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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 불일암 사계
법정 지음, 맑고 향기롭게 엮음, 최순희 사진 / 책읽는섬 / 2017년 5월
평점 :
한 번도 뵙지 못했지만 이미 제 안에는 그 분 말씀이 있어서, 늘 곁에 있는 느낌이 듭니다.
법정 스님은 떠나시는 마지막까지도 무소유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은 더 이상 출판하지 말라는...
그 분의 뜻인 줄 알면서도 못내 아쉬움이 컸습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이 책은 법정 스님의 글과 함께 최순희님의 사진이 담겨 있습니다.
어떻게 이 책이 나올 수 있었나는 최순희님과 법정 스님의 인연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5년 11월 향년 91세로 타계한 최순희님은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뼈저리게 겪었던 분으로, 법정 스님의 책을 읽고 인연을 맺으면서 평생 사셨던 분이라고 합니다.
법정 스님이 계셨던 불일암을 한 달이 멀다 하고 찾아와서 인사만 하고는 암자 구석구석을 청소한 뒤에 돌아갔다고... 그런 최 선생을 두고 법정 스님께서는 '번개처럼 왔다가 번개처럼 간다'고 표현하셨다고 합니다. 대신 한 달에 서너 통의 긴 편지를 통해서 말로 하지 못한 속마음을 털어놓았으나 현재 남겨진 편지는 하나도 없습니다. 법정 스님께서 주기적으로 소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남아 있던 것이 바로 최순희님이 불일암을 찾았을 때 찍었던 사진들입니다.
불일암의 봄여름가을겨울을 볼 수 있는 풍경사진.
이 사진 속에는 오직 풍경만 있습니다.
예쁜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푸르른 산을 보면 마음까지 상쾌해지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법정 스님이 글이 있으니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인 듯 평온합니다.
맑고 향기롭게
세상을 탓하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지닐 때
우리 둘레와 자연도
맑고 향기롭게 가꾸어질 것이고,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세상도
맑고 향기로운 기운으로 채워질 것이다.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에서 (101p)
요즘들어 마음이 자꾸만 조급해지고, 버거운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말도 많고 시끄러운 세상...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그냥 좋았습니다. 법정 스님의 말씀을 그동안 잊고 있었나 봅니다. 다시금 읽으며 마음을 다독이게 됩니다.
시끌벅적 잡동사니로 꽉 차있던 마음 속을 잠시나마 비워내고,
오로지 맑고 향기로움만 남겨보려고...
법정 스님은 꽃조차도 심지 않기로 했는데 집터 둘레에 자생적으로 피어난 달맞이꽃을 보며 간밤에 온 손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해질녘에 피는 달맞이꽃이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혼자서 피게 할 수 없어 여름내 어둠이 내리는 뜰을 한참씩 서성거렸다고 합니다.
어쩌면 최순희님은 법정 스님에게 달맞이꽃 같은 인연이 아니었을까요.
그저 저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지만 이 책이, 법정 스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법정 스님을 불일암의 사계절 사진과 글로 만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꽃 향기에 날아온 노랑 나비마냥 설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