과 함께 마지막으로 에어포스 원(대통령 전용기-옮긴이)을 타고 서부로 날아가 오래 미룬 휴가를 보낸 뒤였다.
나이 들며 참 고맙게 생각하게 된 부분이 있는데 한 권의 책을 사면 한 사람의 인생관을 통째로 사들일 수 있다는 점이다. 책장에 꼽아두면 언제 어느 때나 만날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점이 참 감사하게 느껴진다. 최근에 읽었던 책으로 꼽자면 강방천 저자의 <관점>이 피터 린치의 <전설로 떠나는 월가의 영웅>이 그러했다. 버락 오바마의 저서 <약속의 땅>역시 그런 책으로 분류되길 소망한다. 800페이지 종주하는 그날까지 이 느낌 그대로 가져가기를.
'해바라기 씨앗 초콜릿'을 손으로 집어먹던 아이가 갑자기 책을 읽고 있던 내게 다가오더니 (막을 틈이 없었다) 손으로 덮석 책을 잡아 쥐고 빼앗으려 해서 책에 초콜릿 자국이 남아버렸다.
말해두지만 나는 정말 책을 깨끗하게 읽는 걸 좋아한다. 책에 대한 결벽증 내지 강박증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아이와 함께 있다 보면 책에 여기저기 흔적이 남게 되고 때론 무한한 인내심을 발휘해야 할 때가 많아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해 읽는 것은 꿈도 못꾼다. 이런 사정으로 훌쩍 늘어난 책 구입 덕분에 책장에 책이 넘쳐나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하나의 골칫거리가 되어가고 있지만 육아가 끝나는(그런 날이 오려나?) 그날까지 모르쇠로 일관할 것임을 기록해두는 바이다. 땅땅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