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시청광장의 세월호 희생자 합동 분향소를 다녀왔다. 그곳에서 느낀 감정은 슬픔 못지 않은 무서움과 무력감이었다. 한 시간 남짓의 시간을 들여 분향소를 찾아 간 것 외에 나의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분향소를 가기 몇 분 전만 해도 좋은 시집을 샀다며 즐거워했으며 분향 후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집에 빠르게 가는 방법을 찾아봤고 내일 제출해야 하는 과제를 걱정했다. 주변 역시 마찬가지였다. 광장 옆 차도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차들과 사람들이 제 갈 길을 향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흡연구역에는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의 승진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함께 간 친구는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야 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이번 사건처럼 잔인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쉽사리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쉽사리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비록 정답은 아닐지라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타인에 대해 공감하고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공감만으로 무엇도 바꿀 수 없지만 반대로 공감 없이는 무엇도 바꿀 수 없다. 타인의 상처에 함께 아파하고 타인의 슬픔에 함께 슬퍼하는 것,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모습이 아닐까. 류근 시인의 시집 『상처적 체질』의 뒷 표지에 쓰인 짧은 산문을 되뇌 본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직 아픈 사람이 있어 내 청단풍잎 같은 손바닥으로 그의 이마를 짚어줄 수 있으면 좋으리. 문득 겨울을 맞은 나무처럼 삶의 지붕이 쓰라린 사람일 때엔 낮은 데서 빛나는 종소리 한 줌의 무게로 다가가 그의 가슴을 쓰다듬을 수 있으면 좋으리. 조금은 가난하고 조금은 깊어진 음성으로 먼 눈나라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으면 좋으리. 손금이 마주치는 순간의 평화와 안식을 얹어줄 수 있으면 좋으리. 그러나 아아, 그 아프고 쓰라린 사람이 영원히 나여서 단 하루라도 돌아가 그의 손 아래 내 이마와 어깨 눕힐 수 있으면 좋으리. 멀고 깊은 눈나라에 고요히 갇힐 수 있으면 좋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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