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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모든 것은 바다로 떨어진다
세라 핀스커 지음, 정서현 옮김 / 창비 / 2025년 2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SF 과학소설 장르를 좋아해도 수상작이나 특정 작가의 작품을 찾아 읽는 편은 아닌데 이번엔 궁금하더라고요. 최근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이 국내 최초로 필립K. 딕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이 무척 반가웠거든요. 한동안 뜸했던 장르를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 필립K. 딕의 원작 영화 덕분에 SF 소설까지 빠져들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어느새 그 미래가 우리 현실에 와 있는 게 아닌가 싶네요.
《언젠가 모든 것은 바다로 떨어진다》는 세라 핀스커의 첫 소설집이자 2020년 필립K. 딕상 수상작이라고 하네요. 우선 저자는 세계 SF 문학상인 네뷸러상, 필립K. 딕상, 휴고상, 로커스상을 연달아 수상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작가인데 국내 출간은 이번 책이 처음이라고 하네요. 이 소설집에는 모두 열세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어요. 어떤 미래를 그려냈을까요, 예전에는 상상해본 적 없는 세상을 한 걸음 떨어져 구경하는 재미였다면 지금은 어쩐지 낯설지 않은 미래세계에 접속한 느낌이 드네요. VR기기처럼 단번에 몰입되어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네요.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바람은 바랑하리>에서 우주선의 아이들이 역사 선생님에게 왜 고통스러운 과거를 기억해야 하느냐고, 역사를 무엇때문에 배워야 하느냐고 묻는 장면인데 시공간만 달라졌을 뿐이지 현재 우리의 모습 같았어요.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기억되기 어렵고,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으니까, 아픈 역사라고 해서 지워버린다면 그건 단순히 과거의 기억만 지우는 게 아니라 미래를 없애는 일인 거예요. 역사, 지금 우리가 살고 있고, 겪고 있는 모든 것들이 결국 미래를 만드는 과정임을 생각하면 엄중한 역사의 무게를 느끼는 요즘인지라 소설을 읽으면서도 온신경이 그쪽으로 쏠린 것 같아요. 우주선에 매달린 채 바이올린으로 「바람은 방랑하리」를 연주했던 할머니처럼 누군가는 연주하고, 누군가는 그 선율을 바람에 실려 전해줘야만 해요. 미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숨쉬는 이 안에 함께 있어요. 세라 핀스커의 소설이야말로 우리 내면에 잠든 뭔가를 살랑이는 바람결로 깨워주네요.
"우리가 여기 어떻게, 왜 왔는지 아는 건 중요해. 역사를 모르는 자는 그걸 반복할 운명에 처해 있다고 보통 이야기하지."
"어떻게 반복해요? 우리에게는 석유나 물이 없는데요. 총이나 칼, 폭탄도 없고요. 선생님이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우린 그것들이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내 조상이 에밀리의 조상을 죽이려고 했다는 걸 모르는 게 우리에게 더 좋은 일 아닌가요? 심지어 누군가가 그걸 다 지워버려려고 했는데도 선생님은 그게 우리의 새로운 역사에 다시 포함되도록 하셨잖아요."
"내가 아니었어, 넬슨.나보다 전 시대에 일어난 일이었지. 그만하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겠지만 이걸 배우지 않는 건 선택 사항이 아니란다. 역사 반복의 예시를 하나 찾아서 화요일까지 천 단어 이상으로 제출하도록 해."
학생들은 모두 불평을 하며 각각의 게임과 음악을 들으려고 다시 이어폰을 꽂고 문 밖으로 나갔어. 넬슨이 이 작은 반란을 주도하고 있다는 게 나에게는 흥미로웠어. 그의 증조할머니는 올드타임 기억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분이었거든. 내 할머니는 내가 역사에 집착하게 만든 사람이고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택한 이유였지만 해리엇은 넬슨에게는 그런 영향을 주지 않은 것 같았어. 넬슨은 내 책상 옆을 지나가면서 중얼거렸어. "언젠가는 모든 걸 다시 지워야 할지도 몰라요." (232-233p)
"오늘 내가 말하려는 건 여러분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여러분은 부서지고 손상된 우리 역사를, 남아 있는 모든 것을 배우러 이 수업에 왔어요. 그걸 더 부서뜨리면서도 후대에 그걸 전달하기 위해서죠. 어쩌면 모든 사실을 그 역사로부터 짜낼 때까지 그걸 계속 비틀어봐야만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서 남은 건 우리가 누구인지, 또는 우리가 누구였는지에 관한 어떤 진실일 거예요. 가장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부분이죠." (293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