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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 여자
가쓰라 노조미 지음, 김효진 옮김 / 북펌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영화 <매트릭스>에 나온 빨간 약과 파란 약 중에서, 당신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할 건가요?
빨간 약을 선택하면 꿈에서 깨어나 기계와 싸우는 참혹한 현실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이고, 파란 약을 선택하면 현실이라고 믿는 환상의 세계에 머물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영화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소설을 읽으면 알게 됩니다.
<싫은 여자>의 원제목은 <나쁜 여자>라고 합니다. 이 책을 읽고나면 '사람이란 참 복잡한 동물이구나... 근데 사람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가봐...'
이 소설에서는 두 여인의 일생을 볼 수 있습니다. 이십대부터 칠십대까지 다큐멘터리 '인간극장' 같은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한 명은 고타니 나쓰코. 예쁜 외모를 무기로 평생 남자들을 등쳐먹는 사기꾼. 젊을 때는 결혼사기를 치더니 결혼 후에는 간간히 문제를 일으키다가 결국 이혼하고는 본격적인 사기행각을 벌이며 살아갑니다. 신기한 건 대부분의 남자들이 속은 줄 알면서도 나쓰코를 잊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자들 눈에는 나쓰코의 흑심이 빤히 보이는데 유독 남자들 눈에만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게 놀랍습니다. 그러니까 평생 자기 힘으로 돈버는 일 보다는 남자를 이용해먹는 일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끝까지.
또 한 명은 이시다 데쓰코.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나'이기도 합니다. 나쓰코와는 동갑으로 먼 친척 사이라서, 스물넷 나이에 변호사가 된 데쓰코가 처음 맡은 일이 바로 나쓰코의 결혼 관련 문제입니다. 누가봐도 결혼사기극인데 나쓰코의 변호를 맡은 데쓰코의 능력 덕분에 잘 해결되고 그 이후 쭉 나쓰코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해결사로 데쓰코를 찾게 됩니다. 만약 변호사 입장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나쓰코와 만날 일은 없었을 것 같은데, 사람의 인연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요.
제가 이 소설에서 가장 의외라고 여긴 건, 꽤 나이들었을 때이긴 해도 나쓰코가 자기가 싫으냐고 물었을 때 데쓰코가 바로 아니라고 답했을 때입니다. 데쓰코의 진심은 나쓰코를 싫어할 거라고 짐작했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니... '나쁜 여자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만약 두 사람이 처음 사건 이후로 만나지 않았다면 100% 확실히, 데쓰코는 나쓰코를 싫어하다 못해 경멸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데쓰코는 나쓰코가 변호를 부탁할 때마다 거절하지 않고 도와줍니다. 단순히 일적으로 봤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점점 나이가 들수록 질긴 인연처럼 느껴집니다. 데쓰코 입장에서는 나쓰코의 삶이 가보지 못한 길이기에 처음에는 흥미로 시작했겠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쓰코의 삶에 깊숙히 들어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십대의 데쓰코는 나쓰코에 대한 기억이 여덟 살 때에 멈춰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두 아이에게 커다란 해바라기 꽃 무늬가 들어간 화려한 원피스를 똑같이 만들어주셔서 갈아 입었더니 어른들이 둘 다 예쁘다며 칭찬해주셨던 것, 그래서 그 원피스를 입고 신나게 놀다가 벗어서 세탁기에 넣었는데 데쓰코의 원피스가 갈가리 찢겨져 있었던 것, 알고보니 나쓰코가 저지른 일인데, 밝혀졌을 때 도리어 펑펑 울면서 "내가 더 잘 어울린단 말이야!"라고 해서 원피스를 못 입게 된 데쓰코보다 울고 있는 나쓰코에게 동정심이 더 쏠렸던 것.
그런데 삼십대에도, 사십대에도... 나중에는 칠십대까지 나쓰코의 삶을 지켜본 데쓰코는 나쓰코에게 의외의 면을 발견합니다.
나쓰코는 남자들을 속여서 돈을 뺏었을지는 몰라도 그들에게 꿈과 환상을 심어줬다고, 그래서 남자들은 행복했는지도 모른다고. 비록 거짓일지라도... 어쩌면 남자들 입장에서는 나쓰코가 매트릭스에 나오는 파란 약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쓰코는 정말 나쁜 여자일까요?
데쓰코는 변호사로서 여러 사람의 유언장을 작성하면서 인생에 대해 배웁니다. 혼자만 외롭고 힘든 게 아니었구나...삶이란 그 자체로 소중한 거구나...
사람은 저마다 생긴 대로 살아가는 법이니까, 부디 너무 늦기 전에 깨닫기만을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