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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구원받는다는 것 - 삶을 파괴하는 말들에 지지 않기
아라이 유키 지음, 배형은 옮김 / ㅁ(미음) / 2023년 6월
평점 :
나는 수십 년을 소외와 고독 속에서 살았다. 가족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각별하게 지내는 친구나 지인도 없다. 어릴 때부터 병원생활을 하면서 사회화라는 개념이 정립되지 못하였고, 친구들의 무리에서 항상 배제되어야만 했다. 어떻게 해서 끼어든다고 해도 지속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친구들 대하는 일에 서툴렀고, 그런 나를 받아줄 친구는 당연히 없었다.
친구 대하는 일이 조심스럽다보니, 선뜻 다가가는 일도 못했다. 누군가를 콕 집어 “나랑 친구하자!” 따위의 말을 꺼내는 법도 몰랐다. 그렇게 나는 소위 ‘가마니’가 되어서 괴롭힘을 당하게 되었다. 어떤 아이는 나더러 “멍청하다.”, “지능이 떨어진다.”라고 했다. 나는 공부도 잘 못했으며, 수학문제는 풀 때마다 틀려서 선생님에게 지적을 당하곤 했다.
아무도 나 같은 아이와 짝이 되기 싫어하니 당연히 체육 수업이나 졸업사진 촬영에서는 혼자 남아야 했다. 혼자 남은 내게 “니가 조 짜면 되지 않느냐”며 되도 않는 욕설을 퍼붓는 걸 그대로 감당했다. 결국 담임선생에 의해 나를 가장 심하게 따돌리고 짓밟던 아이들과 한 조가 돼야만 했다. 당연히 아이들의 괴롭힘은 더욱 극심해졌다.
급식으로 배정된 우유에 구멍을 내서 내 자리에 놔두거나, 우유에 내 번호를 적어놓고 구석에 숨겨놓는 경우도 있었다. 책상에 놔둔 내 교과서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발길질했다. 이러한 현상은 졸업할 때도 이어졌고, 중학교 때도 계속됐다. 고등학교 때는 여자고등학교로 배정받긴 했지만 따돌림을 당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이런 내가 대학교에서 온전하고 건강한 인간관계를 맺는 건 어려웠다. 누구에게나 관계가 어렵다고 하지만 나의 경우는 모든 일이 내 잘못으로 귀결돼 항상 내가 먼저 사과해야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개신교 교회 및 동아리 사람들의 무례함도 분명히 한몫했지만 관계에 서투른 나는 항상 약자였고 을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대학 졸업하기 직전에 갔던 정신과에서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나연씨는사람들이왜싫어하는것같아요?” 라고 두 번이나 되물어서 상처받고 집에 오다가 주저앉아버린 기억이 난다. 지금 다니는 대학병원에는 그렇게 말한 분이 없지만 당시에는 집과 그나마 가깝고 유명하대서 잠깐 다녔더랬다. 이런 과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난 평생 버림받으며 살겠구나 싶었다.
대학 졸업하고 나서 교육대학원에서도 조교 선생님이나 학부생들에게 무시와 경멸을 받으면서 장학조교로 일했다. 그나마 교수님들이 개인적으로 많이 챙겨주셔서 무사히 다닐 수 있었다. 먼 곳에서 오는 나에게 따로 식사도 사 주셨고 자살을 생각했던 내게 심리상담 선생님도 알선해 주시는 등 이러한 혜택이 없었다면 나는 수료 자체를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논문을 준비해서 얼른 졸업해야 하지만 나에게는 교육이 적성에 맞지 않다는 걸 깨닫고 나서 조금씩 내려놓는 중이다. 선생님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고 공부도 잘 못해서, 특히 시간강사를 하던 동안 내겐 애들을 지도할 능력 자체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시점부터 임용고시 준비하던 것도 일제히 버려버렸다.
소외되는 순간은 학생 때든 성인이 되어서든 괴롭다. 나의 발언권을 빼앗아 다른 이들에게 넘기는 경우도 많이 겪었다. 겨우 입을 열면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들 속에서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는답시고 교회에 눌러앉았더니 돌아오는 건 능멸이었다. 나는 개신교 교회와 완전히 손절했다. 개신교 교회와 손절하고 나니 타들어가던 속이 다시 아물어갔다.
나는 지금도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준다고 말하면 상당히 조심스럽고 불안하다. 그래서 신체접촉을 최대한 꺼린다. 아니 극도로 싫어한다. 이야기도 좀처럼 하려 하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골라내 겨우 꺼낸 이야기가 남들에게 무시당하거나 질책당하지 않을까 걱정부터 앞선다. 내가 꺼낸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주제에 안 맞는 이야기”가 되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로 전락하는 경우를 수없이 겪었다.
심지어 이성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이성과 논리를 강요당했다. 나의 이야기는 그렇게 짓밟히고 무시당했다. 내가 징징대고 투정부리는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내가 글로써나마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 이야기가 항상 무겁고 버겁다고 말하지만 인생이 이런 걸 어쩌겠는가. 그러면 즐거운 얘기 하는 사람한테 가서 행복한 얘기나 듣든지.
세상에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없고 경시되어야 할 이야기도 없다.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약한 이들,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가 묻히고 사라진 세상에서는 폭력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사 읽고 부지런히 서평을 쓰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