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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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동설이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처음 이론으로 성립한 것은 주관이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으로부터 대상이 주관의 형식에 의해 능동적으로 구성된다는 생각으로의 전회에 의해서이다. 칸트가 중시한 것은 후자처럼 보인다. 그리고 칸트 이후의 관념론은 거기서 성립한다. 하지만 그때 칸트가 하려고 했던 전회가 원래 지동설, 다시 말해 세계는 우리가 구성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세계 속에 던져졌다는 생각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잊혀졌다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칸트 자신이 당장 그의 영향 아래서 성장한 관념론자에게 반격했다. 과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사건은 한 번으로 끝이다. 그러나 칸트의 코페트니쿠스적 전회는 한 번으로 끝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트랜스크리틱'이라고 부른다.

가라타니 고진이 이 책의 이름을 '트랜스크리틱'이라고 지은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다. 찬찬히 살펴보자. '주관이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으로부터 대상이 주관의 형식에 의해 능동적으로 구성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단다. 전자는 기존의 사상이고 후자는 칸트의 사상이다. 당시 사상사를 살펴보면,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혹은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화두였고 여기에 칸트는 '우리가 '물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정신적 형식에 따라 이를 구성하는 것이다'라고 답한 것이다. 또 뒤에서 고진은 '세계는 우리가 구성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세계 속에 던져졌다는 생각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잊혀졌'단다. 두 인용문을 대응시켜보자. '주관이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은 '세계는 우리가 구성한 것'이라는 생각과 대응하고, '대상이 주관의 형식에 의해 능동적으로 구성된다는 생각'은 '우리가 세계 속에 던져졌다는 생각'과 대응한다. 이 두 쌍들은 능동성이라는 양과 수동성이라는 음의 태극이다. 주관이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은 곧 주관이 대상을 물 자체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주관은 세계 전체를 자기 안에 품을 수 있는 진정한 능동체의 위상을 지닌다. 반면, 대상이 주관의 형식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은 곧 대상을 물 자체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의 부재를 전제로 하며,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품기는 커녕 그 속에 던져진 수동적 존재에 불과하다. 즉, 수동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능동적 의도에서 출발하고, 능동성을 강조하는 내용은 수동적인 의도를 담고 있다. 사상적 외관과 사상을 만들어낸 의도가 서로 대립적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따라서 칸트의 사상적 외관은 능동성을 강조하지만, 이는 인간의 수동적인 위상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칸트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관념론이 생겨났단다. 즉,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인간의 위상을 능동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사상이 그의 사상적 기반 하에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에 칸트의 추종자 가라타니 고진은 분연히 선언한다. 칸트적 사상에 기생하면서 그의 의도에 반하는 사상들을 물리치기 위해 그는 칸트의 바통을 이어받는다고. 그리고 칸트의 세 가지 비판의 연장선이면서도 이를 넘어서기 위해, 그는 자신의 비판을 '초월하는 비판(트랜스크리틱)'이라 명명한다.

다시 칸트로 돌아가보자. 그의 사상은 '대상이 주관의 형식에 의해 능동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고진이 모든 것을 깔끔하고 간결하게 정리하는 능력을 갖춘 것만은 확실하다) 근데 이상한 점이 있다. 그의 사상은 이전까지의 사상의 전회라고 했다. 근데 이는 ‘주관이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여기에 불일치가 있다. 칸트의 주체는 ‘주관의 형식’이고 이전의 주체는 ‘주관’인 것이다. 어라.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문제가 되지 않을 듯 하다. 주관’의’ 형식이니까. 형식이란 주관이 지배하는 거니까 결국 주체성은 '주관'에 귀속된다. 정말 그런가. 그렇다면 주관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형식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헉. 그런데 이게 안된다. 아니, 주관'의' 형식이라고 했는데 형식이 주관 맘대로 구성되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능동성은 누구의 속성인가. 오히려 주관이 아니라 형식이 아닌가. 여기에 언어적 환상이 작용한다. 실제로 능동적인 것은 주관의 '형식'인데, '주관의 형식'이라는 말 자체가 형식이 주관에 종속된다는 의미를 표현함으로써 '주관'이 능동적인 것인 양 상황이 바뀌어버렸다. 즉, 고진은 능동적인 것이 '형식'이라고 쓰고 '주관'이라고 읽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형식의 주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형식이 주관에 강제되는 것이며, 실제로 인식 행위에 있어서 능동적인 것은 형식이다. 이 형식은 이전 사상에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것으로, 이것이 어디서 오는지 그리고 이것과 주관과의 관계는 무엇인지 사실상 밝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주관은 여전히 수동적이라는 것이 칸트 사상의 결과이다.

다시 그 이전의 논의로 돌아가보자. 능동성의 의도가 수동성의 사상을 낳았고, 수동성의 의도가 능동성의 사상을 낳았다고 했다. 문제는 분명해진다. 능동성의 사상인 줄 알았던 칸트 사상이 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수동성의 의도를 갖고 있던 칸트가 능동성의 사상을 낳지 못했다는 것, 이는 곧 칸트가 자신의 의도대로 사상을 구축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칸트적인 관념론자들이 탄생하는가? 칸트의 사상이 이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수동성의 사상가들은 칸트의 사상을 너무나도 충실하게 뒤따른 죄밖에 없는 것이다 - 칸트 자신보다 더! 칸트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는 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 문제는 실제로 도출된 사상이며, 이 사상만이 전부이다. 초월하는 비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비판은 한번만 가능한 것이며, 그 한번의 기회에 모든 것을 꿰뚫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러면 이걸로 모든게 다시 무로 돌아가는 걸까. 그렇지 않다. 칸트는 역사 속의 칸트일 뿐이다. 칸트 이전에도 비판이 있었고 칸트 이후에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기존의 비판이 미처 못 다한 소임은 다음 세대의 과제로 넘어간다. 그래서 철학에도 역사가 있고 진보가 있다. 그 역사 속에서 칸트는 커다란 진일보이고, 한 개인의 사상으로서는 실패한 것이다. 고로 칸트(고진)에게 선택은 두 가지 뿐이다. 자신의 의도를 포기하거나, 사상을 포기하거나. 

칸트라면 자신의 의도를 지키고 사상을 포기한다. 즉, 스스로 실패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칸트는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진은 여기서 황당한 선택지를 찾아낸다: 이미 실패한 칸트의 사상으로 다시 한번 칸트의 의도를 관철시키고자 시도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칸트를 칸트의 사상인 채로 초월하겠다. 뭔 소린지 이해가 되는가. 구체적인 예로, 작금의 세종시 문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은 국가 발전을 위한다는 좋은 의도로 세종시 원안을 폐기한다. 그러자 격렬한 반발이 일어난다. 야당은 물론 여당까지, 충청도민은 물론 경상도민까지 모두가 세종시 원안을 고수하라고 난리다. 여느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의도와 달리 정책이 잘못 되었겠거니 하고 자책할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분노한다. '국가를 발전시키겠다는 나의 의도를 이렇게 몰라주다니! 나의 의도는 진심이므로 나의 정책은 옳다. 그러니 무조건 밀고 나간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국민은 곧 국가이니, 이 상황 또한 국가를 위하는 내 의도 하에서 풀어나가야 한다.' 그래서 이명박은 '한번 더!'를, '트랜스-세종시'를 외친다. 이른바, 과학 벨트와 기업 도시다. 고진의 주장이란게 바로 이런 식이다. 그만의 계산법으로는 세종시 원안 폐기도 성공했고 국민들의 반발도 무마시켰다고 판단한다. 현실적으로는 이렇게 엉터리 짓에 불과하지만, 사변적으로는 오히려 기발한 발상인 듯 보인다. 그는 어떻게 이런 우회로를 찾아낼 수 있을까. 근본 원인은 고진은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그는 미학자이다. 철학자의 과제는 단 한번의 붓질로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올바로 그려진 그림, 곧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미학자는 아니다. 고진에게는 그림을 완성하는 것만이 문제이며, 몇 번이나 덧칠을 했던간에 그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리든 아니든, 보기에만 좋으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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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공화국으로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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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마르크스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버리기 위해 이 책을 들었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했다.  마르크스가 천재적일 때는 그에게서 독일적인 사유가 나타나지 않을 때이다. 독일적 사유를 관념론적이라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독일적 사유의 문제는 충분히 관념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독일적 사유의 전형은 현실을 곱디곱게 다듬어 이념형을 도출해내는 것인데, 사실 이 이념형이야말로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사유가 현실을 꿰뚫지 못하고 현실을 자기 안에 품는 것, 이것이 독일적 사유의 문제이며 헤겔, 칸트, 베버 등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마르크스는 이 사유 습관을 종종 돌파해내지만, 금새 다시 돌아오고 만다. 그 역시 너무나 독일적인 것이다. 이 책은 경제학 책이 아니다 - 자본론이 그렇듯이. 그러나 엄청난 분량의 경제학'틱'한 외관으로 채워져있어 결국 독자들을 현혹시키는데 성공하고 만다. 그 와중에 아주 간간히 보여주는, 경제라는 안개 속의 사회라는 진실들은 아마도 그가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은 진실이었겠지만, 이것들이 파편적 상태로 머물지 않고 하나의 일관된 체계를 이뤄야 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은 실패했으며 이제 우리는 그에게서 배울 점만 배우고 그를 보내줘야 한다.

거대한 전환

기대가 높아서인진 몰라도 가장 실망스러운 책. 폴라니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인류학자라는 평가에 십분 공감했다. 과거를 공부하는 것은 현재를 알기 위함인데, '그 때의 진실은 이랬다!' 이상의 무엇이 있는지 모호하기만 하다. 대충 보다 지루해서 덮었는데 너무 단정짓는 걸지도...

세계 공화국으로

먼저 한계부터 밝히면, 저자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칸트를 활용하는게 아니라 칸트의 문제의식에서 그대로 머무른다는 것이며,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 사이에는 300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있고 또 그 사이에는 니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일본인이라는 점이다. 일본 정신의 특징을 나는 두 가지로 본다 - 현실 적응을 위한 자기변용, 아름다움의 추구. 이 두 가지는 맞물린다. 현실에 순응해야 하기 때문에 진리와 선을 포기하며, 아름다움의 기준을 확립하기 위해 현실을 받아들인다. 현실을 고정된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한 인간적 반응들을 고찰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칸트의 사유는 일본 정신의 입맛에 너무도 잘 들어맞으며, 이러한 진행 방식에 있어서 그는 실로 완벽하기 때문에 고진이 이를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고 칸트의 정신이 결코 일본적이지는 않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리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읽으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칸트는 철학자다. 이에 반해 고진은 어떤가. 고진이 이 책에서 밝히는 자신의 목표는 칸트가 말한 '영구 평화'이다. 왜 그는 영구 평화를 원하는가. 평화가 실현되는 방식은 현존하는 다양한 힘들이 투쟁 속에서 서로간에 균형을 이룸으로써 달성되는 것이지, 각 힘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포기하고 평화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헌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즉, 평화는 투쟁의 결과일 뿐이며, 힘들은 이를 자신의 욕망과 결코 혼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진이라는 이름의 힘의 진정한 목표는 결코 평화일 수가 없다. 평화라는 표상을 통해 그가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욕망의 대상을 발견해야 한다. 평화라는 현상 그 이면에는 서로간에 적대적인 힘들이 존재하고, 또 그 힘 이면에는 권력의지가 있다는 것, 그래서 모든 평화는 투쟁을 위한 일시적인 준비기간이라는 것을 과연 고진이 모를까. 절대 아니다. 그는 이를 일부러 외면하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평화란 미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영구히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그는 힘과 권력의지를 무대에서 제외시킨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의지의 결여 때문에, 칸트와 다르게 그는 철학자가 아니며 심지어는 정치경제학자도 아니다. 그는 미학자이다. 미를 추구하는 일본 정신의 대변자로서 그는 칸트 사상 속에서 자신이 동일시할 것을 찾았고 마르크스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세상에 구현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그가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사상적 정점이자 한계라고 짐작한다. 일본 정신이 욕망하기 위해 필요한 '현실'들 중 가장 큰 스케일의 현실이 '인류'라는 장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인류의 자기실현이 막바지에 왔다고 느낀다. 현재 인류 역사를 추동하는 다양한 힘들은 각자의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하고 이제 평화(죽음)를 이루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고진의 논의가 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그가 시대를 잘 만났기 때문이며, 그의 욕망이 앞으로의 전망과 우연히 맞아떨어진 덕분임에 불과하다. (물론 고진이 천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마르크스에 마침표를 찍는 작업에 고진은 대단히 유용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수단으로 마르크스를 아주 능숙하게 활용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사상이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뭔소리를 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고진은 마르크스에게서 취할 점과 그의 한계를 명확히 해줌으로써 우리가 다음 단계로 완전히 넘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의 또 다른 책 '트랜스크리틱'을 통해 이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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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습록 1 - 실천적 삶을 위한 지침, 제2판
왕양명 지음, 정인재.한정길 역주 / 청계(휴먼필드)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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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학은 그 시작에서 유학의 한계를 벗어났으나 그 끝에서는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왕양명의 생이 너무 짧았던 탓일까. 그의 후대가 그의 정신을 계속 밀고 나갈 수만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원래 성인은 드문 법이다.

양명학이 유학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것은 그가 유불선이 하나임을 주창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유학은 현실참여적 성향이 너무 강하여 중심을 잃었고, 불학과 도학은 중심을 지키는 성향이 너무 강하여 현실을 버렸다. 결국 셋 다 그 역량이 충분치 못했던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평에 대해 반발할 수 있다. 유학은 마음 속의 중을 지키는 것을 첫째로 꼽는데 어째서 중심을 잃었다고 하는가. 유학이 중심을 말하지만 중심을 구현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즉,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유학에서는 악을 멀리 하고 선을 행하라고 말한다. 이는 크게 잘못된 관점이다. 왜냐하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처음부터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 역량에 엄청난 제약을 받게 되고, 기존의 선악 구분 이상을 넘어설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수천년 동안 유학이 지배 계급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된 이유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관점은 무엇인가. 악을 행함으로서 선을 배우는 것이다. 내 마음 자체가 이미 천리이므로, 선과 악 또한 내 안에서 다 구별할 수 있다. 다만 성인은 앎과 행이 합쳐져 있고 범인은 앎과 행이 분리되어 있다. 고로 범인은 알지 못하는 행이 있으며, 행하지 못하는 앎이 있다. 선임을 알지만 행하지 못할 때는 부단히 노력하여 그 선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선인지 악인지 알지 못하는 행이 있을 때는 어찌할까. 몰라도 일단 그 행을 해야 한다. 그 행이 악이라도, 행하지 않는 이상은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끝내 알지 못한다. 다만 이를 행함으로써 이게 악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따라서 선도 알게 된다. 악을 전혀 행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으면 도리어 선도 모르게 된다. 다만 내가 배우겠다는 마음만 굳게 지키면, 오히려 악을 행하는 것이 선을 깨닫는 방법이 된다. 본체에 있어서는 앎이 있은 후에 행이 있게 되지만, 실제 공부에 있어서는 반대로 행을 한 후에 앎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래 마음이 이미 천리이지만 범인은 자신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악은 필수적이다. 악한 행위 없이는 선한 앎도 없다. 

이처럼 선과 악이 서로 의존하여 하나의 태극을 이루니, 선만 중시하고 악을 배척하는 유학은 실상 중심을 잃은 것이다. 반대로 불학과 도학에는 이러한 문제는 없으나, 현실에서 도피하여 은둔하기를 좋아하니 사상만 있고 실천은 없는 격이 되어버렸다. 왕양명은 이 셋이 하나임을 말하여 원래의 중심을 회복하면서도 유학의 실천적 가르침을 그대로 잇고자 했으니 이들을 더욱 발전시켰다고 할만 하다.

반면 양명학이 유학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가르침을 내리는데 의존하는 텍스트가 모두 유학 경전들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사실 그의 가르침은 유학을 뛰어넘은 것이기에 그를 통해 유학의 가르침이 보다 완전해질 수 있을 지언정, 그 자신의 가르침은 유학의 편향성에 의해 한정지어질 소지가 크다. 이 때문일까. 그의 사상을 온전히 수용할 그릇이 못 되었던 그의 제자들은 유학자의 좁은 소견에 다시 빠지고 만다. 전습록은 그의 제자들이 스승과의 문답을 정리하는 어록 모음집인데, 읽다보면 유학자의 관점에서 불학과 도학을 폄하하는 내용들이 간간히 등장한다. 이는 왕양명 본연의 견해가 아니라 제자들에 의해 변형된 것이다. 이같은 문제를 피하려면 왕양명의 사상이 왜곡없이 기록된 또 다른 어록집인 '양명선생유언록'과 함께 읽은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앞에서 말한 앎과 행의 상관관계, 이것이 왕양명 사상의 정수인 '치양지'이다. 곧 실천을 통해 내 마음의 천리를 깨닫는 공부법이다. 감히 단언하건데, 이는 유학과 불학은 물론 모든 시대의 모든 사상들을 뛰어넘어 진실로 인간 정신을 관통하는, 사상들의 사상이자 궁극의 진리라고 할만하다.  

전습록은 단순하고도 명쾌하여 읽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다만 일정 정도의 유학 텍스트들이 등장하니 이를 같이 공부할 수 있다면 동양 사상에 대한 좋은 길잡이로 활용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읽더라도 이해하는데는 크게 어려운 점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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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리엔트 이산의 책 24
안드레 군더 프랑크 지음, 이희재 옮김 / 이산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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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테마가 유럽중심주의를 반박하는 것이라는 평가는 너무나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 그냥 읽히는 대로 읽으면, 유럽중심주의는 그저 또 하나의 인종우월주의일 뿐이다. 혹은 승리자의 손에 씌여진 역사가 승리자의 관점을 반영하듯, 지극히 당연한 인간적인 편향일 뿐이다. 우리의 지혜가 깊어지면서, 동양이 세계에서 부상하면서 자연스럽게 수정될 편견일 뿐이다. 결국 시간이 해결해준다. 

위의 얘기가 꼭 틀린 것도 아니고 인종주의적 얼간이들이 세상에 널린 것도 사실이지만, 보다 진지한 이들에게는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유럽중심주의는 표면일 뿐, 그 이면에는 보다 근원적인,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이 문제의 진정한 의미를 절반 정도만 의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지혜보다는 그의 진실성 덕분에 그는 자신의 의도를 넘어서 이 근원적인 문제를 드러내는데 중요한 한 몫을 해주었고, 그것만으로 이 책은 고전들의 반열에 오를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한 마디로 말하면, 유럽중심주의는 근대성의 문제이다. 왜 근대가 유럽에서 시작되었나. 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근대 체제의 대변자들이 유럽에서 탄생했나. 유럽중심주의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 파생된 것이며, 이를 빼놓은 채 유럽중심주의를 논하는 것은 인종주의와 같은 유치한 수준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저자는 이를 겨냥하는 정확한 질문을 던지지도 못한다. 그러니 정확한 답변이 나올 리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일종의 답변 아닌 답변을 하는데, 이는 볼 줄 아는 이에게만 보이는 대목이다. '자본주의'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저자 스스로도 그렇게 되묻는다. 과연 자본주의라는게 있다면... 그는 여러 대목에서 이처럼 유보적인 표현을 쓰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논의 방향과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서로 상충된다는 것을 느꼈다는 징후이다. 저자가 속해있는 세계체계 진영의 월러스틴이나 아리기 등은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시도하면서 역사에 대한 전체론적 관점을 도입했다. 이들은 세계라는 하나의 장에서 각 지역간의 상호작용을 객관적으로 그리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이 '자본주의'라는 문제는 전체론적인 역사관의 구현을 최종 심급에서 좌절시키고 다시 유럽중심주의로 회귀하게끔 만들었다. 자본주의의 탄생은 유럽 내생적으로, 요소론적으로밖에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전체론적 관점, 이 양립할 수 없는 둘 사이에서 그들은 태생상 자본주의의 문제를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그려낸 역사는 뒤틀려있다. 전체론적 관점과 자본주의 사이의 어정쩡한 타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선택에 직면한 저자는 자신의 동료들과 다르게 자본주의를 포기하고 완전한 전체론적 관점을 택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본주의라는 개념에 최초의 균열을 만들어낸다.  

관점을 바꿨더니 자본주의가 없어졌다? 실로 흥미로운 문제다. 관점이란 보는 사람의 위치 설정의 문제다. 그런데 이쪽에서 봤을 때는 보이던 것이 저쪽에서 보니까 없다? 보는 사람의 시력에 문제가 없다면, 답은 하나다. 보이는 대상이 환영이라는 것. 자본주의가 일종의 환영이라는 얘기다. 말이 되는가. 저토록 강고하게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환영이라니. 이에 대한 해답은 별도로 글을 써야 할 주제이기에 일단 덮어두겠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해답의 단초는 토스타인 베블런의 이론에 있다고만 밝혀둔다. ('자본의 본성에 대하여'를 읽을 것) 한 마디만 더 하면, 이 모든 문제가 다 칼 마르크스 때문이며, '자본'이 뭔지도 모르면서 자본주의의 극복을 떠들어댄 그가 오히려 자본주의를 이해할 수 없는 괴물로 만들었다는게 내 생각이다.

이 책이 지나치게 경제사에 치중되어 있다는 점은 아쉽다. 왜냐하면 경제 하나만으로는 역사의 하부구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 스스로 밝혔듯이 이 책은 리소스가 제한된 환경에서 쓰여졌으며, 무엇보다 이는 해답이 아닌 질문을 던지기 위한 책이다. 너무나도 거대한 의문 부호를 던진 것만으로도 저자는 커다란 공헌을 했다. 무엇보다 객관성을 포장하지 않고 자신의 진심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저자의 솔직함을 나는 사랑한다. 이처럼 딱딱한 내용을 읽으면서 저자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은 흔치 않다. 고인께서 편히 영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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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즉 책 읽기를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책 읽지 않기'를 알아야 한다. 그럼 '책 읽지 않기'란 무엇인가. 바로 삶이다. 내가 삶을 사는 동안은 책을 읽지 않고, 책을 읽는 동안은 삶이 멈춰 있다. 삶은 무의식적 행위의 영역이고, 독서는 의식적 행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삶과 독서를 명확히 구분해야 독서의 목적이 분명해진다. 독서를 포함한 모든 '삶을 멈추는 행위'는 결국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 위함이다. 전진을 위한 후퇴, 발산을 위한 수렴이다. 그 목적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독서를 시작한다면 심각한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위의 명제는 전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이 독서에 복무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독서에 맛을 들이면 들일수록 커지는 위험이며, 이른바 고수라는 사람들이 이러한 함정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을 종종 목도하게 된다.

이에 따라 독서 행위를 살펴보면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삶의 수단으로서의 독서, 삶의 확장으로서의 독서, 삶의 대체재로서의 독서. 물론 이 유형들은 일종의 이념형들이며, 현실에서는 이 세 가지가 뒤섞인 형태로 존재한다.

먼저 삶의 수단으로서의 독서를 살펴보면, 쉬운 예로 자기계발서나 '30세 이전에 1억 벌기' 류의 책들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책을 활용하는 것이다. 가장 건강한 독서 자세다. 
 
둘째로 삶의 확장으로서의 독서. 일반적으로 일려져 있는 독서의 효과로, 책을 매개로 한 간접 체험을 통해 현실에서 필연적으로 한정되어 있는 삶의 경계를 확장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서 자세가 갖는 위험은 독서가 '간접' 체험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체험이란 나와 현실과의 만남이다. 따라서 '간접' 체험이란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것은 체험이 아닌 해석이다. 해석을 체험인 양 받아들인다는 것은, 원래 해석자가 되어야 할 내가 자신의 권리를 저자에게 내어준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내가 책을 통해 삶의 경계를 확장하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내가 나의 해석할 수 있는 힘을 버리고 저자의 해석에 굴복하는 일이 벌어진다. 저자가 빼어난 정신의 소유자라면, 이것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나의 권리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이를 양도한다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을 타인의 호의에 무력하게 맡겨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서를 체험으로 여긴다는 것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반증이기에, 문제 또한 심각해지기는 힘들다.

셋째로 삶의 대체재로서의 독서. 이것은 가장 병리적인 독서 자세이며, 소위 식자층에서 발생 빈도가 높다. 왜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가. 역시 키워드는 해석이다. 내가 해석하고 싶지만 해석할 능력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해석에 의존한다. 이는 일시적으로는 좋고 또 필요하다. 배우면 좋으니까. 그런데 무엇을 배우는가. 다른 이들의 해석을 배우는가. 아니다. 다른 이들이 해석하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흔히 경제학에서 하는 말로 '배고픈 자에게 고기를 주지 말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라'라는 격언이 있다. 참으로 경제학에서는 부적절하면서도 교육에 있어서는 적절한 말이다. 다른 사람의 해석을 보면서 그 해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해석을 역추적해나가는 것, 이를 통해 그 해석이 탄생하는 기원을 알아내는 것. 이것이 다른 사람의 해석을 접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삶을 대체하는 독서를 하는 이들은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 이들은 삶이 해석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정신이 고양된 이들이지만, 스스로 해석하는 대신 남의 해석으로 자신을 채우는 방법밖에 모르는 비루한 이들이다. 그러나 고양되기 위해서는 비루함을 거쳐야 한다. 이들이 가장 심오한 해석들을 '30세 이전에 1억 벌기'를 읽는 식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정신적으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채로 장서만 늘리게 된다면 종국엔 책을 아예 안 읽느니만 못하게 된다.

앞에도 말했지만, 이 세 가지 유형은 현실에서 뒤섞인 채로 존재한다. 또한 노력하고 진보하는 사람에게 이 세 가지를 모두 겪는 것은 필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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