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파과, 낯선 사람은 위험하다

 

 과거에서부터 세계 어느 도시를 가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하루 종일 어디를 가던 낯선 사람들과 밀접하게 생활을 한다는 점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지하철을 타고 낯선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며 거리에서 수많은 낯선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게 된다. 도처에 낯선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확실성을 안겨준다. ‘즉 이처럼 낯선 사람들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점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는 수많은 불확실성의 원천이자, 보통 때는 활동을 중단한 채 잠자고 있지만 그럼에도 언제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분출될 수 있는 수많은 공격성의 원천이기도 하다.’(Zygmunt Bauman,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낯선 사람에 대한 불확실성과 예측불가능성은 한편으론 확실성과 예측가능성을 제공하기도 한다. 낯선 사람과 낯설지 않은 사람간에 경계를 지어 낯선 사람들을 철저하게 멀리하고 쫓아냄으로써 안전성과 확실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고급 정장과 액세서리가 낯익은곳인 호텔 레스토랑에 낯선추리닝과 슬리퍼가 함께할 수 없고, 고급 아파트 단지의 주민이 아닌 낯선사람은 출입을 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파과>의 주인공 조각은 어딜 가더라도 설탕처럼 녹아 들어 원래 거기에 있었던 사람인양 낯익은 듯한 사람임을 연출한다. 남들이 봤을 때 바람직하고 교양 있는 전형적인 노년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하철에 들어와 조용히 노약자석으로 향하고 큰소리로 요즘 젊은이의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시비를 걸지 않으며 옷차림 역시 다른 사람에게 시각적 공해를 줄만한 수준이 아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낯익음을 넘어 편안함을 주는 그런 존재다

 하지만 문제는 낯익음과 편안함이다. 겉으로는 낯익음과 편안함으로 가장하고 있지만 조각은 가장 낯설고 위험한 존재인 청부살인업자다. 지극히 평범한 차림을 한 노년의 여자, 이보다 완벽한 킬러의 모습은 없을 것이다. 독심술이 있지 않고서야 그를 킬러라고 생각할 수 없을 뿐더러 그의 표적 또한 자신의 목에 칼이 도달하는 순간 전 까지 그가 킬러임을 알 수 없다.

 ‘테러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아랍인, 흑인, 젊은 남성 같은 특정 유형의 사람들을 철저하고 검사하며 낯설게 여기고 멀리하지만 테러를 일으키는 사람은 우리집 옆에 사는 사람처럼 보이는 백인,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사람인 경우가 허다 하듯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보통의 할머니가 사실은 킬러인 것이다. 아무리 낯선 이들을 차단하려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정작 위험한 사람은 낯익은 사람, 혹은 낯익은 사람으로 가장한 낯선 이들이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과 그들에게서 오는 불안과 공포를 차단하기 위해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는 주택지에 살고 최신 보안 장치를 이중 삼중으로 한다 해도 우리가 느끼는 공포와 불안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늘어날 뿐이다. ‘연구서 《지상 통제 - 21세기 도시의 공포와 행복》의 저자인 애너 민턴은 이책에서 모니카라는 여인의 사례를 들려준다. 모니카는 어느 날 밤 전자식 제어문이 고장 나서 열어 둔 채로 지낼 수밖에 없었는데, 그날 밤 모니카는 잠자리에 누워 있으면서도 뜬 눈으로 밤을 꼴딱 샐 수밖에 없었고 외부인 출입 제한 주택지가 아니라 일반 거리에 살았던 지난 20년의 세월 동안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느낌을 받았다.” 결국 담장 뒤에 숨는다고 해서 불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증대된 셈이다.’(Zigmunt Bauman,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청부살인을 당한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낯선 이들을 차단하고 공포와 불안을 없애기 위해 비서를 고용해 수상한 사람과 물건을 차단하려 했지만 낯익은 사람을 가장한 출입에는 속수무책이었으며 혼자서만 쓰는 사장실은 오히려 킬러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계기가 되었고 남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사장실로 직통인 엘리베이터를 이용했지만 그것 역시 킬러가 재빨리 도망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해줬다. 결국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킬러의 안전을 지켜준 꼴이 된 것이다.

 조각 또한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을 추구한다. 지나가는 낯선 사람과의 마주치는 것을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최소화함은 물론이고 눈에 띄지 않으려 최선의 노력을 한다. 관계를 맺는 사람이라고 해봐야 고작 청부살인 에이전시의 사무직원 해우와 팀장, 자신의 전담의사인 장박사, 화장터의최씨 뿐이다. 하지만 킬러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했던 행동들은 결국 그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부상을 입었는데 하필이면 장박사가 병원에 없어서 페이닥터인 강박사에게 진료를 받게 되고 그것이 그의 가족과의 관계까지 이어지게 된 일과 지나가는 폐지를 모으는 할아버지를 돕고 얘기를 나눈 것이 나중에 투우에게 자신의 약점을 잡히게 되는 계기가 된다.

 불안과 위험을 없애기 위한 행동은 또 다른 불안과 위험을 낳는다. 낯선 이들을 차단하는 것은 오히려 낯선 이들에게 낯익은 사람으로 가장할 기회를 주는 것과 다름없다. ‘결국 여러 공포들을 몰아내기 위해 정작 자기 자신을 어떤 폐쇄적인 외부인 출입 제한 주택지 안에 가두는 일은 마치 아이들이 완벽하게 안전한 상태로 수영을 배울 수 있게 보호하려고 풀장의 물 자체를 아예 빼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Zygmunt Bauman,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문을 여는 것이다. ‘그녀가 무용과 함께 얼마 지나서부터는 이렇게 노상 창문을 열어둔다. 폭우가 들이치거나 날벌레가 심하게 모여들 때나 영하 10도를 넘는 한파가 몰아닥치면 잠시 닫기는 하지만 잠금장치만은 질러놓지 않는다.’(구명모, 파과) 그것은 낯선 이건 낯익은 이건,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시작이다. 비록 그것이 자신이 죽었을 때 키우던 개가 자유롭게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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