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지동설이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처음 이론으로 성립한 것은 주관이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으로부터 대상이 주관의 형식에 의해 능동적으로 구성된다는 생각으로의 전회에 의해서이다. 칸트가 중시한 것은 후자처럼 보인다. 그리고 칸트 이후의 관념론은 거기서 성립한다. 하지만 그때 칸트가 하려고 했던 전회가 원래 지동설, 다시 말해 세계는 우리가 구성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세계 속에 던져졌다는 생각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잊혀졌다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칸트 자신이 당장 그의 영향 아래서 성장한 관념론자에게 반격했다. 과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사건은 한 번으로 끝이다. 그러나 칸트의 코페트니쿠스적 전회는 한 번으로 끝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트랜스크리틱'이라고 부른다.

가라타니 고진이 이 책의 이름을 '트랜스크리틱'이라고 지은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다. 찬찬히 살펴보자. '주관이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으로부터 대상이 주관의 형식에 의해 능동적으로 구성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단다. 전자는 기존의 사상이고 후자는 칸트의 사상이다. 당시 사상사를 살펴보면,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혹은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화두였고 여기에 칸트는 '우리가 '물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정신적 형식에 따라 이를 구성하는 것이다'라고 답한 것이다. 또 뒤에서 고진은 '세계는 우리가 구성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세계 속에 던져졌다는 생각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잊혀졌'단다. 두 인용문을 대응시켜보자. '주관이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은 '세계는 우리가 구성한 것'이라는 생각과 대응하고, '대상이 주관의 형식에 의해 능동적으로 구성된다는 생각'은 '우리가 세계 속에 던져졌다는 생각'과 대응한다. 이 두 쌍들은 능동성이라는 양과 수동성이라는 음의 태극이다. 주관이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은 곧 주관이 대상을 물 자체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주관은 세계 전체를 자기 안에 품을 수 있는 진정한 능동체의 위상을 지닌다. 반면, 대상이 주관의 형식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은 곧 대상을 물 자체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의 부재를 전제로 하며, 따라서 우리는 세계를 품기는 커녕 그 속에 던져진 수동적 존재에 불과하다. 즉, 수동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능동적 의도에서 출발하고, 능동성을 강조하는 내용은 수동적인 의도를 담고 있다. 사상적 외관과 사상을 만들어낸 의도가 서로 대립적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따라서 칸트의 사상적 외관은 능동성을 강조하지만, 이는 인간의 수동적인 위상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칸트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관념론이 생겨났단다. 즉, 그의 의도와는 반대로 인간의 위상을 능동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사상이 그의 사상적 기반 하에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에 칸트의 추종자 가라타니 고진은 분연히 선언한다. 칸트적 사상에 기생하면서 그의 의도에 반하는 사상들을 물리치기 위해 그는 칸트의 바통을 이어받는다고. 그리고 칸트의 세 가지 비판의 연장선이면서도 이를 넘어서기 위해, 그는 자신의 비판을 '초월하는 비판(트랜스크리틱)'이라 명명한다.

다시 칸트로 돌아가보자. 그의 사상은 '대상이 주관의 형식에 의해 능동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고진이 모든 것을 깔끔하고 간결하게 정리하는 능력을 갖춘 것만은 확실하다) 근데 이상한 점이 있다. 그의 사상은 이전까지의 사상의 전회라고 했다. 근데 이는 ‘주관이 대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여기에 불일치가 있다. 칸트의 주체는 ‘주관의 형식’이고 이전의 주체는 ‘주관’인 것이다. 어라. 하지만 좀 더 생각해보면 문제가 되지 않을 듯 하다. 주관’의’ 형식이니까. 형식이란 주관이 지배하는 거니까 결국 주체성은 '주관'에 귀속된다. 정말 그런가. 그렇다면 주관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형식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헉. 그런데 이게 안된다. 아니, 주관'의' 형식이라고 했는데 형식이 주관 맘대로 구성되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능동성은 누구의 속성인가. 오히려 주관이 아니라 형식이 아닌가. 여기에 언어적 환상이 작용한다. 실제로 능동적인 것은 주관의 '형식'인데, '주관의 형식'이라는 말 자체가 형식이 주관에 종속된다는 의미를 표현함으로써 '주관'이 능동적인 것인 양 상황이 바뀌어버렸다. 즉, 고진은 능동적인 것이 '형식'이라고 쓰고 '주관'이라고 읽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형식의 주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형식이 주관에 강제되는 것이며, 실제로 인식 행위에 있어서 능동적인 것은 형식이다. 이 형식은 이전 사상에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것으로, 이것이 어디서 오는지 그리고 이것과 주관과의 관계는 무엇인지 사실상 밝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전과 마찬가지로 주관은 여전히 수동적이라는 것이 칸트 사상의 결과이다.

다시 그 이전의 논의로 돌아가보자. 능동성의 의도가 수동성의 사상을 낳았고, 수동성의 의도가 능동성의 사상을 낳았다고 했다. 문제는 분명해진다. 능동성의 사상인 줄 알았던 칸트 사상이 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수동성의 의도를 갖고 있던 칸트가 능동성의 사상을 낳지 못했다는 것, 이는 곧 칸트가 자신의 의도대로 사상을 구축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칸트적인 관념론자들이 탄생하는가? 칸트의 사상이 이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수동성의 사상가들은 칸트의 사상을 너무나도 충실하게 뒤따른 죄밖에 없는 것이다 - 칸트 자신보다 더! 칸트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는 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 문제는 실제로 도출된 사상이며, 이 사상만이 전부이다. 초월하는 비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비판은 한번만 가능한 것이며, 그 한번의 기회에 모든 것을 꿰뚫지 못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러면 이걸로 모든게 다시 무로 돌아가는 걸까. 그렇지 않다. 칸트는 역사 속의 칸트일 뿐이다. 칸트 이전에도 비판이 있었고 칸트 이후에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기존의 비판이 미처 못 다한 소임은 다음 세대의 과제로 넘어간다. 그래서 철학에도 역사가 있고 진보가 있다. 그 역사 속에서 칸트는 커다란 진일보이고, 한 개인의 사상으로서는 실패한 것이다. 고로 칸트(고진)에게 선택은 두 가지 뿐이다. 자신의 의도를 포기하거나, 사상을 포기하거나. 

칸트라면 자신의 의도를 지키고 사상을 포기한다. 즉, 스스로 실패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칸트는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진은 여기서 황당한 선택지를 찾아낸다: 이미 실패한 칸트의 사상으로 다시 한번 칸트의 의도를 관철시키고자 시도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 칸트를 칸트의 사상인 채로 초월하겠다. 뭔 소린지 이해가 되는가. 구체적인 예로, 작금의 세종시 문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은 국가 발전을 위한다는 좋은 의도로 세종시 원안을 폐기한다. 그러자 격렬한 반발이 일어난다. 야당은 물론 여당까지, 충청도민은 물론 경상도민까지 모두가 세종시 원안을 고수하라고 난리다. 여느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의도와 달리 정책이 잘못 되었겠거니 하고 자책할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분노한다. '국가를 발전시키겠다는 나의 의도를 이렇게 몰라주다니! 나의 의도는 진심이므로 나의 정책은 옳다. 그러니 무조건 밀고 나간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국민은 곧 국가이니, 이 상황 또한 국가를 위하는 내 의도 하에서 풀어나가야 한다.' 그래서 이명박은 '한번 더!'를, '트랜스-세종시'를 외친다. 이른바, 과학 벨트와 기업 도시다. 고진의 주장이란게 바로 이런 식이다. 그만의 계산법으로는 세종시 원안 폐기도 성공했고 국민들의 반발도 무마시켰다고 판단한다. 현실적으로는 이렇게 엉터리 짓에 불과하지만, 사변적으로는 오히려 기발한 발상인 듯 보인다. 그는 어떻게 이런 우회로를 찾아낼 수 있을까. 근본 원인은 고진은 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그는 미학자이다. 철학자의 과제는 단 한번의 붓질로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올바로 그려진 그림, 곧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미학자는 아니다. 고진에게는 그림을 완성하는 것만이 문제이며, 몇 번이나 덧칠을 했던간에 그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진리든 아니든, 보기에만 좋으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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