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박연선 지음 / 놀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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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입담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도 굉장히 맛깔스럽게 표현하는 입담꾼이랄까.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멀찌감치 지켜보게 되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소설이 있습니다.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소설을 읽은 게 아니라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기분입니다.

"해가 똥구녕을 쳐들 때까지 자빠졌구먼. 게을러터져갖고는."

요런 거침없는 멘트를 날리는 사람은 여든 살의 홍간난 여사입니다. 그리고 이 멘트 폭격을 당하는 사람이 바로 손녀딸이자 스물한 살 처녀 강무순입니다.

충청남도 운산군 산내면 두왕리로 말할 것 같으면 케이블은커녕 공중파도 잡혔다 끊겼다 할 정도로 첩첩산중이라 스마트폰은 겨우 시계 기능뿐, 무용지물인 곳입니다.

그나마 TV는 잘 나오는지 홍간난 여사는 정확히 8시 25분이면 열일 제끼고 일일연속극을 시청합니다. 막장 드라마의 열혈팬인 거죠. 오죽하면 62년을 함께 살았던 강두용 옹의 장례식을 치른 마지막 날, 정신없이 찾던 것이 리모컨이었을까. 할아버지는 향년 83세.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셨지만 순조롭게 장례식을 치를 정도로 가족 모두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잠들었던 할머니가 갑자기 일어나 뭔가를 계속 찾더니만 리모컨을 콱 움켜쥔 채 텔레비젼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광경이라니. 평상시였다면 모를까, 할아버지를 땅에 묻고 온 날이라 할머니의 행동이 몹시 걱정스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리하여 본의아니게 남겨진 사람이 바로 강무순입니다. 삼수생이자 백수라는 이유만으로 할머니 곁에 남게 됩니다. 물론 아침잠이 너무 많아서 못 일어난 탓이지만.

암튼 전혀 계획한 적 없는 유배살이를 하게 된 무순이. 지루함을 달래던 중 여섯 살 적에 땅에 묻어놨던 보물상자를 꺼내면서 15년 전 '두왕리 네 소녀 실종 사건'까지 끄집어내게 됩니다. 동네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우연히 경산 유씨 종갓집에서 꽃돌이를 만납니다. 꽃돌이는 유씨 집안의 손자 유창희, 잘생긴 외모 때문에 무순이가 맘대로 갖다붙인 애칭입니다. 외모는 꽃 같은 도련님인데 까칠하고 과묵한 중학교 2학년생.

무순이를 계속 무시하던 꽃돌이에게 '자전거와 소년' 목각인형을 보여주며 15년 전 보물상자에 넣었다는 얘길했더니 관심을 보입니다. 그러다가 15년 전에 네 명의 소녀, 유미숙, 유선희, 황부영, 조예은이라는 소녀가 동시에 실종되었던 사건을 알게 됩니다. 그 소녀 중 유선희가 경산 유씨 종갓집의 외동딸인데 실종된 후에 입양한 아이가 꽃돌이 창희인 겁니다. 그렇다면 '자전거와 소년' 목각인형은 누가 만든 걸까요. 소녀들은 왜, 무엇때문에 사라진 걸까요.

이 소설은 처음부터 두 사람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한 명은 무순이. 또 한 명은 누군지 모를 시체. 사람이 죽는 순간에는 살아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고들 합니다.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 아니 죽은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별 볼 일 없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평범하게 시작된 날, 어떤 예감도 없이 죽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그건 살아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상도 못했던 사연들이 고구마 줄기를 캐듯이 줄줄이 이어져 등장합니다.

마지막에 드러난 진실은 반전이라기 보다는 씁쓸합니다. 해맑은 뇌의 소유자 무순이와 호탕한 홍간난 여사, 꽃돌이 창희의 활약으로 실종 사건의 미스터리는 풀렸지만 비극적 결말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비극은 이미 엎질러진 물. 되돌릴 수 없기에 슬프고 아픕니다. 15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이 소설은 비극이라는 늪에 빠지지 않고 건너는 법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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