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께서 편히 영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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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부를 하면서 독일의 사상들을 꾸준히 찾게 된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별로 내가 참고할만한 것이 없다. 영국은 지나치게 간소하고 프랑스는 빈 수레만 요란하다 - 들뢰즈는 예외이다. 그런데 독일의 사상가들을 면면히 살펴보면서 느끼는 건, 그 저변에 독일적 정신이라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각 사상가들에 따라 끊임없이 변주되고 시대에 따라 진보하기 때문에 결코 같은 외양을 띄지는 않지만, 그 속에는 항상 하나의 정신이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때 나는 니체만은 이러한 전통에서 벗어난, 가장 비독일적인 독일 사상가라고 생각했었다. 많은 철학사가들이 이러한 관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들은 오히려 니체를 종종 영국 경험론과 결부시키곤 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다. 니체를 영국 경험론과 결부시키는 것은 명백한 희화화이며 니체 철학의 정수를 지우는 결과만 낳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니체는 독일적 정신의 흐름 속에서 있으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초극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이렇게 놓고 보니 다른 독일 사상가들도 달리 보였다. 초극하는 사상가와 그렇지 못하고 자신의 성향으로 회귀하는 사상가, 이 두 가지 종류의 독일 사상가들을 구분해보았다.

니체는 자신의 시대와 비교했을 때, 도무지 접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날아가버린 미래의 사상가였다. 스스로도 이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는 읽을 수 있다. 자신이 어린아이가 되었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어린아이를 예감했을 뿐 분명히 사자였다. 그것도 분노에 몸부림치는 아직 젊은 사자. 니체 다음으로 깊은 인상을 받은 사상가는 짐멜이다. 아직도 인지도에서 짐멜이 베버보다 아래 있는 것은 사람들의 낮은 정신 수준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단언하건데, 베버는 짐멜보다 한 단계 아래의 사상가이며, 오늘날 짐멜은 여전히 유효한 시사점을 던져주는 반면 베버는 구시대의 유물이다. 특히나 짐멜은 니체도 하지 못했던 주관과 객관의 융합을 모색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 결과적으로는 실패라고 생각하지만. 칸트 또한 자신의 시대를 초극한 인물로 꼽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근대 학문의 기초를 제공한 인물을 평가절하하기는 힘든 일이다. 다만 오늘날 칸트를 칸트의 저작으로 공부하는 것은 시간 낭비이며, 철학 외에 여타 인문학들을 통해 그의 윤곽을 그려보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이 내가 생각하는 '초극'에 성공한 이들이다. 다음으로 성공과 실패 중간에 걸쳐있는 이로 마르크스를 들고 싶다. 그의 유물론이 단순히 헤겔의 전도가 아니기 때문에 실패는 아니지만, 그 이상의 뚜렷한 무엇을 남기지 못했다는 점에서 성공도 아니라고 본다. 그의 성공은 항상 파편적으로 희미하게만 나타나며, 이는 정신 분석에서의 증상을 연상시킨다.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마르크스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의 경우는 마치 정신의 단면이 잘려져 텍스트라는 평면 위에 펼쳐지는 드문 사건이기 때문에 항상 현상의 '이면'에만 천착하는 이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리라.

베버와 헤겔은 초극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맹위를 떨치는 사상가들이다. 때문에 나는 이들을 싫어한다. 특히 헤겔이 그렇다. 내 눈에 헤겔의 사상은 인간 정신이 퇴화할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준다. 헤겔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젝이 오늘날 세계적인 지식인이라는 점은 그 동안 수많은 선각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가 얼마나 무지몽매한지 보여주는 실례이다. 베버의 경우, 그가 철학자가 아닌 사회학자이며 그가 자신의 사상을 만들어가는데 얼마나 일관되게 노력했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에 심하게 비판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사유는 항상 현실과의 타협점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는 노력이 천재성을 넘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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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파이터 2010-02-02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스에는 베르그송과 부르디외가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가라타니 고진의 마르크스 독해는 퇴행적이다. 비록 간결하고 세련된 텍스트를 갖추고 몇 가지 논점에서 기발한 통찰을 보여주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는 마르크스를 '넘어서기'는 커녕 그의 담론 안에 머물며 사소한 부분들에 착목함으로써 중요한 부분들을 사문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는 논의를 진행하면 할수록 마르크스의 본래 함의를 점차적으로 왜곡하며, 이는 어소시에이션이라는 교환 양식을 주장하는데서 그 정점에 달한다.

그는 마르크스가 공황이라는 현상에 주목했다고 주장한다. 공황은 자본주의의 능동적인 측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능동적인 측면이란 화폐에 대한 욕망이다. 고전경제학자들은 부의 본질이 금, 은 등의 화폐에 있다는 중상주의자들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화폐는 교환 수단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에는 화폐의 축적이 자본의 운동에 있어 핵심 요인으로 작동하며,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시기가 바로 공황이다. 공황 시 모든 사람들이 화폐를 획득하는데 집착하기 때문이다. 고진이 봤을 때, 본질적으로 종이에 불과한 화폐에 대한 욕망이 현실 사회를 추동한다는 점은 경제라는 하부 구조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으며 어떤 신앙적인 문제, 종교적인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자본제 이전의 체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본제 고유의 특징이며, 이러한 능동적 측면 때문에 자본주의는 더더욱 극복하기 어려운 체제이다. 따라서 기존의 생산 양식에 대한 문제 제기로는 이를 해소하기 어렵고, 새롭게 교환 양식을 고찰함으로서 해결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 고진의 주장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연적으로 붕괴한다는 주장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공황을 해명하려 했을 뿐, 공황 자체의 중요성을 고진이 주장하는 것처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고진이 공황에 착목하는 이유는 그가 공황을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증거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터무니없는 오류다. 공황은 자본의 욕망 운동의 결과이지, 사람들의 욕망 운동의 결과가 아니다. 공황 때 사람들이 보여주는 화폐에 대한 집착은 단순히 공황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중상주의적 욕망이 아니라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일 뿐이다. 마르크스가 공황에 착목한 이유는 공황이 초래하는 생존의 위협이 자동적으로 사람들을 사회주의의 길로 이끌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고자 했을 뿐이지,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자본의 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자본의 욕망과 일치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을 때는 자본주의가 평온한 시기, 곧 호황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자본의 운동이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에 별다른 마찰없이 참여하며 심지어 능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자본의 운동이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사람들의 이탈하고자 하는 욕망도 비례해서 생긴다. 문제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점을 분명히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생존하기 위해서 자신의 욕망에 반하여 자본의 운동에 맞춰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상황이 악화되면 악화될수록 자신의 욕망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커지기 마련이며, 종국에는 폭발한다. 문제는 이러한 욕망의 폭발이 자본의 운동을 제거하고 새로운 사회 체제를 구축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다는데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과 자본을 혼동하지 않았다. 자본의 욕망과 사람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며,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만 이 둘이 결합하는 양상을 보일 때에도 이를 명료하게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고진은 이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는 '욕망'이라는 일반 명사만을 보고 '누구의 욕망'인지 질문하지 못함에 따라 자본의 욕망에 사람의 욕망이 묻어들어가는 것으로 착각했다. 욕망을 올바로 인지하는 것은 사회를 분석하는데 있어 가장 근본적인 주춧돌이 되기 때문에 그의 분석은 이미 뿌리에서부터 썩어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의 욕망이라는 단어도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실제로 욕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사람뿐이다. 그렇다고 자본가의 욕망으로 대체할 수도 없다. 실제 개별 자본가가 이를 욕망한다고 한들 이것이 자본의 운동이 영향을 줄 수 없으며, 모든 자본가들이 능동적으로 이 욕망을 갖는다고 볼 수도 없다. 욕망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은유로써, 자본의 운동 구조가 지향하는 정점을 지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결코 생기적인 것이 아니며, 여기에는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관여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만들었지만 사람들에게 귀속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지배하는 구조, 이것이 하부구조이다.  

고진이 주장하는 종교적인 구조란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구조의 욕망과 동일시할 때 생기는 심리적인 구조이다. 따라서 종교적인 구조는 하부구조의 심리적 반영일 뿐이며, 이러한 구조가 자본제만의 특징이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실례로 봉건제에서의 욕망은 지배의 욕망, 곧 영토확장의 욕망이다. 이러한 욕망이 국가와 군대라는 폭력 기구를 창출하고 전쟁을 항상적인 상태로 만든다. 다만 이것이 자본제에 비해 뚜렷하지 못한 것은, 구조의 지향점을 선취할 수 있는 기회가 자본제 안에서 이론적으로 모두에게 열려있는 데에 반해 봉건제 안에서는 특정 소수에게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욕망의 동일시가 자본제 내에서 훨씬 더 수월하다. 그러나 이 또한 국가라는 틀 안에서만 봤을 때 그러하지, 세계라는 틀로 관점을 확장시키면 얘기는 달라진다. 따라서 고진의 얘기는 하부구조가 그 성원들에게 갖는 심리적인 효과를 적시한 것일 뿐, 하부구조와 다른 근본적인 무엇을 발견한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람들이 자본의 욕망대로 행동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것이 현실(하부구조)이기 때문이지, 스스로 이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보지 못하는 고진은 하부구조의 심리적인 효과을 과대평가하여 사람들이 자본의 욕망을 내면화했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그는 생산 형식이 아닌 교환 형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데, 그에 대한 해법이 바로 어소시에이션이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주장에 비추어봐도 말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개혁의 대상이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교환 형식이든 뭐든 지금의 현실을 바꿔야 하는데, 그 바꿀 수 있는 주체들이 이미 자본주의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제시하는 해법은 윤리이다. 그러나 윤리로 욕망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계몽주의적이다. 계몽주의는 고진 스스로 화폐에 대한 논의에서 기각한 바 있다. 따라서 그는 자기 모순에 빠지며, 그의 논의 어디에도 자본주의에서 탈출할 수 있는 출구는 없다.  

고진의 문제는 하부구조에 대한 이해의 결여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그가 하부구조의 효과에 대해서 스스로 실컷 말해놓고도 이를 하부구조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은, 그가 마르크스를 올바로 독해할 위치에 있지 못하며 마르크스보다 한참 뒤떨어져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하부구조의 문제를 은폐함으로써 새로운 체제의 전망을 없애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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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즉 책 읽기를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책 읽지 않기'를 알아야 한다. 그럼 '책 읽지 않기'란 무엇인가. 바로 삶이다. 내가 삶을 사는 동안은 책을 읽지 않고, 책을 읽는 동안은 삶이 멈춰 있다. 삶은 무의식적 행위의 영역이고, 독서는 의식적 행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삶과 독서를 명확히 구분해야 독서의 목적이 분명해진다. 독서를 포함한 모든 '삶을 멈추는 행위'는 결국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 위함이다. 전진을 위한 후퇴, 발산을 위한 수렴이다. 그 목적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독서를 시작한다면 심각한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위의 명제는 전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이 독서에 복무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독서에 맛을 들이면 들일수록 커지는 위험이며, 이른바 고수라는 사람들이 이러한 함정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을 종종 목도하게 된다.

이에 따라 독서 행위를 살펴보면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삶의 수단으로서의 독서, 삶의 확장으로서의 독서, 삶의 대체재로서의 독서. 물론 이 유형들은 일종의 이념형들이며, 현실에서는 이 세 가지가 뒤섞인 형태로 존재한다.

먼저 삶의 수단으로서의 독서를 살펴보면, 쉬운 예로 자기계발서나 '30세 이전에 1억 벌기' 류의 책들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책을 활용하는 것이다. 가장 건강한 독서 자세다. 
 
둘째로 삶의 확장으로서의 독서. 일반적으로 일려져 있는 독서의 효과로, 책을 매개로 한 간접 체험을 통해 현실에서 필연적으로 한정되어 있는 삶의 경계를 확장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서 자세가 갖는 위험은 독서가 '간접' 체험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체험이란 나와 현실과의 만남이다. 따라서 '간접' 체험이란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것은 체험이 아닌 해석이다. 해석을 체험인 양 받아들인다는 것은, 원래 해석자가 되어야 할 내가 자신의 권리를 저자에게 내어준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내가 책을 통해 삶의 경계를 확장하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내가 나의 해석할 수 있는 힘을 버리고 저자의 해석에 굴복하는 일이 벌어진다. 저자가 빼어난 정신의 소유자라면, 이것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나의 권리을 전혀 행사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이를 양도한다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을 타인의 호의에 무력하게 맡겨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서를 체험으로 여긴다는 것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반증이기에, 문제 또한 심각해지기는 힘들다.

셋째로 삶의 대체재로서의 독서. 이것은 가장 병리적인 독서 자세이며, 소위 식자층에서 발생 빈도가 높다. 왜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가. 역시 키워드는 해석이다. 내가 해석하고 싶지만 해석할 능력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해석에 의존한다. 이는 일시적으로는 좋고 또 필요하다. 배우면 좋으니까. 그런데 무엇을 배우는가. 다른 이들의 해석을 배우는가. 아니다. 다른 이들이 해석하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흔히 경제학에서 하는 말로 '배고픈 자에게 고기를 주지 말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라'라는 격언이 있다. 참으로 경제학에서는 부적절하면서도 교육에 있어서는 적절한 말이다. 다른 사람의 해석을 보면서 그 해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해석을 역추적해나가는 것, 이를 통해 그 해석이 탄생하는 기원을 알아내는 것. 이것이 다른 사람의 해석을 접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삶을 대체하는 독서를 하는 이들은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 이들은 삶이 해석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정신이 고양된 이들이지만, 스스로 해석하는 대신 남의 해석으로 자신을 채우는 방법밖에 모르는 비루한 이들이다. 그러나 고양되기 위해서는 비루함을 거쳐야 한다. 이들이 가장 심오한 해석들을 '30세 이전에 1억 벌기'를 읽는 식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정신적으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채로 장서만 늘리게 된다면 종국엔 책을 아예 안 읽느니만 못하게 된다.

앞에도 말했지만, 이 세 가지 유형은 현실에서 뒤섞인 채로 존재한다. 또한 노력하고 진보하는 사람에게 이 세 가지를 모두 겪는 것은 필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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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란 한 마디로 정의하면,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읽는 것이다. 좀 더 전문적인 용어를 쓰면 텍스트를 보고 컨텍스트를 읽는 것이다. 이처럼 독서란 이중화된 작업이며, 이것을 꿰뚫어보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자신의 해석하는 마음이 타인의 해석에 점령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왜냐하면 텍스트와의 만남은 비교적 우호적이지만, 컨텍스트와의 만남은 순수하게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내가 컨텍스트의 주인이 되느냐 노예가 되느냐, 둘 중 하나밖에 없다. 여기서 지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을 반드시 또렷하게 유지해야 한다. 마음이 읽는 능동체가 되기를 멈추는 순간, 읽음을 '당하는' 수동체가 되고야 만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읽는 속도다. 자신의 정신의 속도와 리듬에 따라 텍스트를 따라가고 결코 중도에 멈추지 말아야 한다. 잠깐잠깐 메모를 할 수도 있겠지만, 리듬을 깰 정도로 오래 필기를 하거나 읽기를 멈추면 텍스트에만 매몰되어 컨텍스트에 마음이 휩쓸리고 만다. 또한 정신적으로 피로감을 느낄 수준이 되면 독서를 멈춰야 한다. 긴장감을 놓은 채 눈으로만 텍스트를 따라가는 것 역시 노예가 됨을 의미한다. 

읽을 때만큼이나 읽지 않을 때도 중요하다. 읽지 않을 때는 읽은 바를 소화시키기 때문이다. 소화란 나에게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골라내 내 몸에 흡수하거나 몸밖으로 배출하는 과정이다. 책 또한 이와 같이 나에게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을 골라내야 하며, 이는 나의 의식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무의식이 하는 역할이다. 그리하여 완전히 소화하면 의식에 남는 것이 없어 마치 처음부터 안 읽은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남이 물어보면 다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화되지 못하면 계속 의식에 남으므로,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것이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기 때문인지 아니면 책의 내용이 잘못되었기 때문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 또한 나의 무의식이 알려주는 것으로, 전자의 경우 다시 정독하거나 이에 답할 수 있는 새로운 책을 찾아야 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틀린 부분을 버려야 한다. 한 번에 책을 완전히 소화하기란 드문 일이기에 텀을 두고 여러번 읽는 것이 보통이다. 정말 뛰어난 책은 평생을 두고 읽어도 소화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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