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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리엔트 ㅣ 이산의 책 24
안드레 군더 프랑크 지음, 이희재 옮김 / 이산 / 2003년 2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테마가 유럽중심주의를 반박하는 것이라는 평가는 너무나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 그냥 읽히는 대로 읽으면, 유럽중심주의는 그저 또 하나의 인종우월주의일 뿐이다. 혹은 승리자의 손에 씌여진 역사가 승리자의 관점을 반영하듯, 지극히 당연한 인간적인 편향일 뿐이다. 우리의 지혜가 깊어지면서, 동양이 세계에서 부상하면서 자연스럽게 수정될 편견일 뿐이다. 결국 시간이 해결해준다.
위의 얘기가 꼭 틀린 것도 아니고 인종주의적 얼간이들이 세상에 널린 것도 사실이지만, 보다 진지한 이들에게는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유럽중심주의는 표면일 뿐, 그 이면에는 보다 근원적인,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이 문제의 진정한 의미를 절반 정도만 의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지혜보다는 그의 진실성 덕분에 그는 자신의 의도를 넘어서 이 근원적인 문제를 드러내는데 중요한 한 몫을 해주었고, 그것만으로 이 책은 고전들의 반열에 오를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한 마디로 말하면, 유럽중심주의는 근대성의 문제이다. 왜 근대가 유럽에서 시작되었나. 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근대 체제의 대변자들이 유럽에서 탄생했나. 유럽중심주의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 파생된 것이며, 이를 빼놓은 채 유럽중심주의를 논하는 것은 인종주의와 같은 유치한 수준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자는 이를 겨냥하는 정확한 질문을 던지지도 못한다. 그러니 정확한 답변이 나올 리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일종의 답변 아닌 답변을 하는데, 이는 볼 줄 아는 이에게만 보이는 대목이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저자 스스로도 그렇게 되묻는다. 과연 자본주의라는게 있다면... 그는 여러 대목에서 이처럼 유보적인 표현을 쓰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논의 방향과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서로 상충된다는 것을 느꼈다는 징후이다. 저자가 속해있는 세계체계 진영의 월러스틴이나 아리기 등은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하면서 역사에 대한 전체론적 관점을 도입했다. 이들은 세계라는 하나의 장에서 각 지역간의 상호작용을 객관적으로 그리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이 '자본주의'라는 문제는 전체론적인 역사관의 구현을 최종 심급에서 좌절시키고 다시 유럽중심주의로 회귀하게끔 만들었다. 자본주의의 탄생은 유럽 내생적으로, 요소론적으로밖에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전체론적 관점, 이 양립할 수 없는 둘 사이에서 그들은 태생상 자본주의의 문제를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그려낸 역사는 뒤틀려있다. 전체론적 관점과 자본주의 사이의 어정쩡한 타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선택에 직면한 저자는 자신의 동료들과 다르게 자본주의를 포기하고 완전한 전체론적 관점을 택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본주의라는 개념에 최초의 균열을 만들어낸다.
관점을 바꿨더니 자본주의가 없어졌다? 실로 흥미로운 문제다. 관점이란 보는 사람의 위치 설정의 문제다. 그런데 이쪽에서 봤을 때는 보이던 것이 저쪽에서 보니까 없다? 보는 사람의 시력에 문제가 없다면, 답은 하나다. 보이는 대상이 환영이라는 것. 자본주의가 일종의 환영이라는 얘기다. 말이 되는가. 저토록 강고하게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환영이라니. 이에 대한 해답은 별도로 글을 써야 할 주제이기에 일단 덮어두겠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해답의 단초는 토스타인 베블런의 이론에 있다고만 밝혀둔다. ('자본의 본성에 대하여'를 읽을 것) 한 마디만 더 하면, 이 모든 문제가 다 칼 마르크스 때문이며, '자본'이 뭔지도 모르면서 자본주의의 극복을 떠들어댄 그가 오히려 자본주의를 이해할 수 없는 괴물로 만들었다는게 내 생각이다.
이 책이 지나치게 경제사에 치중되어 있다는 점은 아쉽다. 왜냐하면 경제 하나만으로는 역사의 하부구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 스스로 밝혔듯이 이 책은 리소스가 제한된 환경에서 쓰여졌으며, 무엇보다 이는 해답이 아닌 질문을 던지기 위한 책이다. 너무나도 거대한 의문 부호를 던진 것만으로도 저자는 커다란 공헌을 했다. 무엇보다 객관성을 포장하지 않고 자신의 진심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저자의 솔직함을 나는 사랑한다. 이처럼 딱딱한 내용을 읽으면서 저자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은 흔치 않다. 고인께서 편히 영면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