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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습록 1 - 실천적 삶을 위한 지침, 제2판
왕양명 지음, 정인재.한정길 역주 / 청계(휴먼필드)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양명학은 그 시작에서 유학의 한계를 벗어났으나 그 끝에서는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왕양명의 생이 너무 짧았던 탓일까. 그의 후대가 그의 정신을 계속 밀고 나갈 수만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원래 성인은 드문 법이다.
양명학이 유학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것은 그가 유불선이 하나임을 주창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유학은 현실참여적 성향이 너무 강하여 중심을 잃었고, 불학과 도학은 중심을 지키는 성향이 너무 강하여 현실을 버렸다. 결국 셋 다 그 역량이 충분치 못했던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평에 대해 반발할 수 있다. 유학은 마음 속의 중을 지키는 것을 첫째로 꼽는데 어째서 중심을 잃었다고 하는가. 유학이 중심을 말하지만 중심을 구현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즉,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유학에서는 악을 멀리 하고 선을 행하라고 말한다. 이는 크게 잘못된 관점이다. 왜냐하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처음부터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행위자는 자신의 행위 역량에 엄청난 제약을 받게 되고, 기존의 선악 구분 이상을 넘어설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수천년 동안 유학이 지배 계급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로 활용된 이유이다.
그렇다면 올바른 관점은 무엇인가. 악을 행함으로서 선을 배우는 것이다. 내 마음 자체가 이미 천리이므로, 선과 악 또한 내 안에서 다 구별할 수 있다. 다만 성인은 앎과 행이 합쳐져 있고 범인은 앎과 행이 분리되어 있다. 고로 범인은 알지 못하는 행이 있으며, 행하지 못하는 앎이 있다. 선임을 알지만 행하지 못할 때는 부단히 노력하여 그 선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선인지 악인지 알지 못하는 행이 있을 때는 어찌할까. 몰라도 일단 그 행을 해야 한다. 그 행이 악이라도, 행하지 않는 이상은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끝내 알지 못한다. 다만 이를 행함으로써 이게 악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따라서 선도 알게 된다. 악을 전혀 행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으면 도리어 선도 모르게 된다. 다만 내가 배우겠다는 마음만 굳게 지키면, 오히려 악을 행하는 것이 선을 깨닫는 방법이 된다. 본체에 있어서는 앎이 있은 후에 행이 있게 되지만, 실제 공부에 있어서는 반대로 행을 한 후에 앎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래 마음이 이미 천리이지만 범인은 자신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악은 필수적이다. 악한 행위 없이는 선한 앎도 없다.
이처럼 선과 악이 서로 의존하여 하나의 태극을 이루니, 선만 중시하고 악을 배척하는 유학은 실상 중심을 잃은 것이다. 반대로 불학과 도학에는 이러한 문제는 없으나, 현실에서 도피하여 은둔하기를 좋아하니 사상만 있고 실천은 없는 격이 되어버렸다. 왕양명은 이 셋이 하나임을 말하여 원래의 중심을 회복하면서도 유학의 실천적 가르침을 그대로 잇고자 했으니 이들을 더욱 발전시켰다고 할만 하다.
반면 양명학이 유학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가르침을 내리는데 의존하는 텍스트가 모두 유학 경전들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사실 그의 가르침은 유학을 뛰어넘은 것이기에 그를 통해 유학의 가르침이 보다 완전해질 수 있을 지언정, 그 자신의 가르침은 유학의 편향성에 의해 한정지어질 소지가 크다. 이 때문일까. 그의 사상을 온전히 수용할 그릇이 못 되었던 그의 제자들은 유학자의 좁은 소견에 다시 빠지고 만다. 전습록은 그의 제자들이 스승과의 문답을 정리하는 어록 모음집인데, 읽다보면 유학자의 관점에서 불학과 도학을 폄하하는 내용들이 간간히 등장한다. 이는 왕양명 본연의 견해가 아니라 제자들에 의해 변형된 것이다. 이같은 문제를 피하려면 왕양명의 사상이 왜곡없이 기록된 또 다른 어록집인 '양명선생유언록'과 함께 읽은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앞에서 말한 앎과 행의 상관관계, 이것이 왕양명 사상의 정수인 '치양지'이다. 곧 실천을 통해 내 마음의 천리를 깨닫는 공부법이다. 감히 단언하건데, 이는 유학과 불학은 물론 모든 시대의 모든 사상들을 뛰어넘어 진실로 인간 정신을 관통하는, 사상들의 사상이자 궁극의 진리라고 할만하다.
전습록은 단순하고도 명쾌하여 읽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다만 일정 정도의 유학 텍스트들이 등장하니 이를 같이 공부할 수 있다면 동양 사상에 대한 좋은 길잡이로 활용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읽더라도 이해하는데는 크게 어려운 점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