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가 나를 잡아먹은 것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내가 악의를 품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첫 줄을 썼다
“악의만이 전부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p.59
그 순간이었다. 쇠창살 사이로 누군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어? 나느 쇠창살 앞으로 다가섰다. 안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이럴수가. 어떤 여자가 호텔 터 한가운데 서 있었다. 분명히 출입금지라고 했는데 어떻게 들어갔지? 관계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녹색 재킷에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베이지색 치마를 입었고, 머리는 한 갈래로 묶고 있었다. 호리호리했지만 키는 별로 크지 않았다. 입술이 매우 붉고 도톰했는데, 내가 알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어서 더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p.66-67
연주의 표정이 보기 좋았다. 그래. 저 당당한 얼굴 때문에 나는 늘 그녀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오고 싶은 것이다. 한 명당 백오십환, 꼭 그것만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연주를 대할 때는 당숙모를 마주하고 있을 때처럼 마음이 옥죄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일을 맡겼고, 나는 그에 부응하면 됐으니까. 그래 ‘동등’p.103-104
폭탄이 떨어지던 날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내 가족들은 우왕좌왕했다. 추측이다.그랬을 것이다. 그들이 어땠을지 나는 전혀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도망쳤으니까. 나는 혼자 온 힘을 다해 뛰었다.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소리가 너무 컸다. 무서웠다. 나는 갯벌에 납작 엎드렸다. 축축한 진흙에 몸 전체가 젖었다. 난느 얼굴까지 땅에 처박았따. 진흙맛이 느껴졌다. 나는 어둠 속에서 몸을 떨었다. 그 와중에도 젖은 몸에서 나는 축축한 느낌이 싫었다. 손 끝에 만져지는 미끌미끌한 진흙이 싫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연주에게 그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끔은 나도 꿈을 꿔. 지금 꿈을 꾸는 건지 현실인지 헷갈려하면서, 그때 일이 계속 반복되는 그런 꿈이야. 나는 갯벌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있어. 숨이 막히고, 무서워서 온몸이 떨리고, 눈을 뜨면 아무도 없어.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주위를 봐. 다른 사람들은? 가족들은? 모두 어디에 있지?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어. 아무도. 나는 몸을 떨며 옆을 바라봐. 그리고 시선을 멈추고 말지.
거기에는 내가 있어. 길게 옆으로 누워서 눈을 뜨고 있는 내가 있어.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어가는, 죽어가는 내가 있어. 나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나를 흔들어.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나를 쳐다봐. 아직 죽지 않은 거야. 하지만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몸이 떨리고 입에서는 침과 피가 흐르고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나는 손을 뻗어 내 눈을 감기는데, 잘 안 돼. 눈꺼풀이 자꾸만 다시 위로 올라가. 내리면 다시 올라가고, 내리면 다시 올라가고, 결국 나는 손으로 내 눈꺼풀 위를 덮고 있어. 아주 오래도록. 그래서 나는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해. 나는 숨을 막고 울어. 제발 끝내주세요. 이런 마음을 그만 느끼고 싶어요. 너무 지쳤어요. 제발 중단하게 해주세요. 이 삶을. 이 마음을. 이 고통을……하지만 입에서는 계속 진흙맛이 나. 나는 살아 있어.p.128-129
살아 있는 것들은 기껏해야 똑같이 살아 있는 존재에게 해를 끼칠 뿐이죠. 나는 살아있는 것들은 무서워하지 않아요. 살아 있는 것들이 남긴 것을 두려워하죠. 그건 무엇일까요. 원한, 고통, 절망 그런 것들일까요. 무엇에 원한이 있는 걸까요. 알 수 없죠. 그렇기에 두렵죠. 실체를 알 수 없으니까요. 자신이 왜 원한을 가졌는지조차 잊어버린 존재들. 그래서 오직 원한만 기억하는 존재들. 지우고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 존재들. p.141-142
네 증조할아버지는 세계를 유람한 뒤 각지에서 얻은 영감으로 독특한 건물들을 지었다. 그리고 그 건물은 그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을 기묘한 체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단다. 조선이라 불리던, 일본의 식민지였던 나라의 작은 항구도시에 가셨을 때의 일이야. 그곳의 한 호텔에서 보낸 하룻밤이 얼마나 기이했던지.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날이 밝자마자 우마차를 불러 수도로 향했다고 하셨지. 네 증조할아버지는 말씀하셨어. 거기에는 악마가 있었다고! 너는 동양에 대해 잘 모를 테니 그 경험이 어떤 건지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악으로 가득한 건물이라.... 덕분에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는 충분히 되었어요. 배신감과 미움, 질투와 실망, 그 감정들이 한데 뒤엉켜 내 안을 흔들었고, 이제 첫 문장을 쓰기만 하면되었죠. p.152
그것은 내게 속사이기까지 했어요. 잘 들어, 제대로 들어, 이런 걸 듣고 싶어했잖아? 이런 걸 원했잖아? 이런 걸로 네 글을 완성하고 싶어했잖아? 모르겠어? 이런 소리가 없으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무엇도 쓸 수 없지. 이게 너를 작가로 만드는 거야. 그러니까 너는 이곳에서 절대 나갈 수 없어. 여기 박혀서 그 가짜들을 휘갈겨대기나 해! 나는 악의를 느꼈어요. 밖으로 나가려 할수록 그 감정은 더욱 깊어지며 나를 짓눌렀어요. 도저히 이곳에서 나갈 수가 없었어요.
이전에는 확신이 있었어요. 어떤 곳의 분위기를 읽어내는 사람은 나라고요. 내가 그것을 읽어내고, 그렇게 해서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고. 하지만 여기에는 진짜가 있어요. 여기서 무언가를 만드는 건 내가 아니에요. 다른 존재예요. 그가 나를 만들고 있어요.
당신들은 진짜인가요?-p154-155
이 건물은, 원한을 끌어들이는 것 같아. 사람들의 미움을, 증오를 자꾸만 집어삼키는 것 같아. 서로를 배반하라고 부추기는 것 같아.p158
지영현과 그 강아지. 종숙이. 피투성이였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찌. 생각해보면 그래. 나는 그 애들을 늘 구분하지 못했어. 종숙이가 지영현과 어울리기 시작한 이후로는 더 그랬어. 그년, 지영현에게 단어를 배우기 시작했거든. 되바라지고 똑 부러지게 말하는 계집애가 하나에서 둘이 된거야. 그것들이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어려운 말을 쓰고, 큰 소리로 웃고.....p.232
뢰이한- 저는 중국인이지만 중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지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제 고향은 람청인데, 저는 그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저는 이곳에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고향 음식을 먹으면서 자랐지요. 대체 그 고향음식이란 뭘까요? 람청 음식일까요? 인천음식일까요? 어쨌든 저는 계속 그 음식을 먹고 싶어요. 그리고 만들고 싶어요. 아마 앞으로 제가 만드는 음식은 저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음식이 되겠지요. 고향이 없지만 고향을 그리워 하는 사람들. 고향이 없기에 고향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p.284
결국 이야기를 쓴다는 건, 살아가는 일과 비슷한 것 같다. 매일매일 할 수 잇는 일을 하면서 그냥 계속 살아나가는거. 삶은 그런 식으로 지속되는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 마음이 결국은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해준 것이라 믿는다. p.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