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에게 몰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다르다. 한발짝 물러서서 그들을 지켜보게 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 사이토 마리코, 「눈보라」中 에서
책 제목처럼 단 하나의 눈송이 같은 주인공은 다른 모든 눈송이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겨서 잠시 한 눈을 팔면 그들의 존재를 잊어버릴 수도 있다.
열두 살, 성모상 앞에서 처음 만난 안나와 루시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리고 삼십이 년 뒤에 안나는 1976년, 십대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평범하고 수수한 안나와 예쁘고 눈에 띄는 루시아가 단짝친구라는 사실과 학원에서 알게 된 요한이와는 묘한 삼각관계가 된 부분은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다. 아마도 세상 어딘가에는 안나, 루시아, 요한과 같은 성격의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크리스마스날 명동 거리를 지나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정도의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묘하게도 중년의 안나가 등장하면서 지나온 세월의 간극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다가온 것 같다. 또렷하게 기억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어느 순간 희미해진다. 과연 그때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던 걸까. 오히려 자세하게 묘사된 안나의 어린시절보다 그 시절을 회상하는 안나의 현재 모습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수많은 감정의 파편들이 세월과 함께 바스락바스락 마른 잎사귀마냥 부서져버린 것 같다.
다음장에는 뜬금없이 서울 외곽의 신도시 K시, 신혼집을 마련한 스물네 살의 새댁이 등장한다. 그녀는 누굴까. 안나도 아니고, 루시아도 아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결혼으로 낯선 신도시에서 살게 된 여자의 일상이 그려진다. 그런데 그녀의 삶을 지켜보는 사람을 또 한 명 발견하게 된다. 바로 그녀 뱃속의 아이.
하늘에서 내리는 수많은 눈송이들 중에서 단 하나의 눈송이를 쫓아가듯 이야기는 각자 다른 시공간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남학생을 짝사랑하던 소녀와 그 남학생이 9년 뒤 은행에서 직원과 고객으로 만나는 장면이나 엄마와 단둘이 미국 T아일랜드에서 살게 된 소년의 일상, 유럽 연수를 떠난 친구의 오피스텔에서 두 달간 살게된 여자가 친구의 전남친과 만나게 되는 장면, 옛날 J읍에 살았던 유리와 마리 자매의 이야기까지 보고나서야 알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가 털실로 목도리를 짜듯이 서로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말이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 몰랐던 인연을 알게 될 때가 있다. 전혀 모르는 남의 이야기인 줄 알았던 소설 속에서 나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우리는 결국 누군가의 무엇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기자신을 기억하며 떠나게 될 것이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도 언젠가는 스르르 녹으며 사라지겠지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눈송이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내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상에 닿지 않은 눈송이.