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저는 어쨌든 읽기에 대해 조금 더 섬세하게 말할 의사가 있는 사람이므로 독서가 무용하다고 하여 그것을 하지쌀을 이유는 없다고 기본적으로 생각합니다. 대학에 진학할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모든 학생이 중고등학교를 때려치우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책을 읽었다 하여 훌륭한 인간이된다는 보장은 없으며, 때로는 뱀의 몸통을 손으로 붙잡는 식으로 책을 이상하게 읽고서 오히려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인간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보통은 책을 읽고 난 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일어나기 쉬운 일입니다. 무용하면 무용한 대로 다만 이어가는 것, 그것이 읽기 아닐까요 읽기의 자리에 살기를 넣으면 어떻습니까. 아가씨가책 읽기를 좋아해서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눠줄 사람이필요했다는 것은 어쩌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가씨는 책 읽기에 별 관심 없었을지도 모르고 심지어 사람 읽기만큼이나 책 읽기 자체를 중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둘다 텍스트라는 점에서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는 했다는 겁니다. 그 집에서 보스 옆에 있는 동안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나마 손닿는 데 있던 게 책이라고 한 권씩 무심코 꺼내 읽었을지도 모릅니다. 각 인물과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무언지 잘 모르고 그냥 휜 것은 좋아요 검은것은 글자라는 정도만 인식하면서 책장을 넘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사이 그가 시키는 대로 사람을. 구체적으로는상처를 읽어나가는 일을 계속하면서 한 명의 사람이 한 권의책이라는 오랜 은유를 버렸겠지요. 아가씨 앞에 던져진 것들은인격이 아니라 상처라는 매개였을 뿐이고, 그걸 통해 아가씨가읽어낸 것들은 한 권의 책이 아니라 한 개의 구절이나 몇 개의단어에 불과했으니까요. 그 총체적인 난독 혹은 남독의 나날동안 아가씨의 삶은 뜻한 적 없던 패턴을 그려나갔습니다. 어차피 사람들과의 관계를 허락받지 못한 이상 그의 회사에 다닐필요가 없다고 단념했고-물론 회사는 인간관계를 구축하가는 곳이 아닙니다만 관계의 원천봉쇄라면 얘기가 또 다르지않습니까그의 회사에 가지 않기로 했는데 어떤 회사인들 다니게 해줄 리 없고, 취업할 예정이 없어진데다 캠퍼스 생활을허락받지 못하여 대학에 갈 의미도 퇴색했는데, 강실장이 시험장에 동행한다는 조건을 수락해가며 아가씨가 자신에게는 의미 없는 수능시험까지 치른 건 순전히 감정적 사치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책을 읽고 공부한 시간이. 그 사치가아가씨를 살게 했다고는 볼 수 없는 걸까요. 타인의 상처를 읽어야만 했던 아가씨에게 책이란 그것을 그냥 넘겨 보는 것만으로도 한 존재를 덮는 궁륭이 되어주지 않았을까요.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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