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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 - 직장인의 어깨를 다독인 51편의 시 배달
김기택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비가 오면 질퍽거리는 흙길.
운동화에 흙이 잔뜩 묻는 게 싫었습니다.
널린 게 흙길이니까. 꽃가루 날린다고 나무들을 거침없이 베어버리던 때니까.
그냥 모조리 콘크리트 길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 자랄 틈 없이 말끔하게 깔려 있는 콘크리트 길이 더 좋은 줄 알았습니다.
비가 와도 절대 스며들지 않는 콘크리트 길.
이제는 신발에 흙 묻을 일 전혀 없는 그 길을 걷다가 문득 야속하게 느껴졌습니다.
너는 너, 나는 나.
<다시, 시로 숨쉬고 싶은 그대에게>는 김기택 시인이 2010년 오월부터 일 년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임명한 문학 집배원이 되어 평소에 즐겨 읽거나 좋아하는 시를 소개하고 짤막한 감상을 더하여 인터넷상에 올렸던 글들을 다시 다듬어낸 책입니다. 51편의 시들은 일 년간 배달한 것이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나누어져 있습니다. 시인이 읽는 시는 어떤 시일까요? 김기택 시인은 다시, 시로 숨쉬고 싶은 그대에 시와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보냈습니다.
내게는 '시로 숨쉬고 싶은'이라는 문장이 어린 시절의 흙길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숨쉬고 싶다, 마음껏 숨쉬고 싶다고.
아마도 내 마음 속에는 시가 흙이었던 모양입니다.
"한때는 늘 어디서나 만나는 흙이라, 흔하디 흔한 흙이라, 네가 귀찮다고 여겼는데, 없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 없이도 정말 나는 괜찮을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잘 살거라고 큰소리 쳤는데... 콘크리트로 덮힌 내 마음은 하나도 괜찮지 않더라. 딱딱해져서 숨을 쉴 수 없더라.
쾅쾅 두들겨대며 벌어진 틈으로 너를 발견했어. 반갑다. 반가워."
내 마음에 슬그머니 들어온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문정희 시인의 <흙>
흙
문정희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라
심장 저 깊은 곳으로부터
눈물 냄새가 차오르고
이내 두 눈이 젖어온다
흙은 생명의 태반이며
또한 귀의처인 것을 나는 모른다
다만 그를 사랑한 도공이 밤낮으로
그를 주물러서 달덩이를 낳는 것을 본 일은 있다
또한 그의 가슴에 한 줌의 씨앗을 뿌리면
철 되어 한 가마의 곡식이 돌아오는 것도 보았다
흙의 일이므로
농부는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고
겸허하게 농사라고 불렀다
그래도 나는 흙이 가진 것 중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이름이다
흙 흙 흙 하고 그를 불러보면
눈물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가 들려온다
하늘이 우물을 파놓고 두레박으로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근래에 눈물이 많아졌습니다. 흙 흙 흙... 잊고 있던 흙이 떠올라서일까요. 시인은 그 느낌을 '슬프고 아름다운 목숨의 메아리'라고, '자신을 퍼 올리는 소리'라고 알려줍니다.
그랬구나, 흙 덕분에, 시 덕분에 이제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