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기억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얼마전에 환자들의 임종을 예견하는 고양이에 대한 에세이를 읽었다. 그 고양이가 있는 곳은 노인환자 전문 요양원으로 치매에 걸린 노인환자들의 이야기가 많았다. 치매에 걸린 사람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의사와 환자의 가족 입장에서 묘사한 글들을 보며, 환자 자신도 그렇겠지만, 가족들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고, 힘들어 하는지를 잘 알게 되었다. 

오기와라 히로시의 내일의 기억은 약년성 알츠하이머라는 진단을 받은 50대 가장의 입장에서 이야기되는 소설이다. 언급했던 에세이는 의사와 환자의 가족이라는 다소 객관적인 입장이었으나, 내일의 기억은 환자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 주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외부적인 요소보다는 환자가 겪는 내부적인 갈등, 어려움, 번민, 고통, 그리고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최대한 극복하기 위한 노력 등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것이 바로 이 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치매와 알츠하이머가 똑같은 병인줄 알지만 사실은 좀 다르다고 한다. 증상은 비슷하지만, 치매는 뇌혈관의 문제로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주로 노인들에게 발병하지만, 알츠하이머는 뇌세포가 죽어가면서 생기는 것으로 연령에 제한이 없으며, 유전 가능성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제 50대에 들어선 광고회사 부장 사에키씨. 그는 최근 들어 두통과 불면에 시달리고 있다. 과중한 업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클라이언트. 그러나 회사에 나가는 시간이 제일 편안하다고 느낄만큼 일에 열심이다. 가족은 외동딸 하나. 그리고 곧 결혼 예정이다. 평범하기만 했던 그에게 이상징후가 찾아온 것은 그저 과로와 업무적 스트레스라고만 생각했지만, 이런저런 검사를 받은 결과, 약년성 알츠하이머라는 선고가 내려진다.

이제 50대라면 아직 살 날도 해야할 일도 많은 나이이다. 그런 사람에게 갑자기 알츠하이머 진단이라니. 사에키씨는 처음엔 부정을 하고, 분노하지만, 결국 수용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회사에는 알리고 싶지 않아 모든 걸 메모하고, 잊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병은 조금씩 그의 기억을 갉아 먹어 들어 간다.

최근의 일에 대한 기억이 자꾸만 없어지고, 길을 헤매기도 하고, 아내가 약속이 있다고 나간다고 하면 혹시 외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도 생긴다. 하지만 그와 그의 아내는 그를 지키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 잊지 않도록 메모하고, 또 메모하고, 알츠하이머에 좋다는 생선 요리며, 호박 요리를 먹고, 발아 현미차를 마시는 등 끊임없이 병과 싸워간다. 

딸의 결혼과 출산까지 회사에 남기 위해 애쓰고,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서 그는 요양원을 알아보러 다니기도 한다. 가족들에게 최대한 폐를 덜 끼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 기억을 잃어가는 상황이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전구의 필라멘트가 툭하고 끊어지듯 툭툭 끊어져가는 기억들.
사에키씨의 병은 생각보다 너무나도 빨리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딸의 얼굴도 사진을 보지 않으면 기억나지 않고, 사위의 이름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리고 점점더 그는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사에키씨는 자신의 병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보통 발병해서 5년, 길어야 7년정도에 사망까지 이르게 되는 병. 그러나 절망하고 힘겨워할 시간은 없다. 어떻게 해서든 남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보내야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에키씨의 기억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으로 끝난다. 아내의 얼굴을 알아 보지 못하고, 이름을 묻는 장면. 가슴이 시리고, 코끝이 찡해졌다.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병, 그리고 기억의 소멸과 더불어 인격까지 변해 겉모습은 똑같지만, 속알맹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는 병. 이 소설은 이 병이 가져오는 환자와 환자 가족의 고통이나 절망, 슬픔 보다는 병을 극복하려 애쓰고, 남겨진 시간을 사랑으로 채우려는 한 남자의 사투를 그리고 있다. 물론, 사에키씨가 늘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절망하지만, 그래도 의지마저 꺾지는 않는다.

주인공의 행동과 심리 묘사는 세세하고 치밀해서 사에키씨란 사람이 이 글을 쓴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또한 광고제작회사에서 일했던 자신의 경력을 살려 만들어낸 주인공 광고 제작 회사 부장과 그들이 하는 일들은 이 책의 현실감을 더욱 살려준다. 

이제껏 읽었던 오기와라 히로시의 책중에는 배꼽 잡게 만드는 유머코드를 가미한 책도 있었고, 기담류의 책도 있었다. 그때도 감탄했었지만, 이 책까지 읽은 지금, 작가의 저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달까.

이 책은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든다기 보다는, 한 남자로서,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의 사에키상의 모습이 가슴을 짠하게 만든다.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담담하게 그에게 절대 찾아 오지 않을 미래를 준비하던 그의 모습은 쉬이 잊힐 것 같지 않다.

우리는 현실에서 아등바등 살다 보니, 자신의 기억속에 남겨진 것들이 얼마나 따사로운 것들이었는지, 아름다웠던 것들인지 잊고 살기 쉽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라는 선고를 받게 된다면? 그제서야 후회를 하는 게 바로 우리들 인간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현재 우리에게 내린 행복에 감사하고,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