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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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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 - 나 자신에 대하여 - 승리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는 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도 충분하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경험했던 비극과 실패는 나를 파멸시킨 것이 아니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에게는 환상이라는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있다. 역사의 의지를 알 사람은 누구일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폭력을 뒤엎지 않으면 안 되는 피억압자뿐이다. 패배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사람, 일체의 새로운 세계를 최후의 전투에서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뿐이다. 억압은 고통이요, 고통은 의식이다. 의식은 운동을 의미한다. 인간 그 자체가 다시 태어날 수 있으려면 수백만이란 사람이 죽어야 하고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 객관적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유혈과 죽음의 광경, 그리고 어리석음과 실패의 광경은 더 이상 미래에 대한 나의 통찰력을 가로막지 않는다.
인류 역사의 전통은 민주주의적이요, 이 전통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천부의 권리이다. 그러나 이 천부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들한테서 그것을 도둑질해 가는 자도 있다. 물은 사람을 빠뜨려 죽이기도 하고 구해주기도 한다. 오늘날 인간사회는 고요한 마을 연못이 아니라 성난 홍수이다. 사람은 반드시 헤엄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14살 때부터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나는 결코 물에서 떠나본 적이 없다. 나는 몇 차례나 스스로를 포기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파괴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민중과의 계급관계를 유지하는 것, 왜냐하면 민중의 의지는 역사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민중은 깊고 어두우며 행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단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소곤거리는 소리와 침묵의 웅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개개인과 집단들은 큰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그리하여 그 때문에 혼란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진실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되는 것이지 큰소리로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다. 민중들이 이 작은 목소리를 들을 때, 그들은 손에 총을 잡는다. 마을 노파 한 사람의 긴박한 속삭임만으로도 충분하다. 진정한 지도력은 날카로운 귀와 신중한 입을 필요로 한다. 민중의 의지에 따르는 것만이 승리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사람은 오로지 경험을 통하여 비로소 올바른 판단을 배우고 올바른 판단에 도달한다. 일정한 행동방침을 시험하는 것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침을 발견하기 위한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시험 결과 그 특정한 방침이 잘못이라는 게 입증된다면 그 시험 자체는 올바른 것이요, 올바른 것을 탐구하는 실험인 것이며, 따라서 꼭 필요한 것이다. 사회과학이라는 거대한 실험실에는 통제된 조건이라는 것이 하나도 없다. 하나의 시험관을 던져 버리고 동일하게 주어진 요소들을 가지고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험관은 단 하나밖에 없으며, 그나마도 당신이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 그 내용물이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변화해 간다. 그대가 하는 일이나 실패하는 일이 모조리 그 혼합물 속으로 섞여 들어가서 다시는 원상복구 될 수 없는 것이다.

비극은 인생의 한 부분이다. 억압을 딛고 일어서는 것은 한 인간의 영광이요, 굴복하는 것은 한 인간의 수치이다. 내게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제국주의 전쟁 속에서 자신들의 생명을 맹목적으로 포기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이 비극이다. 그것은 낭비인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억누르는 데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내게는 비극이다. 그것은 어리석음이다.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자기들이 믿고 있는 것을 위하여 싸우다 의식적으로 죽는 것은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영광이요 장렬함인 것이다. 죽음은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니다. 또한 죽음은 무익한 것도 아니요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스스로 믿고 있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싸우다 죽는 것은 행복한 죽음인 것이다. 나는 너무나 많은 인명의 낭비를 보아왔으며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마는 쓸데없는 희생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나의 경우에는 이것을 철학적으로 시인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은 늘 기억하고 있다. 혁명가들은 자기의 희생 속에서 행복하게 죽어가는 것이요, 그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청년시절의 친구나 동지들은 거의 모두가 죽었다. 민족주의자, 기독교신자, 무정부주의자, 테러리스트, 공산주의자 등등 수백명에 이른다. 그러나 내게는 그들이 지금도 살아 있다. 그들의 무덤을 어디로 정해야 하는지 따위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다. 전장에서, 사형장에서, 도시와 마을의 거리거리에서, 그들의 뜨거운 혁명적 선혈은 조선, 만주, 시베리아, 일본, 중국의 대지 속으로 자랑스럽게 흘러들어갔다. 그들은 눈 앞의 승리를 보는 데는 실패했지만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든다. 한 사람의 이름이나 짧은 꿈은 그 뼈와 함께 묻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의 마지막 저울 속에서는 그가 이루었거나 실패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그의 불사성이며, 그의 영광 또는 수치인 것이다.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이 객관적 사실은 바꿀 수가 없다. 그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사람이 역사라고 하는 운동 속에서 점하는 자리를 빼앗을 수가 없다. 그 무엇도 사람을 빠져나가게 할 수가 없다. 유일한 그의 개인적 결정이라고는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후퇴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아니면 굴복할 것인가, 가치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파괴할 것인가, 강해질 것인가 아니면 나약해질 것인가 하는 것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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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수수께끼 - 마빈 해리스 문화 인류학 3부작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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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에서 암소의 활용성 대 서양 농업의 비교
암소는 땅을 경작하는데 쓰이면서, 배설물 또한 토질 유지에 유용하게 쓰임.
반면 트랙터는 땅을 경작하는 대신 땅을 오염시키고, 이에 따라 새롭게 화학비료의 필요성을 불러옴    

기존 농업에서는 각 요소들의 효율성은 떨어졌지만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만큼은 되고, 관계론적 균형이 확립되어있음 

현대 농업에서는 각 요소들의 효율성이 훨씬 발전했지만 관계론적 균형이 깨져있음
관계론을 살필 때 두 가지 요소: 자연과 산업

산업 내적 균형이 깨졌다는 것은 암소의 전천후 활용에 비해 현대 농업에서는 트랙터에 대한 비용 따로 화학비료에 대한 비용 따로 지불해야 하는 점에서 드러남
자본주의에서는 이를 가치창출이라고 포장. 실제로는 물 흐르듯 하나의 통일성을 유지했던 농업을 망가뜨려 단계별로 분리시킴으로써 부가가치(수익)을 뽑아냄. 즉, 가치창출이라는 것은 자본의 입장에서만 그러한 것이며 농민의 입장에서는 가치파괴
관계론적 관점에서 농업이 더욱 고비용 산업으로 퇴화 

결국 토지는 트랙터에 이어 화학비료에 의해 점차적으로 오염되므로써 불모의 땅이 될 운명에 처함.
기존 농업은 자연적 비료를 공급함으로 토지의 지속성을 담보했으나, 현대 농업 방식으로는 자연적 균형이 붕괴 

일시적인 수확량은 현대 농업이 많지만 이는 자연의 파괴를 통해 이뤄지는 것으로 결국 멈출 수밖에 없음.

구조는 적응의 결과
의식은 구조의 반영인 동시에, 적응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다 

종교적인 숭배가 근거있는 이유는 인간이 자연 덕분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의 자식일 뿐이다. 반면 암소를 숭배하는 인도인들은 실제로는 암소를 잡아먹는다.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행동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의식과 행동이 통합되어있지 못하다는 단점.

왜 보다 객관적인 인식으로 발전하지 않는가
인식의 변화는 행동의 변화를 수반하며 공동체 전체의 변화를 의미하기에 '거대한 전환' 
개인과 공동체의 상호의존성 - 개인으로서의 의식은 암소를 잡아먹는데서 드러난다. 하지만 이를 공동체에 문제 제기하지 않는다. 상호간에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데서 머무르며, 이를 하나로 통합할 의지는 없다.

같은 환경에서 다른 결과가 나타날 수 있음 - 야노마모족의 호전성
객관성은 관계론적으로, 주관성은 요소론적으로

야노마모족 여성들은 왜 구타를 당연시하는가
생존의 수단으로서의 인식
자연 속에서 공동체를 이뤄야만 생존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조건
따라서 인식은 생존에 복무한다.  

페미니즘은 어떻게 시작하나
여성이라는 공동체와 남성이라는 적
현실에서 여성만의 공동체는 없다
개인 대 공동체라는 상호배타성 발현의 한 종류 - 한 집단을 위한 다른 집단의 희생 합리화. 반면에 한 개인으로서의 의식 성장이 일어남. 의식적으로 공동체를 보지 못하지만, 그럼으로써 무의식적으로 개인과 공동체를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의지가 발생.

호혜성과 재분배 제도
공동체의 정치경제 유지에 필수
환경적 요인들 - 둘간의 차이는 규모와 밀집화
많이 줄수록 뛰어나다. 물질과 정신의 상호작용
많이 갖는 것만이 장땡인 유럽인들은 이해불가

화물신앙 - 약탈하는 것이 균형의 회복임을 원주민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유럽인들은 원주민의 미개함을 비웃지만, 오히려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의 믿음 '열심히 일하는 자가 부자된다'이 거짓된 것임을 꿰뚫어본다. 부자는 일하지 않으며, 일하는 자는 부자가 아니다.

과학이 얻는 것과 잃는 것들
사물 속의 새로운 세계를 찾아낸다
부분 속에 전체가 있다
동형적인 것들의 공명이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의 변화

관찰하는 자신은 고정되어 있는 존재로 간주할 경우
나 자신이 올바른 관찰의 가장 큰 장애물
관계론적 균형을 발견할 수 없는 무능력
과학이 진행될수록 요소론적으로만 나아가며 관계론적 측면은 점차적으로 소멸
과학이 발전하여 현실에 적용되면 될수록 우리의 생존기반은 파괴된다는 역설이 성립  

격물을 통해 나 자신을 재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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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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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동설이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처음 이론으로 성립한 것은 주관이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으로부터 대상이 주관의 형식에 의해 능동적으로 구성된다는 생각으로의 전회에 의해서이다. 칸트가 중시한 것은 후자처럼 보인다. 그리고 칸트 이후의 관념론은 거기서 성립한다. 하지만 그때 칸트가 하려고 했던 전회가 원래 지동설, 다시 말해 세계는 우리가 구성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세계 속에 던져졌다는 생각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잊혀졌다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칸트 자신이 당장 그의 영향 아래서 성장한 관념론자에게 반격했다. 과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사건은 한 번으로 끝이다. 그러나 칸트의 코페트니쿠스적 전회는 한 번으로 끝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트랜스크리틱'이라고 부른다.

가라타니 고진이 이 책의 이름을 '트랜스크리틱'이라고 지은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다. 찬찬히 살펴보자. '주관이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으로부터 대상이 주관의 형식에 의해 능동적으로 구성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단다. 전자는 기존의 사상이고 후자는 칸트의 사상이다. 당시 사상사를 살펴보면,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혹은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화두였고 여기에 칸트는 '우리가 '물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정신적 형식에 따라 이를 구성하는 것이다'라고 답한 것이다. 또 뒤에서 고진은 '세계는 우리가 구성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세계 속에 던져졌다는 생각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잊혀졌'단다. 두 인용문을 대응시켜보자. '주관이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은 '세계는 우리가 구성한 것'이라는 생각과 대응하고, '대상이 주관의 형식에 의해 능동적으로 구성된다는 생각'은 '우리가 세계 속에 던져졌다는 생각'과 대응한다. 이 두 쌍들은 능동성이라는 양과 수동성이라는 음의 태극이다. 주관이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은 곧 주관이 대상을 물 자체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주관은 세계 전체를 자기 안에 품을 수 있는 진정한 능동체의 위상을 지닌다. 반면, 대상이 주관의 형식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은 곧 대상을 물 자체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의 부재를 전제로 하며,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품기는 커녕 그 속에 던져진 수동적 존재에 불과하다. 즉, 수동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능동적 의도에서 출발하고, 능동성을 강조하는 내용은 수동적인 의도를 담고 있다. 사상적 외관과 사상을 만들어낸 의도가 서로 대립적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따라서 칸트의 사상적 외관은 능동성을 강조하지만, 이는 인간의 수동적인 위상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칸트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관념론이 생겨났단다. 즉,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인간의 위상을 능동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사상이 그의 사상적 기반 하에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에 칸트의 추종자 가라타니 고진은 분연히 선언한다. 칸트적 사상에 기생하면서 그의 의도에 반하는 사상들을 물리치기 위해 그는 칸트의 바통을 이어받는다고. 그리고 칸트의 세 가지 비판의 연장선이면서도 이를 넘어서기 위해, 그는 자신의 비판을 '초월하는 비판(트랜스크리틱)'이라 명명한다.

다시 칸트로 돌아가보자. 그의 사상은 '대상이 주관의 형식에 의해 능동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고진이 모든 것을 깔끔하고 간결하게 정리하는 능력을 갖춘 것만은 확실하다) 근데 이상한 점이 있다. 그의 사상은 이전까지의 사상의 전회라고 했다. 근데 이는 ‘주관이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여기에 불일치가 있다. 칸트의 주체는 ‘주관의 형식’이고 이전의 주체는 ‘주관’인 것이다. 어라.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문제가 되지 않을 듯 하다. 주관’의’ 형식이니까. 형식이란 주관이 지배하는 거니까 결국 주체성은 '주관'에 귀속된다. 정말 그런가. 그렇다면 주관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형식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헉. 그런데 이게 안된다. 아니, 주관'의' 형식이라고 했는데 형식이 주관 맘대로 구성되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능동성은 누구의 속성인가. 오히려 주관이 아니라 형식이 아닌가. 여기에 언어적 환상이 작용한다. 실제로 능동적인 것은 주관의 '형식'인데, '주관의 형식'이라는 말 자체가 형식이 주관에 종속된다는 의미를 표현함으로써 '주관'이 능동적인 것인 양 상황이 바뀌어버렸다. 즉, 고진은 능동적인 것이 '형식'이라고 쓰고 '주관'이라고 읽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형식의 주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형식이 주관에 강제되는 것이며, 실제로 인식 행위에 있어서 능동적인 것은 형식이다. 이 형식은 이전 사상에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것으로, 이것이 어디서 오는지 그리고 이것과 주관과의 관계는 무엇인지 사실상 밝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주관은 여전히 수동적이라는 것이 칸트 사상의 결과이다.

다시 그 이전의 논의로 돌아가보자. 능동성의 의도가 수동성의 사상을 낳았고, 수동성의 의도가 능동성의 사상을 낳았다고 했다. 문제는 분명해진다. 능동성의 사상인 줄 알았던 칸트 사상이 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수동성의 의도를 갖고 있던 칸트가 능동성의 사상을 낳지 못했다는 것, 이는 곧 칸트가 자신의 의도대로 사상을 구축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칸트적인 관념론자들이 탄생하는가? 칸트의 사상이 이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수동성의 사상가들은 칸트의 사상을 너무나도 충실하게 뒤따른 죄밖에 없는 것이다 - 칸트 자신보다 더! 칸트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는 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 문제는 실제로 도출된 사상이며, 이 사상만이 전부이다. 초월하는 비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비판은 한번만 가능한 것이며, 그 한번의 기회에 모든 것을 꿰뚫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러면 이걸로 모든게 다시 무로 돌아가는 걸까. 그렇지 않다. 칸트는 역사 속의 칸트일 뿐이다. 칸트 이전에도 비판이 있었고 칸트 이후에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기존의 비판이 미처 못 다한 소임은 다음 세대의 과제로 넘어간다. 그래서 철학에도 역사가 있고 진보가 있다. 그 역사 속에서 칸트는 커다란 진일보이고, 한 개인의 사상으로서는 실패한 것이다. 고로 칸트(고진)에게 선택은 두 가지 뿐이다. 자신의 의도를 포기하거나, 사상을 포기하거나. 

칸트라면 자신의 의도를 지키고 사상을 포기한다. 즉, 스스로 실패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칸트는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진은 여기서 황당한 선택지를 찾아낸다: 이미 실패한 칸트의 사상으로 다시 한번 칸트의 의도를 관철시키고자 시도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칸트를 칸트의 사상인 채로 초월하겠다. 뭔 소린지 이해가 되는가. 구체적인 예로, 작금의 세종시 문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은 국가 발전을 위한다는 좋은 의도로 세종시 원안을 폐기한다. 그러자 격렬한 반발이 일어난다. 야당은 물론 여당까지, 충청도민은 물론 경상도민까지 모두가 세종시 원안을 고수하라고 난리다. 여느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의도와 달리 정책이 잘못 되었겠거니 하고 자책할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분노한다. '국가를 발전시키겠다는 나의 의도를 이렇게 몰라주다니! 나의 의도는 진심이므로 나의 정책은 옳다. 그러니 무조건 밀고 나간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국민은 곧 국가이니, 이 상황 또한 국가를 위하는 내 의도 하에서 풀어나가야 한다.' 그래서 이명박은 '한번 더!'를, '트랜스-세종시'를 외친다. 이른바, 과학 벨트와 기업 도시다. 고진의 주장이란게 바로 이런 식이다. 그만의 계산법으로는 세종시 원안 폐기도 성공했고 국민들의 반발도 무마시켰다고 판단한다. 현실적으로는 이렇게 엉터리 짓에 불과하지만, 사변적으로는 오히려 기발한 발상인 듯 보인다. 그는 어떻게 이런 우회로를 찾아낼 수 있을까. 근본 원인은 고진은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그는 미학자이다. 철학자의 과제는 단 한번의 붓질로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올바로 그려진 그림, 곧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미학자는 아니다. 고진에게는 그림을 완성하는 것만이 문제이며, 몇 번이나 덧칠을 했던간에 그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리든 아니든, 보기에만 좋으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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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공화국으로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조영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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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마르크스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버리기 위해 이 책을 들었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했다.  마르크스가 천재적일 때는 그에게서 독일적인 사유가 나타나지 않을 때이다. 독일적 사유를 관념론적이라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독일적 사유의 문제는 충분히 관념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독일적 사유의 전형은 현실을 곱디곱게 다듬어 이념형을 도출해내는 것인데, 사실 이 이념형이야말로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사유가 현실을 꿰뚫지 못하고 현실을 자기 안에 품는 것, 이것이 독일적 사유의 문제이며 헤겔, 칸트, 베버 등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마르크스는 이 사유 습관을 종종 돌파해내지만, 금새 다시 돌아오고 만다. 그 역시 너무나 독일적인 것이다. 이 책은 경제학 책이 아니다 - 자본론이 그렇듯이. 그러나 엄청난 분량의 경제학'틱'한 외관으로 채워져있어 결국 독자들을 현혹시키는데 성공하고 만다. 그 와중에 아주 간간히 보여주는, 경제라는 안개 속의 사회라는 진실들은 아마도 그가 진정으로 보여주고 싶은 진실이었겠지만, 이것들이 파편적 상태로 머물지 않고 하나의 일관된 체계를 이뤄야 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은 실패했으며 이제 우리는 그에게서 배울 점만 배우고 그를 보내줘야 한다.

거대한 전환

기대가 높아서인진 몰라도 가장 실망스러운 책. 폴라니는 경제학자가 아니라 인류학자라는 평가에 십분 공감했다. 과거를 공부하는 것은 현재를 알기 위함인데, '그 때의 진실은 이랬다!' 이상의 무엇이 있는지 모호하기만 하다. 대충 보다 지루해서 덮었는데 너무 단정짓는 걸지도...

세계 공화국으로

먼저 한계부터 밝히면, 저자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칸트를 활용하는게 아니라 칸트의 문제의식에서 그대로 머무른다는 것이며,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 사이에는 300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있고 또 그 사이에는 니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일본인이라는 점이다. 일본 정신의 특징을 나는 두 가지로 본다 - 현실 적응을 위한 자기변용, 아름다움의 추구. 이 두 가지는 맞물린다. 현실에 순응해야 하기 때문에 진리와 선을 포기하며, 아름다움의 기준을 확립하기 위해 현실을 받아들인다. 현실을 고정된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한 인간적 반응들을 고찰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칸트의 사유는 일본 정신의 입맛에 너무도 잘 들어맞으며, 이러한 진행 방식에 있어서 그는 실로 완벽하기 때문에 고진이 이를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고 칸트의 정신이 결코 일본적이지는 않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리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읽으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칸트는 철학자다. 이에 반해 고진은 어떤가. 고진이 이 책에서 밝히는 자신의 목표는 칸트가 말한 '영구 평화'이다. 왜 그는 영구 평화를 원하는가. 평화가 실현되는 방식은 현존하는 다양한 힘들이 투쟁 속에서 서로간에 균형을 이룸으로써 달성되는 것이지, 각 힘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포기하고 평화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헌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즉, 평화는 투쟁의 결과일 뿐이며, 힘들은 이를 자신의 욕망과 결코 혼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진이라는 이름의 힘의 진정한 목표는 결코 평화일 수가 없다. 평화라는 표상을 통해 그가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욕망의 대상을 발견해야 한다. 평화라는 현상 그 이면에는 서로간에 적대적인 힘들이 존재하고, 또 그 힘 이면에는 권력의지가 있다는 것, 그래서 모든 평화는 투쟁을 위한 일시적인 준비기간이라는 것을 과연 고진이 모를까. 절대 아니다. 그는 이를 일부러 외면하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평화란 미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영구히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그는 힘과 권력의지를 무대에서 제외시킨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의지의 결여 때문에, 칸트와 다르게 그는 철학자가 아니며 심지어는 정치경제학자도 아니다. 그는 미학자이다. 미를 추구하는 일본 정신의 대변자로서 그는 칸트 사상 속에서 자신이 동일시할 것을 찾았고 마르크스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세상에 구현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그가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사상적 정점이자 한계라고 짐작한다. 일본 정신이 욕망하기 위해 필요한 '현실'들 중 가장 큰 스케일의 현실이 '인류'라는 장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인류의 자기실현이 막바지에 왔다고 느낀다. 현재 인류 역사를 추동하는 다양한 힘들은 각자의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하고 이제 평화(죽음)를 이루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고진의 논의가 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그가 시대를 잘 만났기 때문이며, 그의 욕망이 앞으로의 전망과 우연히 맞아떨어진 덕분임에 불과하다. (물론 고진이 천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가 마르크스에 마침표를 찍는 작업에 고진은 대단히 유용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수단으로 마르크스를 아주 능숙하게 활용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사상이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뭔소리를 하는지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고진은 마르크스에게서 취할 점과 그의 한계를 명확히 해줌으로써 우리가 다음 단계로 완전히 넘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의 또 다른 책 '트랜스크리틱'을 통해 이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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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습록 1 - 실천적 삶을 위한 지침, 제2판
왕양명 지음, 정인재.한정길 역주 / 청계(휴먼필드)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양명학은 그 시작에서 유학의 한계를 벗어났으나 그 끝에서는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왕양명의 생이 너무 짧았던 탓일까. 그의 후대가 그의 정신을 계속 밀고 나갈 수만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원래 성인은 드문 법이다.

양명학이 유학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것은 그가 유불선이 하나임을 주창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유학은 현실참여적 성향이 너무 강하여 중심을 잃었고, 불학과 도학은 중심을 지키는 성향이 너무 강하여 현실을 버렸다. 결국 셋 다 그 역량이 충분치 못했던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평에 대해 반발할 수 있다. 유학은 마음 속의 중을 지키는 것을 첫째로 꼽는데 어째서 중심을 잃었다고 하는가. 유학이 중심을 말하지만 중심을 구현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즉,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유학에서는 악을 멀리 하고 선을 행하라고 말한다. 이는 크게 잘못된 관점이다. 왜냐하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처음부터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 역량에 엄청난 제약을 받게 되고, 기존의 선악 구분 이상을 넘어설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수천년 동안 유학이 지배 계급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된 이유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관점은 무엇인가. 악을 행함으로서 선을 배우는 것이다. 내 마음 자체가 이미 천리이므로, 선과 악 또한 내 안에서 다 구별할 수 있다. 다만 성인은 앎과 행이 합쳐져 있고 범인은 앎과 행이 분리되어 있다. 고로 범인은 알지 못하는 행이 있으며, 행하지 못하는 앎이 있다. 선임을 알지만 행하지 못할 때는 부단히 노력하여 그 선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선인지 악인지 알지 못하는 행이 있을 때는 어찌할까. 몰라도 일단 그 행을 해야 한다. 그 행이 악이라도, 행하지 않는 이상은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끝내 알지 못한다. 다만 이를 행함으로써 이게 악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따라서 선도 알게 된다. 악을 전혀 행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으면 도리어 선도 모르게 된다. 다만 내가 배우겠다는 마음만 굳게 지키면, 오히려 악을 행하는 것이 선을 깨닫는 방법이 된다. 본체에 있어서는 앎이 있은 후에 행이 있게 되지만, 실제 공부에 있어서는 반대로 행을 한 후에 앎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래 마음이 이미 천리이지만 범인은 자신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악은 필수적이다. 악한 행위 없이는 선한 앎도 없다. 

이처럼 선과 악이 서로 의존하여 하나의 태극을 이루니, 선만 중시하고 악을 배척하는 유학은 실상 중심을 잃은 것이다. 반대로 불학과 도학에는 이러한 문제는 없으나, 현실에서 도피하여 은둔하기를 좋아하니 사상만 있고 실천은 없는 격이 되어버렸다. 왕양명은 이 셋이 하나임을 말하여 원래의 중심을 회복하면서도 유학의 실천적 가르침을 그대로 잇고자 했으니 이들을 더욱 발전시켰다고 할만 하다.

반면 양명학이 유학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가르침을 내리는데 의존하는 텍스트가 모두 유학 경전들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사실 그의 가르침은 유학을 뛰어넘은 것이기에 그를 통해 유학의 가르침이 보다 완전해질 수 있을 지언정, 그 자신의 가르침은 유학의 편향성에 의해 한정지어질 소지가 크다. 이 때문일까. 그의 사상을 온전히 수용할 그릇이 못 되었던 그의 제자들은 유학자의 좁은 소견에 다시 빠지고 만다. 전습록은 그의 제자들이 스승과의 문답을 정리하는 어록 모음집인데, 읽다보면 유학자의 관점에서 불학과 도학을 폄하하는 내용들이 간간히 등장한다. 이는 왕양명 본연의 견해가 아니라 제자들에 의해 변형된 것이다. 이같은 문제를 피하려면 왕양명의 사상이 왜곡없이 기록된 또 다른 어록집인 '양명선생유언록'과 함께 읽은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앞에서 말한 앎과 행의 상관관계, 이것이 왕양명 사상의 정수인 '치양지'이다. 곧 실천을 통해 내 마음의 천리를 깨닫는 공부법이다. 감히 단언하건데, 이는 유학과 불학은 물론 모든 시대의 모든 사상들을 뛰어넘어 진실로 인간 정신을 관통하는, 사상들의 사상이자 궁극의 진리라고 할만하다.  

전습록은 단순하고도 명쾌하여 읽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다만 일정 정도의 유학 텍스트들이 등장하니 이를 같이 공부할 수 있다면 동양 사상에 대한 좋은 길잡이로 활용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읽더라도 이해하는데는 크게 어려운 점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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